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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61화 (61/200)

61화 동토에서 광야로 날아간 화살(火殺)

황제의 성지를 가져온 자들이 당당한 표정으로 나와 백작을 마주한 사이.

싸늘한 바람과 스산한 눈빛들이 그들을 잡아먹을 듯 몰아쳤다.

뻗대듯 자리에서 북부인들을 깔아 보던 신하들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춤거리던 때.

“그게 끝인가?”

“네, 네 그렇습니다. 성지에 적힌 명령은 이게 끝입니다.”

“전달 끝냈으면 꺼져라.”

단호한 축객령에 그들이 우물거리며 물러갔다.

아마 성지를 가져온 김에 환영을 바랐겠으나.

그딴 건 없다.

북부인 먹일 것도 없는데 중앙에서 잘 먹고 잘 잔 돼지 새끼들에겐 빵 한 쪼가리도 아깝다.

뒤룩뒤룩 찐 살을 추스르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아, 그리고.”

“네, 전하.”

“그 말 몇 마리 내놓고 가.”

“네?”

“마차도 있고 번갈아 타면 충분한데 왜 이렇게 말을 많이 끌고 다녀? 세금 낭비다. 내놔.”

“그, 그것이 중간에 쉴 만한 여관이 없습니다. 하여 말이 꼭 필요합니다.”

“황자의 명령으로 차출이다. 놓고 꺼져.”

슬며시 등에 건 거검을 잡으며 협박하니.

“옙! 놓고 물러나겠습니다!”

그제야 놈들이 질린 얼굴로 잘 먹인 말 몇 마리를 자리에 내놓곤 북부를 떠났다.

좀 걸으며 살을 빼라는 배려를 베풀었으니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도망가는 꼴이라니 무엄한 놈들.

내 심술 가득한 안색을 살피던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거래가 있었나 봅니다.”

“그런가 보군. 어떻게 흘러갔다고 보나?”

백작이 내 행동은 예측 못 해도 권력자들의 생태는 잘 알기에 물었다.

“폐하께서 신경을 써 주신 것이겠지요. 모닥불 전권을 주신 것부터 전하와 상의하여 일 처리를 하라는 뜻은요. 아마 예상하신 게 아닐까요. 아까 같은 일을?”

“그래, 뭐 마음껏 죽이라고 내리신 명령은 아니겠지만.”

발자크의 말대로였다.

그날 내 욕설에 황제께서 느낀 바가 많으셨나 보다.

과거 관리자들 머리통을 깨 죽인 것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예상했을 거다.

텅 빈 북부에 꼬일 벌레들은 당연지사.

황자의 성격이라면 분명 또 피를 볼 것이라고.

혹시 일어날 분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을 준 셈.

본래 황제의 명이라는 명분을 방패로 들어 외부의 간섭을 막아 내라는 뜻이었겠으나.

“이미 죽여 버린 덕에 면죄부로 쓰면 딱 맞겠군.”

이미 피를 잔뜩 본 후였다.

오히려 잘되었다.

“황제의 명대로 처리했다고 하면 되겠어. 방금 처리한 벌레들도, 나중에 처리할 벌레들도.”

“음. 거기까진 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방패를 쥐여 주었으면 사용하는 건 내 마음이다. 방패는 막는 데만 쓰는 게 아니야.”

“방패는 막는 데 써야지요. 그게 본래 쓰임새 아닙니까.”

“본래 쓰임새를 넘어 사용하는 게 전략이고 작전이다. 내 방패는 공격용 방패야. 적들의 목뼈와 머리통을 부수기 위한 용도이지.”

“공격용 방패도 있나요? 전하?”

“가로등, 방패로 맞아 본 적 있나?”

“아직은요. 그리고 맞고 싶지도 않은걸요.”

“그거 엄청 아프다. 나중에 한번 맛 좀 봐.”

“저 마법사인데요?”

“마법사라고 평생 근접전이 없을까. 생각보다 매울 거다.”

엄연한 사실에 백작과 안드레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손에 훌륭한 무기가 들어왔는데 그냥 둘 수 없지. 백작, 무슨 뜻인지 알겠지.”

“방패를 날카롭게 갈아 두겠나이다.”

“흡족하다.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백작의 선선한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얼굴에 주름이 더 늘겠구나 싶었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나이 들어 생기는 주름은 막을 수 없는 법.

그러다 문득.

오히려 좋아하시지 않을까?

황제가 알면 기겁할 생각도 해 보았다.

어전에서 욕을 걸쭉하게 뱉어냈던 날 입가에 피었던 미소와 만족스럽다는 듯 더해 보라던 말을 기억한다.

어쩌면.

황제가 더 원할지도?

그래 분명 그럴 거다.

아들 된 도리로서 아버지를 실망시킬 순 없지.

반드시 때려 죽이리라.

“전하?”

“괜찮으십니까……?”

터져 나온 살기 어린 웃음에 주변에 선 자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처럼 날씨가 춥지 않건만 왜들 저러는지.

“요즘 제대로들 못 챙겨 먹었나? 왜들 몸을 떨어? 추워? 북부에 있는 게 며칠인데 아직 적응들을 못 했나.”

“아, 아닙니다. 그냥, 그냥 좀. 추위가 아니라 다른 거에 적응을 못 해서요.”

“전하께서 웃으시길래요.”

“왜, 평민. 내가 웃으면 몸이 떨리는 이유라도 있나?”

“진정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뭐 고귀한 웃음을 들으면 몸이 떨릴 만하지.”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놈이 무언가를 대답하려다.

솔이 그림자로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억 신음을 뱉으며 말을 멈추었다.

그 꼴들이 한심해 고개를 돌리려니.

“그야.”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바이올렛.

그녀가 반듯한 얼굴로.

“전하의 웅대한 뜻이 기대되어서 몸을 떠는 것 아닐런지요.”

“…….”

“…아.”

“음.”

“딸아?”

잔잔한 개소리를 뱉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고.

그녀의 세 오라비와 아버지가 망연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입을 벙긋벙긋거리는 동안.

“맞아, 옳은 말이다. 아주 훌륭한 답이었다. 만족스럽구나, 영애.”

“황송합니다.”

내가 백작을 향해 짓궂은 미소를 날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내 탓하지 마라,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딸의 광기는 내가 관여한 게 아니니 아비가 알아서 해야지.

백작의 믿을 수 없다는 눈빛과 바이올렛의 눈에 어려있 는 동정과 위로가 찝찝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향한 적대와 두려움은 어찌 대하는지 알았으나 저런 위로와 동정은 낯설어 껄끄러웠다.

뭔가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황자를 끝없는 사랑과 위로로 보듬어 주겠다, 그런 마음인 건가?

그건 어머니 하나로도 충분-.

“아, 백작.”

“네, 전하.”

“내가 서부로 떠나고 나면 황궁에 계신 어머니와 동생 좀 신경 쓰도록. 황자궁을 떠난 지가 오래라 미처 돌보질 못하고 있군.”

“차라리 한번 들리심이 어떨지요. 서부로 떠나시면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요.”

백작의 제안에 고개를 흔들었다.

“보면 무엇하나. 어차피 슬픈 눈동자 두 쌍이나 마주할 텐데. 내가 가면 오히려 좋다고 둘을 핍박하겠지.”

“…알겠습니다. 심려 없이 돌보겠나이다.”

“황후 혼자일까.”

내 나지막한 물음에 백작이 미간을 찡그리며 곰곰이 생각하길 잠시.

“다들 물러가라.”

주변 가득하던 북부 기사들과 황실부터 따라온 자들을 물리곤.

“황후 마마와 폐하의 거래라 예상하십니까. 불의 샘 전권을 준 대신 전하를 서부로 보내는 조건으로요.”

“우선은. 백작의 의견은 어때. 황후 홀로 황제를 압박하여 이루어 낸 거래일까.”

“홀로는 아닐 것입니다.”

“홀로는 아니다?”

“네, 전하가 세우신 북부의 공로는 작은 것이 아니며 황손의 성인식은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요. 황후 마마의 개입은 당연하며 예상키로는 동남부 공작, 더 나아가 대신들의 입김이 있었겠군요.”

“어찌 그들을 살살 끌어낼 수 있겠나. 뜨거운 사막을 정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돌아왔을 때 날카로운 방패로 놈들의 머리통을 쪼개고자 하는데 말이야.”

“바빠지겠군요.”

“고작 그 정도로? 아직 시킬 일이 많이 남았는데.”

“많이… 말씀입니까?”

“그래,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테니. 우선.”

북부를 정상화할 것, 황비와 동생을 돌볼 것, 시선을 끌지 않는 선에서. 북부에 숟가락 얹으려는 놈들 머리통 쪼개버릴 것, 황후와 관련된 세력을 파악해 둘 것, 아, 참 동북부 공작과 공동 전선 준비할 것, 그 와중에도 수련에 힘써 신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할 것, 로이스 가와 협업하여 북부에 새로운 사업을 관리 감독할 것.

끝나지 않는 말에 백작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고.

“왜.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내가 없는 동안 편하게 쉬려 한 것은 아니지? 설마.”

“후우, 열심히, 열심히 살아야지요.”

백작이 이제는 거의 포기한 듯 낮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 살아야지 치열하게. 우리가 힘들어야 제국이 편한 법이야.”

예상치 못한 말에 백작이 묘한 표정 지었다.

그저 과거 황제의 대역을 하며 깨달은 사실 중 하나였다.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편함마저 누리는 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제국은 안에서부터 허물어졌다.

결과를 보았기에 우선 나부터 편하게 지낼 생각이 없다.

나를 괴롭히고 내 주변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 제국 전체를 괴롭히고 이내.

대륙을 괴롭힐 생각이었다.

물론 딸려 올 사람들의 경악과 두려움은 덤.

내가 뿜어내는 광기에 놀라 소스라치는 얼굴들은 언제나 즐겁고 짜릿하리라.

아아, 갑자기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얄궂다.

괴롭힐 놈들이 필요했다.

서부엔 아직 광기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맑은 이가 가득할 거다.

신선하고 맑은 정신에 광기 한 방울을 떨어뜨릴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충만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쯤 떠나시렵니까.”

백작이 막 하늘 꼭대기로 향하는 해를 따라 고개를 끌어올리며 넌지시 물었다.

나 또한 덩달아 어느새 맑아진 하늘과 어울리지 않게 떨어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넌지시 답했다.

“석양이 질 때쯤에는 눈이 아닌 모래를 맞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바로 가십니까 좀 더 있으시지 않고요.”

“그래야지. 북부의 추위는 맘껏 맛보았으니.”

“강녕하십시오.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래, 그러도록 하지.”

“눈 쌓이는 북부는 언제까지고 전하께서 오실 길을 닦아 놓겠나이다.”

“그거 괜찮은 인사로군.”

잠시 코끝에 떨어지는 눈을 느끼며 열차 지붕에 올라 처음 북부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 오래전도 아니건만 어느새 아득히 멀어진 기억.

콧잔등에 떨어지던 차가운 눈송이만은 선명했기에.

올 때와 같은 작별 인사가 기꺼워 오랜만에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발자크 백작, 북부와 자네는 변하지 않는 순수로 남아 있으라. 내 첫 발자국은 하얀 눈밭에 선명히 찍혀 있으니. 이후 걸어갈 길도 그러했으면 좋겠군.”

“북부는 전하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래, 간지러운 말은 그만하자고.”

나와 백작이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 * *

이후 준비는 간단했다.

솔과 안드레의 작은 불만이 있었으나 황자가 이를 묵살하곤 급히 짐을 꾸렸고.

“소피아.”

“네, 전하.”

“너는 북부에 남아 백작을 도와라.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많을 거다. 사업을 계획하고 어떻게 일으키는지 깨우쳐라. 그 과정에서 욕심 많은 자들, 구두쇠 같은 아비와 드잡이질도 하고.”

“…….”

“아쉬우냐.”

“아쉬우나 명령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돈놀이하는 자들에게 지지 마라. 그때가 되면 좀 더 뚜렷해지겠지.”

“네.”

“혹여 육체를 강화할 생각은 마라.”

황자의 말에 내심을 들켰다는 듯 소피아가 움찔했다.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못 견딜까도 아니다. 아직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모래에 묻혀 지워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감이 지워진다니요?”

“그래, 또한 북부는 널 필요로 한다. 어차피 돌아올 땅이니 최선을 다해 돕고 존재감을 키워라. 네 방식대로, 내가 널 다시 찾을 때까지.”

“네, 전하. 최선을 다해 돕겠어요. 그러니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러마.”

소피아가 억지로 눈물을 참아가며 인사를 올린 뒤.

“가자, 서부로.”

말 위에 올라탄 황자가 북부인들에게 간단히 눈인사를 보내고는 천천히 멀어졌다.

참 정도 없지.

정렬한 북부인들이 예를 표하는 중에도 황자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솔과 안드레가 훌쩍이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 뿐.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과 가리어지지 않은 푸릇푸릇한 풀이 공존하는 기묘한 풍경처럼.

황자의 등장과 퇴장은 북부인들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귀하디귀하며, 가장 미쳤고, 뜨거우며 잔혹했고, 심지어 냉혹하면서도 따뜻하기까지 했던 우리의 전하.

도저히 같이 떠올리기 힘든 단어들이 북부인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자 아르한은 그저 고요히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초원과 설원이 뒤섞인 지평선의 점이 되어 멀어졌다.

다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아쉬워 멀리 바라보고만 있을 때.

“백작님.”

“응? 무슨 일이냐.”

“그,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 누구로부터. 전하가 남기셨나?”

“그게, 아가씨께서.”

순간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불안감에 아버지를 비롯한 세 오라비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발자크가 주섬주섬 편지를 꺼내 드는 동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네 개의 머리통, 네 쌍의 눈동자가 편지 내용을 확인하곤 일제히 각자 방황했다.

당황, 공포, 분노, 걱정.

표정을 달랐으나 비슷한 감정이 실린 얼굴들.

발자크 백작이 쥔 편지엔.

-환상보다 더 지독한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따릅니다. 북부의 일원으로 부끄럼 없이 보필하도록 할 테니 심려 놓으세요. 존경하는 아버지의 딸 바이올렛이.

추신, 성인식 전까지 돌아오지 못할까 미리 선물을 하나 챙겼습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아, 안 된다. 바이올렛, 안 돼!”

백작이 다급히 편지를 구기며 딸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았으나.

이미 황자는 첫눈처럼 사라진 뒤.

“아버지! 따라가야 합니다!”

“가서 바이올렛을 데려와야 합니다!”

“아버지! 막내를 보내선 안 됩니다!”

세 아들이 아끼는 여동생을 데려오자 아우성쳤으나.

“누가 전하와 담판을 지을 테냐. 첫째? 둘째? 셋째?”

“…….”

“아서라. 괜히 건드렸다간 너희도 따라가게 될 거다. 나도 구해 줄 수 없어 그때는. 그저 바이올렛이 성장하여 돌아오길 바랄 수밖에.”

백작의 스산한 경고에 오라비들도 움찔 몸을 떨었다.

그가 아련한 눈으로 올바르기만 하던 딸의 눈동자에 떠오른 어딘가 어긋난 광망을 떠올리고는.

“아버지, 딸을 보우해 주소서.”

지금은 북부의 수호기사가 된 루카르를 향해 아주 깊이, 딸의 신체 및 정신건강을 위해 아주 깊이 기도를 올렸다.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삶이라는 게 고단했다.

* * *

제국의 네 방향은 각각 다른 이유로 막혀 있다.

북부는 오랜 한파와 끝자락 산맥에 의해.

동부는 연합 국가에 의해, 남부는 엘프라 불리는 원주민들의 거주지인 대수림으로 인해.

그중에서도 서부는 끝없는 사막, 광야라 부르는 불모지로 가로막혀 있다.

어찌 보면 한파와 눈보라가 끝없이 몰아치는 북부와는 정반대.

서부의 낮은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모래바람으로 한없이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었고.

밤은 낮과 반대로 깨질 듯한 한기 속 밤하늘 가득한 별이 꿈결같이 펼쳐진다 했다.

며칠간 황자 일행은 그저 말을 몰아 서부로 향했다.

일행도 황자도 앞으로의 거취를 묻거나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자를 믿기 때문이기도 했고 물어도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

황자도 이들이 자신을 믿고 따라올 것을 알기에 말을 늘이지 않았다.

간혹 말 위에서 고고히 눈을 감고 안을 관조할 뿐.

눈이 드문드문 자취를 감출 만큼 북부에서 멀리 떨어졌을 즈음.

“푸하! 전하! 신 바이올렛 드보르작! 전하의 뒤를 따라왔나이다!”

“끼야아아악!”

“우어억!”

잠깐의 소란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했고.

황자는 귀찮다는 듯 그녀를 쫓아내려 했으나.

“북부의 대표로 주군의 곁에 남기로 했습니다. 반드시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용맹함과 위대함을 제가 직접 적어 후세에 남기겠습니다!”

간절한 외침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가져온 넉넉한 돈과 선물이라며 바친 편의품들이 황자의 마음을 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새로운 일행이 합류한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와, 덥네요.”

“어후, 이거 옷을 벗어야겠는데요?”

“전하, 외투를 주시지요.”

바람이 뜨거워졌다.

일행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을 즈음에는 드디어 서부에 도착하여 은은히 모래가 흐르는 광야 초입을 앞두었다.

이때부턴 햇볕의 강도가 달라졌다.

피부가 따갑다 못해 익을 정도.

바이올렛이 가져온 냉기가 흐르는 망토를 둘러 몸을 가리지 않았다면 꽤 힘겨웠을 거다.

물론.

“내 것은 있으니 알아서들 나눠 입어라.”

“…어, 와우.”

“역시 전하의 혜안은 놀라우십니다.”

“바이올렛 경?”

황자는 홀로 자신을 보호할 망토를 챙겨 왔고 그를 보며 바이올렛이 급히 수첩에 무언갈 적었다.

거기엔 황자의 놀라운 준비성에 대한 찬양이 쓰여 있었다.

이기심은?

솔이 볼멘소리를 뱉어 보려 했으나.

뒤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알프레드의 눈동자를 마주하곤 불만을 침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광야 초입에 들어선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뜨거운 태양과의 드잡이질이 슬슬 지겨워질 무렵.

바짝 마른 땅에 말발굽이 찍힐 때마다 피어나는 모래 먼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리던 때.

“서부에 왜 왔는지 슬슬 알려 주어야겠지.”

황자가 입을 열었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바이올렛이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황자의 깨끗한 중저음이 광야에 퍼졌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셨으니 황자는 성인식을 맞이하여 서부-.”

저 먼 지평선, 우뚝우뚝 솟은 암석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끌길 잠깐.

“홍련 족의 오랜 비밀과 보물을 찾아내어 파괴하고 그들에 대한 제국의 지배권을 다시 공고히 하라. 황가의 도움 없이.”

이글이글, 올라오는 아지랑이와 황자의 말이 뒤섞여 시야를 어지럽혔다.

곧 저 멀리 뿌옇게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와 더불어 험악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황자가 군데군데 얼음이 언 활을 뽑아 태양을 향해 겨누니.

불꽃이 올올이 휘감기며 살을 형성했다.

태양에게서 끝자락을 빌려온 듯 이글거리는 화살(火虄)을 허공에 쏘아 내자.

곧 거센 폭발과 함께 몰려오던 도적 떼가 휩쓸렸고.

“가자 서부에서 열리는 첫 사냥이다.”

먼저 말을 달렸다.

바이올렛은 그 순간을 이리 적었다.

존귀한 황자께서 열기와 광기를 버무려 쏘았고, 서부의 도적들은 처음으로 자신들보다 잔혹하고 광폭한 자를 만났다.

건조한 모래바람에 축축한 피가 뒤섞였다.

서부에 도착한 존귀한 황자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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