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강철성으로
단단한 묵색 강철로 가득한 강철성 알현실.
은빛 창틀에 비친 햇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불쾌한 고함이 오갔던 평소와는 다른 묘한 침묵이 알현실을 떠돌았다.
거무튀튀한 복장을 한 신하들이 도열한 가운데.
한 사내가 보고를 이어가니.
“폐하의 성은이 지극하여 서부에 내렸던 검은 비가 멈추었으며! 하늘이 열리고 오색의 상서로운 비가 내림을 확인하니. 검은 바다가 오색 빛으로 변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하늘이 개었고! 서부 사막에서 고통받던 이들이 오색 바다 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나이다! 이 모든 것이 한량없는 폐하의 은덕이시며! 은혜이시며! 축복이나이다! 하여 부족한 서부가 새 생명을 얻어-.”
땀까지 뻘뻘 흘려 가며 터질 것 같은 목청으로 끼얹는 과한 수식어를 거두어 내면.
드러나는 진실은 한 가지.
“서부가 안정을 찾았다?”
“맞사옵나이다! 이 모든 것이 폐하의 은혜이며-.”
황제가 망가진 수정구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려는 자의 입을 멈추고는.
가장 궁금하며 기대하던 것을 물었다.
“누가 이 모든 일을 이루었다더냐.”
얼마 전, 서부에 검은 비가 내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다시 한번 강철성이 시끄러웠다.
아르한이 성인식을 시작하자마자 벌어진 천재지변.
원래라면 혹여라도 황자의 안위에 변고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해야 함이 맞으나.
신하들과 귀족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이 벌인 짓 아니냐.
그가 책임지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들이 무성했다.
심지어는.
“지난 북부의 변고부터 이번 서부의 변고까지 황자를 둘러싼 기운이 좋지 않으니. 몰고 다니는 곳마다 재해가 벌어집니다.”
황자의 존재 자체를 헐뜯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그중 황제를 가장 화나게 했던 말은.
“마도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한 줄 아뢰옵니다.”
“이러한 변고를 일으킬 세력은 마도 왕국의 간악한 마법사들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황자의 어미가-.”
바로 황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인 황비를 건드는 말들.
“그만! 감히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는 것들인가!”
황제가 대번에 분노하여 신하들의 입을 막았다.
이젠 참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무어라 떠들든.
“웃기는 소리들 마라! 황자가 간 곳에 변고가 있었고 그가 직접 일을 해결했으니 문제가 없음이야! 경들은 경거망동하지 말고 제대로 된 대책을 강구하도록!”
황제는 제 것들을 지키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신하들은 집요하게 황비와 황자, 황녀를 물어뜯었고.
몇몇을 황비와 황녀를 가두어 지켜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비와 황녀를 따로 두어 지켜보아야 함이 옳습니다!”
“그만! 더는 듣지 않겠다!”
허나 황제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완강했다.
지난 북부의 일이 끝난 후, 루카르의 장례를 치르면서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들이 위기에 처한 순간, 단호하게 진군을 명했다면 살아 있는 그를 마주했을까.
과거 검술을 배우며 있었던 소소한 추억거리들을 꺼내며 술잔을 나누었을까.
아니, 그러진 못했겠지.
그는 북부의 전대 백작이며 자신은 황제.
그러기엔 둘의 지체가 너무 높았고.
한 마디 한 마디에 휩쓸릴 생명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다.
그저 살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부덕함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이들은 황제의 은혜와 영광을 말하지만 오랜 시간 황좌에 앉아 보니 알겠다.
자신의 무관심으로 죽인 이들이 참 많다는 걸.
들리는 영광보다도 사실 감추어진 부덕함이 한참이나 많다는 걸.
“서부의 귀족들에게 전하라! 모두 전쟁을 준비하고 서부에 갇힌 이들을 구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강철성에 머무는 기사단과 마법사들에게 명하니, 황가의 위엄을 보이라!”
그리하여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다.
과거와는 다르게.
그의 명령에 신하들이 이런저런 반대를 뱉어댔으나.
“그만! 당장 준비하라! 제국 서부의 명운이 달린 일에 자꾸 토를 달지 말라!”
황제의 뜻은 단호했다.
심지어.
“폐하, 시간이 괜찮으신지요.”
“없소.”
“…서부에 관해 말들이 많아 첨언을 드리고자 이리 찾아왔나이다.”
“없다고 했소. 서부의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내버려 두시오.”
“열어라, 폐하. 신하들의-.”
“황후.”
자신의 처소에 마음대로 들어온 황후를 쏘아보며.
“누가 황제고 누가 황후요? 내 허락이 없거늘 누가 지금 문을 연 것이오. 강철성의 모든 것은 내 뜻 아래에 있을 터인데?”
분노했다.
처음 보는 부군의 분노에 황후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려다.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소첩, 폐하의 뜻에 반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허면 비꼬러 왔소?”
“비꼬다니요. 다만 신하들의 뜻이 강건하여 조언을 드리고자 하였나이다. 또 폐하의 지엄한 뜻을 받을 이를 추천하러 왔어요.”
문밖에 선 황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고 황제는 그믐달같이 눈가를 좁혀 의심했다.
둘의 눈빛이 치열하게 부딪히길 잠시.
“황비와 황녀를 지켜보셔야 합니다.”
“황후.”
“괴롭히라는 뜻이 아니에요. 어미가 빈 황자궁에 오래 머물렀다더군요. 의심할 정황이 충분하니 감싸기보단 혹시 모를 상황을 살피는 것이 신하들의 반대를 줄일 것이에요.”
“그저 꽃 키우는 걸 취미로 삼아 지내고 있는데 더 무엇을 확인하란 말이오.”
“신하들의 의심을 종식시킬 때까지만이라도 참아 주셔요.”
“…알아보겠소. 단 그들을 따로 억압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요, 폐하의 뜻을 따라야지요. 또한 첫째, 데카론. 그 아이와 철사자 기사단이라면 서부에 나타난 변고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에요. 아르한, 그 아이와 살라스를 구할 수도 있을 거고요.”
“그들만으로 충분하다?”
“서부의 귀족들과 그들의 병력을 이끌 권한을 데카르에게 내려 주세요. 그거면 충분하답니다.”
“나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묻는군.”
황제가 슬며시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다.
자신의 명 따위 없어도 황후의 손짓 몇 번이면 서부의 귀족들이 무언가 하나라도 얻어먹으려 몰려들 터.
원래 그러지 않았던가.
과거 힘없는 황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그저 한낱-.
황제가 문득 치밀어오르는 혐오감에 잠식당하기 전.
“폐하, 절 보셔요. 폐하.”
“황후.”
“전 폐하를 버리지 않아요. 그러니 절 믿어 주세요.”
황후가 무릎을 꿇은 채 황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간절한 눈으로 그를 구슬렸다.
“첫째가 바로 서야 황권이 바로 섭니다.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세요. 이번 서부를 정리하면 공을 크게 세우는 격이니 황태자 자리에 더욱 가까워지지 않겠나이까.”
“황태자.”
“네, 폐하. 그 아이가 아비를 이를 적격이 아닙니까.”
황후의 손길을 따라 으슬으슬한 기운이 황제의 머릿속을 파고들었고.
황제의 동공이 탁 풀리며 빛을 잃었다.
방금까지 분노를 쏟아 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다만.
“그대의 말이 옳소. 서부의 사건을 해결하는 자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니. 첫째가 능력이 있으니 능히 해내겠지.”
“그러니 다른 것은 보지 마셔요. 오직, 오직 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오롯하소서, 황제 폐하.”
“알겠소. 그리하지.”
머리에 치미는 무력감에도 그가 슬쩍 한 가지 안배를 해 두었고.
“다시 묻겠다. 이 모든 일을 누가 해결하였더냐.”
지금 황제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황후 앞에서 보이던 무기력하고 침중한 얼굴이 아닌.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이라 전합니다.”
승리의 미소.
그가 꽉 쥐어지는 주먹을 억지로 펴며 한숨을 짧게 짧게 끊어 쉬었다.
해냈구나.
내심 기대했지만 정말 이루어 낼 줄이야.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찌, 대체 어떻게?
그리 남들을 괴롭히고 미움받던 미친 황자라 불렸던 자식의 변화.
지난 북부부터 지금 서부까지.
그야말로 제국의 구원자와 같은 행보.
참으로 놀라웠다.
과거에 과오가 있다는 것을 아나.
그만큼 많은 이를 구했으니.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을 부르라. 그에게 직접 상을 내릴 것이니.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치러 내었고 제국에 몰려든 재해와 악마들의 도래를 해결했음이라. 서기관은 사실에 대해 빠짐없이 적고. 황실에선 이를 천하에 발표하여 공을 기리라. 승전식을 열 것이다.”
마땅한 상이 따라야 할 터.
황제의 명에 신하들이 불만을 억지로 삼켜가며 고개를 느릿하게 숙이니.
그들로서도 함부로 반대를 못 할 만큼 황자의 공이 거대했다.
다만 오가는 눈빛 속, 황자의 행보를 경계하는 질투심과 시기심이 피어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발휘되는 판단력만 따지자면 살라스보다 위일지도.
결론은 금방이었다.
자신들에게 패악스러운 욕설을 하고 귀를 찢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황자가 높은 자리로 향한다?
더군다나 지난 북부 사후 처리를 보았을 때.
어떤 이권도 그들에게 넘겨줄 자가 아니었다.
평소 작은 이권에도 반목하고 작은 명분으로도 서로를 죽일 듯 싸워 왔던 그들이었으나.
참으로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아르한 황자가 황제가 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묵언의 합의를 끝마쳤다.
황제만이 만족스레 미소 짓는 알현실, 모두의 눈빛에 음험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황자의 길이 험난해질 것이 분명했다.
* * *
흑해를 정화한 후, 나머지 처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선 서부의 새로운 지배자로 홍련 부족을 세웠다.
황자가 서두칠성의 주인으로서 이를 허락했고, 성주들 또한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군말을 뱉는 순간 죽을 것을 예감했겠지.
아니면.
“성주들을 홍련으로 데려와라. 내 직접 그들을 마주하여 이야기해야겠다.”
“이 새벽에요?”
“그래, 새벽에 나누는 담화가 원래 가장 생산성 있는 법이지.”
새벽, 한창 잠자는 시간에 밝은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새빨간 궁전.
잠옷 차림으로 앞마당에 내던져진 것도 서럽건만.
높은 자리엔 갑옷을 차려입고 살벌한 거검을 든 미친놈.
아니 미친 황자가 그들을 삼엄하게 쏘아보고 있었고.
주변엔 붉은 갑옷을 입은 군세들이 형형한 기세로 그들을 둘러싼 상황.
“홍련이 사막의 주인임을 인정하는가?”
“네, 네에?”
“인정하느냐 물었다.”
이게 질문일까? 과연?
모든 성주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고.
“답하라. 서두칠성의 성주들은 홍련을 구심점 삼아 사막을 지키고 더 나아가 나를 따를 것을 맹세하는가.”
황자가 거검을 바닥에 꽂으며 되묻자.
우르르릉, 브레이커가 협박을 인정하듯 바닥을 갉아먹으며 으르렁거렸다.
어찌 고개를 끄덕이지 않겠는가.
그들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맹세를 하겠다 고개를 끄덕였고.
“좋아, 다들 아침이나 먹지.”
황자가 그제야 살기를 거두었다.
문득 첫 번째 성주가 억울하다는 듯 되뇐 말.
“어차피 서두칠성의 주인이시니 이럴 필요까진 없잖습니까. 그저 평화롭게 불러 말씀하셔도 다들 따랐을 겁니다.”
저번에는 머리를 성벽에 받으시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십니까.
제발 이성적으로 해결하면 안 되겠습니까.
나름 맞는 말이었으나.
“약한 소리 하지 마라. 첫째 성주. 나에게 진 순간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지.”
“어떻게 이런 것을 예상합니까. 제발. 그저 따르겠으니 제발 이런 짓을 멈춰 주십시오.”
애원하듯 외치는 첫째 성주의 목소리에 다른 성주들 또한 간절히 고개를 끄덕였고.
황자가 한참을 웃다가.
“어림도 없다. 버텨, 명령이다.”
단칼에 거절했다.
이 즐거운 짓을 그만두면 무슨 재미로 살아?
홀로 중얼거리는 물음이 더욱 무서워 그들이 고개를 떨굴 때.
“성주님들을 모시도록 하세요. 다들 춥고 피곤하실 텐데 우선 따뜻한 물로 씻고 옷을 갈아입도록 하죠. 아, 저는 홍련의 주인, 이엘이라 해요. 안면이 있는 분들도 계시는군요.”
그들의 편의를 돌봐주는 이엘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도 같았다.
흑단 같은 머릿결을 쓸어올리는 모습이 참으로 선하여 성주들이 안심했다.
그래도 황자보단 나으리라.
원래 한창 고생할 때 챙겨 준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법.
“다들 고생이 많아. 우리 같이 고생하자고.”
일곱 번째 성주 푼이 동료들의 등을 두들기며 위로하니.
그들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피어났다.
황자가 한 번의 패악질로 서부의 지배자 간 관계를 돈독히 만들어 주었다.
글쎄 설마 이것마저 계산된 상황일까.
이엘이 슬며시 황자의 등을 쳐다보았으나.
이미 그는 멀리 떠나 버린 이후.
참으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내라고.
이엘이 황자의 살랑이는 백금발과 곧은 걸음걸이를 바라보길 잠시.
“다들 가실까요.”
이젠 자신과 함께 서부를 이끌어 갈, 일곱성의 성주를 대동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후 며칠간 그들은 홍련의 섬에 머물며 앞으로 새롭게 열릴 사막의 미래를 그려 나갔다.
물론 자리엔 항상 황자가 있었다.
그저 밥을 우적우적 퍼먹으며 묵묵히.
헌데 이상하게도.
“뭘 그렇게들 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모두가 말을 멈추곤 황자를 바라보니.
한마디를 하지 않았으나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사막의 주인인지 알 수 있는 장면.
매번 중요한 때마다 자꾸 황자를 바라보았고.
“내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는 제대로 된 결정이니 자꾸 보지 마라. 그냥 휘두른다? 밥 그만 먹고 싶어?”
철커덕 브레이커를 잡는 손아귀에 핏줄이 도드라지고 나서야 모두가 의식적으로 그를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혹여 브레이커를 잡아 들지는 않으려는지 살폈다.
첫 번째 성주는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한쪽 발을 식탁 바깥에 두었다가 빈축을 샀을 정도.
“아니, 형님. 이제 어차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건데 정말 혼자 살겠다고 그럴거요?”
“형님? 형님이라니.”
“아, 대충 이제 형님이라 합시다. 같은 성주끼리 무슨.”
“그래, 그러자. 근데 아우야 넌 못 봤잖냐. 전하가 어떤 짓을 했는지.”
“무슨 짓을 했길래?”
“너 사람이 머리통으로 바위 깨는 모습을 보았냐?”
“못 보았지. 사람 머리통이 깨지면 깨졌지. 뭔 소리 하시오?”
“난 보았다. 난 보았어. 너흰 모른다. 너희는 전하의 진짜 광기를 몰라.”
그의 스산한 경고가 울린 후 성주 모두가 언제든 도망칠 수 있게 비스듬한 자세로 밥을 먹었고.
황자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첫째 성주가 뭘 좀 알아도 아는구나.”
사막의 주인은 홍련, 서두칠성은 관문.
모래성의 구역과 앞으로의 관리에 관해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즈음.
오색 바다가 사라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 점의 물기도 허락지 않는 사막이 이를 모두 빨아 들여버렸다.
황자가 만들어 낸 오색의 비는 흑해를 오색해로 변화시키자 그쳤고.
사막은 다시 예전의 메마른 모습으로 되돌아갔으나.
“우와-. 봐요! 모래가 알록달록해요!”
오색해를 모두 빨아들인 서부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쨍한 햇볕과 일렁이는 아지랑이들만이 가득했던 지평선.
흑, 백, 청, 황, 홍 다섯 색깔이 어우러져 빛나는 모래 언덕과 암석들은 그 자체로 새로운 생명을 품은 듯 신비로우니.
홍련을 떠나는 날.
이를 마주한 황자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홍련의 섬, 지금은 홍련의 성이라 불리는 붉은색 일색이었던 성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이 황자를 배웅했다.
그들의 옷이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있었다.
“땅에서 염료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이제 더는 붉은색에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오색을 흠뻑 빨아들인 모래를 이용하여 색색 염료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홍련의 섬도 더는 염료를 통해 하늘에 떠 있을 필요가 없으니.
“물들이고 싶은 대로 물들이면 되겠군.”
황자의 말대로였다.
붉은색은 그들의 안전이기도 했으나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했으니.
자유를 얻은 사막이, 여러 색을 얻은 사막이 앞으로 어찌 될지는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검은색 일색보다는 보기 좋아.”
흑해가 가득했던 그때보다 황홀한 풍경임은 자명한 바.
황자의 은근한 치하에 모두가 함빡 미소를 머금었고.
“좌표 설정 완료! 전하 이제 떠나실 시간이에요.”
하란이 준비를 끝마치곤 황자를 돌아보았다.
등대지기인 오라비와 함께 홍련의 성에서 모두의 길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은 남매가 첫째로 황자의 길을 안내했고.
곧 빛줄기로 화한 황자와 일행이 사막의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서부의 구원자! 폴라리스께서 길을 떠나신다! 모두 예를 취하라!”
“서부의 구원자 폴라리스께서 지나가신다! 예를 표하라!”
“폴라리스께서 지나가시니! 고개를 숙여라!”
서부에 사는 자들이 떠나는 그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홍련의 성부터 서두칠성까지.
오색 사막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가장 찬란한 별을 향해.
서부인들이 찬란한 별을 향해 기도하듯 축복하듯 오색 모래를 뿌리며.
그에게 영광 있으라.
외치니.
한낮에 별똥별이 서부를 길게 가르며 수도 페르마를 향해 쏘아졌고.
사막의 염원이 오색 꼬리로 남아 일렁였다.
“강철성으로 가자. 끝장을 볼 계략과 얻어야 할 보상이 많다.”
북부와 서부의 세력을 등에 업은 황자가 걸을 행보 또한 이전과 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