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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63화 (63/200)

63화 새로운 불, 암화(暗火)

검은 비, 먼 훗날 마유(魔油)라 불리는 이치에 벗어난 빗줄기는.

처음 서부에서 등장했다.

본디 물이 없어 사시사철 갈증에 시달리는 사막 하늘 위를 채운 시커먼 먹구름.

이를 본 자들은 모두 사막의 갈증이 끝났다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꾸르르릉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려대다가 쏟아진 빗줄기는.

검은색.

서부의 많은 이가 이것을 마시고 병을 얻었다.

깊이 파고드는 질척한 빗줄기와 풍기는 역한 냄새에 서부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서부 초입 가득하던 모래성이 텅텅 비었고 그나마 근근이 버티던 일곱 바위성의 거주민들도 곧 대거 탈주를 시작.

제국의 난민이 되어 떠돌았다.

결정적으로 서부의 마지막 보루이자 마지막 거대 부족 홍련족이 멸망하며 서부는 와해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제야 이 검은 비의 진짜 사용처가 밝혀진다.

마나석을 대체할 새로운 연료.

광산을 팔 필요도 없이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만 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무한한 동력.

그야말로 검은 축복.

서부의 저주가 축복으로 뒤바뀌었으나 이 축복을 즐길 이들은 모두 모래 속 뼈다귀가 되거나 땅을 떠난 뒤.

결국은 제국 탐욕스러운 자들의 배만 불려 주는 꼴이 되었다.

서부인들로선 참으로 억울하다 하겠으나.

“결국은 같은 꼴로 멸망했지.”

마지막은 허무한 종말만이 남았으니 어쩌면 이것도 운명이라 하겠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전생에선 서부에서 시작한 검은 비가 제국을 넘어 대륙 전역을 덮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물속 가득 어린 욕망과 고통, 허무를 먹고 자란 악마들이 형체를 갖춰 기어 나왔고.

대륙을 멸망으로 밀어 넣었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새 시대를 열 축복이라 불렸던 신의 빗줄기가.

사실은 시대의 종막을 위해 뿌려진 악마의 기름일 줄이야.

시야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까맸다.

손을 들어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잡으니.

찌이익.

끈적하고 미끈거리는 질감이 역겨웠다.

치미는 역한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과거 지겹게 보았던 끔찍한 풍경을 보자 그때의 절망감과 분노가 속에 치밀었다.

“전하, 전하!”

옆에 다가온 안드레의 얼굴 또한 새까맸다.

유일하게 맑은 빛을 유지하는 눈을 꿈뻑거리며 주변을 경계하길 잠시.

“평민, 가서 알프레드와 함께 있어라. 그의 사철과 솔의 그림자를 둘러, 바이올렛이 숨어 있던 주머니까지 더 해 깊이 숨어라. 이 비는 맞을 만한 게 아니다.”

이어지는 명령에 안드레가 멍하니 나를 바라만 보았다.

그의 감정을 돌봐 줄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튀어나올 악마 놈들을 생각하니 이가 갈리며 입안에서 거친 불꽃이 튀었다.

내가 막 몸을 낮추어 튀어 나가려 할 때.

“따르겠나이다!”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급히 내 발목을 잡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보자.

“전하! 따르겠습니다!”

자리에 선 안드레가 말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빗줄기 속 아무것도 분간이 가지 않는 풍경.

그래서일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만이 유독 선명하게 마음에 꽂혔다.

“기사가 전하를 홀로 두고 어디 간단 말입니까! 제가 따르겠나이다! 등을 허락하소서!”

“지금은 기사 놀음을 할 때가 아니다.”

냉정한 목소리에 안드레가 자신의 얼굴 위를 흐르는 빗줄기를 닦아 내곤.

뻐억.

주먹을 쥐어 자신의 콧잔등 옆을 강하게 때리자.

붉은 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곧 피를 얼굴에 펴 바른 안드레가 붉게 외쳤다.

“이러면 알아보실 수 있겠지요! 뒤를 따르겠습니다! 새하얀 눈 속에 전하를 홀로 두었습니다! 까만 빗속에서만은 함께하게 해 주소서!”

그 의지가 선명하여 잠시 침묵했다.

과거의 풍경을 봤더니 잠시 현생과 전생을 혼동했던 모양.

“따라올 수 있겠나.”

“반드시! 반드시 따라가겠습니다!”

전생엔 홀로 분투했다.

아무도 나를 따르지 않았고 어떠한 노력에도 폭군이 심어 놓은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두려움과 미움만이 가득한 시선.

나에게 구원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목소리들.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으나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며 눈 가득 혐오와 분노를 담아 쏘아보던 얼굴들.

저물어 가는 제국, 어전 가득히 고개 숙인 신하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치켜뜬 수백 쌍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들은.

분노, 혐오, 탐욕, 두려움, 조롱뿐.

대역일지라도 때로는 그 눈들이 숨 막혀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

지금 눈앞을 덮은 검은 빗줄기가 그때와 같아 착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바꿀 수 없는 운명에 내몰려 홀로 몸부림치는 힘없는 폭군의 대역이 아니다.

나는 황자이며 새로운 폭군이 될 자.

더 나아가 달려드는 적들과 몰아치는 운명을 극복할 자.

백야 속에서 보았던 루카르와 노병들의 눈빛.

새로운 북부 푸릇한 초원 위 가득했던 북부인들의 눈빛

지금 검은 풍경 속 안드레의 눈빛에 서려 있는 것은.

믿음, 충성, 갈망, 결의.

그래, 진짜 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눈.

비록 아직 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더 많을지라도.

뒤를 따를 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성공이다.

“정 그렇다면 마주해야겠지. 앞으로 싸울 또 다른 적을.”

내 명에 검은 풍경 속, 안드레의 눈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

“모두 따라오도록.”

따르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은 법.

* * *

“네? 모두요? 여기 또 누가?”

황자의 알 수 없는 말에 안드레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동안.

“근데 대체 왜 얼굴을 때린 거예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흐업!”

“그러게 말이야. 안드레 경 불필요한 부상이었어.”

“충정은 잘 봤어요. 덕분에 우리도 허락받았네요.”

옆에는 어느새 검은 비에 젖어 새카맣게 물든 솔, 알프레드, 바이올렛이 있었다.

휜 눈매가 그들이 웃고 있음을 알려 주었고.

“와 코피 엄청 나요. 어지간히 무식하게도 때렸나 봐.”

솔로 보이는 아담한 형체가 고개를 갸웃거리길 잠시.

손바닥을 다른 형체에 부착하자.

우우웅.

작은 불빛이 가슴께에 어렸다.

“이렇게 빛을 붙이면 구별이 되는데요. 이게 바로 마법의 위대함이죠.”

솔이 자랑스럽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얹으며 꺼드럭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치사한 가로등, 남의 부상을 외면하는 가로등.”

“어? 빛 안 붙여 줄 거예요?”

“뛰어난 가로등님.”

“일단 코부터 틀어쥐어요. 과다출혈로 죽겠어.”

“…그 정도예요?”

안드레가 제 꼴을 모르는지 불안한 듯 물었고.

얼굴을 넘어 앞섶 전체가 붉은 꼴을 보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괜한 짓을 했다며 울상을 짓는 동안 솔이 안드레의 가슴팍에도 빛을 붙였고.

“전하, 전하도 빛 하나 붙이-.”

이어 전하께도 빛 덩어리 하나를 선물할 생각에 그녀가 자랑스레 돌아본 순간.

“빛? 무슨 빛.”

심드렁히 그들을 바라보는 황자의 눈치가 수상하여 슬며시 빛 덩어리를 등 뒤로 감추려는 찰나.

“줘 봐.”

어쩐 일로 황자가 선선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가 드디어 인정받을 생각에 신나 빛 덩이를 살포시 넘겨주었다.

황자가 건네받은 빛 덩이를 이리저리 살피기 잠깐.

흐읍, 온 힘을 다해 그걸 앞으로 내던졌다.

“아앗! 전하!”

솔이 무서운 전하에게 차마 너무하다는 소리는 못 하고 저 멀리 날아가는 빛 덩이를 보며 아련히 손을 뻗을 때.

“뭐 해, 방금 못 봤어? 빛 덩이 계속 발사해. 가로등의 오늘 임무다. 사방팔방으로 빛을 밝혀라. 제대로 못 하면 랜턴처럼 뒷덜미 잡고 다닐 것이니 정신 차려.”

“네, 넵! 이 가로등! 최선을 다해 앞을 밝힐게요!”

오랜만에 부여받은 제대로 된 임무에 솔의 얼굴이 밝게 피었다.

그녀는 아는 걸까, 자신이 이미 훌륭한 가로등임을.

예전 같았으면 솔이라 볼멘소리를 했을 텐데.

어쩐지 말갛게 빛나는 눈 깊은 곳, 서글픔이 맺혀 있다.

“알프레드, 모래를 움직일 수 있나. 영애, 알프레드와 합은 어떻지? 검 다루는 경지가 어느 정도인가.”

“네, 전하. 평소보다 훑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만 오히려 방어는 수월합니다.”

“기본적인 합격은 가능해요. 북벽검을 대성했고 최근까지 설풍패검을 수련했습니다.”

황자는 이왕 같이하기로 한 것 철저히 일행을 점검할 모양.

방금 안드레와는 함께 사지를 헤쳐 나왔으니 나머지를 확인했다.

황자가 잠시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바라보며.

“그럼 뛰어.”

“…전하는요?”

“나는 안 뛴다.”

“네?”

“가로등은 머리, 번쩍이며 주의를 끌고 알프레드는 몸통, 모래로 적을 막아 내도록. 평민과 영애는 양팔, 다가오는 적을 베어라.”

황자가 비뚜름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너희는 한 몸이다. 괴물을 연기하여 악마를 끌어들이도록.”

“전하는요?”

솔의 멍한 물음에 그가 하얀 귀신 가면을 뒤집어쓰며 간단히 답했다.

“내가 왜 그런 멍청해 보이는 짓을 해야 하지?”

“……!”

“전하!”

“…….”

“내가 말했지? 너희가 선택한 황자라고. 충심으로 괴물을 연기하도록, 실시.”

황자가 당혹스러운 명령만을 남겨 둔 채 그림자를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가 뒤집어쓴 건 과거 황궁 영림에서 획득했던 백면귀 가면.

모두가 잠시 넋을 놓고선 우물거리는 동안.

“꾸어어어.”

어디선가 괴물 소리가 들려왔고.

홱, 돌아간 시선 끝엔.

“꾸, 꾸어어어. 왜요? 괴물 연기하라 하셨잖아요. 따라야죠.”

뻔뻔한 얼굴을 한 바이올렛이 보였다.

다행히도 붉어진 귀와 볼이 검은 비 덕에 보이지 않았다.

곧 다시 백작가의 귀한 영애가 바른 표정을 유지한 채 꾸워어어 이상한 소리를 내었고.

이를 잠시 바라보던 안드레는.

“키에에엑!”

질 수 없다는 듯 한결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신분에서는 밀려도 충성심에서 밀릴 순 없다!

물론 검술에서도!

그의 결의 어린 괴성에 바이올렛도 질 수 없다는 듯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고.

“이, 이상한데. 뭔가, 뭔가 잘못됐는데요.”

솔이 무언가 잘못되어 감을 느겼으나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부끄러워 소리는 못 낸 채 그저 밝은 빛을 펑펑 뿌려대는 동안.

“…….”

알프레드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곧 셋의 눈이 일제히 그를 향했고.

압박에 못 이긴 그가 사그락사그락 모래를 비벼 거대한 몸통을 만들어 냈다.

어느새 합체 괴물이 된 넷이 검은 비가 가득 내리는 모래성 어느 거리로 들어섰다.

빗소리와 비명, 괴성이 한데 어울려 질척였다.

그 사이로 그들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솔이 빛 덩이를 던져 댈 때마다 기괴하게 일렁이는 빗줄기와 그림자에 그들이 흠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듯한 괴괴한 분위기.

어느새 간간이 들리던 비명이 뚝 그쳤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와 슬며시 흘리는 숨소리만이 주변 가득했다.

멈추고 싶었으나.

멈추는 순간 무언가 뛰쳐나올 거 같아 멈출 수 없었다.

문득 흘러가는 빛 덩이 아래로.

“시, 시체!”

흩뿌려진 시체들이 얼핏 보였다.

“우리가 있던 곳은 아니군.”

“전하와 제가 걸은 길도 아닙니다.”

알프레드와 안드레가 혐의를 부인했다.

지금 그들이 마주한 길목은 그들로서는 처음.

그러나 시체가 가득하니.

무언가 위협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긴장을 끌어올리며 골목으로 들어선 순간.

그들과 반대에 놓인 거리 끝.

한 남자가 고요히 비를 맞고 있는 모습.

헌데 그 움직임이 좀 기묘했다.

움찔움찔 떠는 것이 어딘가 불편한 모양.

“모두 준비.”

알프레드의 한마디에 자리에 선 모두가 무기를 바짝 잡으며 남자를 주시할 때.

“어?”

솔이 눈을 찡그렸다.

남자의 발이.

“떠 있는데요?”

허공에 살짝 떠 대롱대롱 흔들렸다.

발끝으로 선 게 아니었구나.

그제야 어딘가 괴상하게 꺾인 목과 파들거리는 팔이.

“당했다.”

무엇인가에게 잡혀 있어 벌어지는 현상임을 짐작.

곧 남자가 춤을 추듯 파드득 몸을 격하게 움직이더니.

머리와 몸이 분리되며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금세 검은 비에 씻겨 내려갔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 있는가.

모두가 남자가 선 방향을 보며 집중하길 잠시.

사그락.

“온다!”

알프레드가 주변에 깔아 놓은 모래에 무언가 걸림을 느끼곤 경고했고.

벽에서 튀어나온 것들은.

예전 열차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으나 크기는 비슷한.

소악마들.

놈들이 스멀스멀 벽과 시체를 타 넘으며 다가왔다.

그들이 몰려오는 소악마와 남자를 잡아 뜯었던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경계하는 사이.

바로 앞, 빗물이 촤르르륵 흩어짐과 동시에.

-잡았다!

거대한 손 하나가 불쑥 솔의 앞에 나타났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손이 마치 날개와 같았다.

나머지 한 손은 제 몸과 얼굴의 절반을 가렸고.

한 손은 솔을 붙잡아 터뜨리려 하니.

“솔!”

“가로등!”

안드레와 바이올렛의 검이 손바닥을 찔렀으나.

철퍽, 질척이는 소리만을 낼뿐 베지 못했다.

알프레드가 모래로 막아섰으나 잠시 멈칫했을 뿐.

금방이라도 그들을 후려칠 것 같은 거대한 손바닥에 다들 이를 물 때.

놈이 다가오는 방향 직각으로 건물의 벽을 부수며 나타난 건.

“전하!”

하얀 가면을 쓴 황자.

부서지는 벽과 검은 빗물을 튕기며 튀어나온 그가.

한 손에 브레이커를 들곤 그대로 악마를 찌르자.

와르르르릉!

거검이 거칠게 울며 놈의 몸을 꿰뚫음과 동시에.

한 손으로 막 실체를 드러낸 놈의 목덜미를 움켜쥐곤 그대로 밀어붙였다.

악마가 옆으로 기우뚱 밀려난다 싶은 순간.

투투투투투투!

이제는 익숙해진 두 심장이 엇갈리며 박동하는 소리에 이어.

발끝에서부터 적염과 폭염을 폭발시키며 그대로 내달렸다.

“가로등, 가면을 쓰고 빛을 이용해라. 네게 유리한 전장이다.”

불꽃과 함께 떠나간 황자가 남긴 마지막 말에.

솔이 전력을 다해 빛을 터뜨렸고.

그녀가 퍼뜨린 빛이 곧 안드레와 바이올렛의 검, 알프레드의 모레를 하얗게 물들였다.

골목, 건물, 지붕 어느 곳 할 것 없이 빽빽이 몰려든 소악마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뛰었고.

쏟아지는 빗줄기와 같이 몰려드는 놈들을 향해 모두가 빛이 어린 무기를 들이밀었다.

이어 하얀색과 검은색이 부딪혔다.

* * *

와르르륵!

놈의 옆구리를 갈아대는 브레이커의 소리가 시끄러웠다.

놈이 한쪽 눈을 가린 상태 그대로 나를 마주 보았고.

반쯤 드러난 얼굴엔 색색의 눈알이 가득했다.

데루룩, 사방으로 구르는 눈이 징그러웠다.

놈이 혼란스럽다는 듯 내 가면을 응시했다.

사람의 얼굴이 아닌 백면귀의 가면.

어떠한 감정 없이 그저 살기만이 감도는 귀면과 눈동자에선 어떠한 것도 얻어 낼 게 없을 거다.

“내게서 두려움을 읽고 싶은가.”

악마를 향해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으르렁거렸다.

놈은 날 모르겠지만 난 놈을 안다.

전생에 나타났던 악마 중 나름 유명했던 종.

데몬 - 백 개의 눈알.

마유 속에서 태어난 소악마가 정확히 사람의 눈알 백 개를 모으면 탄생했다.

그 눈으로 상대의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상처, 욕망과 공포를 읽고 재현하는 놈.

조금이라도 더 솔, 안드레, 바이올렛을 마주했다면 무엇으로 변했을지 몰랐다.

어쩌면 에스키모로 변했을지도.

그래서 내가 마주했다.

가면을 쓰고 기다렸다.

검은 빗속에서.

“넌 나에게서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차갑게 들러붙는 빗방울들이 섬찟하게 피부를 두드리는 와중.

내면에서 피어난 광기와 혼돈, 퇴폐와 유혹, 패악과 오만이 놈의 시야를 흐렸다.

놈의 눈동자들이 길을 잃고 방황했다.

혼란스러운 모양.

그렇겠지.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자는 처음일 테니.

눈이 백 개 아니 천 개여도 보지 못한다.

백면귀의 가면과 그림자로 상처를 감싸고 광기와 불꽃으로 놈의 눈을 멀게 하리라.

지금껏 키워 온 신비와 운명들이 악마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였음을 보여 줄 때.

“타올라라.”

내 한 마디에 다시금 적염과 초적염이 몸을 감쌌고.

검은 비와 뒤섞인 백면귀의 그림자를 감싸 안으며 어둡게 타올랐다.

백면귀의 가면에 뚫린 눈구멍으로 진홍색 안광과 함께 어둑한 불길이 치솟으니.

“이 역겨운 마유는 이제 너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득한 목소리를 뱉어 내며 불을 폭발시키는 순간.

[운명 신비 염제심결 - 적염, 초적염. 신비 그림자가 한데 뒤섞여 새로운 불을 일으킵니다]

[하위 운명 광기, 오만, 패악, 혼란, 퇴폐가 새로운 불 속에 깊이 스며듭니다]

[새로운 신비 암화(暗火)가 악의를 타고 번집니다!]

붉은색의 적염, 주황색의 초적염, 까만 그림자가 뒤섞이기 시작.

어둑한 다홍색의 불꽃이 광기처럼 마유를 태우며 번졌다.

오래전, 신이 패악한 성을 벌했다던 전설처럼 모래성 전체가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멸망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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