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도래
“이런 제기랄…….”
첫 번째 성 아카이드, 성벽 위에 선 성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마디.
별빛이 꺼질 때마다 몰아치는 검은 폭우 속 악마들을 상대하길 꽤 오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면 사실 성은 함락되었고 자신은 저 검은 물 안에서 영원히 이 순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끝없이 차오르는 의심이 머리를 간지럽혔다.
이전이라면 진즉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라 생각하며.
악의가 귓가에 포기와 절망을 속삭일 때마다.
참으로 빌어먹게도.
‘명확히 기억해라. 너를 지켜 주었던 이 바위가 껍데기에 불과했단 사실을. 넌 패배했고 나에게 모든 권리와 명예를 빼앗겼다.’
황자의 조롱이 떠올랐다.
새빨간 피를 바른 채 하얗게 웃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통을 성벽에 마구 박아 대던 광기가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굴욕이 끝없이 성주를 움직이게 했다.
성벽은 누구도 지켜 주지 못한다.
결국은 우리가 성벽 위에 서서 모두를 지켜야 한다.
황자라는 광기를 마주하고 깨달은 사실.
“우리가 함락당하면 모두 죽는다! 잊지 마라! 다들 정신 차려! 아니! 황자가 우릴 비웃을 거다! 기껏 살려 주었는데 힘이 없어 죽었다며 비웃을 거다!”
머리통에 쪼개지는 바위답다고 모욕할 거다!
그 무엇보다 황자가 비웃는다는 소리가 병사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미친 황자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모욕을 감내할 순 없다.
성벽 위에 선 자들이 얼굴 가득 달라붙은 검은 빗줄기를 연신 쓸어 내며 싸우길 계속.
“성주님! 성주님! 황자 전하의 전언입니다! 신호를 멈추라 하셨어요! 성주님!”
빛줄기가 되어 날아온 하란이 허공에 머물며 황자의 명령을 전했고.
순간 하늘의 계시라 생각한 병사들이 감격하는 사이.
“다들 신호를 멈춰! 별빛을 유지해라!”
성주가 다급히 전장을 정리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전투가 끝났다.
별빛이 내리쬐는 한 흑해는 침범치 못하리라.
사실 살았다는 기쁨보다 죽어서까지 황자에게 조롱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걸 뭐라 해야 할까.
“끔찍한 사기 진작이군.”
그래, 미친 황자만이 가능한 사기 진작이라 생각해야겠지.
그런 그의 귓가에.
“전하께서 버티느라 고생하셨답니다.”
하란이 전한 수고했다는 말이 감격으로 와닿는 이유가 무얼까.
그가 뒤통수에 치미는 소름을 쓰다듬으며 떠올렸다.
그가 머리통으로 바위를 깨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냉혹한 현실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 몰아치는 흑해를 막아 낼 수 있었을까.
문득 어쩌면 이 모든 게 황자의 노림수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 사막 곳곳에서 몰아치는 별빛을 보자 더욱 확신이 들었다.
본디 사막 일곱 성주가 가진 열쇠는 오래된 비밀.
지금껏 이를 요구한 자는 없었다.
헌데 황자는 이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당당히 요구했다.
그가 알기론.
“성주에게 자격을 받은 자는 손님, 성주의 자격을 빼앗은 자는 주인이라.”
시험을 통과한 자는 일곱 성의 손님으로 홍련을 마주하지만 성주를 이기고 자격을 빼앗은 자는 사막의 주인으로서 홍련을 마주한다는 전설.
벌써 여섯 개의 하늘이 열렸다.
곧 일곱 개째에 도달하면 황자는 진정으로 서두칠성의 주인이자.
평등한 자격으로 홍련을 마주하리라.
물론 그 또한 전설 속에 나온 문구만을 알고 있을 뿐.
대체 동등하게 마주한다는 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덩달아.
“폴라리스.”
황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떠올랐던 전설의 한 자락을 다시금 떠올렸다.
쏟아지는 별빛과 같은 후광을 업은 채 하늘 가득한 먹구름과 같이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 악마보다 짙은 광기를 뿜어내는 그를 마주 보았지.
그 모습이 서두칠성의 열쇠에 대해 기록된 전설 속, 사막의 구원자이자 파괴자라던 폴라리스를 닮았다.
사람이 어찌 그런 형상을 취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
그저 과장된 수식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일곱 성의 주인이자, 한낮의 사막과 같은 뜨거움과 깊은 밤하늘의 추위를 동시에 지닌 자. 멸망을 왼손에 생명을 오른손에 쥐고 거꾸로 선 붉은 자들을 겨누리니. 사망의 명운이 그에게 달려 있으리라. 그의 이름을 폴라리스라 부르라. 그대들의 파멸자이며 우리들의 구원자라.”
성주에게만 전달된다는 오랜 전설을 중얼거리는 와중 드디어 일곱 번째 하늘이 열렸고.
쏟아지는 별 무리를 보며 성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대들의 파멸자이며 우리들의 구원자라.
입 안에 감도는 전설이 기도와 같았다.
서두칠성의 별자리가 완성되었고 황자가 주인이 되었음을 하늘이 확인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가 눈을 뜨는 순간.
“오, 맙소사.”
처음으로 마주한 장면에 저도 모르게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하늘이 올올이 찢어지며 나타난 것은 붉은 섬.
그것도 거꾸로 선 모양의 성 하나가 서두칠성과 흑해를 마주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먹구름 위에 떠올랐다.
그렇게 서두칠성 별자리와 홍련 부족이 서로를 마주했다.
* * *
“이런 빌어먹을. 저건 또 뭐야.”
네 번째 성, 마지막 숨어 있던 악마까지 모두 정리를 끝낸 살라스 또한 하늘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별빛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하늘에 떠오른 섬이라니?
그것도 시뻘건 색에 거꾸로 뒤집혀 있는 모습이 마법사인 그의 상상력으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설마 저것과 싸워야 하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할 때.
“오오, 홍련의 섬이다!”
“홍련의 섬이 나타났다!”
거주민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신기해했다.
그들에게 물어보자니 홍련의 섬은 선택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 곳.
보통은 바로 거주지로 이동했기에 위치도 형태도 몰랐다 한다.
다들 신기해하는 와중에 살라스의 눈가가 좁혀졌다.
왜인지.
“우릴 지켜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운데.”
검은 하늘에 떠오른 붉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깔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왜인지 아르한의 오만한 눈동자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재수 없는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거친 빛줄기가 앞에 투욱 떨어져 내리더니.
“이봐, 살라딘. 맡긴 일은 끝냈나. 설마 이 쉬운 것 하나 못 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것은 아니겠지. 대인관계 기피증 마법사.”
“거봐, 역시 재수 없잖아.”
실제로 보니 더욱 재수 없는 아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처음 보는 안대를 낀 사내.
살라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뜸 시비를 거는 황자를 노려보는 사이.
주변을 둘러본 아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으음, 나름대로 잘해 냈군. 만족스럽다.”
계속해서 얄미운 말들을 내뱉어댔다.
이대로 두면 저 주둥아리가 멈추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일곱 하늘은 모두 열었고 저 위 시뻘건 섬이 나타났다만. 이것까지 모두 계산하신 거겠지? 위대한 황자 전하?”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살라스의 물음에 황자가.
“당연한 걸 묻는군. 마법사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을 벌써 생각해 두었지.”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웃길 잠깐.
“등대지기, 길잡이. 보고 있는가?”
이번엔 하늘을 향해 물었고, 그의 주변을 떠돌던 빛 덩이들이 깜빡이며 긍정을 표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황자가 하늘을 가리키자.
“저 하늘에 보이는 붉은 섬도 보이겠지.”
깜빡깜빡.
번쩍이는 빛 덩어리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면 과장일까.
물론 황자는 남의 불안감 따윈 신경 쓰는 자가 아니니.
“그럼 저 홍련이 사는 섬으로 항로를 조정해라. 이번엔 너희도 같이 간다. 살라딘도 포함해서. 가로등, 빛을 뿜어라.”
“어어? 지금 바로 가신다고요? 준비도 없이요?”
“이봐, 저기가 어떤 줄 알고 그렇게 간단하게 간다고 하는 거냐.”
최소한의 준비 정도는.
살라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한의 비웃음이 크게 울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게 어지간히 웃긴 모양.
살라스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무어라 하기 전에.
“제발 마법사의 상식을 들이밀지 마라. 현실엔 마법식처럼 완벽한 준비와 계산은 존재치 않는다. 영애, 그대가 즐겨 읽는 책의 인물들은 어떠했지?”
“원래 주인공은 계획이 다 있는 법. 결국은 이기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그래 오랜만에 죽은 지식이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하는구나.”
바이올렛에게 배신당한 살라스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녀가 슬며시 그의 눈을 피했다.
그들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던 황자가.
“어차피 침략이다. 시간이 길어지면 녀석들도 준비할 시간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뭐? 침략?”
“잠까안-.”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끝나기도 전.
빛덩이에게서 항로 설정이 끝났다는 소식을 확인한 황자가 곧바로 활을 치켜들었고.
쭈우우욱, 시위를 당기더니 새하얀 빛살이 되어 올라갔다.
막 그를 말리려던 살라스도, 침략이란 말에 경악하던 이들도 일제히 빛줄기로 변하여 뒤를 따랐다.
마치 비가 거꾸로 솟아오르듯.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삭막했다.
점점 멀어지는 사막과 서두칠성.
올라갈수록 거세지는 검은 빗줄기와 먹구름이 뒤틀리는 모습.
입으로 고함을 질러 댔으나 귓가가 먹먹했다.
그 와중, 황자만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선명했다.
살라스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 알프레드는 눈까지 감아 버린 채.
곧 합류한 등대지기와 하란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고.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아아아아악!’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늘에 처박듯 날아간 그들이 이윽고.
퍼어엉! 홍련이 거주하는 붉은 섬에 도착.
“으으윽. 너 제발 말 좀하고 움직여. 우읍.”
“우욱, 토할 거 같아.”
“토하는 가로등이 되기 싫으면 참으세요.”
“바이올렛 경! 너무해요!”
“으음, 이번엔 꽤 속이 흔들리는군요.”
모두가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느라 흔들리는 사이.
심지어 알프레드조차 잠시간 멀미를 다스리는 동안.
“뭐야? 다들 어지럽습니까? 나는 멀쩡한데?”
안드레만큼은 굳건히 두 발을 땅에 딛고선 당당했다.
다른 이들의 어지러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안드레 경, 안 어지러워요? 왜 혼자 멀쩡해요.”
“무슨 훈련을 따로 하신 겁니까? 황성 기사단만의 훈련인가요?”
“훈련은 무슨, 저놈도 정상이 아니니-우읍.”
솔과 바이올렛이 놀라 물었고, 살라스가 사실을 뱉다가 덩달아 토악질도 뱉는 사이.
“차 트렁크에 타고 있을 때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드레가 이유를 밝혔다.
과거 차량 뒤, 어두컴컴한 트렁크에 탔던 시절에 비하면 이건 황홀한 대우.
전하께서 예비하신 고난은.
“역시 전하께서는 모두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바로 지금을 위한 것!
모두가 측은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이제야 깨달았나, 미련한 평민.”
“역시!”
황자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둘의 유대감을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아니, 딱히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 * *
대충 안드레의 주접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으려니.
“홍련이군요.”
등대지기의 나지막한 감탄이 울렸다.
“와 본 적 있나?”
“등대지기들은 모두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시험을 쳐 자격을 획득합니다.”
“이런 꼬락서니라는 건 몰랐겠군.”
“거꾸로 매달려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죠.”
“그럼 이번엔 뒤집힌 하늘을 보는 기분이 어때.”
“이런 제기랄.”
그가 내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보고는 아찔한지 욕지기를 뱉으며 눈을 꾸욱 감았다.
덩달아 위를 쳐다본 일행도 각자 개성 넘치는 신음을 삼키며 얼른 고개를 바닥으로 향했다.
하늘에 보이는 풍경은 검은 바다 위 떠 있는 일곱 개의 우윳빛 별.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익숙한 밤하늘과는 어딘가 달랐다.
바로 사막.
검은 비가 역류하듯 땅으로 짓쳐 들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따라 땅으로 처박힐 듯싶은.
절로 현기증이 이는 풍경.
“하하하! 트렁크 수련법 덕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거까지 문제없으면 네가 좀 문제가 있는 거다.”
“어? 어어? 전하?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습니다.”
안드레의 헛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잠시 검은 바다에 떠오른 일곱 개의 별을 바라보자니.
직접 이룬 일이 퍽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풍광을 감상하는 동안.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길 잠시.
곧 붉은 갑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가득 몰려왔다.
그들이 각종 무기를 겨누며.
“침입자들은 순순히 투항하라!”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내가 내 땅에 들어섰는데 침입자라니.
미친놈들. 설마 하늘 위라 해서 제국의 영토가 아니라 생각하는 걸까.
땅, 하늘, 지하마저 제국의 것임을 명시하는 법령이 있거늘.
어찌하여 감히 황자를 향해 무기를 겨눈단 말인가.
그리고 침입자라니.
분명 하늘에 타오르는 일곱 개의 성을 보았을 터.
나는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서 도래했으니 이런 태도는 맞지 않았다.
사막의 법도를 보아도 지금 저들이 하는 행동은 글러 먹었다.
이외에도 구구절절한 상황들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즉.
“무엄하군. 버러지 새끼들이.”
무엄했다.
뒤에 수식어는 그냥 내 기분을 표현한 것뿐.
그럼에도 놈들은 무기를 치우지 않았고.
오히려 더 성난 듯이.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나를 향해 을러대었다.
방금 친절하게 설명했는데도 분노하는 꼴이라니.
아니, 설명은 안 했던가?
어쨌든 많은 생각을 정제하여 귀중한 충고를 건넸으면 재깍 알아들었어야지.
결론은 놈들 책임이다.
“투항하라!”
자꾸 저 투항하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리하여.
끼이이익, 투앙!
지체할 것 없이 하늘에 활을 겨누어 쏘아 냈고.
떠오른 불이 수십 가닥으로 나뉘어 놈들을 겨누었다.
놈들이 투항이란 단어를 몇 번 뱉었더라.
투앙, 투앙, 투앙, 투앙, 투앙, 투앙.
이미 횟수를 넘은 것 같았으나 사실은 중요치 않다.
내가 느낀 게 중요하지.
끝없이 손을 튕길 때마다 폭죽이 터져 오르듯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처음엔 수십 개에 불과했던 불덩이들이 이윽고 수백, 수천 개로 불어났다.
이미 병사 몇 갖고는 막아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숫자.
지금껏 투자해 온 신비 점수와 얼음을 소화하여 얻은 능력 덕에 염제심결에 대한 통제력이 대폭 상승했고.
수천의 불화살을 주먹 하나로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높은 하늘에 떠 있음에도 정수리에 치미는 열기가 뜨거웠다.
마치 내 명령을 기다리듯 하늘에 가득한 불비가 화르르륵, 적들을 위협했고.
“공격해 봐라. 모두 쏟아부어 줄 테니.”
선명한 협박에 붉은 갑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어쩔 줄 몰라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불꽃이 그들을 잡아먹을 듯 이지러졌다.
처음 보는 신비.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차오르는 살기와 화기에.
“여기! 나요! 등대지기! 나! 기억 못 하시오들!”
등대지기가 급히 나와 둘러싼 병사들의 눈길을 끌고는.
“여기 서두칠성의 주인이자 모든 열쇠를 얻은 자께서 행차하셨으니!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어서 길을 안내하시오! 침입자가 아니니! 어서!”
그가 힐끔 황자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죽기 싫으면! 제국의 황자이자 서두칠성의 주인은 용서와 자비가 없는 분이시니까!”
간절한 설득이자 간절한 협박.
조금은 먹혔던 것일까.
갑옷을 차려입은 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며 길을 트려 하던 중에.
“뭐 하는 짓들이야! 감히 누가 서두칠성의 주인이며 홍련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단 말이야!”
화려한 치장을 한 늙은이 하나가 추레한 목소리로 마구 호통을 쳐댔고 병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서 잡아! 어서!”
자신들의 목숨을 개처럼 버리라는 강요에 다시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선 자들이 덩달아 그들을 향해 윽박질렀다.
마치 아랫사람을 깔보고 다루듯이.
입은 의복이 한결같이 검은 것을 보아하니 소속이 다른 모양.
병사들이 억지로 다시 무기를 꼬나 쥘 때.
“늙은이.”
내가 직접 그를 불러.
“네가 안내해라. 직접, 홍련 부족장이 있는 곳까지.”
명했다.
늙은이가 무어라 떠들어 댔으나.
화살 몇 개를 주변에 직접 쏘아 주자.
폭발에 휘말린 자들의 피가 낭자했다.
그제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던 놈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몸을 떨어댔다.
“개처럼 기어서 안내해라. 타 죽기 싫으면. 너희들 전부.”
놈들이 그제야 제 위치를 자각하곤 땅을 벌벌 기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찍힌 피들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낮게 웃었다.
홍련 족의 재앙이자 축복이 되어 줄 이가.
붉은 도시, 피를 뿌려 깐 융단 위를 걸었다.
머리 위에 검은 바다와 일곱 개의 성을 밤하늘처럼 이고, 수많은 불을 군세처럼 이끌며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