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환상보다 지독한 현실
바이올렛 드보르작.
그러니까 굳건하며, 충성심 넘치며, 신의 있는 기사인 백작가의 영애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한 것은 그날 저녁.
며칠간 이어진 마적 사냥에 이어 결정적으로 잃어버린 재산을 따지러 온 자들을 마주했을 때.
살면서 처음으로 분노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를 뻔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그녀도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악명은 익히 들었다.
앞으로는 북부의 영주들을 구슬려 자원을 빼앗아 가고 뒤로는 모닥불을 도둑질했던 이들.
그들의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북부인이 추위에 떨었던가.
사실 그들을 잘라내지 못한 백작가의 무능을 탓해도 할 말은 없었다.
다만 백작을, 백작가의 부덕함만을 탓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삶은 검술과 같지 않다.
아니 검술은 물론이요, 죽여야 하는 원수에게 죽임당하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백작가 또한 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나 이미 세워진 기반, 중앙을 등에 업은 그들을 무조건 밀어낼 수 없었다.
어쨌든 중앙과의 관계가 중요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북부의 선의를 이용한 놈들.
허나 백작가가 참음으로써 북부인들이 얻는 삶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구나.”
바이올렛은 문득 깨달은 것이다.
이를 자를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비록 죽이고 싶다고 죽여 버리는 게 인간적으로 맞는가 의문이 남았으나.
어쨌든 황자는 뒷일은 생각지 않는 듯 당당히 놈들을 피와 공포로 겁박했다.
그리고 이어진 의문.
어째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리는 차에서 지었던 미소와 며칠간 보았던 광기.
방금 보았던 공포를 상기하며 그녀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전하는 북부와 더불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계신다.”
나름 타당한 결론.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상식과 황자의 행보, 그녀가 느낀 위태로움을 종합한 결과.
황자는 분신(焚身)하듯 삶을 태우고 있다.
“이유가 뭘까?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물론 행동이라는 표면 아래, 심리와 동기는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자기 파괴의 연유까지 건져 낼 만큼 황자를 깊이 알지 못했기에.
다만 그 방법이 과격하다 못해 광기에 이르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여튼 바이올렛은 제 나름대로 황자의 행동을 해석했고 조금 괴상한 결론에 도달한 뒤로.
“그저, 그저 가여운 분이었구나.”
측은함을 느꼈다.
날카롭고 올곧은 인상 아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주변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따뜻한 감정이 흐르니.
차가운 북부 아래 담긴 모닥불과 같이 온도가 뜨거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 안에서 황자의 광기 어린 웃음이 생을 태우는 발악으로 변해 갔고.
막 밤이 무르익었을 때.
“하아, 가엾은 분.”
그토록 미워하고 피해 도망 다녔던 황자 아르한은 세상 누구보다 가여운 이가 되었다.
광기라는 이름에 갇혀 고통받았던 이, 그러나 속으론 진심으로 제국을 생각했던 이.
북부에서 보였던 희생과 자기 파괴적 행보.
어쩌면 모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는 이.
무엇이 그리 미워서, 무엇이 그리 괴로워서.
얼핏 할아버지의 마지막과 닮았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셨구나.”
그리고 그 생각은 돌고 돌아 발자크 백작에게로 향했다.
본디 광기에 절은 황자를 자신에게 떠맡겨 두고 도망갔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황자의 치유를 맡긴 것.
아! 아버지의 뜻을 알겠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아버지는 도망치실 분이 아니야!
오히려 답을 알고 나에게 맡기신 거였구나!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마 발자크가 자리에 있었다면 회초리를 들고서라도 딸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말렸을 터인데.
아쉽게도 아버지는 이미 산맥 초입에 들어선 상황.
길을 잘못 들어선 그녀의 망상을 말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웠던 북부의 겨울, 홀로 읽은 로맨스 소설이 방 하나를 꽉 채우고도 흘러넘칠 정도였던 건 그녀의 작은 비밀.
“저기, 바이올렛? 그… 나가서 생각을 이어 해 주겠니?”
좀 무서우니까.
결국 참다못한 기사단 선임 하나가 완곡히 부탁했고.
“죄송합니다.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녀가 냉랭한 무표정 속, 볼과 귀에 피어난 홍조를 식히기 위해 다급히 막사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 보라.
달빛이 가득한 밤.
조부가 굳어 선 자리.
나타난 황자가 홀로 말을 걸더니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곤.
펄펄 끓는 불 속으로 뛰어들려 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거기다 이미 그가 자기 파괴적 광기를 내뿜는 가엾은 이라 확정 지은 상태였다면?
“이러지 마세요. 전하! 살아야죠! 산 사람은 살아야죠! 어찌 그리 모두를 아프게 하시려 합니까!”
황자의 당황한 표정과 애써 부정하는 물음이 그녀에게 더욱 아픔으로 다가왔다.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마저 애써 부정하는구나.
누구도 조부를 잃고 노병들을 잃은 게 그의 탓이라 하지 않건만 홀로 슬퍼 눈물을 흘리고 죽으려 하다니.
그녀의 측은함 어린 맑은 목소리가 밤하늘을 별빛처럼 수놓았으나.
* * *
“아니, 그러니까 뭔 개소리냐고.”
나에겐 그저 밤길 개 짖는 소리와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왜 이러는 건데?
밤에, 몰래 훈련하러 나왔는데 방해하는 건 둘째 치고.
“이해해요. 그러니, 그러니 같이 버텨요. 우리.”
그 한풍 같던 여자가 짓는 표정이 너무 서글퍼 더 황당했다.
광기는 내가 품었는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질문이 목 끝까지 치밀었으나.
“무슨 일이야!”
“전하! 전하!”
막사 곳곳에서 불이 켜지며 몰려나오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여기-.”
바이올렛이 모두를 부르려 했다.
그냥 본능이었다.
아니 백작가의 영애와 황자가 뒤엉켜 있다면 어떤 소문이 떠돌지 모른다.
아무리 내가 미쳤다지만 그딴 염문에 휘말려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거기다 내가 평소 쫓아다녔다 소문이 자자한 바이올렛이라면 더욱.
해명하기 귀찮아 그냥 숨기기로 했다.
“입. 무엄한 입 좀 닫아.”
“우읍!”
자연스레 그녀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선.
그대로 불의 샘을 향해 몸을 던졌다.
혹시 몰라 불을 뿜어내어 바이올렛을 감싸 주었다.
물에 빠질 때처럼 풍덩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몸을 감싸는 살가운 따뜻함.
타오르는 불 속이었건만 살랑살랑 몸을 간지럽히는 불꽃이 간지럽고 보드라웠다.
모닥불을 대신하여 자리한 불의 샘 안에는.
도도하게 흐르는 불들이 한가득.
몸부림치던 바이올렛이 주변 풍광을 보곤 차츰 몸에서 힘을 빼더니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신기하겠지, 불 속임에도 뜨겁지 않으니.
바이올렛이 무어라 입을 뻐끔거렸으나 그냥 두었다.
밖에 소란스런 기사들의 목소리가 흐리게 들렸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싶다가도.
‘따뜻하니 모든 게 귀찮다.’
몸을 감싸는 안온함과 노곤함에 서서히 눈이 감겼다.
첫 번째 심장 적염과 두 번째 심장 초적염이 둥둥둥둥 고동을 울리며 함께 울렸다.
전투 시에 강한 폭발력을 낼 때는 엇갈리게, 지금과 같이 힘을 비축할 땐 함께.
두 개의 심장이 공명하며 주변 가득한 불을 한없이 빨아들였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퍼져나갔다.
“밖이 잠잠해지면 알아서 나가라. 난 여기에 좀 더 있을 테니.”
아직도 놀란 토끼 눈으로 날 바라보는 바이올렛에게 간단히 명하곤 완전히 눈을 감았다.
몸을 채우는 불이 기꺼웠다.
잠시 볼을 찔러 대는 시선이 따가웠으나 금세 이를 잊고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산맥 초입부턴 과거 북부가 그랬듯 강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험준한 산맥과 수북이 쌓인 눈에 오히려 북부 병사들은 반가움을 느꼈다.
익숙한 전장.
“모두 무기를 세우고 산을 올라라! 마주하는 모든 몬스터를 죽여라!”
백작의 명령에 곧 기사들이 앞장서 눈을 헤치고 나아갔고 북벽의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때때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그야말로 순식간에 도륙했다.
며칠 동안 계속하여 산을 올랐고.
어느새 산맥 중턱에 오른 발자크가 뒤로 돌아.
“아-.”
푸릇푸릇해진 북부를 눈에 담았다.
문득 눈물 한 줄기가 떨어졌다.
시린 바람에 금세 얼어 흩어지는 눈물.
근래 간혹 아무 감정이 솟아나지 않아도 눈이 제멋대로 눈물을 뽑아내었다.
그러고 나면 환상처럼 항상 흔들거리는 꽃과 메마른 목소리 한 줄기가 떠올랐다.
“아프구나. 미안하다.”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라고, 전하께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안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그저 목이 막혀 아이처럼 울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황자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진격한 산맥.
“여기가 새로운 북벽이라.”
문득 황자의 말이 생각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맥을 둘러보았다.
그 어떤 방벽보다 든든한 방벽이 되어 줄 건 확실했다.
다만 한 가지 드는 의문.
“무엇으로부터?”
에스키모는 이미 패퇴하여 죽음만을 남겨 두었고.
북녘 숲과 산맥의 몬스터들은 연이은 토벌과 모닥불 폭발 때문에 거의 전멸 상태.
설사 다시 살아난다 해도 예전처럼 웨이브를 형성하진 못하리라.
그가 오랜만에 시리게 몰아치는 칼바람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따르면 될 일.”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문득, 황자와 함께 있을 막내딸 바이올렛이 떠올랐다.
그 아이라면 흔들리지 않으리라.
어릴 적부터 항상 심지가 올바르고 곧은 아이였으니.
그나마 백작가의 자식 중 황자의 광기를 받아 낼 수 있는 건 바이올렛이란 결론.
도망친 건 아니었으나, 바이올렛에게 떠넘긴 건 맞았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설마, 갑자기 전하를 측은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면 평소 즐겨 보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본다거나.”
“그 뭐야, ‘악당을 구원하는 영애가 되었습니다.’ 이런 거 말씀입니까?”
“그래, 바이올렛만 빼고 모두가 아는 비밀이긴 하지만. 설마 우리 딸아이가 소설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그럼요. 가장 막내지만 가장 어른답게 행동하는 아이지 않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금쯤 전하를 잘 보필하고 있을 겁니다.”
평소 딸아이의 은밀한 취미.
그래도 어른이 된 아이인데 소설과 현실을 구분 못 하지는 않겠지, 그리 믿었다.
장남의 장담에 그가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딸이라면 잘해 내리라, 견디리라.
그때.
“이글루! 이글루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통신구를 통해 들려온 소식에 그와 아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전하께 알려라. 빌어먹을 귀신들을 찾아냈다고.”
스산한 살기를 피워 내며 소식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곧 북부의 오랜 원수를 모두 죽일 수 있으리라.
그의 검에 하얀 마나가 몽글몽글 맺혔다.
* * *
“…….”
“……!”
“……올렛!”
“바이올렛!”
“네? 네!”
멍하니 꽃 핀 언덕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퍼뜩 깨어났다.
근래,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정신 줄을 놓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특히 그 시선이 늘 언덕을 향해 있으니.
“곧 임무다. 집중하자.”
“네! 죄송합니다!”
딱히 탓하는 이가 없었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조부를 잃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겠는가.
물론 그녀의 시선엔 조부에 대한 그리움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대부분은.
‘대체 그 풍경은…….’
불의 샘으로 끌려 들어간 그날 밤 보았던 장면.
몸을 휘감은 불 속, 고요히 눈을 감은 채 불보다 더욱 밝은 불을 뿜어내는 황자의 고귀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가득했고 영롱히 부유하는 황자의 백금발 머릿결이 아름다웠다.
감은 눈꺼풀, 일렁이는 속눈썹 아래로 살포시 드러난 진홍색 눈동자와 아래로 떨어지는 날카로운 콧잔등이.
붉은 초승달 아래 고고한 절벽과 같아 상서로웠다.
기억 속 흐드러진 불꽃과 황자의 모습은 마치 과거 보았던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던 유화와 같이 치명적이니.
그녀가 고개를 흔들어 억지로 생각을 털어 냈으나.
자꾸 눈에 각인된 듯 떠올랐다.
스스로도 미칠 노릇.
평소 소설과 현실을 구별한다 장담했으나, 환상보다 더 지독한 현실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밤새 읽었던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을 데려다 놔도 그 장면보다 강렬하지 못했다.
그때를 평생토록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내리누를 때.
“전하께서는 또 어떤 일을 저지르시려고 그러시나.”
“그러게 며칠째 불의 샘에 계시다며.”
“이거 또 폭발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간혹 부글부글한다던데?”
황자의 돌발 행동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아니요. 전하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그런 말씀은 곤란합니다.”
“어? 어어. 바이올렛 뭘 그렇게 정색해. 그냥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뇨. 그것도 안 됩니다. 전하라고요, 전하. 거기다 전하께서 마음속 얼마나 커다란 슬픔을 지고 괴로워하시는지-.”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가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친구 소피아가 왜 그리 전하에 대해 말을 아꼈는지 알겠다.
그분이 너무 귀하고 대단해서.
물론 진실의 일부분은 두려워서였으나.
바이올렛 상상 속 황자는 이제 불을 두른 전설 속 정령왕과 같았다.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어어? 어어어?”
“나, 나오셨다!”
불의 샘에서 불을 두른 채 뛰쳐나왔으니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며칠간 불의 샘에서 그저 잠잠히 지내던 그가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평민! 가로등! 갑옷과 검을 가져와라!”
황자가 고함을 질렀고.
“네! 솔이 갑니다!”
“전하, 안드레 대령했습니다!”
순식간에 황자의 갑옷과 검을 챙겨 나왔다.
어느새 알프레드가 나타나 황자의 옷을 입혀 주어 전투 준비를 끝마침과 동시에.
“가자. 우릴 기다린다.”
“따르겠습니다.”
“어, 일단 네. 따라갈게요.”
안드레와 솔이 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저, 전하!”
“저희는 어찌할까요?”
마침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다급히 물었으나.
황자는 그저.
“너희들은 맡은 일을 다해라. 원수들을 만나러 가겠나, 백작 영애.”
바이올렛을 쳐다볼 뿐.
그녀가 이끌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 전하는 모두 계획이 있으시다며 지금은 무슨 계획이신데.”
떠나려는 그녀의 귓가에 방금 무안을 당했던 기사가 다급히 물었고.
“계획이 있으십니다, 전하는.”
“그러니까. 그 계획이 뭐냐고.”
“계획이요.”
“응?”
“계획이 계획이죠.”
“…….”
“전하는 다 뜻이 있으십니다. 전 알아요.”
어딘가 어긋난 그녀의 표정을 보곤 상대가 한 발짝 물러났다.
황자의 광기가 바이올렛에게 전염되기까지 걸린 시간 단 열흘.
발자크는 몰랐다, 바이올렛의 깊디깊은 심연엔 할아버지를 닮은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원래 아버지는 딸에 대해 잘 알면서도 모르기 마련이다.
* * *
지난 시간은 초적염에 적응하기 위해 몸을 개조하는 시간이었다.
처음 마적 사냥 때는 적염을 위주로 사용하며 초적염이 이용할 불길을 정비했고.
불의 샘에 잠겨 있는 동안은 부상으로 인해 쌓인 탁한 기운을 정화하고 정비한 불길을 넓히며 더욱 많은 불을 심장에 쌓았다.
그러며 건국제가 전해 준 신비 사용법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그의 모습이 바로 모닥불에 담긴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심장을 획득할 때도 불에 담긴 기록을 빨아들였으니.
어쨌든 각인된 기록에 따르면.
‘심장은 따로이되 따로가 아니다.’
건국제의 염제심결은 여러 개의 심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은 명확한 성질을 띠고 있다.
다만 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함께 사용할 때 더욱 강력했다.
가령 첫 번째 심장 - 적염은 타오르는 불.
두 번째 심장 - 초적염은 폭발.
한 손에는 타오르는 불을 한 손에는 폭발을 담을 수 있으나.
이것은 그저 힘의 일부일 뿐.
진짜는 예전 모닥불 꼭대기에서 에스키모와 싸웠을 때처럼 적염과 초적염이 서로 부딪히며 반목하고 공명을 꾀해야 했다.
기록은 그걸.
‘2기통이라.’
기통이라 불렀다.
심장의 개수가 늘어갈수록 기통이 늘어가는 형식.
우선은 적염, 초적염.
2기통의 최대출력을 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첫 연습 상대는 바로.
“저기인가. 에스키모들이 숨어 있는 더러운 아지트가.”
이글루.
갑작스레 떠오른 운명에 바로 불의 샘에서 뛰쳐나와 산맥으로 향했다.
마침 백작이 내려 보낸 기사들과 마주쳤고 곧바로 산맥을 올라 백작이 기다리는 장소로 향했다.
이윽고 마주한 건.
끝자락 산맥 끝없이 이어진 봉우리 중 하나.
다른 봉우리들보다 조금 낮은 높이.
바로 이 산봉우리 전체가 에스키모들의 이글루.
“폭발에 대부분이 사멸했다. 남은 건 찌꺼기뿐.”
유독 서늘한 바람이 흐르는 계곡 입구.
“이제 우리가 놈들의 두려움이 될 시간이다. 북부의 오랜 가시를 뽑으러 가자.”
내딛는 발과 목소리에 열기가 어렸고.
두 개의 심장이 서로 부딪히고 합심하며.
쿵쿵쿵쿵!
강렬한 소리와 함께 거센 불이 몸 안에 감돌았다.
타오르는 적염 속, 작은 폭발들이 생명처럼 어렸다.
막 초입에 들어서다 우뚝 멈추어 섰다.
얼핏 코끝을 간지럽히는 혈향과 불 냄새.
그 사이.
[포식을 기다리는 적의 운명이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두려움의 냄새가 풍기는구나.”
섞인 두려움, 입꼬리가 쭈욱 찢어져 올라갔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처지가 바뀌었고.
이 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