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추수꾼
사람이 사라진 것 치고는 알현실은 고요했다.
안드레와 솔은 자리를 비웠고 옆에는 알프레드뿐.
“지금까지 몇을 죽였지.”
“다섯입니다.”
“생각보다 덜 죽였군. 이거 마음이 고와졌나 봐.”
“…….”
내 고약한 농담에도 알프레드는 답하지 않았다.
문득.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앞날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습니다. 새로운 운명 탈주, 배신, 외로운 희생이 일렁입니다]
그의 운명이 앞에 떠올랐다.
알프레드는 본래 암철단의 일원.
지금까진 날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옆에 붙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명분도 통하지 않겠지.
강철성에 돌아온 이상 암철단의 명령을 거부하긴 어려울 터.
그는 무슨 각오를 하였기에 저런 운명이 떠오르는가.
이미 알프레드의 운명은 나로 인해 뒤틀렸다.
탈주, 배신, 외로운 희생.
그는 나를 배신하려 하는가 아니면.
황가와 암철단을 배신하려 하는가.
“전하?”
빤한 눈길을 읽은 알프레드가 되물어 왔고.
“알프레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그의 이름이 아니기에 불렀다.
알프레드는 이번 임무에만 존재하는 가면이니까.
대신 뜻을 담아 답하였다.
“서부에서 보인 충심은 진심이었나.”
북부까지만 하더라도 날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고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서부 흑해를 건너고 나서부턴 달라졌다.
내 어떤 말과 행동에도 묵묵히 믿고 뒤를 돌보았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가면이었는지 궁금했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대놓고 물었다.
알프레드가 곰곰이 생각하길 잠시.
“진심이었다… 그리 믿고 싶습니다.”
바위와 같이 단단하던 그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안에 몰아치는 감정이 참으로 다양하건만 얼굴에 드러나는 흔적은 그저 얼굴 근육 몇 개의 떨림뿐.
감정이 읽히지 않게 철저한 훈련됐다는 증거.
그런 그에게 이 정도의 요동이라면 흔치 않은 일이겠지.
이번엔 알프레드가 되물었다.
“전하께선 지금껏 보인 행보가 모두 진심이셨나이까.”
의심이라기보단 확신을 구하는 목소리.
속내에 세운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증거라도 필요한 것일까.
나이든 시종을 놀리기엔 재미가 없어.
“한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광기를 걷어 내곤 솔직히 답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내 유일한 스승이니까.
전투와 생존법, 가짜로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을 그에게서 배웠지.
그래서일까, 현생 동안 내심 그에게 많이도 의지했다.
그런 만큼 지금은 패악과 광기가 아닌 진솔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가짜와 진짜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 때론 충만한 가짜가 텅 빈 진짜를 압도하기도 하지.”
“전하께선 가짜의 인생을 아십니까.”
“전에 살던 모습이 가짜였지.”
“그렇군요. 어떤 이유로 가짜의 삶을 버리셨습니까.”
“간단한 결심과 우연한 행운 덕. 알프레드, 떠나도 좋다. 다만 어떤 선택이 네 삶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봐라. 그래도 같이한 시간이 있기에 건네는 조언이다.”
“같이한 시간 말씀입니까.”
“그래, 말하지 않았나. 진심이 아닌 적 없었다고. 나는 충만한 시간을 보냈으니 자네가 어떤지는 스스로 잘 알겠지.”
“…….”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라. 누구의 목이든 그 자리에서 날려 줄 테니.”
“감사합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잠시 둘만 있는 자리에서 드러낸 속내.
충만한 가짜가 텅 빈 진짜를 압도한다.
가짜 황제로 살던 때 그가 내게 해 주었던 말.
황제로서 제국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나에게 해 주었던 응원.
그때야 비로소 그를 스승이라 여겼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이제 선택은 그의 몫,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전생과 현생 모두 내 뒤에서 묵묵히 헌신한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운명에 작은 파문이 일어납니다. 과거 별빛으로부터 얻었던 깨달음으로 운명들이 변화합니다. 운명 탈주, 배신, 외로운 희생을 포식합니다. 새로운 운명이 싹틉니다!]
그거면 되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기다려봐야겠지.
방금까지 나누었던 진솔한 대화가 가짜였다는 듯.
“그래, 현자 추수꾼에 대해선 찾아보았나.”
“네, 수소문한 결과 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혼자라던가.”
“네, 정보부에선 그리 말하더군요.”
“곧 찾아올 거다. 그러기 위한 솎아 내기니.”
“추수꾼을 찾으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는 파멸을 노래하는 자입니다만.”
“그러니 찾아야지. 내가 파멸과는 꽤 가깝지 않은가.”
비로소 내 농담에 알프레드가 작게 웃고는.
“허면 그가 찾아와도 두라고 일러둘까요.”
“그리하도록.”
고개를 숙였다.
고민이 해결된 모양.
이후 추수꾼이라 불리는 현자를 만나기 전까지 솎아 내기 작업을 계속했다.
들어오는 귀족 중 어머니와 유리엘에게 살심은 품은 자들은 모조리 그림자의 먹이로 삼았다.
누군가의 명령이던 자의적 판단이든 용서치 않았다.
명분? 그런 것 따위 필요없다.
어차피 시체도 찾지 못할 테니까.
북부와 서부 사막을 얻었다.
세력을 확장한 순간, 신하들을 향해 욕을 뱉은 순간, 황후와 뜻을 달리한 순간.
가족들을 향한 공격을 예상했다.
나는 그전에 놈들을 부술 생각이었고.
미리 다가오는 운명 모두를 먹어치울 작정이었다.
무서워 움츠러들기보다는 당당히 맞서 싸우리라.
“다음.”
차가운 목소리에 알프레드가 문을 열자.
“위대한 북부의 구원자이자 서부의 빛인 전하를 뵈옵니다.”
막 들어선 이가 무릎을 꿇으며 깊은 예를 표했고.
[운명 거짓, 속임수, 기만, 조롱이 가면 뒤 당신을 비웃습니다]
정중한 몸가짐과 반대되는 운명들이 떠올랐다.
문득 느낀 건데.
“편하군.”
편하긴 했다.
원래라면 놈들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깊이 살피고 대화를 해야 했을 텐데.
이렇게 앉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의도가 보이니 어찌 편하지 않겠는가.
귀족들에게 일부러 서신을 보내 여기까지 부른 이유.
위세를 과시해 황후와 1황자의 속을 뒤집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귀족들의 사분오열을 일으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며.
내가 미처 모르는 제국의 독을 빼내기 위해서기도 했다.
“편하시다고요?”
놈의 되묻는 말에 입꼬리에 비웃음을 띄워 올렸다.
“그래, 너 같은 쓰레기들을 이리 쉽게 찾아내니 인생이 참 편해.”
대화 한마디 나누기도 전에 쏟아진 모욕에 상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나 또한 마주 살기를 내뿜었다.
콰앙!
탁자를 내리치자 와르르 컵이 깨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고.
놈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충성심 따윈 없고 그저 조롱과 모욕을 담아 온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았나!”
정확한 지적에 상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운명 복종, 첩자, 배신을 확인합니다]
비열한 속내가 드러났다.
“이미 네놈이 목숨 바쳐 섬기는 이가 있음에도 날 속이려 들다니 미쳤구나.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 그것이.”
“좋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 대신 조건을 걸지. 네가 본래 섬기던 자의 목을 가져오면 받아 주겠다.”
“잠시만-.”
“자신이 없다면 팔을 내놓고 꺼져라.”
“파, 팔이라뇨. 그저 인사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인사 좋지. 난 인사로 팔을 받는 성미라.”
놈이 주춤거리는 꼴에 검을 뽑아 들자.
“으아가각!”
상대가 기함하며 내뺐다.
도망치는 놈의 꼴을 가리키며 신나게 웃으려니.
꽁무니를 내빼는 놈과 나의 웃음을 번갈아 보는 귀족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손에 검을 늘어뜨린 채 주위에 가득한 거렁뱅이들을 살폈다.
탐욕과 야망, 뜨거운 분노와 의심이 가득했고.
그사이 두려움과 불안함이 피어났다.
내가 앞에선 자들을 향해 턱짓했다.
“다음, 들어와.”
서로 눈치를 보며 들어오기를 주저하는 놈들을 바라보다.
“황자궁에 온 이상 도망가지 못한다. 당장 들어와. 안 들어오면 망설이는 놈들부터 베겠다.”
검을 들고 을러대자.
앞에 선 자 중 가장 허름한 자가 등을 떠밀려 앞에 넘어졌고.
“흐으윽!”
나를 마주하곤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턱 끝에 검 끝을 가져다 대어 자세히 살폈고.
주변에서는 끔찍한 사건을 예감했는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황자가 귀족들을 모아 놓고 죽인다.
얼핏 속닥거림을 들었으나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상대의 허름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대상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운명 잃어버린 명예, 빼앗긴 영지, 장인의 후손, 무기의 주인이 엿보입니다]
[상대의 옷깃에서 영광을 잃어버린 무구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흥미로운 운명이 떠올랐고.
와락.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겠군. 들어와라.”
“어어, 어어어!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전하!”
상대의 멱살을 잡아끌어 들어가니.
밖에 서 있던 자들의 얼굴이 더욱 퍼렇게 질렸다.
손끝에 걸린 월척의 펄떡임이 생생하여 더욱 즐거웠다.
청소 중 주운 금화만큼 즐거운 게 있을까.
* * *
며칠간 수도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황자는 안주를 싫어한다는 듯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매일같이 귀족들을 불러모아 일일이 얼굴을 마주했고.
틈이 나면 수행원들과 함께 훌쩍훌쩍 강철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면 꼭 사고가 터졌으니.
“황자의 옆에 있으면 피 볼 일이 생긴다더군.”
“알현실에 들어간 이들 중 못 나온 이들이 있다던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소문이 돌아.”
귀족들 또한 소문을 알았으나 탐욕을 버리지 못해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황자를 찾아갔다.
그중에.
탁, 탁, 타탁.
지팡이로 땅을 짚는 한 노인이 있었다.
로브를 깊이 눌러쓴 노맹인이 이리저리 땅을 짚으며 귀족들 사이를 지나갔고.
주변에 선 귀족들이 처음엔 어디서 장님이 왔냐며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으나.
그는 그저 담담히 길을 걸을 뿐.
굽은 허리와 꾹 감은 눈에 진 주름이 깊은 세월을 짐작게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소란이 일어나는 중에도
노인이 귀를 쫑긋거렸으나 정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귀족들과는 좀 떨어진 자리에서 시간을 보낼 뿐.
대체 이런 자가 어떻게 궁에 들어왔는지 의아했으나 황자가 누구든 자신을 알현할 수 있다 했으니.
그의 괴팍한 성정 덕에 들어온 몰락 귀족이겠거니 생각할 때.
“전하께서 오셨다!”
황자가 여느 날처럼 인파를 헤치며 나타났고.
그의 존귀하며 광기 넘치는 눈동자를 마주한 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은 와중.
노인만은 꼿꼿이 자리에 그대로 섰다.
본래는 굽은 허리 덕에 제일 작았으나 모두가 무릎을 꿇고 나자 홀로 우뚝 높았다.
다들 죽음을 예감했다.
황자의 검이 노인의 낡은 육신을 잘라 낼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저를 찾으시기에 이리 왔나이다.”
“이제야 찾아오다니 꽤 굼뜨군. 육신이 늙어서인가?”
“눈이 보이지 않아 늦었음을 이해해 주시지요.”
“그리 좋지 못한 핑계야. 알곡이 익기를 기다렸나.”
“…달라지셨습니다.”
“날 아는 듯이 말하는군.”
“전하의 악명을 모를 이가 어디 있을까요. 최근의 업적도요. 이 늙은이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놀랍다라. 아직 많은 게 남았는데 벌써 놀라면 쓰나.”
노인은 미친 황자를 앞에 두고도 뻣뻣했고, 황자 또한 노인을 탓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광경.
곧 그가 로브를 벗어 감았던 눈을 뜨자 이유가 드러났다.
“현자!”
“대륙의 현자가 어찌 여기에!”
깊게 주름진 얼굴 속, 흰자와 검은자가 뒤바뀐 눈동자가 이질적이었다.
이마에는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핏줄들.
대륙 삼 현자 중 하나이자, 가장 오래 살았다는 자이며 하늘의 진노와 종말을 노래하는 예언자.
과거 폭군의 오랜 조언자였다던 멸망을 노래하는 늙은 현자가 파멸의 씨앗이었던 황자를 찾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황자의 눈에도 깊은 경계가 어리니.
대륙의 역사에도 이름을 남긴 미친 현자와 현재 가장 손에 꼽히는 미친 황자가 만난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여기 있는 자들 중 굳이 살릴 사람이 있나?”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모두 죽여야겠군.”
“얼마든지요.”
두 미치광이의 광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 * *
일그러진 현자, 베니시오르.
현자 중에선 최고이자 최악.
오랜 지식을 탐독한 끝에 미쳤다는 광인이자 멸망을 위해 치달린다는 악한 현자.
그가 나타난 자리엔 새까만 죽음이 넘실거리며 썩은 내가 진동한다고 했던가.
눈동자와 눈자위 색이 뒤바뀐 눈.
일명 생명을 빨아들이는 눈에 찍힌 자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였다.
입은 절망과 파멸을 노래하고, 눈은 죽음을 흩뿌리니.
걸음걸음 시체 썩는 내와 손에는 죽임당한 자들의 뼈가 가득하다.
그리하여 불리는 또 다른 별명, 추수꾼.
생명과 희망을 거두어 가는 자.
그리하여 물었다.
여기서 살릴 자들이 있는지.
역시나 잔혹하며 까탈스러운 현자는 누구 하나 살릴 이가 없다 하였다.
살릴 씨앗이 없다 하였다.
허면.
“나는 어떠한가?”
나는 어떤가.
현자이며 사신이자 추수꾼이 그가 보기엔 어떠할까.
지금의 나는 살 가치가 있는가.
그를 마주하자 속에서 광기와 분노, 즐거움, 잔혹이 어둑하게 피어올랐다.
몸을 잠식하는 운명들이 당장 그를 내려치라 요동쳤으나.
참았다.
전생에서 보인 그의 행보를 알기에.
대륙 3대 현자 중 하나이자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는.
전생 황태자 임명식이자 건국기념일 행사 당일.
자폭을 시도했다.
목표는 황가의 모두.
황제를 포함한 황후, 황손들 모두.
실제 꽤 많은 황자 황녀가 죽거나 반병신이 되었고.
그들을 따르던 귀족들도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로 곤죽이 되었다.
제국은 위 사건을 빌미로 대륙 3대 현자 모두를 공적으로 선포.
그중에서도 베니시오르가 이끌던 추수 학파 출신들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당시 폭군은 시녀 하나를 때려죽인 벌로 근신 중이었다.
어쩌면 폭군이 황제가 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
후에는 폭군이 직접 불러 그의 조언자가 되었지.
자폭을 시도하여 황가를 멸문시키려 한 자를 불러 조언자로 삼다니.
상식적으론 말도 안 되는 일.
그런 사정을 알기에 궁금했다.
“나는 쭉정이인가, 알곡인가. 아니면 그대가 노래하는 미래를 위한 씨앗인가.”
현자는 폭군과 무슨 관계였는가.
진정 멸망을 위해 움직이는 자인가.
아니면 악마와 연관이 있는 자인가.
분명한 건 추수꾼은 언젠가 부딪혀야 할 자였다.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강고한 의지에 막혀 운명을 읽지 못합니다!]
비록 운명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생명, 죽일 방법을 찾아내면 그뿐.
북부의 에스키모, 서부의 흑해 또한 본래라면 어림도 없었을 상대들.
앞에 놓인 장애물이 거대하고 강하다 해서 돌아가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부수고 나아간다.
나를 위협하고 제국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죽음과 멸망을 막아 내기 위해서라면 없는 방법이라도 만들어 낼 생각.
의지를 태우자 심장에 어린 세 개의 고동이 차근차근 광기를 억눌렀다.
머릿속 둥둥둥둥 번갈아 울리는 고동이 낮게, 높게, 깊게, 얕게 울리며 점차 자신감을 실어 주었다.
놈이 무엇을 하든 이겨 낼 수 있다.
대륙의 현자? 웃기지 말라고 해.
멸망을 노래하는 입을 찢고 죽음을 뿌리는 눈을 뽑으리라.
그리 결심한 순간.
노인이 징그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꿈틀거리는 핏줄들과 새까만 치아가 역겨웠다.
“또 다른 추수자이며 또 다른 재배자이지요.”
“추수자이며 재배자이다?”
“황자께서 보기에도 여기 있는 자들이 알곡으로 보이십니까?”
“글쎄, 그런 자는 별로 없군.”
“저기 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자를 보지요. 얼마 전 혼외자를 낳았군요. 제 부덕함을 감추기 위해 어미와 자식 모두를 죽였습니다. 재산이 많은 형을 죽이고 형수를 취하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능력이 없는 자는 아닙니다. 죽일까요, 말까요.”
“대체하기 어려울 정도인가?”
“대신할 자들은 많습니다.”
“죽어야겠지.”
“그러지요.”
현자의 눈이 묘하게 뒤틀리자 겁에 질려 떨던 귀족이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다들 신음을 삼키는 사이.
이번엔 다른 귀족을 가리켰다.
“저자는 능력이 나름 뛰어납니다. 허나 가문이 없군요. 버려진 자식에 불과합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며 여러 피를 묻혔습니다. 능력이 제법 있으나 잔혹한 자를 어떻게 할까요?”
“대의가 있었는가?”
“나름은요. 도움을 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심도록 하지.”
“너그러우시군요.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내 대답에 추수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숨죽인 채 그의 눈에 띌까 싶어 고개를 처박은 모습.
특히 죄 많은 이들은 더욱 숨어 사신의 낫질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라니.
“그래서 온 이유는?”
“말씀대로입니다. 추수꾼이자 재배자이신 황자 전하의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만.”
“내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라. 흥미가 돋는군. 만일 필요 없다면 어쩌겠는가.”
“어찌 새로운 기회는 마음에 드십-.”
거기까지 말했을 때.
지체없이 검을 뽑아 놈의 목을 잘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