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62화 (62/200)

62화 사막에 내리는 검은 비

공격당하기 먼저 공격하라.

한 전사가 현학적으로 표현하길 선빵필승.

그야말로 싸움의 기본이자 인생의 진리.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

“이랴!”

단단하며 건조한 땅과 말발굽이 부딪힐 때마다 성마른 울림이 귓가를 울렸다.

황성에서 품종 좋은 말을 잘 먹여 키웠는지 광야까지 오는 동안에도 녀석은 단 한 번도 지치지 않았다.

탄탄한 근육이 순식간에 땅을 밀어내자 모래를 머금은 머릿결이 뻣뻣하게 요동쳤다.

쨍한 햇살 아래, 일렁이는 아지랑이 속을 찢으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

“오, 오지마! 이 미친놈아!”

“맞는 말이다! 처맞는 말!”

막 도망치던 마적의 몸을 거검으로 갈랐다.

나를 피해 이리저리 흩어 도망치는 마적 떼.

벌써 몇이더라.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저 마적 떼의 흔적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면 그쪽을 향해 달렸다.

후끈후끈 치미는 열기와 눈을 찌르는 태양이 나를 이끌었다.

아니, 그냥 뜨겁고 번쩍이는 방향을 따라 달렸다.

그러면서.

“크아아악!”

“자, 잠깐! 우린 공격하지 않았잖아!”

보이는 마적 놈들을 모조리 베어 죽였다.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어도, 그저 관찰만 했어도 먼저 공격했다.

선빵필승.

상대가 때릴 생각이 없어도 내가 먼저 때린다.

보이면 때린다, 아니 죽인다.

이유는? 그냥 눈에 거슬리니까.

제국 땅에서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 살아가는 놈들에게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언젠간 공격할 거잖아. 나 말고 다른 이들을.”

“그, 그건-.”

푸화학!

놈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머리를 쪼갰다.

튀어 오르는 피에 강렬한 빛에 달아올랐던 시야가 벌겋게 식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열이 가득한 숨을 뱉어 댔다.

그러나 공기가 뜨거워 금세 달아올랐고 옆구리에 매달아 놓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얼굴에 물을 들이붓고서야 조금은 열이 가라앉았다.

번뜩이는 눈으로 끝없는 광야를 노려볼 때.

“저, 전하.”

“무슨 일이냐.”

“조금 열을 식히시는 게 어떠실지요?”

“맞습니다. 많이 가빠 보입니다.”

솔과 알프레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의 안부를 살피는 동안.

“평민! 영애! 눈에 보이는 적이 더 없는가!”

“시야에 보이는 것들은 없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안드레와 바이올렛에게 더 갈라 죽일 도적이 없는지 확인했다.

바이올렛은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원통형 망원경을 길게 뽑아 광야의 풍경을 다시 살피길 잠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안드레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솔이 우리 셋을 보며 북부에 간 뒤로 다들 이상해졌다며 몸을 떨었고.

“가로등, 우리가 무서우냐?”

“아니요. 무섭다기보단 걱정되어서요.”

“그래, 걱정되겠지. 하지만 놈들이 향하는 방향이 어딘지를 알면 그리 말하지 못할 게다.”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길 잠시.

바이올렛이 망원경을 접어 넣으며 씹어뱉듯.

“북부, 놈들의 목적지는 북부예요.”

이리 날뛰는 이유를 뱉었다.

놈들이 우리를 보고도 달려들지 않은 이유.

“뜨거운 광야에서 힘을 빼면 북부에 가서 제대로 약탈하지 못하니까요. 그런 이유였겠죠.”

그녀의 쓰린 말이 모래에 뒤섞여 까끌거렸다.

그제야 솔이 나의 분노의 이유를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가로등.”

“네, 전하.”

“나에게서 명분과 이유를 찾지 마라. 과거 그랬듯 앞으로도. 그게 너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야.”

“네.”

솔의 얼굴에 어린 그림자를 모른 척하며 다시 말을 몰았다.

광야에 들어온 지 일주일.

나는 마적들을 보이는 족족, 찾아가서까지 죽였다.

그럴 때마다 변하는 운명이 모래와 뒤섞여 떠올랐다.

북부에선 전 재산을 빼앗기고 죽었을 이들이, 부모를 잃고 팔려 나갔을 아이들이 삶을 지켰고.

서부에선 피가 흘러 모래가 굳었다.

붉은 기를 머금은 모래를 보며 만날 홍련을 떠올렸다.

과거 사막엔 다섯 부족이 존재했다.

홍, 백, 황, 녹, 청.

홍련 부족은 그중 하나.

제국이 세워지고도 건국제는 그들 스스로 광야에서 자치하도록 두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하나씩 사라져갔다.

어느 부족이 처음 사라졌는지는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며 하나씩, 하나씩.

사막 가득하던 오색 부족은 점차 모래 속으로 퇴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홍련 또한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이맘때쯤.

전생엔 다른 황손들과 귀족들의 잔혹한 학살극이 있었다 기록된 바.

이제는 나의 손에 넘어온 운명.

[하위 운명 학살이 피를 먹고 더욱 자라납니다]

작아지는 북부의 피해와 반대로 서부의 학살은 점점 크기를 키워 가니.

오싹한 광기가 피를 타고 맥동했다.

모래바람이 사그락거리며 쨍하니 멀어 가던 시야를 가렸다.

“전하! 모래폭풍입니다!”

“저 멀리 작은 모래성이 있으니 그쪽으로 피하시지요!”

알프레드와 바이올렛이 봐두었던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30분 거리, 깎아지른 절벽 아래 야트막한 벽을 쌓아 형성된 성.

흔히 서부 초입에는 모래성이라 불리는 작은 생활 구역들이 존재했다.

서부로 들어가는 광야가 너무나도 넓고 사람들은 수없이 몰려오기에 이러한 모래성을 쉬이 발견할 수 있었고.

지금 알프레드와 바이올렛이 가자는 곳도 그중 하나.

허나.

[장소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운명 암살과 악의가 고여 있습니다. 운명 행운과 구사일생이 당신의 경로를 바꾸려 합니다]

내 눈에는 평범한 쉼터가 아님이 보였다.

행운과 구사일생이 지금 부는 모래폭풍을 불러왔는가.

경로를 바꾼다라.

본디 우리는 저 성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원래 어디로 갈 생각이었지, 알프레드.”

“첫 바위성으로 가려 했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을 듯합니다.”

알프레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입술이 뒤틀렸다.

그러니까 살려면 저 암살과 악의가 가득한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자.”

얼마든지.

곧 나와 일행들이 짙은 모래바람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 모래가 들어갔을 리 없건만 사각사각사각 껄끄러운 감각이 정수리와 관자놀이에 맴돌았다.

* * *

황자 일행이 향한 모래성의 문은 폭풍 때문인지 굳건히 닫혀 있었다.

쾅쾅쾅.

안드레가 거칠게 나무문을 두드리며.

“이봐요! 이러다 사람 모래에 파묻혀 죽겠어! 문 좀 열어 봐! 이봐!”

성급하게 사람을 부르길 한참.

“아, 거 좀 천천히 부르쇼.”

성문 한쪽, 야트막하게 뚫린 또 다른 문에서 눈구멍이 열리더니 눈살을 잔뜩 찌푸린 사내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쳤다.

그리곤 일행의 행색을 살피길 잠시.

“사람이 아니라 시체를 받을 생각인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지금 모래폭풍에 쫓겨 쉴 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가엾지도 않소?”

안드레가 이번엔 동정심에 호소해 보려 했으나.

찌푸린 살 속 감추어진 눈은 그저 일행의 행색을 샅샅이 살필 뿐이었다.

황자의 백금발에 시선이 머무르길 잠깐.

“어디서 오셨지? 익숙한 행색들이 아닌데 제국에서 오셨나 보군?”

“맞아요. 원하면 신분증도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신분증? 여긴 제국의 법이 통하지 않아. 제국 도시가 아닌 광야의 모래성이거든.”

“제국 땅에서 제국 법이 통하지 않는다니요? 그럼 어떻게 들어가는데요.”

“그거야 그쪽들이 생각해 낼 문제이지. 아닌가?”

“아니, 약 올리는 거예요. 뭐예요?”

솔과 안드레가 문지기를 상대로 입씨름을 하는 모습에.

“이거면 될까요?”

바이올렛이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흔들었고.

“아, 통행증이 있으셨구만. 잠깐 기다리쇼. 문 열어 드릴게.”

그제야 문지기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먼저 돈을 주어야 문을 열어준다는 뜻.

바이올렛이 그에게 은화를 넘겨주려 할 때.

덥썩.

황자가 눈구멍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상대의 손을 붙잡고선.

확 끌어당겼고.

“무엄하다.”

살벌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문지기가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

팔을 잘랐다.

터지는 비명과 피.

돈을 받는다는 태도가 괘씸했던 걸까.

울리는 비명과 동시에 알프레드가 황자가 선 문 옆으로 검을 찔러넣었고.

신음과 함께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황자의 옆구리, 슬며시 머리를 내민 날붙이가 내뿜는 살기가 시렸다.

곧 비명도 신음도 사라졌고.

침묵과 사그락거리는 모래 소리만이 문 앞을 맴돌았다.

아니, 발걸음 소리인가.

황자가 손에든 잘린 팔의 옷을 벗겨 내자.

검푸르게 올라온 핏줄이 가득했다.

툭툭 떨어지는 피가 모래 사이에 스며들며 역한 냄새를 풍겼다.

독살을 위한 암수.

“어쌔신……?”

바이올렛이 그제야 사막의 오랜 전설이자 제국에서도 악명 높은 광야의 암살자들을 떠올리곤 입술을 깨물었고.

“영애, 세상은 책과 같이 단순한 게 아니다.”

황자의 타박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삶과 소설은 달랐다.

소설 속에선 돈만 쥐여 주면 되는 지나가는 문지기가 인생에선 주인공의 생명을 위협할 암살자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법.

그리고.

“모두 한발 물러나라.”

인생에선 주인공이 암살자들보다 더 미치고 잔혹할 수도 있는 법.

지금 황자처럼 말이다.

그가 비죽비죽 사납게 웃으며 거검을 들어 올리자.

와르르르릉!

브레이커가 불티를 휘날리며 덩달아 울었다.

두 개의 고리가 울리며 치달은 불이 거검을 휘감았고.

타타타탁! 세밀한 폭발이 불꽃 속에 별 무리처럼 어렸다.

황자가 지체할 것 없다는 듯.

“하압!”

기합을 내지르며 거검을 내리긋자.

브레이커가 거칠게 회전하며 문을 잘라냈고 안에서부터 터져 나온 불과 폭발이 거센 소리를 내며.

모래성의 정문 일부를 부수었다.

불붙은 나뭇조각들과 벌겋게 달아오른 쇳조각들이 비산하는 가운데.

황자가 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화려하며 고고한 발걸음에.

“으윽.”

“죽-!”

막 무기를 들고 덤비려던 놈들이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참으로 이상했다.

분명 불과 폭발, 나무와 철이 적들의 몸을 찢어내는 사이.

황자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으니.

마치 주변 것들이 알아서 피해 가는 듯했다.

곧 그의 옆에서 나타난 안드레와 바이올렛이 부상을 감내하며 달려들려던 암살자들의 가슴팍에 검을 박아 넣었고.

잠시 자리를 피해 재정비하려던 놈들은 솔의 그림자에 휩싸여 목이 꺾였다.

벌어지는 싸움 사이.

황자가 찬찬히 모래성 내부를 살폈다.

누런 벽돌로 지어진 집과 건물들.

바람이 거세어 그런지 가장 높은 곳이 3층 가량.

모래폭풍이 불건만 열린 창문 가득.

“…….”

묵묵히 외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득했다.

싸움과 살인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그들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입고 있는 옷과 손에든 물건들은 평범한 일상의 그것.

주변은 방금까지도 물건을 팔고 사고 활발하게 움직였던 듯 생활감이 가득했으나.

싸늘하게 굳은 얼굴들이 물 위에 고인 기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무감정한 눈빛들이 유리알과 같아 괴상했다.

물론.

“왜? 너무 쉽게 들켜서 놀랐나?”

황자의 타오르는 눈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의 물음에 사람들이 일제히 손에 쥔 물건들을 놓으며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드레와 솔, 바이올렛이 긴장하며 사방을 경계했다.

성 전체가 암살자로 가득한 걸까.

“이게 말이 돼?”

“숫자가 너무 많은데요?”

안드레와 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는 동안.

“어쌔신은 혈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방금 어쌔신이 독을 사용했으니 다들 독에 유의하세요.”

바이올렛이 검을 들어 올리며 경고했고.

“내가 찾아낸 사실 가지고 아주 자랑스럽게도 떠드는군, 영애.”

황자가 비아냥거리며 태평하게 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전하!”

“잠시만요.”

“위험합니다.”

솔과 안드레, 바이올렛이 황자를 걱정하며 주위에 섰으나.

“방해다. 비켜라.”

그들을 뒤로 물리곤 이젠 석상처럼 굳어 있는 암살자들 사이로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옮기는 발소리가 흐르는 모래바람 소리와 뒤섞여 건조하게 울리는 동안.

그와 일행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말간 눈동자들로 황자를 바라만 볼 뿐.

끊어지기 직전의 현처럼 팽팽한 공기가 거리를 채웠고 모두의 얼굴에 서서히 살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자의 태도는 한결같이 고고할 뿐.

두려움 한 점 없는 표정으로 그들 사이를 걸었다.

분명 그를 잡기 위해 모인 이들일 텐데.

단번에 모든 분위기가 황자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턱.

그가 거리 중앙에 멈춰서서는.

“뭐해? 설마 겁먹었나? 어쌔신들이?”

비뚜름히 입술을 끌어 올리며 뱉은 말에.

진득한 살기가 바닥에 짙게 깔렸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분위기.

발화점을 넘긴 건.

“덤벼라. 모래 속에서 사람 죽이는 법이나 연구하는 음침한 비렁뱅이들아. 너희들의 돈주머니가 여기 있다.”

황자의 말.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뱉은 모욕적인 말에 놈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히며 달려들었고.

덩달아 황자의 발끝에서 튀어 오른 불이 순식간에 치달아 온몸에 휘감았다.

“알프레드, 덮어라. 가로등, 어둡게.”

황자의 지시와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지금껏 따라 들어오지 않았던 알프레드가 밖에서 모래폭풍과 함께 몰아쳤다.

바람에 실린 것은 단순한 모래가 아닌 그의 능력인 사철.

진회색 바람이 자욱하게 성을 덮었고.

놈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어둑해진 거리를 따라 펼쳐진 솔의 그림자가 어둠을 더했다.

“영애는 솔을 보호하라. 평민 옆에 따라붙어라. 빠른 검이 필요하다.”

바이올렛이 솔 옆에 황자는 안드레를 끌고 놈들을 향해 달렸다.

거검과 불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찔러오는 검과 날아오는 단검들을 넓은 검 면으로 막아 낸 뒤, 치워 낸 사이 안드레의 검이 빛살처럼 튀어나와 적들을 갈랐다.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퍼엉, 발끝에서 폭발을 뿜어낸 황자가 짓쳐 들어와 거검을 휘두르니.

어쌔신들이 무엇을 해 보기 전에 피를 흩뿌렸다.

본디 암살이란 기습에 가장 큰 의미가 있는 법.

이미 힘 싸움이 되어 버린 이상.

“평민, 밟아라.”

황자와 안드레의 합은 꽤 훌륭했다.

검 옆면에 안드레를 올린 황자가 그대로 공중으로 집어 던졌고.

자신 또한 발끝에서 불과 폭발을 뿜어내며 떠올랐다.

올라선 곳은 가장 높은 3층 건물의 지붕.

사방에서 몰려드는 어쌔신들의 말간 눈동자가 흐릿한 풍경 속에서 놈들의 존재를 알렸다.

검을 찌르는 놈의 허리를 통째로 베어 내며 그 아래 솟아나는 놈을 발로 눌러 태웠고.

그대로 한 바퀴 도는 사이.

황자의 거검이 달려드는 모든 적을 향해 부채꼴로 불을 뿜어내는 동안.

몸을 낮춘 안드레는 등을 맞댄 채 수십 번의 찌르기를 한 호흡 만에 펼쳤다.

우수수수, 달려들던 적들이 일제히 피를 흩뿌리며 떨어져 나갔다.

허나 둘의 합이 잘 맞는다고 해도 숫자에서 밀리니.

사방이 적이요 암기.

“흐읍!”

황자가 발을 크게 구르자 퍼엉, 지붕이 터져 나가며 둘의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검과 창, 암기들이 다양했다.

떨어져 내리며 아래에 있던 어쌔신들을 도륙 낸 둘이 이번엔 건물 바닥을 연속으로 깨며 놈들과 사투를 벌였다.

황자의 웃음과 안드레의 숨 참는 호흡이 연이어 들려왔다.

무너진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적들과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들이 금세 주변을 메웠고.

“평민, 몸을 움츠려라.”

황자의 눈이 벌겋게 빛난다 싶더니.

손을 하늘로 뻗자.

두 번째 심장 초적염이 연이어 크게 폭발했다.

번쩍이는 주황빛 폭염에 눈이 아팠다.

시야의 어린 불꽃이 사라지자.

건물이 통째로 날아간 듯 하늘이 훤히 트였다.

그러나 아직 땅을 타고 몰려오던 적들이 꽤 남았다.

황자가 일으킨 폭발에서 살아남은 놈들이 정신을 차리곤 사방을 둘러싸니.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안드레가 호흡을 멈추길 잠깐.

근육이 꿈틀거리며 약동하기 시작.

스스스슷, 얕은 숨을 나누어 뱉어 내는 사이.

안드레의 검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분명 강철로 이루어진 검이건만 마치 나뭇가지와 같이 휘어지며 적들의 급소를 노리니.

그렇게 한 호흡을 나누어 수십 번의 검격을 휘두른 안드레가.

벌게진 얼굴로 깊은숨을 내쉬자.

주변엔 구멍 뚫린 시체만이 가득했다.

“훌륭한 검이군. 노병의 검인가.”

“스승님의 유지를 잇고 있습니다.”

안드레의 결의 어린 눈빛에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둘의 무력에 질린 것일까.

주변이 고요했다.

좀 떨어진 곳 알프레드와 바이올렛, 솔이 위치한 자리에서 싸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합류하자.”

“따르겠습니다.”

황자와 안드레가 다시 거리로 발을 디뎠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건물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 이들이 황자와 안드레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쯧.”

귀찮다는 듯 혀를 찬 황자가.

“평민, 알아서 따라와라.”

“네? 전하-.”

안드레의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거검을 가로로 세우곤 발끝 폭염과 적염을 잔뜩 모아 땅을 박찬 순간.

소리와 풍경이 길게 늘어졌다.

에스키모를 상대했을 때보다 더욱 거센 불이 거리 전체를 휩쓸었고.

브레이커가 흉하게 울며 건물 전체에 기다란 자상을 남겼다.

타탁, 타탁,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인 거리 끝.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듯 거칠게 우는 브레이커를 늘어뜨린 황자의 실루엣이 어두웠다.

흥분한 검과는 반대로 황자의 자태는 침착하여 잔잔했다.

뒤늦게 휘몰아치는 후폭풍에 그제야 그의 머릿결과 몸에 감싼 불이 화르르륵, 춤을 추었다.

어둑하게 그림자가 내려앉은 얼굴, 광기와 살기 가득한 진홍색 눈동자가 자욱하니.

그런 모습마저 아름답고 고귀하여 사람을 빨아들여 파괴하는 광화 같았다.

찬찬히 내뱉는 숨결이 눅진하여 보는 이들의 심장을 울렸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드레가.

“후우, 점점 괴물이 되어 가십니다.”

솔직하게 감탄을 토해 냈다.

척박하고 추웠던 북부에서의 싸움은 모두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황자의 발전은 특별했다.

검만으로 나누는 기교에선 이길지 몰라도 저 능력을 상대로 목숨을 겨눈다?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 검의 기교 또한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

안드레가 황자의 등에 어울리는 자가 되겠다고 굳건히 결심할 때.

끄아악-!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낯선 목소리, 황자와 안드레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방향 또한 전혀 달랐다.

문득.

“어? 왜 이렇게 어둡죠?”

지금 황자의 얼굴과 주변에 어린 그림자가 단순히 알프레드의 사철과 솔의 그림자 때문이 아님을 느꼈다.

그나마 방금까진 옅은 햇볕이 남아 있었건만.

그의 의문에 황자가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고.

안드레도 덩달아 하늘을 바라보곤 멍하니 있길 잠깐.

“…먹구름?”

간신히 맞는 단어를 뱉어냈다.

이 건조한 광야에서 볼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풍경에 잠시 단어를 떠올리는 게 늦었다.

“그래, 먹구름이군.”

그가 급히 고개를 내려 황자를 바라보자.

황자가 그대로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희게 미소 지었다.

그가 뚫어질 듯 하늘을 바라보다 툭.

“검은 비다.”

한마디를 뱉음과 동시에.

말을 따라 툭, 툭, 툭 검은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졌고.

모래성 위로 검은 비가 내렸다.

처음엔 방울방울 가늘게 떨어지던 비가.

곧 쏴아아, 폭우로 변해 쏟아졌고.

주변 가득한 시체와 피, 불꽃을 덮으며 까맣게 물들이는 사이.

암살자들이 질러 대는 비명이 빗소리에 섞여 잡음처럼 끊겨 들렸다.

거멓게 덮여 가는 세상 속에서.

“악마가 왔구나.”

하얗게 빛나는 황자의 웃음이 섬찟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