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적야
죽음을 예감했다.
이엘, 홍련의 후예이자 현 족장.
그녀는 제국의 황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죽음을 예상했다.
살 가능성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전력으로 그를 막아서지 않았을까.
모든 무사와 병사를 동원해 그를 막아서지 않았을까.
이리 준비된 것처럼 그를 맞이하지 않았겠지.
차라리 그래 볼 걸 그랬나?
그럼 다음은? 황자의 복수를 명목으로 짓쳐 들 더 강하고 잔인한 제국군은? 막아 낼 수 있나?
그럴 리가, 사막 전체가 모여도 불가능하다.
가진 힘을 과대평가할 만큼 세상을 모르지는 않았다.
황자가 일곱 성의 열쇠를 획득했다던 순간 결심했다.
차라리 떨어지는 꽃처럼 죽으리라.
자신이 죽어서 홍련의 목숨을 이을 수 있다면 그리하리라.
그렇기에 희생을 각오했다.
보통은 나라의 수장을 처형하는 대신 모두의 존속을 보장해 주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예상 못 했던 사실.
하필 등장한 황자가 이렇게까지 미친 인간일 줄은 몰랐다.
보통 외교란 설전이 오가는 와중 차차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는 법.
때로 험한 말이 오가고 은근한 협박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합의점을 찾아가는 일.
그녀가 아는 상식은 그랬고 황자와의 대담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목숨은 내어주어도 자존심을 내어주진 않으리라.
그리 결심했건만.
완전히 틀렸다.
지금 홍련을 찾아온 아르한에게 남들의 상식은 중요치 않았으며.
긴말은 오히려 그의 광기를 자극할 뿐.
말로 하는 드잡이를 받아 준 이유도 전생의 이엘을 기억해서였지 그녀가 어여뻐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황자의 참을성은 매우 얕았다.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이엘이 해야 했던 일은 황자의 심기를 건드려 그에게 무언가를 얻어 보려는 것이 아닌 그저 굴복하는 것.
어쩌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그래도 홍련 족장 이엘은 머리가 모자란 자는 아니었고.
황자가 손을 내리고 불화살들이 모든 걸 휩쓸어 버리기 전.
“살려 주세요!”
황자의 성미를 파악하곤 다급히 용서를 구했다.
바로 코앞, 불화살이 우뚝 멈추었다.
이글거리는 날카로운 화살촉이 맹수가 먹잇감을 노려보듯 살벌하게 일렁였다.
온도가 올라서일까.
그녀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침을 꿀떡 삼키는 사이.
황자가 입술을 뒤틀며 물었다.
표정이 마치 빌어보라 촉구하는 것 같아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뭐라?”
“살려 주세요. 실수였어요. 당신과 대담을 하려 했는데 소용이 없었네요. 제가 멍청했어요. 그러니 화살을 거두어 주세요.”
“대담이라… 쓸데없는 짓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가?”
“네, 인정하고 사과드려요. 그러니 저만을 벌하세요. 여기 있는 신하들은 제가 준비시켜 놓은 자들. 죄가 없어요.”
황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이엘의 얼굴을 살폈다.
무엇을 저리 골똘히 고민하는 걸까.
방금 모두를 죽인다는 결정은 이리 쉽게 했으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은 저리 심각히 고민하다니.
잘못 걸렸구나.
이엘이 질끈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황자를 향해 결백함을 주장했다.
허나.
“개소리를 즐겨 하는군. 홍련의 후예.”
황자는 이미 그녀의 심계 따윈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비웃었다.
“원하는 게 있어. 그것도 간절히.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루고 싶은 염원이. 그게 무엇이지. 이야기해 봐라. 듣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겠군.”
그가 유희를 즐기듯 신하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이엘을 휘둘렀다.
인질을 죽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겁먹지 않았겠으나.
아까 별빛 제사장 몇을 쉬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방금 과감하며 잔혹한 결정을 보았다.
졌다.
그녀가 직감했다.
처음부터 진 것이다.
황자라는 직위에 서두칠성의 주인이란 명분까지 얻은 이상.
협상 테이블은 처음부터 기울어졌다.
거기에 광기와 살기, 잔혹한 손속과 타오르는 불꽃이 이를 무겁게 내리누르니.
“하아-. 홍련의 생존을 보장받으려 했어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고작 그대의 목숨 하나로?”
“자존심을 바닥에 처박으시네요. 제 목숨으로 모자란다면 여기 선 모든 신하의 목숨과 홍련의 지배권을 주고서라도 홍련이란 이름을 남기려 했다면 고작은 아니겠죠.”
분명 파격적인 발언이었으나 자리에 선 자들 모두가 각오했다는 듯 침묵했다.
보통 점령이란 모름지기 지배계층의 몰락으로 이루어지는 법.
여기 알현실에 모인 자들은 서로 뜻은 달랐으나 홍련을 지키고자 하는 대의는 같았던 것.
스스로 몰락을 각오한 그들의 결심이 꽤 고결하고 아름다웠으나.
“미련하구나, 미련해. 홀로 고립된 시간이 길었다더니. 그 미련한 생각들이 가련할 정도다.”
황자에겐 그저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주변에 가득한 불들이 이글거리며 따라 비웃었다.
감히 비웃음에 분노를 표할 수 없었다.
황자의 눈에 휘도는 광기가 그만큼 거대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맑은 웃음 사이 얼핏 서글픔이 느껴졌기에.
* * *
의문이 풀렸다.
그들의 결심은 간단했다.
만만히 보이지 않는 희생.
자신들의 목숨과 특권을 값으로 홍련의 목숨을 사려 했다.
위대한 결심을 보면 감동하여 약속을 지켜 줄 거로 생각했던 걸까.
참으로 순진했다.
이래서 전생의 홍련과 서부가 망했구나.
6황자는 본디 사람의 선한 의도를 이용해 배를 찌르는 녀석.
이들의 선한 결심을 보곤 옳다구나 속여 먹었겠지.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으려니.
[대상의 운명 헛된 희생, 덧없는 결심, 배반당한 선의를 확인합니다. 당신의 운명 책략과 현혹이 상대의 운명에 스며듭니다]
내 손에 올려진 순진한 운명들이 떠올랐다.
저들의 결심이 남에겐 진수성찬이며 나름의 책략이 자신들의 목줄이 되었음을 이들은 알까.
아니, 몰랐으니 그리 멸망했겠지.
죄책감을 못 이기고 목매달았겠지.
폭군은 어찌하여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순진한 여인을 황후에 앉혔는가.
아니, 그가 원했을 것이다.
“참으로 모질지 못한 성미로군. 차라리 홀로 살고자 발버둥을 칠 것이지.”
이엘은 독하지 못하니까.
자신을 독살하지 못할 것을 믿었으니까.
황권에 간섭할 외가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힘을 잃은 꼭두각시를 옆에 세워 둔 것이 아닐까.
세력마저 멸망하여 텅 빈 껍데기에 불과했던 여자를.
그리곤 돌아보지도 않았던 것이겠지.
참으로 기구했다.
그런데 나에겐.
“재미있어. 재미있어서 죽이기 싫어졌다.”
이들의 선의와 결심이 즐거웠다.
제국에선 보지 못했다.
모두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제국을 팔아먹느라 바빴거늘.
북부에서 보았던 루카르와 노병들이 떠올랐다.
얼핏 그들의 희생을 닮았다.
이런 이들이 제국에 더 많았다면 그런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겠지.
이런 순수한 결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쯧, 미련한 홍련의 후예야. 잘 들어라. 인간의 선의에 기대지 마라. 같은 검은색이라도 너의 머릿결과 밖에 쏟아지는 검은 비가 다르고, 같은 붉은색이라도 네가 입은 궁장과 쓰레기들이 흘릴 피는 다르니.”
그녀에게 작은 조언을 건넸다.
함부로 사람의 선함을 기대치 말라고.
갑작스런 조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당장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과거의 연을 생각하여 선의를 베푸는 것은 여기까지.
나 또한 사람의 선의에 기댈 생각이 없었기에 지금부턴 진짜 움직일 때였다.
“나 말고 홍련에 들어온 자들이 더 있는가.”
“없어요.”
“진정으로?”
“네, 제가 알기로는요.”
“족장의 눈을 속이고 외부인을 들여올 수 있는 직위에 있는 자는.”
“…그건 있군요.”
“누구지.”
“별빛 제사장, 그들이라면 가능해요.”
“만일 그들이 네 눈을 속이고 제국의 인사들과 내통했다면 죄목은?”
“…반역, 반역이에요.”
그녀의 답에 아직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놈들을 바라보았고.
시선이 닿자 그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길 잠시.
“너, 고개를 들라.”
“네, 네네.”
“묻겠다. 나 말고 다른 외부인이 홍련의 섬에 들어왔는가.”
“아니-.”
끄아아악!
놈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불화살을 하나 잡아 놈의 몸에 살포시 박아 넣었다.
화살촉의 끝이 들어갔을 뿐이지만 타오르는 고통에 놈이 고함을 질러댔다.
살타는 소리, 냄새, 비명이 시끄러웠다.
“몸 흔들지 마라. 더 깊게 박힌다.”
“히익, 히이이익! 끄으윽!”
“다시 묻지 홍련의 섬에 나 말고 다른 외부인이 왔는가.”
“안 왔-끄아아악!”
끝까지 거짓말을 하기에 화살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리긋자.
놈이 거품을 물더니 기절했다.
쓰러진 놈을 뒤로하니.
“다음. 답해라.”
“없습니-.”
다른 놈도 같은 거짓을 말하기에 바로 화살촉으로 내리그었고.
덩달아 기절했다.
“정신력들이 약하구나. 너는 오래 버티길 바라마.”
마지막 남은 놈 하나.
상대를 향해 짙게 미소 지으며 화살촉을 찬찬히 가져다 대려니.
“있습니다! 들어온 자들이 있습니다!”
놈이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못 이기곤 비밀을 실토했다.
“누가, 몇 명이나 들어왔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만 숫자가 꽤 여럿이었습니다.”
“짐작 가는 것도 없나.”
“마법, 마법을 쓰는 듯했습니다.”
“그렇군. 훌륭하다.”
“대답했으니 목숨만은.”
“그거 아나?”
화살촉으로 놈의 턱 끝을 들어 올려 울먹이는 표정을 마주 보았다.
놈의 눈동자 속, 서늘하게 휜 눈매와 입꼬리가 비췄다.
내 얼굴이지만 참 잔혹하게도 웃으며.
“본래 배신자가 가장 쓰레기인 법이야.”
화살로 놈의 목을 꿰뚫었고 놈이 절명했다.
정보를 얻은 대가로 고통은 없었으니 충분했겠지.
곧 불을 던져 기절한 놈들 또한 잿더미로 만들었다.
“허억, 별빛 제사장들을 그리 죽여 버리면.”
“자, 잠깐.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하들이 그제야 경악성을 토했으나.
“말리긴 뭘 말려 이미 뒈졌는데. 말리고 싶음 불 속으로 뛰어들던가.”
내 비아냥거리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들은.
“죽기 전에는 침묵했으면서 뒤늦게 고결한 척하지 마라. 같은 꼴 당하기 싫으면.”
놈들의 아니꼬운 짓을 지적했다.
한눈에 보아도 족장과 별빛 제사장들의 관계가 대척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족장을 따르는 이들이 별빛 제사장들의 죽음을 아쉬워할 리가.
내가 힐끔 아직도 벌서듯 무릎을 꿇고 있는 이엘을 바라보자.
“외부인을 들인 것부터 부족의 배신자. 배신자는 쓰레기. 태워 마땅하죠. 잘하셨어요. 황자.”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하게 떨리는 턱 끝이 우스웠다.
말려야 한다 외쳤던 녀석들은 내심으로 죽음을 반겼고 배신자들의 죽음을 축복하는 족장은 정작 속으로 아파하다니.
아직 허세를 버리지 못한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며 더욱 짙게 웃었다.
“견뎌라. 더 아픈 일이 가득할 테니.”
“우읍-.”
알고 맞으면 덜 아플 테니 기껏 알려 주었건만.
이엘은 이런 현장이 익숙하지 않은 듯 구역질을 해댔다.
흔들리는 검은 머릿결과 허물어지는 붉은 궁장이 녹아내리듯 물결쳤다.
그 모습을 외면하며.
“안내해라. 홍련의 배신자 별빛 제사장들과 홍련의 섬을 허락도 없이 침범한 진짜 침입자들이 있는 곳으로.”
당당히 알현실 밖으로 나선 순간.
“제국의 침입자를 잡아라! 사막을 멸망시키려는 자를 잡아라!”
붉은 궁성 바깥부터 검은 깃발이 몰려왔다.
검은 바탕 위에 은빛 별 무리가 수놓아져 있으니.
밤하늘 같은 이들이 홍련을 잡아먹으려 했고.
“잠깐! 지금 무엄하게 무엇 하는 것들이냐!”
“족장이 제국과 내통하여 홍련을 팔아 넘기려 한다! 쳐라!”
곧 밖에서부터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반역.
“별빛 제사장들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등대지기가 담벼락 너머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검은 깃발과 붉은 깃발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너와는 어떤 관계냐.”
“등대지기가 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수련법은 그들에게만 전해지는가. 아니면 너에게도 그 지식이 있는가.”
내 담담한 물음에 그가 침묵하길 잠시.
“…사막의 등대지기들이 모이면 충분히 복원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하다.”
“무엇이 충분한 건가요?”
하란의 순진한 질문에 오라비가 그녀의 귀를 얼른 막았고.
“모두 죽여도 되겠어.”
죽여도 되겠단 판단이 서자 알현실 가득했던 불화살들이 일제히 빠져나가 성 위로 넓게 퍼졌다.
붉은 성이 붉은 우산을 쓴 것 같은 풍경.
모두의 얼굴에 붉은빛이 드리우니.
이것이야말로.
“이제야 홍련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군. 안 그래? 홍련의 후예.”
붉은 세상이 아닐까.
타오르는 붉은 장막을 드리운 아래.
아엘의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 홍조를 띠었고.
내 백금발도 덩달아 붉게 일렁였다.
얼핏 어둑하게 창문을 투과한 붉은 기운이 알현실 가득한 분노와 두려움, 절망과 희망, 혼란과 괴로움마저도 벌겋게 물들였다.
잠시 권태로운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본디 보였던 검은 바다와 일곱 개의 별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가득한 불과 적색.
마음에 더욱 들었다.
내가 이루어 낸 붉은 세상.
심장의 고동이 느렸다.
두근, 두근, 두근.
항상 몰아치듯 달렸던 첫 번째 심장 적염이 아주 느리게 맥동하며 도드라진 존재감을 뽐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아 알겠다.
제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았구나.
녀석의 마음이 나와 같아 흡족했다.
이렇게 한 가지 색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속에서 오랫동안 싸웠다.
훌륭한 전우들을 앗아 갔던 하얀 밤, 백야.
오랜 순간을 기억했다.
나의 불꽃도 나도.
녹지 않는 혹한 속 에스키모들의 신비를 소화하며 그 기억을 키워 나갔다.
어쩌면 분노, 어쩌면 회한.
그래도 한 가지 염원이 있다면 그때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
심장과 주인의 마음이 통했고.
오랜 시간 들여 모든 걸 녹여냈으며.
지금 최적의 조건을 만났으니.
어찌 운명이 보고만 있으리.
-눈이 멀기 싫은 자는 눈을 감으라.
[녹지 않는 혹한 사이 담겨 있던 신비 백야의 일부를 얻었습니다. 첫 번째 심장 적염이 잠깐이나마 세상을 덮습니다]
적야가 몰아칠 시간이었다.
* * *
소름이 돋았다.
-홍련의 족장을 따르는 자.
-사막의 법도를 아는 자.
-서두칠성의 주인을 존중하는 자.
머릿속 삼엄하게 치미는 황자의 목소리가 반복될수록 두통이 몰려왔다.
듣고 싶지 않았으나.
신비를 담은 목소리가 자꾸 뜻을 강요했다.
평생 입고 보아온 색이건만 두려웠다.
시야를 가득 덮은 붉은색에 지워질까.
아니 어쩌면 이미 시각을 잃은 것은 아닐까?
평생 익숙하다 생각했던 당연하다 생각했던 홍련의 붉은색이 낯설고 두려웠다.
색을 빼앗겼다.
이러한 경험은 처음.
서로를 공격하던 이들도 알현실 가득한 이들도 두려움에 떨었고.
홀로 고고하게 선 황자가.
-눈을 감아라. 지워지기 싫다면.
마지막 경고를 반복했다.
모두가 황급히 눈을 닫아 영혼을 보호했다.
떨리는 눈꺼풀이 삭풍에 흔들리는 창문 같아 서러웠다.
동시에 검붉은색이 닫힌 시야 가득히 번졌다.
물감을 떨어뜨리듯 화하게 번져 나가는 색이 점점 짙어졌다.
영혼을 물들이듯.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았던 궁성의 풍경을 모조리 지워 내길 잠시.
이어지는 시간이 영원과 같아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순간 지금 딛고 있는 바닥이 바닥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잊었다.
물속을 유영하듯, 뜨거운 욕탕 속에 잠수하듯 먹먹한 감각들이 전하는 두려움만이 선명했다.
-눈을 떠도 되느니라.
황자의 목소리에 모두가 번쩍 눈을 뜨며 밭은 숨을 뱉어 냈다.
온몸에 피어나는 열기와 달뜬 숨, 뚝뚝 떨어지는 땀 때문에 꼴이 정말 온탕에 푹 담그고 왔다 해도 믿을 모양새.
이엘이 급히 밖을 확인했고.
“아.”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을 뱉어 냈다.
문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불.
알현실 앞마당을 비롯하여 저 바깥까지 타오르는 불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붉은색과 세력을 다투던 검은색은 단 한 점도 없었고.
오직 오롯이 모두를 굽어보는 황자의 단단한 등 뒤, 늘어뜨린 그림자만이 까맸다.
역류하는 바람에 백금발이 살랑였다.
그가 살며시 옆으로 돌아서자.
날카롭게 떨어지는 콧대, 휘어진 입가와 빛나는 진홍색 눈동자가 이목을 잡아끌었다.
열린 문은 사각 액자, 배경은 타오르는 불, 홀로 서서 돌아보는 어둑하며 찬란한 황자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림의 주인이자 모든 일의 원인인 그가.
“가자 홍련의 아이들아. 이제 진짜 너희들의 권리와 의무를 되찾아야 할 때다.”
사람의 목소리로 그들을 이끌어 막 궁성 밖으로 나서니.
그가 다루는 불이 궁성 전체를 감쌌으나.
무엇도 타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다.
황자가 손을 휘두르자 불이 늘어서듯 길을 비켰고.
곧 그를 따라 살아남은 홍련의 군세와 붉은 불꽃이 행군했다.
온통 붉은색뿐이다.
진짜 홍련이 홍련의 섬을 내달렸다.
불 가운데를 걷는 황자의 걸음 옆, 반 발짝 뒤처진 자리에는 홍련의 주인 이엘이 뒤에는 그와 그녀를 따르는 이들이 가득하니.
전생 폭군과 황후처럼 둘이 나란히 패악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