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홍련
붉게 물든 길을 걸으려니 주변에서 움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무기를 겨누었던 병사들.
폭발에 휘말려 쓰러진 자들과 나를 번갈아 보며 고민하는 모습.
치렁치렁 치장한 녀석들의 말을 듣긴 싫었으나 막상 선제공격이 벌어졌으니 대응을 해야 하나 고민이겠지.
그래서.
“섣불리 덤비면 다 죽인다. 지금 바닥을 기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간인들까지. 지금부터 이 불이 닿는 범위 안 모든 이가 인질이다.”
고민을 해결해 주기로 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늘을 바라본 병사들의 얼굴에 체념이 어렸다.
시야를 가득 메운 불화살들.
보는 것만으로도 화끈거리는데 위력은 두말할 것 없다.
지금 바닥을 기어 다니는 놈들을 굴복시키는데 단 몇 발이면 충분할 정도의 위력.
그 정도의 화력이 하늘을 가득 메운 상황이니.
방금 전 단호하고 잔혹한 손속을 미루어 보아.
섣불리 움직였다간 정말 큰일이 날 수 있음을 짐작할 터.
그들이 결국 주변을 정리하며 길을 뚫었다.
“모두 물러나십쇼! 당장! 저 멀리들 피해요!”
“상황을 통제 중이니 모두 물러나 기다리세요!”
“건물 안에 사람 남았는지 확인해! 있으면 대피시키고!”
그들이 소리치자 지금껏 충격적인 장면에 굳어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곤 썰물처럼 거리를 벗어나기 시작.
집 안에 숨어 있던 자들마저 급히 문을 열고 나와 귀중품만을 들고 도망쳤다.
집안은 안전하리라 생각했으나.
그럴 리가.
두려움 뚝뚝 묻어나는 얼굴들이 즐거웠다.
걷는 발걸음엔 오만한 자들의 피와 굴종이, 주변엔 다급한 피난 경고가, 집까지 버리고 도망하는 이들의 얼굴엔 붉은 두려움이 가득하니.
주변이 온통 붉디붉었다.
건물도 길가도 피로 얼룩진 바닥도 머리 위 가득한 불꽃도 사람들의 얼굴도 그 아래 빛나는 나의 미소와 눈동자도.
누군가.
“재앙…….”
이 풍경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를 내뱉었다.
재앙.
마치 자연재해가 몰아치듯 모두가 두려워하고 도망치느라 바빴다.
단어가 맘에 들어 웃고 있으려니.
“어디로 가시렵니까.”
등대지기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물어왔다.
모두의 표정에 궁금증이 어렸다.
우선 기선은 제압했다.
그렇다면 이제 황자라는 재해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표정들로 물어오기에.
“일곱 성의 주인이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자가 누구냐. 등대지기, 길잡이. 서두칠성의 주인은 누구와 동등한가.”
역으로 물었다.
당연할 걸 물었기 때문.
본디 홍련과 서두칠성은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세간엔 마치 서두칠성의 허락을 받아야 진정한 사막의 주인인 홍련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소문이 났으나.
실제로 서두칠성은 홍련의 관리인이며 홍련은 서두칠성의 보호 겸 감시를 받는 이들.
반면 서두칠성이 사막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등대지기와 길잡이를 기르는 지식은 홍련에 있으니.
서두칠성 또한 홍련의 지식이 없으면 어찌 사막에서의 삶을 이어갈까.
둘의 관계가 참으로 애매하며 껄끄러웠다.
지금은 퇴색되었다지만 서두칠성의 주인은 본래.
“홍련의 왕과 동등하시니 그와 마주해야 합니다.”
다섯 부족의 부족장과 동등했다.
하늘엔 오색이 땅엔 일곱 별이.
누가 이런 환상을 만들어 두었는가.
건국제 카이론.
바로 꼰대의 업적.
본디 다섯 색, 흑, 백, 청, 황, 홍이 모두 존재했을 때에는 일곱 성과 교류하며 서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론.
-사막엔 색이 넘쳐 났고 하늘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염료를 뿌려 제국의 변방을 지켰다.
과거 서부는 그저 메마른 광야가 아닌 오색 찬란함이 감도는 색의 땅.
어둠 속 칠성은 별과 같이 반짝이며 사람들의 방향을 인도했고.
다섯 부족은 제각각 염료를 뿜어내어 사막을 물들여 쨍한 태양 아래에서도 제 색을 잃지 않았다.
허나 지금 남은 건 빛을 잃어버린 일곱 바위성과 단 하나의 색.
그마저도 서로를 돕던 이들이 이제 서로를 경계할 뿐이니.
후손들의 뒤틀린 욕심의 결과.
건국제가 서글프게 반짝이던 모습이 눈에 남았다.
어떤 역사가 있었는가.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리 만들었으며 네 부족 모두를 사라지게 했는가.
전생에 홍련이 사라졌던 과정을 미루어 볼 때.
황가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으리라.
하란의 서글픈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마주해야 할 것은 홍련의 지배자. 그러니 그곳으로 안내해라. 지독히 얽힌 매듭이 있으니.”
곧 둘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운명을 짐작했는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검은 비가 더욱 굵어졌다.
머리 위 흑해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위태롭게 일렁였다.
* * *
황자가 고고하게 홍련의 성을 향해 잔혹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
“그를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그를 막는단 말이오. 그는 일곱 성의 자격을 획득했잖소.”
“그렇다고 별빛 제사장들을 공격하였는데 두고 볼 수 있습니까?”
“별빛 제사장들은 물론이고 홍련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자가 아닙니까!”
“현재는 싸울 때가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해야 할 때입니다. 만일 정말 방금 들어온 보고가 사실이라면 양패구상 아닙니까.”
“어허 말조심하세요. 일개 개인이 어찌 홍련 전체를 상대하렵니까.”
“피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피해가!”
붉은색 일색으로 치장된 알현실에선 무의미한 논쟁이 이어졌다.
별빛 제사장들을 공격한 이상 황자를 두고 보아선 안 된다.
그를 공격하기엔 피해가 너무 클 터이니 대화를 해 봐야 한다.
제국의 장난질엔 놀아날 수 없다.
황자가 아닌 서두칠성의 주인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로서도 지금 같은 상황은 처음.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황자의 등장은 충격적이었고 파격적이었다.
그때.
자박, 자박, 자박.
알현실 바깥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울렸고.
방금까지 떠들어 대던 홍련의 신하들이 입을 닫았다.
문이 열리자 고요해진 알현실, 살과 매끈한 바닥이 부딪히는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왜들 입을 다물었어? 하던 이야기들을 마저 해 보세요.”
가녀린 목소리가 울리며 등장한 것은.
홍련 특유의 붉은 궁장을 차려입은 여인.
팔 품과 등에 늘어지는 비단이 유독 길어 마치 한 마리의 붉은 나비와도 같았다.
그녀가 새빨간 궁장과 새까만 머릿결을 하늘하늘 펄럭이며 권좌에 앉자.
대비되는 새하얀 발이 빼꼼 드러났고.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 사이.
“칠성의 주인은 어디쯤 왔나요. 곧 이곳으로 들이닥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녀가 총명이 반짝이는 검은 눈을 굴려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옷과 입술은 붉고 피부와 치아는 하얗고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검다.
서부 오색 족 중 마지막 남은 홍련의 부족장이자, 홍련 순혈의 혈통을 이은 마지막 후손.
서부에 남은 마지막 붉은색.
선명한 대비가 눈이 아파 신하들이 꾸욱 눈꺼풀을 닫길 잠깐.
“불, 불입니다!”
밖을 지키던 무사가 성 앞 가득 몰려온 재해를 보며 기겁했고.
곧 성문을 지키는 이들이 울리는 종소리와 몰려오는 황자를 막기 위해 달려오는 무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신하들이 소란스레 떠들어 댔다.
도망가야 한다, 피해야 한다, 병사들을 더 모아야 한다, 별빛 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등등.
의견은 달랐으나 그래도 제 꾀를 내는 모습에.
“다들 진정하세요.”
그녀가 작게 미소 지으며 진정을 청했다.
붉은 입술이 나풀거리자 신하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걸로 되었다.
“우선 일곱 성의 주인을 만나보도록 하죠. 들어오라 하세요. 불은 밖에 두고.”
그녀의 명에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움직이려니.
“일곱 성의 주인이자! 제국의 황자이신 아르한 황자 전하의 행차이니 모두 길을 비켜라!”
마침 황자의 도착 소식이 가까이 들려왔다.
족장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아직 들어오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나 그녀의 의문과 별개로 빗금무늬가 아로새겨진 알현실의 문이 열리자.
드넓은 앞마당이 드러났고.
거기서부터 걸어오는 황자의 모습이 눈에 뜨겁게 새겨졌다.
황자를 바라보는 홍련 족장의 눈에 경탄이 어렸다.
“선명해.”
그래, 그 말대로 선명했다.
그녀 또한 선명한 대비가 강렬한 여인.
흑, 백, 홍의 세 가지 색을 아울러 가진 여인이건만.
어찌 저 멀리 걸어오는 황자는 저리 많은 색을 저리 선명히 가지고 있는 걸까.
머리 위엔 가득한 붉은 불꽃이, 얼굴엔 짙은 어둠이, 빛나는 두 눈은 광기 어린 진홍색, 휘날리는 머리카락은 백금이 녹아 풀어지듯 보드랍게 살랑였다.
발걸음 아래엔 검붉은 피가 피어났고 몸에는 황금색 광휘가 가득.
비슷했으나 모두 다른 색이 제 존재감을 어지럽게 피워 냈다.
상서로웠다.
방금까진 그녀의 색만큼 선명한 게 없었는데.
황자를 마주한 순간 어찌 색이 바랜 느낌.
그녀가 권좌에 앉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꺼져라.”
황자가 지금까지 네 발로 기어 움직이던 놈들을 물렀고.
비로소 피로 깐 융단이 끝난 자리.
그가 차근차근 계단을 걸어 오르니.
신하들이 압도되었는지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비뚤어진 입술에 광기가 가득히 피어 났다.
이윽고 홍련의 후예와 건국제의 후예가 마주했다.
그녀가 색에 압도되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마치 지금 앞에선 자는 그래.
“폴라-.”
거기까지 말을 하던 중.
“무엄하게 내려다보지 말고 내려와 마주해라. 붉은 일족의 후손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충격적인 모욕에 그녀가 우뚝 멈추었고.
“뭐해, 안 내려오고. 네가 홍련의 왕이라면 나는 제국의 황자다. 누가 감히 속국의 왕이 주인 된 제국의 황자를 내려다보는가.”
화르르르륵.
누구의 반항도 허락지 않겠다는 듯 알현실 가득 침입해 들어온 불꽃들이 열기를 부라렸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가운데.
권자에서 내려온 홍련의 지배자가 제국의 침략자와 같은 선상에 섰다.
황자의 키가 커 그녀를 내려다보니.
비로소 황자가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같은 멸망의 운명을 겪었던 두 수장의 만남이자.
전생 폭군의 아내와 현생 폭군의 만남이었다.
* * *
눈앞에 이지러지는 검은색과 붉은색, 흰색이 단정했다.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볼모, 망국의 군주, 회한, 외로운 삶, 두 번의 멸망, 땅에 처박힌 존귀……]
반면 피어오르는 운명은 절망 그 자체.
어찌 사람의 운명이 이리 기구할 수 있는가.
내가 처음 폭군의 운명을 보고 사람이 어찌 이리 악할 수 있나 놀랐다면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여인의 운명은 너무나 가련하고 참혹했다.
북부에 홀로 오랜 시간 버텼다던 백작가 영애 바이올렛도, 팔이 잘린 채 반역을 꿈꾸었던 평민 안드레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를 처음 본 때를 기억한다.
폭군이 병을 얻어 쓰러지고 대역을 맡은 지 꽤 오래.
탑에 갇힌 동생이 광증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발걸음을 옮겼고.
“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온 얼굴을 피 칠갑한 채로 피 말리는 비명을 질러 대는 동생과.
“쉬이,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
그녀를 꽉 안은 채 눈물짓던 검은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붉은 궁장을 입고 있었다.
강철성 관리인들과 대신들은 하잘것없는 야만인들의 복장이라며 뒤에서 조롱했으나.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어쩌면 자신의 몸에 난 상처, 동생의 몸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감추기 위해 굳이 붉은 궁장을 고집했던 것 아닐까.
그리 생각한 때도 있었다.
내가 들어선 순간 탑 안의 분위기가 쨍하고 얼어붙었다.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사실 충격적인 풍경에 정신이 없었던 터라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저 폭군을 따라 하고자 잔혹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황제와 황비였으나 서로를 찾지 않았다.
진짜 폭군도 마찬가지라 들었다.
황후로 맞이했으나 정작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다.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니.
그냥 그렇게 지냈다.
그녀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관심 없었고.
나는 침몰하는 제국을 살리느라 정신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제국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계절처럼 몰려올 즈음에.
“화, 황후께서!”
[중요 운명 자결이 대상의 목을 움켜쥡니다]
그녀는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기억 속 시계추처럼 흔들리던 창백한 발끝과.
지금 궁장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새하얀 발이 닮아 마음이 섬찟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은.
미안하단 한 마디뿐.
누구에게?
서부의 진실과 서두칠성, 홍련의 멸망에 관해 조사를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황후의 자결과 남겨진 짧은 유언에 얽힌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사실, 혹시라도 제국을 되살릴 실마리가 남아 있진 않을까.
그런 마음이 대부분.
그래, 그녀의 죽음은 그때의 나에겐 그저 제국을 살릴 수단에 불과했다.
그만큼 각박한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대가 홍련의 주인인가?”
“응, 맞아.”
“반말이라, 무엄하군.”
“남의 성에 들어와 이리 함부로 구는 황자보다 더할까.”
“뒤에 있는 불이 보이지 않는가?”
“옆에 선 무사들이 안 보여?”
나를 앞에 두고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꼴이 재밌었다.
입에 절로 미소가 피어 났다.
그래, 본디 황후였던 자가 이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지.
물론 그건 황후가 되었을 때 이야기.
“그래? 자신이 있나 보군?”
“무슨 자신?”
“홍련이 멸망해도 그리 얼굴을 당당히 마주 볼 자신이.”
멸망이란 위협에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앞에는 시린 눈동자가 뒤에는 치미는 광기와 화기가.
즐거웠다.
“감히, 감히. 일곱 성의 성주는 지금 홍련을 대적하러 왔나? 제국의 황자는 결국 홍련을 무너뜨리러 온 것이구나. 그러면서 무슨 대화를 원했지? 차라리 죽여. 제국이 하던 대로 마음껏 짓밟고 죽여.”
그녀의 한 서린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의문이 들었다.
“왜 막지 못했지?”
왜 그녀는 홍련의 멸망을 막지 못했는가.
단순히 6황자의 책략이 뛰어나서? 귀족들의 군세가 너무나도 강해서?
의문이 들었다.
나름 뛰어난 무사들이 곳곳에 보였다.
신비가 아니었다면 목숨이 위험했으리라.
또한 신하들의 운명을 보니 쉬이 굴종할 자들이 아니었다.
나름 똘똘 뭉친 세력.
심지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자신의 세력을 7성주의 직위까지 올려놓았지.
그때 보았던 무력함과 지금의 당당함이 도저히 맞닿지 않았다.
내 질문에 그녀가 반듯한 눈썹을 찌푸렸다.
“무엇을?”
차마 전생의 일을 말하진 못하여.
“오색족의 멸망, 홍련의 쇠락, 밖에 몰아치는 어둠을 왜 막지 못했는가.”
“그걸 막을 수 있었다면 너에게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부끄러운 일이야.”
“그래, 그래서 물은 거다. 홍련의 후예. 멸망을 앞둔 민족의 지도자가 무슨 뻔뻔함으로 그딴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겁이 없는 거냐, 생각이 없는 거냐.”
“으윽.”
이번에는 꽤 아팠나 보다.
신랄한 비판에 그녀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고 목울대가 일렁였다.
치미는 화가 꽤 큰 모양.
그럼에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화를 참는다라.
생각 외로 뛰어난 군주였으나.
내 앞에선 오히려 자충수.
“왜 직접 멸망시키라 지껄이면 내가 못할 줄 알았나?”
“……!”
“남을 시험하는 못된 심보부터 고쳐 주어야겠군.”
자신의 의도가 읽혔음을 깨달은 홍련의 후예, 아엘의 눈에 경악이 어렸고.
“먼저 피부터 좀 보고 이야기를 하자.”
입가에 떠오른 광기와 번뜩이는 살기를 마주한 그녀가 내 말이 진심임을 알아채고는 다급히 막아서려 했으나.
손을 내리자.
불화살들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쏘아졌다.
신하들을 보호하려는 아엘과 그녀를 보호하려는 신하들이 뒤엉킨 사이.
“살려 주세요!”
간절한 외침이 울렸다.
이제야 본심이 튀어나오는구나.
스스로를 죽였던 여인의 애절한 생존 갈망이 알현실을 메웠고.
[대상에게 새로운 운명 삶의 의지가 싹틉니다!]
[당신의 운명 패악과 잔혹이 홍련의 운명 멸망을 강하게 움켜쥡니다!]
비로소 붉은 일족의 운명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