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잔혹한 결의
북부는 본래 고집불통 사내와 같았다.
홀로 북벽을 고수하며 흔들림 없이 제국을 지켰지만 굳건한 만큼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치적 이유로, 경제적 사유로 이런저런 말로 구슬려도 그저 등을 돌린 채 눈 몰아치는 북부를 바라볼 뿐.
이 고집불통 사내는 고집은 있어도 패악스럽진 않았던지라, 중앙 욕심 많은 배불뚝이들은 북부 백작가를 유혹하기보다 무력한 지방 영주들과 같은 욕심을 가진 관리자들을 포섭했다.
백작가는 이를 두었다.
저들에게 자신과 같은 고집을 무작정 요구할 순 없었기에.
북부는 척박한 땅.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그들의 생존마저 막을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와 관계들로 북부의 깊은 곳은 썩어 갔다.
아무리 고집불통 사내라도 등에 꽂히는 무관심과 조롱의 말들이 상처로 쌓였고 야속함이 눈 깊은 곳에 고였다.
그러한 운명들이 모이고 모여 죽음과 반역이 된 것.
물론.
“북부에 몰려가서 항의를 해야 함이 옳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가면 문제없을 것입니다.”
“명분을 주장하고 명확히 얻을 걸 얻어야지요. 이자까지 쳐서요.”
“이번엔 전하께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겝니다.”
중앙, 등 따시고 배부른 자들은 그런 북부의 사정을 이해 못 했다.
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들의 눈엔 그저 자신들의 욕망을 방해하는 답답한 고집쟁이에 불과할 뿐.
그래서 북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들에겐 즐거움이었다.
어쨌든 기반을 잃은 북부 변경백과 그를 따르는 가신들은 힘을 잃었을 터.
기회만 잘 노린다면 과거보다 더욱 커다란 이득을 취할 수 있다.
탐욕스러운 이들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과실을 그냥 보아 넘길 리가 없다.
북부에 패악스러운 황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4황녀 전하의 지시라면 분명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맞소이다. 거기다 이미 대리인을 죽이기까지 하셨으니까요. 명분을 업은 고관들의 아우성엔 어쩔 수 없으시겠죠.”
이번엔 그들도 충분한 준비를 해 왔다.
거기다.
“설마 공작님의 전령들이 계신 앞에서까지 피를 흘리겠습니까?”
그들의 앞엔 동북부 공작가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본래라면 감히 산맥까지 올라올 생각도 못 했겠으나.
동북부 공작이 보낸 전령들이 산맥에 등장했단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나름 그쪽에도 연을 이어 둔 이들이 있으니 하다못해 목숨은 보전하겠지 싶은 생각.
설마 제국에서도 둘밖에 없는 공작 중 하나와 황손 중에서도 나름 세력이 크다는 4황녀의 가신들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안일한 생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름 기세등등하게 산맥을 오르는 중에 드디어 황자와 북부 세력을 만난 순간.
“저 풍경은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방금 폭풍이 설마?”
“지금 내리는 눈이 저기서 나왔나 보군요.”
생경한 풍경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했다.
사방 가득 무너진 얼음덩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온전해 보이는 땅에 모여 있는 기사들과 병력.
그들의 감격스러운 눈이 하늘로 향해 있는 사이.
넓은 어깨를 지닌 자 옆.
“저분이?”
“맞는 듯싶습니다.”
백금발을 일렁이며 선 황자의 자태가 눈에 띄었다.
분명 같은 자리에 섰으나 유독 그만이 높아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단단한 갑옷 위, 털코트를 차려입은 그의 자태가 황가의 고귀한 피를 방증하는 것 같아 다들 침을 꿀떡 삼켰다.
그런 귀하고 아름다운 태와 다르게 형형한 붉은 눈과 손에든 험악한 거검은 마치 가시와 같이 위협적이었다.
곧 그들을 알아차린 황자가 그쪽으로 눈을 돌렸고.
맹수와 같이 살기가 일렁이는 눈빛을 마주한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거리가 너무 멀다.
어찌해야 할까.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황자가 먼저 인사를 하기로 했는지 무언가를 꺼내 들었고.
그게 활임을 눈치챈 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설마?
“피해라! 못 피하면 죽는다!”
벽력처럼 울리는 황자의 목소리.
팔을 당기자 활과 그의 손 사이, 선명한 불이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쏘겠어? 에이 설마 쏘겠어? 위협만 하는 거겠지.
다들 어찌할 줄 몰라 우왕좌왕할 때.
황자는 시위를 놓았다.
그래, 진짜 쐈다.
화르르륵, 내리는 눈 사이 백색으로 가득한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선명한 붉은색이 마치 황자의 눈동자를 닮아 시야를 아프게 찔렀다.
“으, 으아아아!”
“피, 피해! 모두 산개!”
“다들 흩어져!”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이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에 황자의 얼굴엔 못된 즐거움이 가득했다.
정녕 저 사람이 제정신이란 말인가?
설마설마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들이 각자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사이.
어느새 도착한 불줄기가 땅에 콰직 박혀 들었고.
퍼엉! 불꽃과 폭발을 뿜어냄과 동시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눈더미들이 우르르 일어나 이리저리 내달렸다.
그들 또한 황자의 광기를 피해 달아나고 싶었던 모양.
충격과 소란으로 인해 주변 산봉우리에서도 눈들이 우수수 쏟아지니.
“누, 눈사태다!”
“다들 뭉쳐!”
“이미 흩어졌습니다!”
무엇을 해 보기도 전에 쏟아져 내린 눈에 휩쓸렸다.
방금까지 기세는 어디 갔는지 볼썽사납게 넘어진 그들을 보며.
황자가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길 잠시.
“새로운 북부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낯선 이들이여.”
낯선 이들이라니, 황자의 알 수 없는 농담에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나 황자가 선택한 단어가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 여러 의도가 포함된 말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금 환영식은 장난이라 치자고. 따뜻한 땅에서 음식이나 축내던 놈들에게 눈 맛을 좀 보여 주고 싶었거든.”
맑게 터지는 웃음에 주변 북부인들이 함께 웃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커서일까.
아니면 방금 있었던 얕은 눈사태의 여파로 오랜 시간 쌓인 만년설이 헐거워진 탓일까.
들썩이는 황자의 어깨를 따라 산봉우리가 따라 웃듯 아직 미끄러지지 않은 눈들이 풀썩였다.
방금 차가운 눈맛을 보았기에 그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좋은 반응이다.
그들의 두려움을 하나하나 굽어보며 황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후 오가는 말들에 장난과 농담은 없을 거다. 분명히 말해 두지. 어떤 말을, 어떤 뒷배를, 어떤 증거를 준비했든 조심히 생각하고 조심히 뱉어라. 새로운 북부엔 새로운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바꾸려 들면.”
광기 어린 웃음 가득했던 황자의 얼굴이 사그라들었고.
“잘라 낸다.”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뒤바뀐 얼굴 속 살기가 매캐하게 피어났다.
꿀떡.
순간 자리에 찾아온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잘못 찾아왔구나.
왜인지 북부인들에겐 포근함으로 느껴졌던 눈송이가 그들에겐 그저 차가워 살이 아렸다.
“고하라. 낯선 이들이여. 너희는 왜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는가.”
다시금 황자의 물음이 떨어지자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북부의 병력들이 봉우리 사이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포위를 당한 것 같아, 그들이 방금 눈사태처럼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눈 속 파묻힌 이들의 오금이 저렸다.
모두가 깨달았다.
꿀이 가득해 보였던 과일 안,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맹독이 들어 있었음을.
자리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황자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아님에도 마치 예를 올리는 것과 같은 자세였다.
* * *
대화는 길지 않았다.
어찌저찌 드문드문 방황하는 말 속에 탐욕과 두려움을 숨기려 해 봤으나.
나에겐 모두 보였다.
그들의 운명도 그들이 몰고 온 탐욕의 결과도.
진정, 단 하나도, 북부에 도움 될 인물이 없었다.
그저 텅 빈 북부의 자원과 인력을 이용하려는 이들뿐.
절로 한탄이 터졌다.
그래서 덧없는 한탄 따위를 내뱉는 대신.
“죽여라. 모두 죽여 버려.”
도움 되는 말을 뱉었다.
간결한 명령에 기사들의 턱 근육이 불거졌고.
이를 예상했다는 듯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이 무어라 아우성을 쳤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뭐, 4황녀가 어쩌고 재무대신이 어쩌고, 누가 어쩌고.
어쩌라고.
“전하.”
“백작, 설마 말리려는 건 아니겠지?”
백작이 먼저 무어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날카로이 물었다.
“기껏 얻은 기회다. 아비들의 피와 헌신이 녹아든 기회다. 백작 알량한 걱정과 자비로 이를 망치지 마라.”
“…전하.”
“난 탐욕 어린 머저리 수백보다 이 차가운 동토에서 밭을 일굴 한 명의 농부가 소중하다. 황녀의 지엄한 경고보다 자신의 터전을 빼앗겨 실망한 사냥꾼의 투덜거림이 더 무섭다. 이해했다면 죽여라, 백작. 내게 일반적인 커다람과 무거움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 터.”
분노 어린 말에 모두의 얼굴에 결의가 어렸다.
백작 또한 잔잔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볼 뿐.
그사이 곧 죽을 놈들이 너무나 시끄럽게 요동쳤기에.
“난 미쳤으니 세상의 경중이 중요치 않다. 황녀의 명이든 공작의 눈이든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 방해하면 죽인다. 그뿐이다.”
그 말대로다.
난 폭군이고 패악스러운 미치광이.
처음부터 남들의 기준과는 다른, 뒤틀린 기준으로 세상을 살 작정이었다.
그리고 가로막는 건 모두 자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도.
그러기 위해 불을 택했고 광기를 부렸다.
지금이라고 달라질 이유가 없다.
공작과 황녀의 이름 앞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 앞에 있다 해도 같은 말을 했을 터.
내 단호한 표정에.
“전하.”
아련히 나를 부른 백작이 나지막이.
“여전히 멋지십니다.”
극찬을 남기고는.
검을 뽑았다.
“기사들은 가만히 있으라.”
그가 홀로 책임을 지겠다는 듯 나설 때.
“함께하겠습니다.”
기사들이 다 같이 검을 뽑았다.
“몬스터에게 당한 척을 하려면 여럿이 좋습니다.”
“마침 눈사태도 일어났으니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하다 눈사태에 파묻힌 것으로 하죠.”
“좋은 생각입니다, 단장.”
서로를 보며 희게 웃는 그들의 미소를 보며.
나도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 그들이 내 표정을 따라 하게 된 것인가?
백작이 고개를 젓길 잠시.
“그럼 새 북부의 첫 번째 사건을 저지르도록 해 볼까.”
비명과 칼부림하는 소리가 울렸으나.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북부를 위협하는 자들의 피와 죽음을 묵묵히 마주했다.
그래야만 했다.
전대 백작과 노병들의 희생, 황자의 눈물을 본 그들은 새로운 북부의 두려움이 되려 했고.
망설임은 없었다.
북부의 새로운 눈이 따뜻함이라면 그 안에 사는 이들이 이제 새로운 혹한이 될 차례.
[장소에 새로운 운명이 싹틉니다! 단호한 결의, 잔혹한 정의가 북부의 새로운 한파로 성장합니다!]
[발자크 드보르작과 기사들의 운명이 뒤틀립니다. 마음속 깊은 불만과 실망이 새로운 단호함과 깊은 결의로 뒤바뀝니다!]
외에도 그들의 마음을 좀먹었던 후회와 비통함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마구 가지를 뻗어 나갔다.
이제는 뺏기지 않겠다는 작은 욕심과 다른 이들을 쳐내서라도 북부를 지키겠다는 잔혹한 다짐, 그 악명과 피마저 감당하겠다는 고결한 패악.
때로 사람의 운명과 장소의 운명은 이리 피를 먹고 크는 것.
나와 닮아 가는 그들의 모습이 즐겁고 기뻐 터지는 피를 보며 한참을 웃었다.
소복이 쌓이는 눈이 따스했으나 휘두르는 검과 기사들의 눈빛은 그 어떤 눈보라보다 차갑고 냉엄하니.
죽어 나자빠진 시체와 사방에 터진 피 위로 굵은 함박눈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북부가 아들들의 죄를 덮어 주는 동안.
백작과 기사들의 입에서 피어나는 입김이 옅은 죄책감으로 주변을 물들였다.
흩어지는 입김과 같이 흐려지는 탐욕들이 마음을 더욱 뿌듯하게 했다.
물론 나중에 4황녀를 상대해야 하긴 하겠으나.
“어차피 벌여야 할 싸움이니까. 황녀는 그러려니 하고.”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 좀 더 빨리 올 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
벌써 눈에 파묻혀 식어 가는 시체들에서 고개를 돌렸다.
칼부림 와중 튀었는지 눈가에 흐르는 피가 얼핏 시야 아래로 느껴져.
스윽, 이를 닦으며 미소 지었다.
돌린 시선 끝에 닿은 것은.
“저, 전하. 어찌 이런 일들을.”
동북부 공작이 보낸 전령들.
그들의 용무는 아직 듣지 않아 일부러 뒤로 빼두었다.
물론 어떤 용무일지도 짐작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겁에 질린 이들을 일단 진정시키고자.
“쉬, 쉬-. 아직 죽지 않았으니 그리 떨지들 마. 얼음 밑에서 오랜 시간 떨 수 있을 테니까. 깊이 숨을 쉬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이 깨끗한 공기를 만끽하지.”
따뜻한 말로 위로를 건넸으나.
“히이익.”
어째서인지 공작가의 가신들은 더욱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위로를 포기하곤 비뚜름히 고개를 꺾으며.
“이봐, 공작. 언제까지 없는 척 듣고만 있을 것인가.”
아직도 의뭉스럽게 숨은 공작을 질책하자.
발자크 백작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최소한 입막음을 하거나 덩달아 죽일 줄 알았나?
그때.
-어찌 이런 장면을 보이셨습니까.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울렸고, 단숨에 정체를 파악한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우르르 빠져나갔다.
새하얗다 못해 퍼래진 얼굴이 얼핏 에스키모를 닮아 우스웠다.
* * *
뭘 그리 놀래?
황자의 표정에 어린 물음을 보고 백작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 또 방심했다.
전하 앞에선 방심은 금물이건만!
자신을 질책해 봤지만 사실 발자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황자의 광기는 이미 경지에 이르러 예측 불가였다.
그에 반해 발자크의 광기는 이제 막 자리 잡은 애송이.
어찌 검의 첫 자락을 잡은 이가 검의 끝자락에 닿은 이를 읽겠는가.
황자의 광기와 발자크의 광기는 그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야말로 경지 역전 세계.
“미리 좀 말씀 해 주시죠…….”
그의 투덜거림에.
“말했으면 또 남의 시선과 체면 생각해서 당당히 움직이지 못했을 것 아닌가. 저놈들 살려 두면 뭐가 남아. 그리고 보면 어때. 욕심 많은 놈들 죽일 수 좀 있지.”
“전하-.”
백작이 말을 맺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 같았다면 이 급작스러움에 힘겨웠겠지만 이젠.
“뭐 맞긴 합니다. 어차피 죽여야 할 놈들이었으니까요. 다만 정치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외부의 적을 맞이할 때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냥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주변 기사들도 이젠 백작을 따라 그러려니 하는지 금세 동요를 가라앉혔다.
지난번 혹한을 겪으면서 황자의 행동과 결과를 보았기에.
믿었다.
그의 순순한 인정과 옅은 투정에 황자가 여전히 존귀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 적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겠지.”
모두의 시선이 황자를 따라 공작가의 가신들로 향했고.
그들이 덜덜 떨길 잠시.
몇몇 침착한 표정을 한 자가 그제야 앞에 나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위에 수정구를 놓으니.
-전하의 뜻이 궁금하여 물었을 뿐입니다. 문제 삼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소. 발자크 백작.
아까보다 좀 더 또렷한 목소리가 설산을 울렸다.
황자가 뚱하니 그 모습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수정구 뒤에 숨어 나와 대화할 작정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동북부의 일이 바빠 직접 행차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소서.
곧 수정구가 이리저리 몸집을 키워가더니 한 노인의 형상을 취했고.
그가 찬찬히 고개를 숙여 황자에게 예를 표했다.
무릎은 꿇지 않았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선 자.
황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황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권력가니까.
잠시 둘의 시선이 부딪혔고.
“묻고 싶은 것은 정녕 그뿐인가?”
-…글쎄요.
“이런 늙은 거북이 같으니라고. 오랜 시간 등껍질에 숨어 있느라 눈과 귀까지 탁해진 것은 아닐 테고. 아니면 편지의 내용이 빈약했나?”
-후우, 전하 이 늙은이의 미련함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역시나 황자의 신랄한 혀가 공작이라고 봐줄 리 없다.
둘의 아찔한 대화에 다들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면서도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귀를 기울일 때.
쯧, 혀를 찬 황자가.
“간단하지 않은가. 동북부와 북부의 연합 전선. 그게 그리 어려운 말이었나? 자네의 오랜 염원과도 연관이 있을 터.”
매우 복잡하고 충격적인 말을 간단하게도 꺼냈다.
“난 고작 북방 정벌에서 끝낼 생각이 없거든.”
그의 입가에 위험한 광기가 산불처럼 번졌다.
문득 설산의 한기가 거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몸을 떨었다.
오직 몸에 갑옷처럼 열기와 광기를 두른 황자와 수정으로 이루어진 동북부 공작만이 추위를 모르는 듯 담담했다.
둘의 마주 선 눈빛 속 운명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