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허풍과 협박
이리 자신을 몰아붙이던 자가 감히 있었던가.
있었던 것도 같다.
이미 흙이 된 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을 뿐.
황후가 잠시 깊이 서린 살심을 내리눌렀다.
아직은 황자를 벌할 때가 아니다.
다만 방종한 태도를 참을 수 없어 건넨.
“황자, 과한 추측은 속으로만 삼켰어야지요. 이런 무례까지 용서할 거로 생각지 마세요. ”
황후의 살벌한 경고에.
“용서치 않으시면 어쩌시겠습니까.”
황자가 밝게 미소 지으며.
“자신들의 부덕함을 황제 폐하가 아닌 황후께 용서를 빌고, 황자의 성인식에 제멋대로 개인적인 명령을 개입시킨 황후께선 제게 무슨 죄를 물으시겠습니까. 식사를 방해한 죄?”
대번에 경고를 비웃었다.
마법사들이 벽에 머리를 박은 것보다 지금 황자가 황후의 협박을 받아친 게 더 놀라운 일 아닐까.
지금만큼은.
“황자, 그만하세요.”
그의 어머니마저 참다못해 그를 말릴 정도.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안위보다도 황자의 미래가 걱정이었다.
황후는 잔혹한 자,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않는 사람임을 안다.
아무리 황자가 많은 일을 이루었다고 하나.
“과해요. 제발 부탁이니 그만하세요.”
선을 넘었다.
어차피 자신은 버려진 처지.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자식들이 해를 입을까 걱정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만류에.
“무례를 범하러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황자가 그런 그녀를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전하곤 말을 이었다.
“더는 계승 싸움에 관여하여 더럽히지 마십시오. 황손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계승이 홀로 하는 것이라 누가 그럽디까?”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도는 소문을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의 머리통을 부술 생각인데 괜찮겠습니까?”
“협박하는 건가요?”
“협박이라기보단 통보입니다. 누구처럼 은근슬쩍 몰아가고 세뇌시키고 하는 것엔 재주가 없어서요.”
“황자, 끝까지 선을 넘는군요.”
“그러려고 온 자리입니다. 오랫동안 찾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고작 북부와 서부를 믿고 이러나요?”
“전 저를 제외한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일지라도요.”
“굳이 이 자리까지 끌고 와 하는 말치고는 빈약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한 가지입니다. 서부에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악마와 관련된 자라면 누구든 벨 생각입니다. 설령 그것이 어머니나 동생일지라도. 지금 여기에 있는 누구라도. 결심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같이 왔지요. 황후 마마께서는 무엇을 보이시겠습니까. 무엇을 버릴 수 있습니까.”
“지금 무어라 했나요. 나에게 무얼 보이라는 거죠?”
“1마법사단 일부를 마음대로 이용한 죄, 서부를 멸망시키라던 명령. 결백하십니까.”
“황자! 감히-!”
“악마와 관련된 자라면 누구든 죽이겠다 했습니다! 날 낳아 준 어머니라도! 내 핏줄인 동생이라도! 그 어떤 자라도! 피를 보고야 말 것입니다!”
황후 마마께서도 그 정도 각오는 되셨겠지요-!
황자의 고함에 황후가 말을 멈추었다.
황자의 주변에 타오르듯 열기가 어렸다.
“황가에, 악마의 힘을, 이용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황가에 악마 숭배자가 있다.
악마를 멸했던 가문에 악마가 스며들었다.
이는 단순한 세력 싸움이 아니다.
황자는 경고하는 것이다.
모든 걸 걸고 싸울 각오가 되었는지.
그런 중에도 황자의 시선은 변함없이.
“황가에 오래전부터 악마의 힘을 다루려던 이가 있습니다. 전 그 더러운 종자의 목숨을 반드시 취할 것입니다.”
황후를 향해 있으니.
황자의 진홍색 눈동자를 마주한 황후의 눈가에 핏발이 올랐고 포크를 쥔 손이 하얗게 질리며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감히, 감히!
고작 왕국의 쓰레기 같은 핏줄을 섞어 태어난 네놈이 나에게 이런 모욕을 줘!
입에 험한 말이 가득 차올랐으나.
억지로 눌러 담았다.
갖은 풍파를 겪은 그녀로서도 힘겨울 정도의 도발.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황후가 욕설과 살기를 뿜어내는 대신.
“기대하죠. 황자의 경고. 진정 어미를 향해 검을 휘두를지 궁금하군요.”
“황후 마마께서도 제 어미 중 하나입니다. 안심하지 마십시오.”
싱긋 미소 지으며 황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방금 살벌하게 싸울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운 건 왜일까.
황자가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음을 터뜨리곤.
“식사를 마쳤으니 먼저 일어나겠나이다. 폐하. 무례를 용서하소서.”
“아르한.”
“폐하, 누군가 황가에 악마를 끌어왔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저를 포함한 주변의 누구도. 황자가 아닌 부족한 아들로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알겠다.”
“그럼 이만.”
황제가 깊이 눈을 감은 사이.
그가 어머니와 동생을 이끌고 식당 밖으로 향했다.
그때.
“왜 이리 공개적인 자리에서 일을 벌인 것이냐.”
황제로서도 도저히 이해 가지 않았는지 떠나가는 황자를 붙잡고 물으니.
“즐겁지 않습니까. 이런 자리가.”
어차피 벌어질 일, 파국을 즐거이 맞이해야지요.
과는 공에서 제하십시오.
알 수 없는 소리를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황제의 식탁에 피와 고함 살기만이 남았고.
황후의 손아귀 속, 은제 포크가 뜨거운 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 * *
[운명 악의, 계략, 암살, 죽음이 당신에게 바짝 다가옵니다]
[상대의 운명이 흐린 안개에 덮여 있습니다. 그중 끝자락만을 읽어냈습니다. 운명 깊게 얽힌 뿌리를 엿봅니다]
[대상들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어머니와 동생의 주변을 떠돌던 암살, 조롱, 왜곡된 소문이 모두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외에도 나를 위협하는 운명들이 한참이나 떠올랐다.
비록 날카로운 운명의 극단들이 나를 향했으나.
즐거웠다.
두렵지 않았다.
그저 뒤따라 걷는 어머니와 동생을 향한 위협이 사라졌다면 되었다.
황제의 주변을 잠식해 가던 왜곡된 충성들이 물러가면 되었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이리 식사하는 자리까지 찾아와 도발한 거다.
결투를 벌이는데 굳이 군더더기가 필요치 않으니 붙을 거면 둘이 붙자.
난 버릴 각오가 되었다고, 그러니 주변을 건드리는 짓은 소용없다는 허풍과 건드리면 같은 걸 빼앗겠다는 협박을 버무렸다.
일부러 화를 부추겼다.
그녀가 나에게 집중하도록.
전에는 피했다.
따르는 기반도 세력도 없었기에.
허나 이젠 다르다.
북부와 서부의 사막이 등 뒤에 있고 로이스 가문의 자금력이 있다.
살라스는 서부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던 마유와는 다른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 낼 테고.
원래 무너져야 했을 북부는 새로운 방벽으로 든든한 보탬이 될 것이며.
멸망했을 홍련은 사막의 주인이 되어 오색 모래로 나의 영광을 더하리니.
“알프레드, 수도에 머무는 중앙 귀족 전부에게 연락을 넣어라.”
“무엇이라 넣을까요.”
“내가 황태자가 될 것이라고.”
그러니 죽기 싫으면 당장 달려오라 그리 일러라.
오랜만에 돌아온 수도.
이번엔 의심이 많아 함부로 입방아를 찧어 댄 놈들을 벌할 차례.
몰아치는 운명과 시끄러울 풍랑이 기꺼워 웃었다.
* * *
중앙 사교계가 또 한 번 거친 풍랑을 맞이했다.
분명 서부에 있다던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의 갑작스러운 귀환.
본래 서부 극단에 위치한 사막에서 수도까진 빨라도 보름 이상은 걸릴 거리.
헌데 어찌 이리 일찍 도착했단 말인가.
심지어 그가 처음 벌인 행보가 충격적이었다.
황후와 부딪혔다.
원래 부모와 자식 간에 의견 충돌이 있는 법이라지만.
거기다 어머니가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면 어디서나 있을 법한 충돌이라지만.
직위가 황후와 황자라면 무게가 다른 법.
거기다 지금의 황후와 미쳤다는 11황자라면 완전히 다른 문제로 봐야 한다.
제국 모두가 지금의 황제를 만든 것이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의문스러운 죽음과 실종이 얼마나 많았는가.
“살아남는 사람이 가장 강하니 황제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강철성의 오랜 격언.
그런 격언의 산증인이자 가장 큰 오류라 평가받는 현 황제.
살아남았기에 황제가 되었으나 강자는 아니었기에.
그는 본래 능력도 없었고, 세력도 없었으며, 야망도 없었다.
그저 누운 풀과 같이 풍랑이 지나가길 바랐을 뿐.
유약한 성격으로 인해 다른 황손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도 못하였고 자신도 다른 이들과 싸우는 걸 싫어하여 피해 다녔다.
그런데.
“동남부 공작성에서 황자 전하와 영애의 혼인을 주선하고자 합니다.”
어느 날 기연처럼 찾아온 인연.
제국에서도 단둘뿐인 공작이자, 평소 거북이처럼 숨어만 있는 동북부 공작과 달리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동남부 공작가의 제안.
북부, 동북부, 동남부, 제국에서도 가장 거대한 영지와 군사력을 자랑하는 3대 세력 중 하나.
북부는 척박한 땅과 몬스터 침공, 동북부는 가주인 대마법사의 오랜 칩거가 단점으로 작용하여 정작 위세를 떨치지 못했으나.
동남부는 달랐다.
철혈의 공작이라 불리는 가주.
일신의 무력 또한 북부 백작가의 검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루카르 이상이라 알려졌으며.
아들은 백뢰(百雷)라 불리는 뇌전계 마법사 중 으뜸.
뿐만인가 그들을 따르는 세력이 동남부를 넘어 남부를 아우르니.
“북부, 동북부, 동남부 중 동남부가 으뜸이라.”
세간에선 최고로 평가받는 명문가 중 명문가.
황가에서도 쉬이 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귀족가.
그런데 그런 동남부에서 가장 힘없고 황제가 될 의지도 없는 황자를 사위로 맞이하다니.
당시에도 파격적인 혼인.
현 황제 전 6황자 아우구스 아이로니아 또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자신을?
그때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철혈의 영애라 불리며 동남부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던.
현 황후.
문이 열리고 물빛 머리와 어울리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의 첫 마디.
“저와 혼인해요. 황제로 만들어 드릴게요.”
처음엔 거절했다.
그런데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점차 주변을 옥죄어 오는 자들이 생겨났다.
황손들이 자신을 경계했고 몇몇은 실제로 그를 해하려 들었다.
깊은 밤이었을 거다.
“헉, 헉! 전하! 전하께서 먼저 피하소서! 신들이 여길 막겠나이다!”
“안 된다! 같이 가자! 너희를 잃으면 어찌하란 말이냐!”
“전하, 전하께서 사시옵소서. 어떻게든 살아 고귀한 자리에 올라가소서.”
“행복하셔야 합니다.”
“안 돼!”
뜬금없는 영지 감찰 명령을 받아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받았다.
흉수는 별 갈등 없던 황손의 세력.
이유를 떠올리기도 전에 우선 도망쳤다.
매복된 적들을 피해 깊은 산골짜기를 달리길 오래.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제 목숨을 던지겠다는 말에.
“차라리 나도 옆에서 죽겠다!”
그가 죽음을 결심했을 때.
누군가 기사들을 이끌고 말을 타고 달려오니.
철혈의 영애, 현 황후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수상할 정도로 기막힌 우연들이라 하겠으나.
당시 젊은 황제는 지쳐 있었고.
깊은 새벽, 신하들을 잃고선 슬퍼하는 그를 위로하는 손길이 따뜻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혼인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반드시 찾아올 죽음이 무서웠고 자신을 지켜 줄 이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황손들과 그들의 신하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과 실종을 당했다.
황제는 이를 외면했다.
황후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고 걸으면 피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눈을 감았고 무능력한 황제가 되어 버렸다.
자신은 바라보지 못한 진실을.
“그러니 황후 마마. 간섭은 그만두어 주시지요.”
황자 아르한은 당당히 마주했다.
북부로 도망하듯 급히 가는 것을 보곤 황후를 피한다 생각했다.
옳은 일이었다.
그녀와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지 부군인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귀족들에게까지 황태자가 되겠다 선언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황자는 피한 게 아니었다.
이리 진심으로 맞부딪히기 위해 세력과 공적을 모으러 간 것.
이르지 않은가?
더 많은 세력을 모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했으나.
“그리하여 이 많은 이가 아르한의 궁에 들어가고자 신청을 했단 말이지?”
황제가 눈앞 가득한 명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중앙 사교계 대부분이 황자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개중엔 다른 황손들의 세력도 포함되어 있으니 경계하는 의미도 함께라 생각됩니다만.”
“그럼에도 놀라운 일이지.”
여러 의심과 경계가 함께했으나 어쨌든 놀라웠다.
어느 누가 감히 대놓고 황태자가 되겠다 선언할 것이며, 죽기 싫으면 찾아오라는 망발을 하겠는가.
그야말로 모든 황손과 제국의 귀족들에게 날 표적으로 삼으라는 선언과도 같은 짓.
황제가 갑작스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루카르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반역을 가장하여 자신을 찾아왔던 날, 황자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알현실에서 자신을 서글픈 표정을 바라보던 스승이자 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구해 달라는 간절한 신호 아니었을까.
아침 댓바람부터 황후와 부딪히며 자신의 속을 뒤틀더니, 점심엔 스스로 소문까지 내어 가며 귀족계 전부를 흔들다니.
“루카르, 대체 어떤 싸움을 해 온 것이야.”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
황자가 멀리 북부의 일을 시원스레 처리할 때는 그저 기꺼웠건만 막상 옆에 두고 보니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의 마법을 보는 듯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난하여 어딜 건드릴지 짐작도 안 가는 망가진 마법식 같은 녀석.
그런 녀석을 데리고 고군분투했을 루카르가 가여울 지경.
물론 지금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였으니.
문득 황후와 황자가 부딪힐 걸 떠올리자 다시 머리가 옥죄듯 아파 왔다.
“머리가 아프구나.”
“약을 대령하겠나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사이.
내시가 묘한 빛깔 약이 담긴 고급스러운 병을 내어오더니.
“황후 마마께서 약방과 마법사들에게 명하시어 만든 포션입니다. 폐하의 두통과 최근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고자 만들었나이다.”
지난번 황후가 준비하겠다던 약을 공손히 은잔에 따라 내밀었다.
일렁이는 약물을 보는 순간.
‘누군가 황가에 악마를 끌어왔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저를 포함한 주변의 누구도.’
부족한 아들로서 건넨 황자의 조언이 귓가에 울렸다.
누군가 악마를 황가에 끌어왔다.
그리고 황후가 서부의 사건에 개입했다.
그것도 1전투 마법사단을 이용하여 직접.
본인은 황가를 위한 일이라 했지만 어찌 되었든 사건엔 악마가 결합되어 있었고.
악마가 나온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
황후가 황자의 발칙한 도발에도 크게 응수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이유가 깔려 있다.
그녀는 정치적 감각이 유독 탁월한 사람이니까.
당장은 황자를 향해 바람이 불고 있다.
의문점이 있다고 해도 북부, 서부 두 번 연속이나 제국을 구한 상황.
세간에선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니 아무리 권력이 강고한 황후라도 당장 황자의 목을 칠 순 없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약을 보고 있으려니.
“…….”
싸한 분위기에 퍼뜩 정신 차렸다.
앞에 약을 가져다 놓은 내시의 힐끔거리는 시선.
마치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동공.
내시들의 입은 가볍고 혀는 사실을 왜곡하는 법.
아마 지금 모습을 두고 황제가 황후를 의심하더라 또는 황제가 황후를 꺼린다는 소문을 퍼뜨리겠지.
아니, 쪼르르 황후에게 달려가 사실을 아뢸지도.
차라리 그럴까 싶었으나.
“황후의 마음이 갸륵하여 잠시 말을 잊었군.”
자신은 아르한과 같이 굳건한 자가 아닌 유약한 자.
이제 와 눈을 뜨고 황후의 손을 놓기엔 겁이 났다.
황제가 억지로 미소를 띠며 잔을 집어 마셨다.
묵직한 감촉이 역겨웠으나, 그저 꾹 참고 마셨다.
곧 머리와 가슴이 시원해지며 나른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그래, 황후와 대화할 때 느꼈던 나른함이 몸을 엄습했다.
황제가 풀린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폐하.”
그림자 속, 우뚝 솟아난 자가 슬며시.
“아르한 황자의 궁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고가 일어났음을 알렸으나.
“조금 있다. 조금 있다 듣자.”
황제가 흐물거리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내저었고.
암철단의 일원이 그저 자리에 우뚝 서서 기다리는 사이.
고개를 깊이 숙인 내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황제의 눈망울에 타올랐던 빛이 깜빡깜빡 꺼질 듯 위태로웠다.
* * *
11황자궁,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된 알현실.
본래라면 온갖 정치적 거래와 다중적 의미를 내포한 말들이 오가야 할 장소에서.
“죽어라.”
참으로 단순하며 명확한 명령을 던졌고.
“전하?”
앞에 선 귀족 놈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전.
커다란 그림자가 쑤욱 입을 벌리더니.
놈의 몸을 삼켜 버렸다.
그걸로 알현실이 고요해졌다.
[상대의 운명 암살, 계략, 탐욕, 독살, 과잉 충성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획득합니다!]
[대상 유리엘을 향한 운명 독살을 포식합니다]
“밖에 몇이나 있지?”
“수백이 남았습니다.”
“잡아먹을 놈들이 많겠군.”
알프레드의 답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