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적과 흑
황자가 향하는 방향은 명확했다.
“별빛 제사장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반역의 죄를 물어야겠다.”
유일하게 족장과 세력을 견줄 수 있는 별빛 제사장들이 머무는 장소.
황자가 걷는 길.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검은 깃발들이 불에 감겨 흩어졌다.
그가 뿜어낸 불은 다른 색을 용납하지 않았다.
붉은색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태워 버릴 듯 끝없이 일렁였고.
주변을 걷는 이들의 눈이 따끔거렸다.
영혼을 빨아들이듯 교태롭게 흔들리는 불꽃이 신기루처럼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더 나아가 욕망, 감정을 비추었다.
몇몇이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불을 바라보지 마라. 놈들처럼 잡아먹히기 싫다면.”
황자의 말에 문득 모두의 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러고 보니 검은 깃발은 남았는데 이를 들고 몰려온 군세가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탔다면 시체라도 남아 있어야 하건만, 하다못해 실탄 냄새와 메케한 연기라도 남아 있어야 하건만.
주변엔 깨끗한 불 냄새뿐,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많던 병사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믿기 어려웠다.
정말 홀로 모든 군세를 지워 버렸단 말인가?
진정 홀로?
“지워 버리기라도 한 거냐? 그 짧은 시간에? 이건 태웠다고 볼 수 없겠는데.”
살라스가 믿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물었으나.
황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
참지 못한 살라스가 다시 물으려 할 때.
“살라딘, 너의 그 어쭙잖은 마법과 신비를 비교치 마라. 이미 답이 나왔는데 자꾸 묻는 이유가 뭐냐. 황자의 자아를 버리라 했지. 지능을 버리라 했나?”
“꼭 그렇게 재수 없게 답해야 하냐. 그냥 맞아 한 마디면 될 것을. 어휴, 그러니 어릴 적부터 친구가 없었지.”
“그럼 살라딘 마법사님께서는 친구가 많으셨어요?”
“훗,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릴 적부터 주번에 친구가 끊이질 않았어. 저 스프링 필드에만 해도 부르면 달려올 마법사들이-.”
살라스가 괜히 말 걸었다며 투덜거리다가 솔의 투명한 물음에 당당히 어깨를 폈다.
친구 많다는 자랑이 저리 신날 일인가 싶을 때.
“아첨꾼들을 친구라 부르던가? 아서라, 살라딘. 진짜 친구라 생각하는 이가 다섯은 넘을까.”
“무슨 지금 생각만 해도 스무 명은-.”
“너 말고 그 당사자들. 네가 친구로 생각하는 그들이 너를 친구로 생각하느냔 말이다. 진짜 친구라 생각하는 거냐? 설마? 그 정도로 멍청했나?”
“…나쁜 새끼.”
이번에도 상처만 남은 살라스가 푹 고개를 숙였고.
솔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감히 황자의 몸에 손을 댄다며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왜인지 축 처진 어깨가 위로를 기뻐하는 듯 보였다.
하란이 그들의 대화를 듣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친구라 생각하는 분이 계셔요?”
“친구?”
“네! 친구요!”
“없다. 있었던 것도 같은데 죽었군. 아니 죽어서야 친구가 되었다.”
“네?”
“추운 겨울날 싸우다 명을 달리했다. 그들을 친구로 여긴다. 비록 죽었으나 이해해 주겠지.”
“아, 죄송해요.”
황자의 담담한 말에 하란이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저렇게 담담히 고백할 말인가.
반면 이번엔 바이올렛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전하께선 그분들을 친구로 여기셨나이까.”
“그래. 죽고 나서야 친구로 여기기로 했다.”
“죽고 나서라면 살아 있을 때는 친구가 되지 못합니까.”
“살아 있는 자는 친구가 되지 못한다. 그 누구도.”
“외로운 삶입니다. 따르는 이들이 많이 생기지 않았나이까.”
“영애. 또 죽은 지식을 이야기하는군. 아니, 책 속에 적힌 알량한 감정인가. 충고 하나 하지. 언젠가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명심해라. 외로워져야만 한다. 본디 정점에 서는 자는 외로워야만 하는 법. 누구도 친구로 여기지 마라. 날 섬기는 자들과 내가 통치해야 하는 자들. 그뿐이다. 동등한 관계는 없어. 황제는 누구보다 존귀해야 한다.”
황자의 솔직한 답에 모두가 입을 꾸욱 닫았다.
얼핏 황자의 외로움이 느껴서 주변에 흐르는 불이 서글펐다.
하란의 눈에도 그의 앞에 놓인 외롭디외로운 길이 보였다.
바이올렛 또한 마음 아픈 시선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북부에서도 그리 외롭게 싸우더니.
어쩌면 황자 나름의 제왕학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가장 앞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길을 가장 당당하게 걷는 자.
문득 공포로 와닿던 걸음이 존귀해 보임은 왜일까.
그때.
“흥, 인기 없는 걸 은근히 제왕학과 엮어 에두르지 마. 네가 친구 없는 걸 무슨.”
“난 그런데 넌 진짜 없나 보지?”
“으윽! 아니야!”
“골방에서 마법만 연구하니 친구가 생길 턱이 있나. 마법식이 유일한 친구라니. 딱하다, 마법사.”
“그래서 전 뒤에서 걷겠습니다! 친구가 아니어도 따르겠나이다! 이 안드레! 전하의 일부로서 항상 곁에 있겠나이다.”
살라스와 안드레가 일부러 분위기를 풀었다.
황자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공감하는 바가 있는지 살라스의 얼굴이 쓰라렸고 그런 형의 얼굴을 본 황자가 피식 작게 웃었다.
황손이라면 모두 겪는 고충.
솔이 안드레의 외침을 들으며 흠칫 어깨를 떨더니 새끼손톱을 유심이 바라보다 입을 비죽였다.
진실을 모르는 안드레만이 신나 떠들 뿐.
홍련의 후예 이엘이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문득.
“아, 맞아. 지금 별빛 제사장들과 싸우러 가는 중이잖아요. 소풍 가는 줄 알았어.”
지금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적과 싸우러 가고 있는 길이라는 걸 상기했다.
대체 이 여유로움은 무엇이란 말인가.
특히 황자.
방금까진 그리 강렬한 광기를 내뿜어 놓고는 지금은 유람이라도 가듯 여유가 넘치지 않는가.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 걸까.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짐작했는지.
“저들은 본래 저런 성격이더군요.”
일곱 번째 성주이자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끌려온 회색 늑대 푼이 아뢰었다.
그녀가 힐끔 그를 보곤.
“어찌 여기까지 왔지요. 성주께선.”
“황자는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
원망하듯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라렸다.
저런 미친 인간이 왔으면 미리 좀 말을 할 것이지!
더군다나 이미 들킨 마당에 왜 침묵했단 말인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상황이 너무 급했습니다.”
“내가 함부로 발설하면 죽이겠다 말해 두었다. 그와 관계된 모두를.”
황자가 뱉은 진실에 그제야 이엘이 푼을 이해했다.
이엘과 푼의 스치는 눈빛에 동질감과 동정이 어렸다.
본디 굳건한 동맹이자 서로를 믿는 주군과 신하였기에 서로를 불쌍히 여겼다.
‘잘못 걸린 거 같지?’
‘잘못 걸렸습니다.’
‘살 수 있을까.’
‘제가 봤을 땐 대적하는 것보다는 훨씬 살 가능성이 큽니다.’
그나마 황자와 싸우는 것보다는 함께하게 되어 다행이라며 처지를 위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자가 불꽃을 헤치며 나아가길 꽤 오래.
드디어.
“보입니다. 별빛 제사장들이 머무는 별빛 제단이.”
등대지기가 목적지에 당도했음을 알렸다.
훌륭한 길잡이다운 태도.
끝까지 안내를 놓치지 않는 모습에 황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깜깜하군.”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말 그대로 별빛 제단은 거대한 신전 형태로 몰려왔던 깃발과 같이 새까만 색.
건물 전체에 어린 은은한 은빛 무리가 얼핏 보기엔 사막의 하늘을 건물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았다.
붉은색 일색인 홍련의 섬과 대비되어 짙은 어둠을 품었다.
그 모양새가 황자에게는.
“저들의 미래처럼.”
암울한 미래로 보였던 모양.
고약한 농담을 던지며 한바탕 웃은 그가.
“전해라.”
자신의 말을 전하라 명하니.
“검은 굴속에 숨어 있는 버러지 같은 반역도들아. 일곱 성의 자격을 얻은 자와 홍련의 주인이 직접 머리통을 깨러 왔으니 당장 대가리를 조아려라. 깨기 쉽게.”
“오우.”
신랄한 발언에 모두가 침을 꼴딱 삼켰다.
이 험한 말을 누가 당당히 외칠 것인가.
서로가 눈치를 보는 사이.
“야, 이 개같은 반역도 놈의 새끼들아! 네놈들의 그 더러운 굴속에서 꼼짝 말고 대가리나 내밀어라! 지금 일곱 성의 주인과 홍련의 주인이 몰려가 당장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릴 테니!”
안드레가 당당히 황자의 말을 더욱 고약하게 바꾸어 전달했다.
그리곤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뒤돌며.
“전하의 일부로서 진정 뜻을 전했나이다. 이왕이면 하수구 구역 특제 걸쭉한 욕설도 추가할까요? 맛깔나게 잘할 자신 있습니다.”
천박한 어휘력을 과시했다.
반짝이는 눈이 칭찬이라도 바라는 모양.
다들 어디다 내놓아도 부끄러운 동료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려니.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구나. 어디 해봐라. 맛 좀 보자.”
황자가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짙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떠밀었고.
안드레에겐 다른 이들의 질책과 부끄러움보다 전하가 내리는 한 번의 칭찬이 더욱 기쁨이었다.
그리하여.
입에도 담지 못할, 천박하디천박한 욕설을 우렁차게 외쳐 대기 시작.
등대지기가 쫑긋거리는 하란의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듣지 마. 귀 썩는다.”
그렇게 검술의 깊이보다 더욱 깊은 욕설의 경지를 자랑하며 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다채로운 욕을 뱉어 내길 몇 분.
“그만! 그만! 이런 미친!”
잠잠하던 별빛 제단에서 드디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안드레의 욕설을 듣다 못한 제사장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마주 욕설을 뱉어 냈고.
안드레 홀로 당당히 서서 그들 모두를 상대하니.
그야말로 현장은 아수라장.
본디 가장 천박하다는 하수구 출생 거기다 고아 출신인 그가 밀릴 리가 없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용사가 아닌가!”
황자가 손뼉까지 쳐 가며 안드레의 용맹을 칭찬했다.
* * *
사실 욕사, 욕맹이 더 맞을 정도로 욕으로 점철된 현장이었으나.
어쨌든.
“저기, 숨어 있던 쥐새끼들이 머리를 드러냈구나. 안드레, 들어와라.”
목적을 이루었으니 되었다.
내 철수 명령에 안드레가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멋지게 뒤돌아서서는.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니.
나 또한 그의 예를 진심으로 받아.
“수고했다. 거친 싸움을 끝마친 경은 들어가도록.”
“네, 전하!”
그의 노고를 위로했다.
검은 나누지 않았어도 혀로 서로를 베었으니 그야말로 설전.
홀로 수백을 상대한 기사의 업적을 경시할 순 없지.
그런 우리를 보며 해괴하게 일그러지는 이엘의 표정이 재밌어 멈출 수 없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건물 밖으로 쥐새끼 같은 얼굴을 드러낸 놈들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고.
그중 익숙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1전투 마법사단이 어찌하여 거기 있는가.”
모래성에 만났던, 살라스를 따라 서부에 온 강철성 소속 1전투 마법사단.
자격을 얻지도 못하였을 놈들이 어째서 홍련의 땅에 먼저 들어와 있는가.
그것도 하필 별빛 제단과 함께.
놈들과 섞여 있는 꼬락서니가 꽤 익숙해 보였고.
“너희 처음이 아니구나. 홍련의 섬에 온 게.”
단번에 저들이 만난 게 처음이 아님을 알았다.
맞춰 입은 듯 검은색 일색인 복장.
허리춤에 매달린 하얀 가면.
그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나와 홍련의 주인을 번갈아 보는 중에도.
“답해라. 아니 먼저 예를 취해라 황가의 마법사라는 자들이 어찌 황자를 멀뚱히 보고만 있지? 죽고 싶은 건가?”
예를 취하지 않았다.
마치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듯한 멀뚱한 표정들.
내 협박에 비로소.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을 뵈오.”
그들이 대놓고 뻗대듯 삐딱하게 고개 기울여 예를 표했다.
저런 예는 모욕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목숨 걸고 싸울 입장. 서로 차릴 예의도 없다는 건가.”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1단장이 삐딱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소. 그대는 반역을 두고 볼 이가 아니고 우린 하달받은 명을 이행해야 하니 부딪히는 게 당연지사. 어차피 서로 죽여야 하는 마당에 당신 같은 패악스러운 자에게 예를 차릴까.”
“황자를 죽이겠단 말을 쉽게도 담는구나.”
“사유는 명확하오. 7황자 전하 시해. 결투가 아닌 일방적인 함정과 비열한 술수로 벌어진 일.”
“개소리.”
“개소리라 하기엔 우리가 당한 일이 있소만.”
“너희의 명분은 모두 틀렸다. 믿는 자가 있겠지. 아마 황후? 그 여자가 너희에게 명했나?”
“감히-.”
“단장! 지랄하지 마라! 내게 그 여자는 너처럼 굴종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 개같은 새끼야!”
갑자기 터뜨린 기세에 놈이 말을 멈추었다.
분노를 따라 지금껏 잠잠하던 불꽃이 일제히 몸을 뒤틀었다.
내 몸과 머리를 따라 치닫는 분노와 광기가 전염되듯 불이 점점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겁게 오르는 열기과 역류하는 바람에 휘말힌 옷이 몸을 휘감는 사이.
“첫째! 황가의 자식들은 서로를 죽인다! 결투든 아니든 방식은 중요치 않다! 누가 감히 지엄한 강철성의 약육강식 법도를 바꾸었는가!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황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죽일 수 있다.
다만 그 방법에 따라 지지세력의 이탈을 감내해야 할 뿐.
즉 놈들이 말한 비겁함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덕분에 폭군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끝까지 살았기에.
방식이 어떠했든 남의 뒤통수를 쳤든, 몰래 암살을 시도했든, 악마의 힘을 빌렸든 끝까지 살아남았기에 가장 강했고 결국 황제 위에 올랐다.
어쩌면 제국의 원동력이 된 약육강식의 논리이자 어떻게 보면 모두를 패망의 길로 이끈 악법.
그리고 놈이 틀린 것 하나 더.
“누가 죽었다는 거냐. 이 빌어먹을 놈들아.”
살라스는 살아 있다.
그것도 바로 내 옆에.
분노는 본래 전염성이 강한 법.
로브를 걷어 드러난 살라스의 얼굴엔 살기가 가득했다.
“황후 손아귀에 놀아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너희가 그러고도 황가의 마법사들인가.”
아마 자신이 이용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더군다나 평소 싫어하던 황후의 계략에 휘말릴 뻔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참기 어려운 모양.
한 가지 맞는 게 있다면.
“황자는 죽지 않았고, 너희는 제국이 아닌 황후의 명을 받아 삿된 일을 계획했으며, 지금은 대놓고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 자, 이 중 너희를 살릴 이유가 있나?”
서로 죽여야 할 운명이라는 점.
구겨지는 놈들의 얼굴을 보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본래라면 6황자와 황후의 계략에 별빛 제사장들의 반역이 성공했겠고.
홍련의 주인, 이엘은 홍련을 존속하게 해준다는 거짓을 믿고 물러났으리라.
그리고 제사장들과 마법사들이 별빛 제단을 이용하여 서부에 흑해를 이루었겠지.
아니 어쩌면 여기서부터 검은 비가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순간 모든 게 바뀌었다.
놈들의 검은 반역은 내가 굽이굽이 펼친 적야에 지워졌고.
이엘은 헛된 선의에 기대기보단 차라리 싸우기를 택했다.
제사장들과 마법사들이 제단을 이용하여 흑해를 만들기도 전에 검은 비가 쏟아졌고 본디 멸망했어야 할 서두칠성은 제 모습을 회복했다.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악의 구렁텅이, 역류, 멸망, 오용, 거짓된 사용이 가득합니다]
[본디 맞았을 장소의 운명들이 당신으로 인해 어긋납니다! 사막의 운명 흑해, 홍련의 운명 멸망이 뒤틀려 별빛 제단의 운명 또한 뒤틀립니다]
[운명 학살이 크기를 키워 나갑니다!]
전생과 달라진 모든 운명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어긋난 톱니바퀴들이 뒤틀리듯 일어났어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 중심엔 내가 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황가 비고에도 남아 있지 않았던 홍련과 별빛 제단의 진실을 마주할 시간.
바닥에 늘어뜨렸던 브레이커가 불을 머금고 와르르릉 울자.
놈들이 대답 없이 실드를 짜 올렸고.
“모두 죽여라. 한 명도 남김없이.”
차가운 명령에 일제히 홍련의 군대가 적을 향해 내달렸다.
검은 바닥을 차고 달리는 그들의 붉은 발자국이 선명했다.
살라스가 살기를 터뜨리며 마법으로 1전투 마법사단이 짠 실드를 부수자.
솔이 빛을 던지고 그림자를 날카롭게 뻗어 균열을 넓혔다.
안드레와 바이올렛이 선두, 그들의 주위로는 알프레드의 사철이 공격을 방어하니.
적색이 흑색을 오염시키듯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그들이 안으로 들이칠수록 내가 뿜어낸 불도 따라 번져갔다.
선명한 세력 다툼.
전투 한복판을 평화로이 걸었다.
적색이 흑색을 잠식하는 범위의 경계선에서.
반 발짝 뒤에 이엘을 대동한 채.
피와 시체로 이루어진 융단을 걸어.
제단의 중심으로 향했고.
걸음걸음마다 목숨과 결의와 분노와 이기심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이 모든 걸 지르밟고 나아갔다.
패악스럽게, 잔혹하게.
마침내 중앙.
어느새 몰린 마법사들과 제사장들이 빙 둘러 마지막 방어선을 형성한 제단의 가장 높은 곳.
“우리의 일을 방해하려 하는가.”
눈에 진물이 어릴 정도로 늙은 노인 하나가 탁한 눈동자로 우리를 질책했다.
“이 모든 일이 제국을 위함임을 모르는가.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려 옳은 길을 선택하시게. 제국이 준비한 일을 제국이 망친다면 그만큼 미련한 일이 어디 있나.”
노인이 나와 살라스를 바라보며 제국을 위함을 밝혔으나.
“지랄하고.”
“자빠졌네.”
오랜만에 형과 동생의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의 거절에 노인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곤.
“모두 가면을 써라. 미련한 자들의 심장으로 흑해를 완전히 이루어야겠다.”
명을 내리자.
살아남은 제사장들이 일제히 하얀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노인 또한 기묘한 선이 그려진 가면을 쓰니, 제단 전체에 어둠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 어어? 저 가면?”
솔이 탄성을 지르며 그들이 쓴 가면을 가리키곤.
자신의 가면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가면.
바로 강철성 영림 속 저주받은 귀신들의 하얀 가면.
그들의 것과 솔의 것이 똑 닮았다.
그리고.
“그 어설픈 가면은 어디서 난 쓰레기지?”
노인의 가면을 비웃으며.
선명한 귀신이 그려진 하얀 가면을 얼굴에 눌러쓰니.
가면 속 확대되는 동공들 속, 경악과 절망이 별 무리처럼 어렸고.
“백귀면! 말도 안 돼! 사람이 어떻게 저 가면을!”
노인의 떨리는 목소리와 더불어.
내가 몸에 깊은 그림자를 둘렀다.
제사장들이 두른 어떠한 어둠보다 내가 두른 것이 가장 까맸고.
이제 적과 흑 모두가 내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