54화 묘기에 가까운
정벌을 나서는 북방 병력의 기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방벽이 사라진 지금, 그들을 보호해 줄 보호막이 사라졌음에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땅을 박차고 나가 사냥하는 늑대와 같이 살기등등했으며 용맹했고 지혜로웠다.
잠깐이지만 노병들의 지혜를 배웠고 값진 경험을 얻었다.
전투력의 상승.
그뿐만 아니라, 북부를 떠난 시간 동안 느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얼마나 비참하고 서글픈 일인지 배웠다.
거기다 자신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 들꽃이 되어 버린 노병들과 전대 백작을 떠올리면 없던 힘도 생겨났다.
전투 의지가 삼엄했다.
전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경험과 의지가 충만하니 흔들릴 리가 없다.
“숲의 반절을 돌파했다 합니다. 이 기세라면 산맥에 닿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하더군요.”
지난 출정으로부터 일주일.
북부의 기사들과 병력은 북녘 숲을 샅샅이 훑어 가며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들을 모두 사냥했다.
“지난 몬스터 사냥, 에스키모들의 습격, 모닥불 폭발 덕에 숲에 남은 몬스터가 얼마 없어 진군이 수월할 텐데 무슨 고생이라고 자랑을 하는가.”
내 담담한 답변에 막 보고를 올렸던 기사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 그랬다.
기세는 살벌했는데 생각보다 잡을 게 없어 다들 편한 여정 중일 것이다.
“잡은 건 내가 다 잡았지. 나와 전대 백작이. 아니 그런가?”
문득 막사 밖으로 보이는 루카르를 보며 물었으나.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몸은 얼추 회복이 끝났다.
앞에 썰어 놓은 고기를 마구 삼키며 간단히 조언 하나를 던졌다.
“진짜는 산맥부터니 굳이 지금 힘 빼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 이글루를 찾으면 알리라 하고. 합류할 테니.”
“알겠습니다!”
“다들 들자고.”
막사 안에 마련된 식탁에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백작이 내 호위를 위해 남기고 간 기사단의 기사단장과 핵심인물들이 함께하는 자리.
텅 비어 버린 북부엔 나와 백작이 맡기고 간 기사단, 청익 기사단, 3전투 마법사단을 비롯해 최소한의 방어 병력이 지내는 막사가 전부였다.
기사들 중 하나가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다.
“저, 황자 전하.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나이까.”
나름 용기를 냈으나.
“실례라는 걸 알면 저지르지 마라.”
“…네.”
내 단호한 답에 입이 막혔는지 바로 입을 다물곤 빵을 찢어 먹었다.
금세 싸늘해진 분위기.
그들의 걱정이야 뻔했다.
북부의 기반 시설이 모두 사라졌다.
거센 폭발로 인해 깡그리 무너졌다.
사람은 있는데 시설이 없으니 당장 군량미부터 사람들을 먹여 살릴 궁리부터 해야 했다.
그런데 북부 정벌이라니.
사람들의 삶이 있어야 정벌도 있는 법이다.
“왜. 당장 군량미와 사람들의 삶이 걱정인가?”
담담히 묻는 말에 기사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본인들만 좋은 음식을 먹는 게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
특히 고기 한 점 입에 대지 않은 채 접시를 쏘아보고 있는 자를 향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보랏빛 머리칼을 한 줄기로 질끈 묶어 하얀 목덜미가 두드러지는 미인.
반듯함의 표상인 듯 올곧은 등줄기와 목선, 날이 선 턱과 콧날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곧은 검 한 자루를 형상화해 놓은 듯 반듯하고 날카로워 아름다웠다.
“바이올렛 드보르작.”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바이올렛이 입술을 깨물고는.
“네, 전하.”
최대한 감정을 죽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도 나를 알고 나도 그녀를 알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좀 더 잘 알 거다.
과거 폭군이 사랑했던 여자.
그런 폭군을 피해 도망쳤던 여자.
결국엔 고향과 가문, 가족을 모두 잃고 북방의 귀신이 되어 떠돈 여자.
폭군이 싫어 귀신 같은 삶을 택했던, 그녀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폭군은 그녀가 자신에게 올 거라 생각하여 북부를 그리 두지 않았을까?
언젠간 한파를 이겨 내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그리 못된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까.
놈이라면 그랬으리라.
감상은 여기까지.
지금의 바이올렛은 그때의 바이올렛이 아니며 나는 놈이 아니다.
운명 또한 바뀌었으니 굳이 과거이자 오지 않을 미래를 떠올릴 필요 없다.
현재, 변한 지금이 중요하다.
하여 이유를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먹지 않지?”
“그저…….”
잠시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뱉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걱정되어서 쉬이 삼키질 못했나이다.”
그녀의 올곧은 말을 들은 순간.
입가에 미소가 퍼져 나갔다.
역시 입에 발린 말을 못 하는 성격.
그게 반갑기도 했고 괜히 궁금했다.
지금도 그녀는 나를, 폭군을 미워할까? 북부를 구한 지금도?
“탓하는 것인가? 북부의 백성들은 이리 굶고 있는데 홀로 맛있는 고기를 씹어 넘기는 황자의 부덕함을.”
“…….”
“아니면 북부를 이런 상황으로 밀어 넣은 걸 원망하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
“제 고기를 나누어서라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기다렸습니다.”
“그 한 접시의 고기를?”
“네, 스튜라도 끓여-.”
그녀의 말을 듣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웃었다.
퍼지는 웃음이 날카로웠다.
대놓고 터뜨린 비웃음에 기분이 나쁠 만하건만 바이올렛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뭐랄까, 우스우면서도 반가웠다.
저런 미련한 말이 답답하지만 또 저 여자와 잘 어울려서.
내가 한참을 웃고 나서야.
“왜 그리 웃으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를 물었고.
“우스워서 웃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고작 고기 몇 덩이로 사람을 얼마나 먹일 수 있나. 아니. 이 식탁에 올라온 고기로 지금 병사들의 식사를, 저 멀리서 올라오고 있는 북부인들의 식사 전부를 책임질 수 있는가?”
“일단 급한 허기를 채우고 그다음은 다시 생각을 해 봐야겠죠.”
“이거 북부 백작가의 여식이 음식을 창조하는 신비를 얻었다는 건 처음 알았는걸?”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터져 나와 주체하기 힘들었다.
비웃음이 계속되자 그녀의 평정심에도 금이 가기 시작.
“그딴 건 해결책이 아니다. 백작가의 영애.”
“바이올렛 드보르작, 북부의 기사입니다.”
“기사? 기사라 칭하면서 그리 멍청한 말을 쉽게 하는 건가.”
“모욕입니다.”
“그래, 모욕이다. 문제 있나? 제국의 기사? 제국의 황자가 제국 기사의 부족함을 지적하는데 명예를 생각해야 하나?”
내 당당한 표정에 그녀가 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올렛에게 동조하는 표정을 짓는 북부의 기사 몇몇을 보자 골이 아팠다.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나.
“멍청한 것들. 이걸 나누어 주고 사람들이 잠깐 허기를 면하면 끝인가? 이후는? 누가 힘을 내어 나가 몬스터들을 막고 누가 외적을 막을 테냐. 고기를 나누어 먹은 농민이? 아니면 제 의무도 망각한 배곯은 기사가?”
마른 빵을 한가득 머금은 듯한 답답함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명심해라. 너희에게 주어진 고기는 그저 즐기기 위한 특권이 아니다. 잘못이 아니니 특권을 나누어 주기보다 탐욕스럽게 삼켜라. 그리고 고민해라. 제국을 위해 어떻게 제대로 헌신할지. 그러기 위한 고기고 그러기 위한 와인이다. 먹은 만큼 값은 해야지?”
내 당당한 말에 바이올렛을 비롯한 기사단이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마음껏 사치를 누리되 할 일만 하면 된다? 약자를 돌보라는 기사도 정신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까.
이딴 생각이나 하겠지.
방법이 글러 먹었다.
“그런 구시대적인 완고함과 고지식함으로는 앞으로의 북부를 바꾸기 어려울 거다. 특히 영애. 너는 새겨들으라.”
바이올렛의 얼굴에 혼란이 어렸다.
왜 자신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리라.
아마 그녀가 방금 한 말의 밑바탕에는.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아버지와 형제들, 동료들이 걱정되는 마음도 섞여 있겠지. 갸륵하다 갸륵해. 허나 미련하다.”
죽은 할아버지, 싸우는 아버지와 형제들에 대한 죄책감이 섞여 있을 터.
자신은 여기 남아 편히 고기를 넘기려니 마음이 불편했겠지.
그런데.
누가 놀게 해 준데?
“백작은 가장 어려운 자리를 자네들에게 맡기고 도망간 거다. 홀로 즐기기 위해.”
그래서 진실을 알려 주었다.
모두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 즐거웠다.
왜 사람들은 진실에 이리 거부감을 느끼는지 모를 일이다.
난 항상 진실만을 말하거늘.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도망가실 분이 아닙니다.”
역시나 바이올렛이 딴지를 걸었으나.
곧 알게 되겠지.
발자크 백작이 얼마나 약삭빠른 곰인지.
마침.
털털털털 부르르릉!
거센소리와 함께 막사를 울리는 진동이 찾아왔다.
다들 밥을 먹다 울리는 진동에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곧 엄청난 물자를 실은 거대한 차량, 로이스 가문의 트럭들이 막사 주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거대한 금전운이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금전운 사이 탐욕과 비리, 악의가 섞여 있습니다]
[당신의 운과 금전을 노리는 탐욕들이 이곳저곳 눌어붙어 있습니다]
북부에 찾아온 금과 탐욕, 적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곧 일어날 진흙탕 속에서 벌어질 싸움이 기대됐다.
* * *
북부에 때 이른 호재가 찾아왔다.
황자의 명령으로 현금화시켰던 관리자들의 재산, 백작가의 재산을 쏟아부어 북부 개발을 시작.
그러며 자연스레.
“새로운 기회의 땅! 북부로 갈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이봐! 나랑 북부에 가서 사업 하나 해 보자고!”
제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던 자들이 점차 북부로 발길을 돌렸다.
이는 제국의 수도, 페르마 하수구 구역을 비롯한 빈민가도 마찬가지.
“북부에 가면 집 하나는 쉬이 얻을 수 있다더군.”
“그뿐인가? 지을 집이 몇 채이며 도로와 공장들도 들어선다던데?”
“당분간은 세금도 면제된다더라!”
이미 포화 상태인 수도에선 뭘 해 보기 늦었다.
어차피 챙길 짐도 몇 가지 없으니.
“가자! 다들 짐 싸!”
“아빠 걱정 마세요! 우리 챙길 짐도 없어요!”
“그거 잘됐구나…….”
많은 이가 희망을 품은 채 북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중엔.
“후욱, 전하. 제가 갑니다. 뒷골목을 접수하러!”
어느새 덩치가 두 배는 커진 전생 미친 황소, 현생 그냥 황소 베론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황자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이미 수도의 뒷골목은 대부분 정리가 끝난 상태.
새로운 고아원을 세우기 위해 그가 북부로 향했다.
물론 새로운 삶을 찾는 이들 말고도.
“거기에 세운 사업체가 몇인데!”
“손해가 막심합니다. 막심해요.”
“다시 투자해야지요. 그리고 잃어버린 원금 이상을 뽑아내야 합니다.”
“영주들에게 줄을 대어 놓았으니 다시 돈이 들어올 겁니다. 그리 만들거구요.”
사태에 휘말려 잃어버린 재산을 찾으려는 자들도 많았다.
관리자에게 받아먹던 돈이 끊어졌고, 비밀리에 운영하며 돈세탁에 이용하던 사업체들이 붕괴했다.
다시 찾아야 한다.
아니, 그 이상 해 먹어야 한다.
황자와 백작의 존재가 불편하긴 했지만.
“백작은 정벌에 나섰고 황자는 아프다더군.”
“북벽도 저택도 없는 그들의 힘도 약해졌겠지.”
아직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
그들이 곧 저들 나름대로 작전을 세우며 북부에 간섭하려 했다.
물론 모두 황자가 예상하고 기다리던 일이었다.
북부에 돈과 사람, 혼란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이엔 짙은 어둠을 품은 자들도 함께였다.
* * *
바이올렛 드보르작.
변경백의 딸이라는 것 이상으로 미모가 뛰어났기에 인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미쳤다 일컬어지는 황자 아르한은 그녀에게 광적으로 집착했고 그녀는 그가 싫어 항상 북부 깊은 곳에서 기사 임무에 집중했다.
간혹 비밀리에 황성으로 향할 때가 있었는데.
그 두 번 모두가 아르한 황자 덕에 엉망이 되었다.
처음은 세린느 황녀를 만나러 간 날.
차를 한잔하기로 한 정령의 정원.
안으로 막 들어서려 할 때.
피를 잔뜩 뒤집어쓴 황자의 옆모습을 얼핏 보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체를 부여잡고 울먹이는 황녀가 있었다.
“후우-.”
뿐만인가, 오랜 친구들과 오랜만에 다과회를 하기로 했건만.
친구 하나가 오지 않았고, 나중에 들어보니 황자가 탄 차와 그녀가 탄 차가 충돌하는 바람에 오지 못했단다.
이후 오랜 친구, 소피아를 만나지 못했다.
황자의 시녀로 들어갔다던가.
하필 그의 눈에 들다니 어릴 적부터 교분을 쌓았던 소피아가 험한 꼴을 당할까 항상 걱정이었다.
그가 북부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기사 임무를 떠났다.
사실 그를 보면 마구 따지고 들어 혹여라도 아버지와 소피아를 곤란하게 할까 봐 내린 결정.
이후 북부에 벌어진 사건들.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했지?
그가 벌인 일들과 감당한 싸움을 들으며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이었고 심지어 오랜만에 만난 소피아는.
“전하께서 내 삶을 구해 주셨는걸요. 바이올렛도 그분을 너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반쯤 풀린 눈으로 황자를 찬양하기 바빴다.
그녀의 그런 태도가 믿기지 않아 바이올렛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올바른 미간에 작은 주름이 졌다.
“미워하지 않아요. 다만 그 변화가 너무 이상해요. 대체 전하는 변한 건가요. 변하지 않은 건가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대로더군요.”
“맞아요. 변했지만 변하지 않으셨죠. 하지만 그래서 더 좋지 않나요?”
“좋다고요? 소피아, 진심이에요?”
“왜요? 바이올렛이 저번에 명작이라며 선물해 줬던 ‘폭군 황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에 나오는 주인공과 똑 닮았-.”
“그, 그만! 멈춰요! 그건 책이잖아요!”
괜히 놀림만 받다가 뛰쳐나왔다.
뭔가 소피아도 황자의 곁에 있으면서 바뀐 듯싶었다.
당황스러웠으나 보기엔 훨씬 좋았다.
심지어 지금은.
“여기 공사 자재 도착 확인서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구역 분획 계획서 확인하시고 사인 부탁드립니다.”
“군량 및 사람들 먹을 식량입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끝없이 끝없이 마차와 수도에서나 가끔 보았던 마력차들이 밀려들어 오는 중.
저 커다란 걸 트럭이라 부른다 했던가.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의 북부는 이전의 북부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비롯한 모두를 놀라게 만든 한 가지 사실.
이 모든 게 황자의 전폭적 지원이란다.
모닥불 관리자에게 빼앗은 돈이지만 어쨌든 본인이 빼앗았으니 자기 돈이라던가.
이외에도 로이스 가문의 지원은 그가 끌어온 게 맞았으니 얼추 사실이었다.
그리고.
“화물 습격이다! 화물 습격!”
황자의 말대로 남은 기사단은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텅 빈 북부에서 마차와 트럭, 사람들이 돈 되는 짐을 싣고 돌아다닌다는 소식에 도적들이 승냥이처럼 몰려들었다.
동부와 서부에 머무르던 마적떼와 강도, 왈패들이 섞여 들어왔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화물을 비롯해 북부로 흘러드는 사람들의 재산.
새로운 삶과 기회를 얻고자 터전을 옮기는 제국민들과 상인들이 그들의 목표.
좌시할 수 없었다.
남은 기사단과 방어 병력들이 도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트럭을 타고.
“말을 타기엔 거리가 멀다더군. 말을 쉴 곳도 없고.”
담담히 이유를 전달하는 단장의 얼굴이 어딘가 서글펐다.
트럭 화물칸에 올라타 새로워진 북부를 달리길 한참.
문득 한 기사가.
“사방에 풀이 자랐네요.”
저도 모르게 여기가 북부임을 상기하곤 감탄했다.
트럭이 내달리는 땅 위로 파릇파릇한 들풀이 가득했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랐던 새하얀 설원과는 전혀 다른 풍경.
놀라운 일이었다.
모닥불로 간신히 유지되는 온기와 그 위를 덮는 차가운 눈보라가 없는 북부라.
말을 타고 달리지 못해 아쉬웠으나 이리 담소를 나눌 수 있으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말 새로워지려나 봐요.”
모두가 황자의 말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감탄을 토했다.
북부에서 아르한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
모든 이가 매 순간 아르한과 전대 백작의 위업을 마주하며 놀라기 바빴다.
그게 바이올렛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대체 황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녀가 보았던 패악과 광기, 모진 말들과 지금 보이는 파릇파릇한 생명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몇몇을 보니 그들도 마찬가지인 듯 복잡한 표정.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하께서 아직 크게 노하시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다는 것이겠죠.”
바이올렛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북부에서 활동한 후로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뒤늦게 들었다.
그러다 머릿속에 남아 있던 말을 슬그머니 떠올리곤.
“도망치신 게 아니라 책무를 다하러 가신 겁니다.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세요.”
퉁명스레 혼잣말로 변명했다.
딸이라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 깊이 남았던 모양.
물론 다른 충성심 높은 다른 기사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아는 아버지는 정의롭고 굳건하며 어떤 위험 앞에서도 북부와 백작가를 위해 헌신하시는-.
그때.
“그래? 과연 그럴까?”
그녀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 한 줄기.
근래 가장 많이 듣는, 생각하는 목소리.
황자 아르한의 깨끗한 중저음에 모두가 화들짝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고.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그를 발견하곤 일제히 입을 벌렸다.
바이올렛도 그들을 따라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지금 황자는.
“요즘 내가 잠잠했더니 다들 편해 보여서 말이야. 이제 좀 움직이려 하는데. 어때 감당들 가능하겠어?”
황자 전용 차량 지붕 위, 거검을 쥔 채 서 있었다.
푸릇푸릇 펼쳐진 평야를 배경으로 말도 아닌 자동차 위에 선 황자라니.
휘날리는 백금발과 시원한 웃음이 놀러 나왔다 생각할 만큼 평화로웠으나.
“아니, 감당들 해야 할 거야. 네가 선택한 황자다. 충심으로 기사도로 따라라.”
콰카카캉!
울어대는 거검과 그의 등 뒤로 번지는 붉은 불이 단번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저, 전하! 안 됩니다! 여기선 안 돼요!”
누군가의 애절한 외침.
자세를 낮춘 황자가 불을 뿜어내자 그가 선 차량이 흔들거리며 순식간에 앞서 나갔다.
마치 기사가 말 위에 올라 랜스를 든 모양처럼.
차 지붕에 올라 거검을 겨누는 황자의 고귀한 모습에 모두가 아득히 정신을 잃었다.
너무 아름다웠던 탓일까.
아니면 골을 울리는 경악 탓일까.
본디 남들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 황자께서 저 멀리, 마적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더니.
와르르릉!
거검을 붕붕 휘두를 때마다 피와 고함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황자 전하 납셨다! 모두 고개를 조아려라!”
그래야 자르기 편하니!
그 위태로운 싸움에 황자를 호위해야 하는 기사들의 얼굴이 까맣게 물들었고.
“아버지……?”
바이올렛의 마음에 아버지에 대한 작은 의심이 싹텄다.
어쩐지 정벌을 떠나며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황자의 묘기에 가까운 광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