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77화 (77/200)

77화 새까만 먹구름 위 새빨간 섬

살고 싶다.

검은 비가 내리는 밤, 악마들이 나타났다는 소식, 텅 빈 바위성 지하에 마련된 피난처, 겁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이 허옇게 반들거렸다.

“허억, 허억-, 수, 숨이 안 쉬어져요.”

“정신 차려. 공기는 충분해. 몸이 착각해서 그런 거다. 숨을 끊어서 쉬어 봐.”

“다들 숨 너무 깊게 쉬지 말아라.”

“비는 언제 그칠까요. 점점 수면이 오르고 있어요.”

끝없이 차오르는 검은 비와 뭉글거리는 악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도 두려움이 차올랐다.

평소 샌드 웜이나 블랙맘바, 데저트 와이번 등 거대 몬스터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을 지켜 주었던 지하 시설.

흔히 벙커라 부르는 방공호 속.

평소라면 몬스터가 사라지기까지 또는 거친 모래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을 사람들이.

지금만큼은 불안 가득한 숨결을 내뱉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기다리면 지나갔던 지금까지와 다르다.

사막을 가득 덮은 까만 바다는 마르지 않을 것 같았고.

안에서 부글거리는 악의가 곧 형체를 이루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흑해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머릿속 의문과 의심 또한 깊어졌다.

바깥에서 방공호를 때려 대는 빗줄기 소리가 속살거리듯 그들의 정신을 잠식했다.

악마들의 흔한 수법.

물리적 공격이 아니라도 정신을 파고들어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게 악마들의 특기.

다들 불안을 꿀떡꿀떡 억지로 삼키던 중에.

“다들 그만해. 입 다물고 등을 펴라. 사막의 전사들에게 비는 오히려 반가운 일 아닌가.”

암석 표면같이 거친 목소리가 컴컴한 방공호를 울렸고.

덜덜 떨던 이들이 불안을 가라앉혔다.

곧 방공호 통로에 나타난 건.

“그저 지나가는 비다. 좀 길어지면 어떤가 버티면 그만. 그러니 다들 겁보 같은 표정 좀 버려라.”

회색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섞인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한쪽 눈에 찬 안대와 얼굴 가득한 흉터가 얼마나 거친 삶을 살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만큼 그가 일곱 번째 성에서 획득한 신뢰가 적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곱 번째 바위성의 성주이자 과거 사막의 위대한 전사 중 하나였던 회색 전갈 푼.

한결 나아진 분위기를 확인한 그가 억지로 구겨지려는 얼굴을 폈다.

자신이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린다.

바위성의 성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단단해야 하는 법.

다만.

‘두 번째 성주의 말이 사실이었나. 이런 제기랄.’

얼핏 머리 위를 때리는 은은한 빗소리를 들으며 심란해지는 마음을 어쩌지는 못했다.

처음 연락이 왔을 땐 의심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일곱 개 열쇠를 모두 내준다는 것은 즉 사막의 목숨을 내주겠다는 말.

특히 홍련 부족을 생각하자면 내주기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혹여 정말 상대가 사막의 재앙을 초래할 인물이라면 직접 싸워 지키리라.

전사로서 결심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네 번째 성주는 개인의 욕심이 거대하여 주지 않았고.

일곱 전째 성주는 모두를 지키기 위하는 마음이 커 주지 않았다.

극과 극이 맞닿은 지점.

“결국 내 선택이다.”

그가 억지로 치미는 후회를 내리눌렀다.

전사로서 많은 싸움을 겪었다.

싸움은 필연적으로 많은 후회를 동반한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흉터와 잃어버린 눈.

작게는 이렇게 했으면 한쪽 눈을 지켰을까.

더 나아가선 이때 이런 선택을 했다면 더 많은 이를 구하지 않았을까.

오랜 시간, 사막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후회를 곱씹었더랬다.

그러다 깨달았다.

결국은 벌어진 일이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후회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은 흘려보내야 하는 자명한 결과들.

그리하여 그는 그때부터 후회보단 수련을 택했다.

이미 멀어진 후회보다 손에 쥔 현재와 무기를 벼렸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악착같이 앞으로만 걷다 보니 어느새 성주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이봐, 너, 너, 너. 그리고 특별 기동대 중 발 빠른 놈들 몇 더 뽑아서 떠날 준비 해.”

지금도 굳이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후회하기보다는 당장 움직이기를 택했다.

믿을 수 있는 수하 몇을 꾸려.

“통로를 달려 두 번째 성까지 간다.”

지하 통로를 통해 두 번째 성으로 달릴 생각.

물론 부하들의 반발이 있었다.

지하 통로는 그들이 만들어 낸 게 아니었다.

과거 기록으로도 남지 않았을 만큼 오래전, 어쩌면 바위 성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을지 모르는 오랜 통로.

과거 어느 일곱 번째 성주가 열쇠를 보관하는 깊은 밤 속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하였고.

지금은 일곱 번째 성의 도피처로 이용 중일 뿐.

그때부터 꾸준히 통로를 복구했으나 아직은 일부.

어느 통로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무모하며 위험하다.

더군다나 성주님이 안 계시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찌하냐는 물음에.

“내가 벌인 일이다. 내가 책임을 져야지.”

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죽어 가는 이들을 보며 후회하리라는 강한 확신.

상황을 뒤집기 위해선 앞으로 달려야 한다.

그가 지금껏 정한 삶의 방향.

물론 여기에 남을 자들을 위하여.

“이봐 검은 돌풍, 앞으로 네 별명은 검은 전갈이다. 뒷일을 부탁하마.”

“성주님!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차라리 제가 달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성주님께서 여기 계시면 저희가 다녀오겠습니다.”

후일도 안배했다.

수하들의 충심이 기뻤으나.

“멍청한 놈들아. 열쇠를 성주가 옮겨야지 누가 옮기겠냐. 혹여 통로에서 죽는 바람에 열쇠를 잃어버리거들랑 모두 잊고 너희끼리 어떻게든 살아가라.”

남에게 맡길 일이 있고 맡기지 않을 일이 있다.

열쇠를 운반하는 일은 후자.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죽더라도 책임을 지리라.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막 옮기려 할 때.

“서, 성주님! 입구! 입구 바깥에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입구를 지키던 정예 몇이 급히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이상 상황을 보고했다.

“대체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지금 밖에 저 빌어먹을 검은 물이 가득한데 어떻게 사람이 밖에 있어? 너희 정신 안 차려? 너희들이 그렇게 현혹되어서 사람들을 어떻게 지킬래!”

그가 눈을 부라리며 부하들의 정신을 다잡으려 할 때.

쿵, 쿵, 쿵!

그의 귀에도 두들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아니 모두의 귀청을 때렸다.

쿵쿵쿵! 쿵쿵쿵! 콰드드득!

검은 통로에 광폭한 소리가 불길하게 메아리쳤고.

푼이 두 번째 성으로 달리려던 걸음을 멈춰 입구를 바라보는 순간.

콰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지금껏 누구에게도 함락된 적 없던 통로가 부서졌다.

가뜩이나 환기 시설이 열악한 지하 통로 속 뭉게뭉게 가득 피어오르는 먼지구름과 튕기는 파편들.

사람들이 기침하며 입 주변을 가리는 사이.

“누구냐! 침입자는 정체를 밝혀라!”

성주, 회색 전갈이 대번에 자신의 무기 창을 뽑아 들며 앞을 겨눴다.

창끝, 푸른 기운이 도는 게 독을 발라 놓은 모양.

푼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좁은 통로, 사거리가 긴 무기이니만큼 유리한 상황.

찬찬히 먼지구름이 가라앉았고.

그사이 찬란한 별빛이 들이쳤다.

순간 검은 비가 물러간 줄 알았으나 아직 빗소리는 선명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 부유하는 먼지들이 빛줄기를 따라 떠도는 중에.

얼핏 휘날리는 백금발을 보았다.

무언가를 들고 있는 형태.

그래도 사람 형태라 다시금 물었다.

“답이 없으면 적으로 간주, 공격하겠다.”

“네가 성주인가.”

“그렇다. 내가 일곱 번째 성주 회색 전갈 푼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이 위급한 순간에 함부로 문을 뜯고 들어왔나.”

“정중히 양해를 구했으나 답이 없더군. 그래서 뜯었다.”

“저런 미친!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라 쿵짜 이 지랄 하는데 열어 주겠냐! 너 같으면.”

부하의 거친 항의에 상대가 낮게 웃길 잠깐.

“성주면 자웅을 겨루어 승자와 패자를 나누자.”

“나누면 무엇이 달라지지?”

“자격을 내놓아라.”

“자격!”

순간 푼이 상대의 정체가 두 번째 성주가 말한 그 자임을 깨달았다.

헌데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주파했단 말인가?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찼으나 지금은 그걸 해결할 때가 아니다.

“주겠다! 믿지 못하여 저지른 실수이니 나를 벌하고 사람들은 살려 준다는 약속을 하면 열쇠를 주겠다.”

“필요 없다.”

“뭐? 방금은 자격을-.”

“멍청하군. 자격은 승리를 통해서만 이양되는 것. 네놈을 용서하는 게 무슨 소용이지? 전력을 다해 덤벼라. 밟아 주마.”

“방금 한 선택. 후회할 거다. 이곳은 내 전장이야. 준다고 할 때 가져가라.”

푼에 결의 어린 말에 상대가 한껏 비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맑고 깨끗해 청량하게 들릴 정도.

상대는 말이 통하는 자가 아니다.

단번에 황자의 성질을 파악한 그가 몸을 낮추며 창을 겨누었다.

해독약도 있으니 단번에 거리를 격해 어깨를 찔러 무력화시키고 열쇠를 넘겨주면 되겠지.

열쇠를 주어 명분도 챙기고 상대를 제압하여 일곱 번째 성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

혹시 모를 습격을 경계해 통로 끝과 거리가 좀 있으나.

자신의 창과 속도라면 한 호흡, 아니 반 호흡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상대의 태도는 좀 고쳐야겠다.

“좋다. 그럼 지금 당장 결판을 내자!”

회색 전갈이 외침과 동시에 땅을 박찬 순간.

푸화학! 다시금 밝은 빛이 터지며 앞을 가린 먼지들을 거두어 냈고.

통로의 끝,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과 이를 똑 닮은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약간 옆으로 빗겨선 자세, 심장 어림에 감도는 날카로운 불꽃 하나가 보였다.

손에 든 건 바로.

활.

그가 자랑하던 속도와 사거리를 모두 압도하는 무기.

처음 이상할 정도로 많이 피워 올렸던 먼지도.

지금 자신이 먼저 달려들게 만든 저 도발도.

모두 단 한 발을 위해 준비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오랜 싸움으로 축적된 본능이었다.

그래도 단 한 발만 피하면 승산이 있다.

피하고 찌른다!

그러나.

어림도 없지.

핑, 활시위 놓는 소리와 동시에 통로 전체를 뜨거운 불이 가득 채웠고.

성주가 시도도 못 한 채 그대로 휩쓸렸다.

“이런 치사한-.”

외마디 비명만을 남기고선.

* * *

“싸움에 치사가 어디 있어.”

상대의 불평에 피식 입술을 끌어 올렸다.

싸움에 치사란 없다.

이기면 될 뿐.

무기의 상성을 따지고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부터가 결투의 시작.

패배자 주제에 웃긴 말이라며 비웃는 동안.

“서, 성주님!”

성주의 부하들이 쓰러진 주군의 생명을 걱정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고.

“닥쳐라. 모두.”

활에 다시 불을 모으자 모두가 침묵하며 뒤로 물러섰다.

몸에는 휘광을 두르고 손에는 타오르는 화살을 쥔 채.

위엄과 광기를 담아 쏘아보자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저벅저벅.

통로를 걷는 걸음엔 어떤 망설임도 없다.

내가 성주를 이긴 이상 이제 이 통로는 나의 것.

내 소유물을 걷는데 겁이 날 리가.

오히려 나의 소유물을 불법 점거한 입장이 된 저들이 불안에 떨어야 맞지 않겠는가.

그래서.

“감히 성주의 자격을 얻은 자를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가.”

놈들에게 당당히 새로운 성주의 등장을 알렸고.

그제야 그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쓰러진 성주의 머리통에 겨눈 화살촉이 무서워서일 수도 있겠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개의치 않았다.

어설픈 예를 표하는 이들 사이.

“으, 으으. 저들은 죄가 없소.”

“안다. 허나 죄가 없다고 책임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지.”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웃기는 소리. 패배한 개 주제에 무슨 책임을 지나. 그 정도의 위치도 능력도 없으면서.”

막 정신을 차린 회색 전갈이 차가운 사실에 얻어맞고선 고개를 떨궜다.

“고작 이 정도에 기죽지 마라. 밖에는 더 큰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당신의 목적이 대체 무엇이오. 무엇이길래 이런 상황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오.”

“네가 걱정하는 목적.”

내 단호한 답에 그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어갔다.

“내가 걱정하는 목적이라면……?”

“홍련.”

“…….”

“맞다. 난 서두칠성의 주인으로서 서부의 지배자 홍련을 마주하려 한다.”

담담한 답에 그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두려운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가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나도 공포를 먹고 사는 것은 아닐까.

전생엔 항상 분노한 얼굴만을 마주했는데.

일곱 번째 성주, 회색 전갈 푼.

아니.

“네가 섬기는 홍련이 나에게 멸망할까 두려우냐 물었다. 회색 늑대.”

“……!”

“늑대?”

“그게 무슨.”

홍련에서 파견한 전사, 회색 늑대.

나의 물음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일곱 번째 성주 푼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눈에 많은 뜻을 담았다.

네 진실을 알고 있다.

본디 회색 전갈의 진짜 별명은 회색 늑대.

사막 홍련 부족을 지키는 가문의 수장이며 밖으로 나와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자.

“일곱 성주가 허락한 자격으론 홍련과 나란히 설 수 없지. 빼앗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걸 왜 나에게 묻지.”

“묻는 것으로 보이나? 아, 그래. 묻는 것이긴 하지. 헌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은 아니야.”

“그럼 무엇을 확인하려 하는 거지.”

그의 얼굴에 서서히 어두운 죽음이 끼었다.

정체를 들킨 이상 나를 죽이든 자결을 하든 둘 중에 하나.

어두운 통로, 화살촉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두 눈동자에 팽팽한 긴장감이 얽혔다.

과거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선 서부의 일곱 성과 홍련은 협력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홍련을 보호하겠다는 명목하에 억압하는 결계이자 그들을 가둬 둔 봉인.

그래서 준비해 왔다.

홍련의 해방을 위해.

진정한 사막 주인의 지위를 찾기 위해.

그런데 엉뚱한 자가 그 의도를 알고 있으니 놀랐겠지.

두렵겠지.

“제국의 황자로서 조언하지. 경거망동하지 마라. 이미 모든 패는 내게 들어와 있다.”

“열쇠 여섯을 모았나.”

“하늘까지 열었지.”

“그건 또 어떻게…….”

“제국이 몰랐다 생각하나. 진정 황가가 너희를 건드리지 않은 게 바위성이 튼튼하고 사막이 메말라서라 생각했나?”

말 그대로다.

본디 황가는 그들을 그저 방치한 것뿐.

실제로 전생에선 한 명의 황자와 귀족 몇이 서부 전체를 말살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어둠 속 말갛게 두려움을 품은 눈동자들이 가득했다.

“아니.”

그리하여 더욱 잘 들리라고 하나하나 그들을 쏘아보며 부정해 주었다.

너희들의 현실을 깨달으라고.

“그저 가엾어서, 불쌍해서, 건드릴 가치가 없어서 둔 것뿐이다.”

냉혹한 현실에 몇몇은 떨었고, 몇몇은 눈을 감아 외면했고, 몇몇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때.

“그래서 넌 뭘 원하기에 이 자리까지 온 건가.”

회색 늑대, 끝까지 홍련의 주인을 위해 싸웠으며 마지막까지 성을 지켰던 성주가 물어 왔다.

평생 쓰디쓴 후회를 삼켜왔던 사내의 물음에.

“일곱 성주의 주인으로서.”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내가 답했다.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학살이 크기를 더욱 키워 나갑니다! 짙은 어둠과 붉은 피가 뒤섞여 사막을 가득 채웁니다!]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충성, 분투, 독기, 후회, 죽음, 멸망이 가득합니다]

[성의 운명 함락, 멸망이 바투 다가왔습니다]

“홍련을 해방하려 한다.”

[서두칠성의 모두의 운명이 당신으로 인해 뒤틀립니다! 사막의 운명이, 하늘의 운명이, 흑해의 운명이 당신으로 인해 모조리 뒤틀립니다!]

피어나는 미소 속 수많은 운명이 변화를 알렸다.

“마지막 열쇠 탐랑(貪狼)을 내놓아라. 회색 늑대. 내 묻혀 버린 붉은 일족을 만나야겠으니.”

곧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게 미약한 빛을 품은 별 하나를 내밀었고.

그대로 활에 실어 하늘로 쏘자.

철컥!

이젠 익숙해진 빗장 풀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각 성을 이어 주는 미약했던 빛줄기가 서로를 강하게 엮으며 점점 세력을 확장.

멀리 여섯 개의 성, 아니 별이 각자의 방식으로 뿜어내는 빛.

일곱 번째 성(星) 두베 또한 우윳빛으로 빛나며 검은 물을 씻어 내리더니.

안에서부터 거친 빛을 내뿜었고.

드디어 일곱 성의 하늘이 모두 열리며 별자리가 완성되었다.

국자의 중심.

4, 5, 6, 7성이 이루고 있는 사각형의 중심 어림에 위치한 하늘에서.

새까만 먹구름을 찢으며 새빨간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련이 사는 땅이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