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60화 (60/200)

60화 청사진

수정을 빌려 만든 공작의 몸이 맑게 설산을 비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담아 냈다.

파인 주름과 호흡을 담는 가슴팍이 마치 사람의 것 같아 더욱 신비로웠고.

그가 작게 움직이거나 숨을 깊이 들이쉴 때마다 파문이 일듯 비치는 풍경들이 왜곡되는 모습이 어떤 먼 존재와도 같았다.

비치는 모든 것을 왜곡시키는 마법을 앞에 두고도 황자의 모습만은 고요히 제 형태를 유지했다.

잠잠해서도 굳건해서도 아니었다.

이미 끝없이 흐드러지고 이지러지고 있기에.

황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흔들렸기에 왜곡할 수 없었다.

황자의 진홍색 눈에 비친 공작의 모습이 루비로 빚은 것 같이 붉었다.

둘이 그저 마주 보길 잠시.

-연합 전선이라 하셨습니까.

공작이 한숨과도 같이 말을 뱉어 냈다.

황자의 편지를 읽고 그의 말을 듣고자 온 건 사실이었으나.

그가 남긴 짧은 편지만으로는 도저히 유추하기 힘든 결론이었다.

그러나 크게 놀라진 않았다.

자그마치 제국의 공작, 그저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기에 이런저런 조사를 해보았고.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후였다.

특히 무명 요새의 부요새장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꽤 흥미를 자극했다.

* * *

지난 동부에서 황자가 망국의 레지스탕스들을 상대로 승리한 이후.

무명 요새의 전 부요새장이자 현 요새장으로 승진한 패트릭은 살면서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기회를 얻었다.

바로 공작과의 독대.

과거 먼발치에서나마 보았던 동북부의 지배자를 가까이에서 본다니.

절로 심장이 뛰고 손이 떨렸다.

물론.

‘이 편지를 전해라.’

황자의 명도 잊지 않았다.

사실 전하께서 전하라 했던 편지 덕에 이런 기회를 얻었음을 알고 있다.

동부 전선 가득한 요새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요새이자 동북부의 중심.

일명 수정 요새라 불리며 전선 너머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자 동북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상징과도 같은 공작 성에 발걸음을 디뎠을 때 감격이란.

자박, 자박, 자박.

내딛는 발걸음 아래 맑은 수정 속,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자 꿈인 것도 같았다.

“이봐. 앞을 봐라. 넘어진다.”

옆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기사의 냉정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가 도착한 곳은.

투명한 수정 기둥이 가득한 공작성의 알현실.

기둥에 비친 패트릭의 형상이 수십으로 불어난 가운데.

그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며 기다리는 사이.

“왔는가. 전하의 편지를 갖고 있다지.”

공작이 의자에서 솟아났다.

사람이 수정으로 이루어졌다니 놀라운 일.

공작의 목소리가 동굴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마법을 잘 모르는 패트릭이 화들짝 놀라길 잠시.

“동북부의 지배자이시며 제국의 공작 각하를 뵈옵니다.”

나름 정중히 예를 취했고.

공작이 그런 그를 흥미를 담아 관찰했다.

그리곤 한 가지를 물었다.

“그리 놀라지 않는군.”

“놀랍습니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그리 크지 않아. 으음, 그래. 자네는 이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을 본 듯하군. 아마 전하와 관련되었겠지. 어때 내 예상이 맞는가?”

공작의 맑은 눈을 마주한 패트릭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이런 위대한 자들 앞에선 진실함이 가장 효과적인 생존 방법임을 배웠다.

황자에게서.

“그래, 편지를 주기 전. 이제 요새장으로 헌신할 자네가 본 그때의 전투와 전하의 용태가 궁금하군.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물은 앞에 있네.”

어느새 앞을 보니 수정이 반듯한 탁자로 변해 있었고 스르륵 생겨난 투명한 컵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담겼다.

덩달아 얕은 의자가 그의 몸을 받치니.

공작과 패트릭이 같은 선상에서 찻잔을 앞에 두었다.

공작과 독대하며 차를 마시다니 이 얼마나 커다란 영광인가.

그야말로 평생 꿈꿔 왔던, 상상에 불과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졌건만

이상하게도 예상과 다르게 패트릭의 심장은 그리 크게 뛰지 않았다.

왜지?

금방 그 이유를 떠올렸다.

전하와 함께 딱딱한 빵을 씹으며 몰려오는 적들을 마주했을 때가 더 두근거렸으니까.

허름한 무명 요새 회의실에 놓여 있는 평범한 의자,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같은 퉁명스러움으로 모두를 질책하던 그였으나.

앉은 자리와 풍경에 상관없이 고귀함을 뽐내던 전하께서는 주변을 마음껏 주무르며 신비와도 같은 싸움을 펼쳤다.

황자는 수정 없이도 빛났고 다채로웠다.

이미 너무나 강렬한 열기와 색을 본 패트릭의 눈엔 그저 다른 것을 반사해 내는 공작의 마법은 황자의 것처럼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 못했다.

때로 너무 강렬한 경험은 사람의 감각을 무뎌지게 만드는 법.

지금 패트릭이 그러했다.

침착하게 감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어 자신이 겪었던 놀라움과 과격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고.

설명이 이어질수록.

공작의 얼굴에 놀라움이 더해졌다.

사실 이미 황자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이겼는지 알았다.

동북부의 지배자가 그 정도도 모를까.

그가 직접 명령하여 병력을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

다만 황자의 승리 속,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평소 무능력하다 일컬어졌던 황자가 어찌 그런 요술과 같은 승리를 얻어 냈단 말인가.

어떤 묘책이 숨겨져 있었을까.

밖에서 본 자와 안에서 본 자의 시선이 다르기에 패트릭을 불렀던 것.

역시나 놀라웠다.

아니, 예상을 넘어 놀라웠다.

‘남들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는 패악스러울 정도의 과감성과 결단력, 상황을 읽는 걸 넘어서 역사를 읽듯 동부인들의 성질을 파악했다. 이걸 단순히 책략이라 할 수 있나?’

동부 출신이 아님에도 어찌 동부인들의 속내를 정확히 알고 움직였는가.

아니, 동부 출신이 아니라 가능했던 일.

그의 깊은 심계만으로도 놀라울진대 지금 패트릭을 마주하며 공작이 더욱 놀랐던 점은.

“마지막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악명도 모두 자신의 것이라며. 그러니 너희는 그저 승리를 즐기라며. 떨어지는 피와 울어 대는 거검을 들고 그리 말씀하셨지요.”

열망으로 들뜬 패트릭의 호흡과 시선.

패트릭의 시선이 그때를 눈앞에 떠올리듯 투명한 수정 속을 파고들어 과거를 재생했다.

공작이 진짜 놀란 점은 바로 이것.

황자에게 완전히 매혹되어 버린 자의 반응.

동북부의 공작이자 지배자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이 신비한 마법을 앞에 두고도, 수정으로 가득한 공간 한가운데서도.

황자를 떠올렸다.

수정에 비치는 수십의 패트릭이 열기로 가득한 찬양을 읊어 대는 통에 공작 자신도 절로 열이 올랐다.

“울어 대는 거검이라. 그 검에서 불꽃이 튀던가. 날은 비죽비죽 솟아 있고.”

“네. 맞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생김새였습니다. 그러니까 음… 적을 잡아먹듯 흉포했습니다. 말이 이상하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놀랍군. 정확히 일치해.”

그는 오랫동안 동북부의 지배자로 군림했고.

오랜 세월, 많은 학문과 서적을 탐독하며 얻은 지식이 적지 않았기에 패트릭의 말을 들을 때마다 궁금증이 더해갔다.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 검이 맞는 걸까? 대체 아르한 황자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단 말인가.

더는 기다리기 어려웠다.

“편지를 줘 보게. 내 읽어 봐야겠군.”

아직 황자 전하를 찬양할 말이 한참 남았거늘.

공작의 재촉에 패트릭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품속 고이 간직한 편지를 공손히 내밀었고.

편지를 뜯어 본 공작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투명한 얼굴에 비친 황자의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북부에 불이 피어나고 북벽이 사라지면 동부와 북부를 잇는 산맥을 타고 오도록. 공작이 지닌 비원을 이루어 줄 테니.]

비원(悲願), 속에 품고 있는 비장한 소원.

황자가 적은 비원이라는 단어가 이 비원이 맞다면.

“알겠네. 내 편지를 확인했으니 이만 가 보아도 좋아.”

반드시 황자를 만나야만 했다.

그런데, 대체 북부에 불이 피어나고 북벽이 사라진다는 말은 무언가.

“이상하구나, 이상해.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을 만났으나. 가장 이상하고 궁금하구나.”

제국의 위대한 대마법사이자 동북부의 수정 거북이라 불리는 하르델 공작가 그 자체인 하르델 공작이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편지에 적힌 일들이 현실이 되어감을 들었다.

북부가 처한 위기, 이후 벌어진 행보.

전대 백작의 희생과 황자의 분투.

전대 백작과 친분이 있는 그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패트릭의 열망이 루카르에게도 옮겨붙었던 것일까.

북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황자를 만나는 순간이 기다려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육신은 늙고 마음은 마모되고 머릿속은 온갖 지식으로 가득해 자극에 무뎌진 지가 오래건만.

황자의 행보와 북부의 변화는 그마저도 놀랄 충격적인 소식밖에 없었다.

특히 오래 알았던 전대 백작의 용맹한 산화는 참으로 마음 아프면서도 뜻깊었다.

“그리, 그리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더니. 극복할 자리를 찾더니 이루었구나, 루카르. 놀랍다, 놀라워. 결국은 이루어낸 너도 놀랍고 그런 너를 이끈 황자도 놀랍다.”

홀로 쓸쓸히 웃던 그가 문득.

“어떠했을까. 자신의 염원을 이루는 광경은…….”

부럽다는 감정이 스며듦을 느꼈다.

그리하여 북부가 비고, 몸을 회복한 황자가 산맥을 올랐단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사람들을 파견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황자는 첫 순간부터 자신의 상상 이상이었다.

공작 자신이 환상을 현실로 만들려는 마법사라면.

“활? 불이다. 불이로구나. 초대 건국제께서 품었던 불! 등에는? 등에는 무엇인가? 그래 검이다. 거검. 부수는 검! 브레이커가 맞았어! 정말 저 무구를 되찾은 이가 있을 줄이야!”

황자는 환상 그 자체였다.

실제로 보자 이해했다.

패트릭이 어째서 그리 황자에게 취해 있었는지, 루카르가 왜 죽을 자리를 황자의 옆으로 정했는지.

첫인사 이후 마치 보란 듯 보여 준 탐욕스러운 자들의 죽음과 북부인들의 변화.

놀라울 따름이었다.

동부에선 동부인들의 습성을 이해하고 상황을 조절했다면.

지금은 아예 북부를 통째로 뒤바꾸어 버렸다.

아니 저 스스로 바뀌도록 모든 무대를 준비해 놓았다.

황자가 자신에게 백작과 기사들의 변화를 보여 준 이유는 자명했다.

-절 설득하신 겁니까.

긍정하듯 떠오르는 황자의 짓궂은 미소에 공작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수정 너머 먼 거리, 마법으로 그를 바라보건만.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그의 표정이 뿜어내는 광기와 열기가 선명했다.

깨끗한 백금발이 설원의 눈과 함께 요동칠 때마다 선뜻선뜻 한기가 몰려오는 듯했다.

공작의 물음에 황자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가 빠르군. 번거로운 말 몇 마디보다 한 번의 견식이 좋으니까. 원하면 경험도 하게 해 주고 말이지.”

킥킥거리는 웃음이 날카롭게 수정 속을 파고들었다.

공작이 최대한 침착하게 감정을 가라앉히며 다시금 물었다.

-제 비원에 대해 적었지요. 지금도 염원에 대해 말했구요. 일단 북부가 변했고 그만큼 전하의 결단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만. 어떤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제 비원과 동북부, 북부의 연합이.

공작의 애써 담담한 물음에 황자가 더욱 거세게 웃었다.

황자의 들썩이는 어깨가 공작과 백작, 수많은 기사의 시선을 산란시켰다.

* * *

투명한 척을 하지만 공작의 속내는 뻔했다.

자신에게 어떤 그림을 제시할 수 있는가.

나에게 그걸 묻고 있다.

그래 북부의 변화를 보았다, 루카르가 당신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겠다.

하지만 자신은 북부인도 루카르도 아니니 넘어올 수밖에 없는 청사진을 제시하라.

역시 늙은 거북이답게 반응도 느리고 조심성도 많았다.

아마 아무렇지 않은 척 기다리는 중에도 속은 부글부글 끓을 거다.

북부, 동북부, 산맥, 북벽, 비원.

이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충분히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노괴물이니까.

계속 의뭉을 떠는 공작을 바라보다.

“난 이 산맥을 새로운 북벽으로 삼을 거다.”

당당히 새로운 북부 재건 계획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입에 올렸다.

새로운 북부는 어떤 간섭도 더러운 착취와 부당한 대우 없이 오롯이 제 역할을 해낼 거다.

그중 가장 핵심은 이 새로운 북벽, 끝자락 산맥.

전생에선 악마들이 무너진 북부를 거점으로 삼아 이루어졌던 침략.

몬스터 웨이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끔찍한 행군을 막아 내야 하기에.

우린 산맥이 필요했다.

그리고.

“산맥의 끝자락과 동북부는 이어져 있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이 산맥으로부터 시작해 동북부까지 감싸는 거대한 성벽을 말이야. 북벽보다 길고 동북부 요새들을 모두 감싸 안는 거대한 장벽을. 뭐라 해야 할까. 그래, 이름을 만년 장벽이라 할까.”

산맥 끝자락부터 동북부를 감싸 안는 벽을 세울 생각.

내가 찬찬히 손가락을 뻗어 산맥을 이루는 산봉우리들과 그 너머 있을 동북부의 요새들을 가정하며 쭈욱 선을 하나 그었다.

손끝에서 맴돈 불꽃이 화르르륵 허공에 길게 꼬리를 남기며 머물렀다.

그리곤 잔불이 맴도는 손가락으로 공작을 가리켰다.

“자네의 비원. 마법으로 이루어진 장벽, 수정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수성을 이루는 것. 그걸 넘어 산맥에 어린 한기를 빌려주지. 어때. 이글루를 넘는, 고대의 신비를 넘는 위대한 등껍질을 만들어 보지 않겠나.”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꽃과 피어나는 꿈이 너무나도 닮았다.

주변에 눈이 쌓이고 있건만 나와 공작이 선 땅은 열기로 인해 후끈했다.

아무 말 없는 공작을 보며 씨익 깊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곤 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늙은 거북이의 심장이 뛰고 있군.”

모두의 시선이 공작의 가슴으로 향했고, 가신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눈에도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수정 속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언가 맥동하고 있다는 걸.

아직은 투명했으나 그 형체만은 뚜렷해 더욱 놀라웠다.

공작 또한 자각하지 못했는지 가슴팍을 보곤 놀라 숨을 삼켰다.

그런 공작을 향한.

“북부는 비원을 이루는 중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말씀하셨죠. 공작님께선 자신 못지않은 야망가라고. 전하께서는 분명 이루어 주실 겁니다.”

백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러니 그 정신병 생길 것 같은 수정 속에서 좀 나와. 바깥 공기 좀 쐬도록. 공작.”

퍼엉!

내가 손끝에 모아 둔 불꽃을 공작을 가슴팍에 그대로 쏘아 냈고.

그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불을 맞은 수정이 와르르르 무너졌다.

* * *

“…….”

황자와의 통신은 그걸로 끝이었다.

뭐 굳이 한다면 다시 수정을 재건할 수도 있겠으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공작은 진실로 오랜만에 맥동하는 자신의 심장이 낯설고 즐거웠다.

두근거린다는 감정.

이미 수정과 같이 굳어 버린 삶에서 이런 격랑이 일 수 있다니.

황자는 확실히.

“놀라운 분이 맞군요.”

공작이 수정으로 가득한 방, 홀로 앉아 꿈꾸는 듯 눈빛을 흐렸다.

허공을 긋는 황자의 존귀한 손가락을 보며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법사란 족속의 특성상,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북방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험준한 산맥부터 동북부의 요새를 전부 덮는 수정 성벽을 떠올렸다.

신비와 다를 바 없는 풍경.

자신의 진정한 염원이자 소원.

이를 어찌 알았을까 황자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욱 큰 설렘과 즐거움이 그의 몸을 감쌌고.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공작성 전체가 들썩이며 그와 함께 웃었다.

심장 어림에 작게 어렸던 형체.

그건 분명.

“마법을 넘은 무언가.”

평생 마법이라는 학문으로 신비의 그림자를 쫓았던 마법사는 처음으로 진정한 신비의 씨앗을 마주했고.

“동북부, 공작성에 거하는 이들은 들어라. 곧 변화가 있을 것이니. 모두 맡은 일에 힘써라. 거북이가 움직일 때가 왔다.”

공작성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울리길 잠시.

쿠르르릉, 공작성이 굉음을 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전선 너머 국가 연합 전체가 최고 경계령을 내리며 분주히 동부 전선을 주시했고.

제국의 권력자들이 다시금 술렁였다.

북부가 터져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동북부 공작성이 이동한단 소식에.

제국이 또 일렁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 늘었다.

아니, 여러 개가 늘었다.

* * *

공작과 만남이 끝난 이후.

동북부와 공작의 변할 운명이 떠오르기도 전.

막 산맥을 내려와 마련된 막사로 향할 때.

“황자 아르한과 발자크 드보르작 변경백은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들라!”

이제는 꽤 과거가 되어 버린, 11황자궁에서 마주했던 황제의 성지가 이번엔 북부의 막사를 찾았고.

“북부의 변화에 감동하여 발자크 드보르작의 변경백 지위를 유지할 것이며 기존 관리자를 두었던 모닥불을 불의 샘이라 새로이 명명. 그 관리 및 사용을 맡기니. 황자 아르한과 상의하여 올바르게 사용하길 명하며 혹여 삿된 유혹이 있다면 모두 뿌리칠 수 있도록 하라! 황제의 명령이다!”

한 가지 반가운 소식과.

“다음으로 황자 아르한은 이번 북부를 구한 공로로 예정보다 일찍 성인식을 치를 예정이니 서부 뜨거운 땅으로 가 제국과 황자의 지엄함을 보이도록 하라!”

한 가지 시련이 찾아왔다.

[하위 운명 시련, 열기, 갈증, 탈수, 사멸, 암살, 학살이 당신을 노립니다. 이전 쌓았던 운명 원한이 앞선 운명들을 더욱 거세게 키웁니다]

[중요 운명 악의와 신비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차가운 땅에 오래 머물렀으니 이번엔.

“더운 곳이라 마침 잘됐군.”

열기와 함정이 가득한 사막으로 갈 차례다.

귓가에 울리는 두근거림이 새로운 운명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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