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얼음 속 활
처음 백야가 가득한 작은 방을 마주한 순간.
[신비 눈보라를 담은 녹지 않는 얼음을 마주했습니다. 본래의 주인이 소유권을 잃은 상태입니다]
[안에 담긴 대상의 운명이 일부 엿보입니다. 신비를 쏘아 낼 오래된 무구입니다]
눈앞에 떠오른 먹음직스러운 글자를 보자 입속에 절로 침이 돌았다.
마치 환상적인 냄새를 풍기듯 아름다운 운명들이 나를 유혹했다.
이건 못 참지.
다음 행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
운명을 보자마자 짐작했다.
영원히 녹지 않는 한기와 과거 건국제가 즐겨 쏘았다던 활.
건국 신화에 따르면 그가 가진 신비를 가리지 않고 비처럼 뿌려 대었다지.
그래서 이름도 스타레인.
별빛이 비처럼 내렸다던가.
물론 그건 건국제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리 불렀던 거고.
대부분의 호사가들이 부르는 무기의 이름은 바로.
“데스레인.”
죽음의 비를 뿌리는 활.
아마 이번에 만난 건국제의 환상이 실제 그의 성격이라면, 어쩌면 건국제 스스로 데스레인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을까?
퍽 타당한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길 잠깐.
“어지간히도 소란이군.”
방안으로 들어서자 원수라도 만난 듯 휘몰아치는 백야가 귀찮았다.
주인을 잃어서일까.
지난번 세상의 모든 색을 지웠던 것처럼 신비를 부리진 못했다.
아니면 내 불꽃이 더 선명해져 침범치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이미 패배한 신비는 나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하니.
빽빽한 눈보라 속을 찬찬히 헤치고 나아가자.
2m 크기의 거대한 얼음 덩어리와 그 안에 담긴.
“맞군.”
덩어리에 맞먹는 길이의, 들고 다니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장궁이 눈에 띄었다.
스타레인을 발견한 것까진 좋은데.
“대체 왜 이리 큰 걸 좋아하는 거야?”
브레이커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그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옛날 유행인가? 아니면 아저씨라 큼지막한 걸 좋아하나?”
이왕이면 갖고 다니기 편하게 작게 좀 만들지 이리 주렁주렁해서야 원.
건국제가 들었다면 어린 녀석이 뭘 몰라 그런 말을 한다, 본래 남자는 크기다.
보아라, 웅장한 크기에서 나오는 위엄을!
이 따위의 말을 했겠으나, 여긴 나 혼자.
다행히 앉아 보라며 잔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이걸 이대로 짊어지고 갈 순 없다는 사실.
2m짜리 얼음을, 거기다 이렇게 눈보라를 펑펑 뿜어대는 걸 어떻게 옮긴단 말인가.
거기다 안에 있는 활은 어쩌고.
얼핏 아래를 살피니 이글루와 이어진 바닥이 보였다.
한참을 얼음 기둥과 이글루의 이음새를 노려보자.
[대상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장소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이전보다 더 맑아진 운명을 파악하는 눈이 짙은 백야 속 얼음 기둥의 운명을 읽어 냈다.
깊은 추위와 단단한 냉기를 담고 있는 녀석.
그 아래 딱 한 곳.
빽빽하게 얽힌 운명들 사이 옅게 금이 간 공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본디 오랫동안 이 신비를 지녔을 에스키모의 죽음이 견고한 얼음에 충격을 가했던 모양.
때로 신비란 위대한 힘은 정말 어처구니없게 의미를 잃기도 하니 불가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봐, 이글루 폭파 준비는 끝났나?”
무너뜨리기로 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마법사가 잠시 통신구로 떠들어 대더니.
“우선 폭파 마법진 매설은 끝났습니다. 대피한 뒤 밖에서 공격 마법을 펼쳐 안과 밖을 동시 타격하면 충분합니다.”
“그래? 마침 잘되었군.”
마법사의 보고를 들은 후.
브레이커를 세워 들었다.
콰르르르!
이젠 적염에 더해 폭발까지 머금은 거검이 사나운 맹수와 같이 울었고.
“1분, 59초, 58초, 57초-.”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분은 너무 많이 줬나?
* * *
황자 전하께서 폭발 마법진이 완성되었냐는 물음과 동시에.
발자크 백작과 솔, 안드레, 알프레드를 비롯한 몇몇이 일제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난 오크 군락지부터 같이해 온 이들.
그들뿐 아니라 이미 황자의 유명세를 익히 들은 마법사들의 얼굴에도 불안이 피어올랐고.
안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과 울어 대는 거검에 점점 불안감이 현실이 되어감을 느꼈다.
몰아치는 백아와 황자의 불꽃이 뒤섞여 서로 뭉개지는 풍경 속에서.
“1분, 59초, 58초, 57초-.”
선명한 카운트다운이 들려왔다.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황자의 뜻은 분명했다.
일이 벌어지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1분.
더군다나 방금 폭발에 관해 물었으니 분명 이글루에 무슨 일이 생기겠거니 짐작했다.
저 광폭한 황자 전하와 지낸 지 제법 오래.
사람이라면 눈치가 생기는 법.
아니 동물적으로 위기를 감지, 어쩌면 광기를 감지하는 능력이라도 생겼나 보다.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할지는 못 들었으나.
“모두 이글루 밖으로!”
여튼 무언가 벌어질 것을 짐작한 백작의 다급한 명령이 평온했던 이글루 안에 메아리쳤고.
“전하께서 웃으신다!”
그의 이어진 경고에.
“전하께서 웃으신다! 모두 나갈 준비!”
“당장 중요한 물건들 들고 뛰어!”
마법사들과 병사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탈출을 시작했다.
그들에겐 그 어떤 소식보다 황자 전하의 웃음이 가장 두려웠다.
메아리치듯 반복해서 전달되는.
“전하께서 웃으신다!”
“전하의 웃음이다!”
“다들 뛰어! 전하의 웃음소리다!”
경악 어린 목소리들을 들으며.
“좋아. 효과 확실하군.”
발자크 백작이 보람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북부의 오랜 밤, 전설 속 두려움의 대상은 에스키모가 아닌 황자의 웃음이 될 거다.
그가 스스로의 지혜에 감탄하는 사이.
“20, 19, 18-.”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모두 탈출 준비 끝났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글루 입구에 그득 몰린 마법사와 기사. 병사들이 명령을 기다렸고.
“전하! 퇴각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서 같이 나가시죠!”
“그래요 전하! 얼른 나가요! 너무 무서워요!”
“신 안드레는 전하와 함께 남겠습니다!”
황자가 들어선 방 근처, 대기하던 이들이 전하를 다급히 부를 때.
우뚝 시간 세는 걸 멈춘 황자가.
태평하게도.
“누가 나가라 하였지? 살아남을 방법은 내 주변밖에 없는데.”
짓궂게 되물었다.
답을 들은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섣불렀다.
황자의 광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건만!
멋대로 예측한 게 오히려 자충수가 되어 버렸다.
“백작, 그리 병사들의 목숨을 헛되이 날릴 계획인가? 눈 감고 있을 시간 따위 없을 텐데.”
황자의 질책에 그가 재빨리 수정구를 들어.
“모두 전하가 있는 곳으로 뛰어! 어서! 그리고…….”
미안하다아아악!
괜히 똥개훈련을 하게 된 죄없는 병력들에게 백작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동안.
그제야 황자의 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들리는 웃음은 정말 맑고 깨끗하건만 하는 행동은 어찌 이리 심술궂은지.
이젠 황자의 고귀한 짓궂음에 익숙해진 안드레와 솔마저 허탈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노력하셨잖습니까.”
수정구에 대고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외쳐 대는 백작의 등을 토닥였다.
이윽고.
“우아아아악!”
기사들을 선두로 병사들, 마지막으로 마법사들이 숨을 헉헉거리며 달려왔고.
“모두 주변에 대기한 채 실드를 펼치라고 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를 예측하려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건방지다, 백작.”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황자의 배려에 백작이 무한 감사를 표하는 동안.
곧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착한 이들이 모두 모여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살피길 잠시.
“…….”
자신들의 주군 발자크를 묵묵히 바라보았고.
발자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시선을 피하며.
“나라고 예상했겠나.”
짧은 변명을 뱉었다.
물론 신하들도 자연재해와 같은 황자의 성격을 알기에.
땀과 숨을 거칠게 흘려대는 와중에도 눈빛으로나마 백작을 위로했고.
백작이 울컥한 표정으로 감동했다.
북부의 유대감이 더 깊어진 순간이었으나.
“그럴 시간이 없을 텐데? 10, 9, 8, 7.”
그런 감상 따위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황자의 심술궂은 카운트다운이 다시 시작되었다.
곧 백작의 명령대로 마법사들이 실드를 펼치며 황자가 백야와 세력을 다투고 있는 방 주변을 감쌌고.
“3, 2, 1.”
주어진 시간이 끝난 순간.
“폭파시켜.”
황자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거검이 울며 무언가와 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터졌다.
푸화하학!
안에서 불과 폭발, 눈보라가 뒤엉켜 쏟아졌고.
“폭파!”
백작의 호령에 마법사들이 마나를 개방하여 설치된 마법진 속으로 거칠게 쑤셔 넣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에 얼음이 이리저리 비산했고.
뒤에선 불과 눈보라가 으르렁거리며 피어났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곧 황자가 들어 있는 방을 중심으로.
쩌저저적.
먹구름에 번개가 치듯 뚜렷한 균열이 이글루 전체에 내달렸다.
푸스스 피어나는 색색의 냉기가 이글루가 뿜어내는 피 보라 같았다.
온 사방이 굉음으로 가득한 가운데.
아하하하! 아하하하하!
황자의 맑은 웃음이 뒤섞여 북부 병사들의 귓가를 울렸다.
약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풍경.
하늘이 무너지듯 갈라지는 이글루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이 흔들렸다.
그때.
“겁먹지 마라.”
백작의 고요한 목소리가 울렸다.
분명 같은 풍경을 바라봄에도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서글펐다.
“아버지는 이것보다 더 끔찍한 풍경 속에서 싸웠으리라. 오늘 우리가 그 한을 씻었으니 당당히 보아라. 원수들의 오랜 삶이 무너지는 것을. 북부의 원수이자 아이들의 깊은 잠을 방해하던 오랜 귀신들의 패망을.”
당당히 마주해라.
백작의 읊조리는 말이 굉음 속에서도 선명했고 이에 주변에 선 북부인들의 무릎이 굳건해졌다.
끝에 이른 폭발 마법이 절정에 달함과 동시에.
황자의 광기 어린 불꽃과 거검이 얼음 기둥을 잘라 냈다.
지탱하던 신비가 잘려 나간 순간.
콰르르르.
폭발하는 눈보라와 함께 이글루가 무너져 내렸다.
솟아오르는 눈과 무너지는 얼음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 * *
모닥불 폭발로부터 한 달가량 지나며 북부를 떠났던 북부인들이 속속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왔고.
고향 땅에 돌아온 이들이 먼저 한 일은.
재산을 확인하는 것도, 집터를 확인하는 것도, 새로 정착할 땅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그대들이 있었기에, 북부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생에도 노고에도.”
꽃에 휩싸인 전대 백작 루카르가 선 언덕.
굳어 버린 위대한 기사와 언덕 안에 잠들어 있는 노병들을 기리는 줄이 이어졌다.
이제 막 풀이 자라기 시작한 땅, 가져올 것이 없어 감사만을 놓고 돌아서는 그들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산맥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리더니.
거센 눈보라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언덕 앞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봄을 맞이했는데.
다시 겨울이 오는가.
우리의 봄은 이리 짧고도 보잘것없는가.
이들의 희생이 이리 덧없이 사라지는가.
그러나.
화산처럼 터져 오른 눈보라가 하늘에 머물길 잠시.
북부의 하늘로부터 소복한 눈송이들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아-.”
“따뜻해.”
한 여인이 오랜만에 본 눈이 반가워 눈치 없는 말을 뱉고는 목을 움츠렸다.
혹여라도 쏟아질 시선과 질책이 두려워 주변을 살피자.
“그러게 따뜻하네.”
“이상하게 보드라워.”
옆에 있던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본래 북부에 몰아쳤던 설풍은 매섭고 차가웠다.
마치 그들을 체벌하고 괴롭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머리와 손끝에 소복소복 쌓이는 눈송이들은.
피부에 느껴지는 차가움과 다르게 마음에 따뜻함을 전해 주었다.
같은 눈이지만 같은 눈이 아니다.
하얗게 덮여가는 땅, 파릇파릇 풀과 꽃으로 뒤덮인 언덕에도 눈송이들이 수줍게 내려앉았다.
눈을 머리에 인 꽃과 풀의 허리가 굽었으나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머금은 풀과 꽃들이 싱그러운 향을 내뿜으며 생명력을 함빡 뿜어냈다.
새로운 눈이 새로운 북부를 따뜻하게 덮는 풍경 속.
루카르의 머리와 어깨에도 따스한 눈송이들이 나풀나풀 소담스럽게 쌓였고.
이내 눈이 녹아 모인 물기가 하얗게 굳은 전대 백작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대는 그렇게라도 후대의 북부를 축하했다.
* * *
완전히 무너져 버린 이글루.
사방 가득 깨진 얼음이 박혀 흉측한 풍경 속.
유일하게 깨끗한 원형 공터.
“눈이 아름답긴 처음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북부 기사들과 병사들이 머리 위로 내리는 소담스러운 눈을 보며 감탄했다.
높은 산맥에서 바라보는 북부는 새삼스레 아름다웠다.
드문드문 보이는 녹색 대지 위를 덮는 하얀 눈과 새롭게 삶을 이어나가려는 치열한 생존이 뒤섞인 풍경.
“아름답군.”
황자의 담담한 말에.
“그렇습니다.”
백작이 답했다.
“앞으로 너희들이 일구어 갈 새로운 북부다.”
“새로운 북부… 말씀입니까.”
“그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할 위험을 잘라냈으니 이제 과거의 의지를 이어 새로 시작해야지.”
“맞습니다. 새로 시작해야죠.”
백작이 열망 어린 목소리로 답하길 잠깐.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 북부는 전하를 따를 것입니다.”
뜨거운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북부의 드보르작 변경백 가문이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을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그의 맹세에 이를 바라보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따라 무릎을 꿇었다.
“전하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든 북부는 방벽이 되어 전하를 보필할 것이며 제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옆에 설 것입니다.”
백작의 맹세가 고요한 산맥에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무릎을 꿇은 자들 사이, 오롯이 선 황자의 모습이 고고하여 우뚝 솟은 봉우리 같으니.
잠시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을 굽어본 그가.
“날 따라오다간 죽어. 겪어 봤잖아. 내 주변이 얼마나 험한지를.”
담담히 경고했다.
물론 보았다.
아버지와 노병들의 죽음을.
그러나.
“새로운 북부가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누구도 죽지 않게 지키겠나이다!”
발자크가 다시금 확고한 뜻을 전했고.
“전하를 따르겠나이다! 지키겠나이다!”
충성스런 기사들과 용맹한 병사들이 복창했다.
그들의 맹세에 아르한이 사납게 웃길 잠깐.
“살려 줬더니 죽을 자리를 굳이 찾아오는군. 좋다. 그 미련한 뜻 받아주지. 올라탔으니 도망칠 생각 마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끝까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해 얄궂게 말하던 황자가 답지 않게 우물거리길 잠시.
“너희가 날 섬기는 만큼 나도 너희를 돌보마.”
툭 던지듯 자신의 뜻을 밝히곤 돌아섰다.
어쩐지 뒤돌아선 어깨에 부끄러움이 살포시 내려앉은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북부의 모두가 주군의 창피를 모른 척하며 소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황자의 심술 속 깔린 배려를 알았기에.
티를 내면 또 무엄하게 자신을 파악하려 한다며 광기를 부릴 것을 알기에.
그들이 모시는 황자 전하는 참으로 멋지게 미치신 분이기에.
아름답고 고귀하게 미치신 분이기에.
어쨌든 여러모로 미치신 분이기에.
그들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툭툭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그걸로 맹세는 끝.
참으로 간단하며 단순한 맹세.
그러나 그 무엇보다 단단한 황자와 북부인들만의 맹약이 세워진 순간이었다.
* * *
괜히 털이 숭숭 난 남정네들의 뜨거운 눈길이 징그러워 눈살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려니.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반역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였습니다! 대상의 운명 반역, 죽음, 불만, 부당한 대우, 분노를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대량 획득했습니다!]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파멸과 멸망, 오랜 공포를 극복하였습니다! 운명을 포식합니다! 새로운 운명 생명과 활력이 싹 틉니다!]
[발자크의 운명에 위대한 기사가 이룬 신비가 서서히 깃듭니다]
눈을 어지럽히는 운명들이 귀찮아 툭 내던지듯 뱉었다.
“이봐 백작.”
“네, 전하.”
“루카르는 기예를 극복하여 신비를 이룩했다. 내가 보았느니라.”
“위대한 일입니다.”
“극복으로 이루어진 신비는 그가 죽었다 해서 덧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새겨듣도록.”
“네?”
“내가 선조의 불을 받아 뿜어내듯, 루카르의 신비도 의지로 남아 북부에 머물러 있다. 날 따라오겠다 했지? 그 말이 참이라면 마음속 깊이 의지를 받들어라. 새로운 북부를 지키고 일으켜라. 그리하면.”
마치 신년 선물을 받는 아이처럼 빛나는 백작의 얼굴을 보곤 피식 웃으며 말을 맺었다.
“아비의 신비가 아들에게로 연이어 이어지리라. 내 장담하지.”
“그릇을 만들고 의지를 담고 신비를 잇겠습니다. 반드시 따르겠나이다.”
답하는 백작의 눈 깊은 곳, 존재를 잘라 내던 것과 같은 백광이 아주 살며시 어리는 듯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힌트를 주었으니 이제 나머지는 그의 몫.
이제 나는.
“때마침 오고 있군.”
새로운 운명을 맞이해야 할 때였다.
산맥의 끝자락에서부터 올라오는 일련의 병력들이 보였다.
눈을 맞으며 펄럭이는 깃발에 새겨진 문양은 동부 2공작 중 하나인 동북부 공작 가문의 것.
외에도 형형색색 여러 깃발이 함박눈 사이 비쳤다.
점점 다가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이 싣고 오는 새로운 시련들이 소란스레 존재를 알렸다.
안에 담긴 알량한 악의와 저열한 계략들이 즐거워.
손에 든 얼음장같이 냉기를 뿜어내는 장궁을 겨누었다.
얼핏 보이는 얼굴들에 어린 의문들.
의문을 해소해 주고자.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을 담아 겨눴고.
대부분이 설마 쏘겠어라는 태평한 표정을 지을 때.
“피해라! 못 피하면 죽는다!”
시위를 놓자 날카롭게 맺힌 불이 뜨겁게 뻗어 나갔다.
이리저리 산개하는 꼴이 쥐새끼들 같아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