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귀신 퇴치
검을 타고 전해지는, 사람의 살이 아닌 찰흙을 자르는 생소한 느낌.
목을 잘랐건만 피 하나 솟아 나오지 않았고 떨어진 놈의 머리통이 데구르르 구르며 킥킥 웃어 댔다.
놈이 색 뒤바뀐 눈을 데굴거리더니 나를 찾길래, 친절히 놈의 앞에 가 눈을 마주 보아 주었다.
그리곤 으르릉거리듯 경고를 뇌까렸다.
“선을 넘었다, 늙은 현자.”
“전하께서 키우고자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설마 제국의 영광은 아니겠지요.”
“대답할 의무가 없군.”
“전하, 인연은 그리 쉬이 끊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이어진 적도 없는 인연을 들먹이지 마라. 냄새나는 늙은이.”
“대의를 위해서 때론 도덕을 버려야 하는 것이 사람 일이지요. 아시지 않나이까.”
“선이 있다. 너희는 뒤틀렸어. 그 대의마저도.”
“결국은 다시 찾게 되실 겁니다. 그분을 대적하기 위해서라면 힘이 필요해서라도 말입니다.”
머리 잘린 늙은이의 장담에 입술을 뒤틀며.
손끝에 불을 피워 던지니.
“크흐흐흐, 크흐흐흐흐아악!”
놈이 웃 듯 울 듯 기묘한 소리를 내었고.
“장담하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늙은 쓰레기. 난 쓰레기는 옆에 두지 않고 태우는 편이라서.”
타오르는 놈의 고통을 고스란히 바라보며 짙게 웃었다.
주변에 가득했던 귀족들이 일련의 사태를 보곤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탐욕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풍경.
황자가 대륙 3현자 중 하나를 공격했다!
메케하게 타오르는 적염 사이.
허락된 운명을 거스르려는 황자와 과거의 운명을 되살리려는 못된 현자의 눈이 교차했다.
[본래 품었어야 할 중요 운명 악마에 의한 찬탈, 악마 숭배, 악의가 신비 염제심결에 의해 사멸합니다! 운명을 포식합니다!]
[중요 운명 계승과 학살이 뒤틀립니다!]
[대상이 지닌 운명의 끝자락, 악마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부스러지는 육신과 튀어 오르는 불티 사이로 본래 지녔어야 할 운명이 스러져 갔다.
역시나 전생의 현자가 일으킨 자폭테러는 폭군의 명이었고.
악마는 다시 계승에 관여하려 했으나 전생의 폭군은 없으니.
[길을 잃은 운명이 다른 이를 향해 떠납니다]
제물을 잃은 악마란 운명이 곧 어둡게 닥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가자. 아직 할 일이 많다.”
그렇기에 멈춰 있을 수 없다.
잿가루가 되어 버린 현자의 육신을 뒤로하고 텅 비어 버린 황자궁을 떠나며.
“청익 기사단과 3마법 전투단을 불러라. 그들과 함께 영림으로 들어가야겠다.”
영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철성에서 이룰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림 깊은 곳, 오랜 시간 머문 귀신들을 만나 물어야겠다.
황후와 무슨 관계인지.
또한 가능하다면 승전식이 이루어지기 전.
영림을 취해 증명하리라, 북부와 서부에서 행했던 구원이 단순한 기적이 아님을.
내가 바로 승리를 이끌었으며 더 나아가 제국을 이끌 적임자임을.
황태자의 자리에 어울림을 보이리라.
* * *
어느 먼 곳, 깊은 결심을 공고히 한 채 자리를 떠나는 황자의 뒷모습을 보며.
“크크크큭.”
늙은이가 깊게 미소 지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사람이 어찌 저리 변했나 했더니.”
황자의 부덕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의 미래도 보았다.
추수꾼은 현자이자 예언자, 천기를 읽고 미래를 본다.
분명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에게서 읽었던 미래는 폭군.
대륙에 파멸을 불러올 자.
그렇기에 지금까지 은근히 그를 지켰다.
살금살금 그의 광기와 패악을 자극하고 키워 가며.
스스로는 몰랐겠으나 어릴 적부터 그는 이미 준비된 씨앗이었다.
제국의 멸망을 위해.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가 바뀌었다.
패악과 광기는 그대로였으나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비참한 미래를 가진 이들을.
본래는 폭군을 위협하고 더 나아가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이들을 제 옆에 두었다.
이상했다.
그에게 모진 모욕을 당하고 반역자가 되어야 할 기사를 품은 데 이어, 본래 비극을 일으켰어야 할 마법사까지 품었다.
뿐만인가.
“악마 숭배자를 잡았다? 밤하늘을 생산하는 공장들을 모두 파괴하고?”
하수구 구역부터 시작된 정화.
황자가 하는 행동들은 정화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본래 제국을 좀먹었어야 할 것들을 쳐내고 되살렸다.
심지어.
멸망하여 악마의 주구가 되었어야 할 북부와 서부까지 지켜 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 패악스러운 황자가 저리 변했단 말인가.
어떻게 저런 위대한 일들을 이루었단 말인가.
자신들의 도움 없이는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었거늘.
“직접 보아야겠다. 대체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말이야.”
결국 현자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가에 나타났다는 순간부터 황자를 기다렸다.
마침내 만난 순간.
미래가 송두리째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폭군이란 미래는 그대로였으나 멸망의 운명이 뒤틀렸다.
죽을 자들이 살고 살 자들이 죽었다.
악마와 죽음이 가득했을 미래에 생명과 삶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황자는 제국을 살리려 하고 있다.
자신 또한 살려 하고 있다.
처절하게.
겉으로는 광기와 패악을 두른 채 고고한 척을 해 댔으나.
오랜 세월 사람의 목숨을 추수한 노인에게는 보였다.
황자가 얼마나 간절하고 숨 가쁘게 달리고 있는지.
미래를 모르고는 저럴 리가 없다.
그리하여 물었다.
어디서 기회를 얻었냐고.
본디 우리의 씨앗이 되었을 자가 어떻게 저리 변했나 했는데.
“저자는 본래의 황자가 아니다.”
익히 알던 미치고 패악스러운 황자가 아니다.
파멸을 위해 대신 달려 줄 사랑스런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더욱 충격적인 비밀을 품었음을 방금 보았다.
“건국제의 불을 품은 자다.”
자신의 몸을 감쌌던 불은 건국제 카이론의 불.
일반적인 마법, 검술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현자의 오랜 육신을 태워 버렸다.
일부러 덮어 없애 버린 신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막 깊은 땅에서 얼굴을 드러낸 현자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국제의 재림.
말도 안 되는 일이나 자신의 존재부터가 그런 이적 중 하나.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결국 나름의 결론을 내리곤 하얀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여니.
“가장 위험한 적이 등장했다. 모두 추수를 준비해라. 뿌린 씨앗을 거둘 시기가 빨리 이르리라.”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새까만 땅, 같은 얼굴을 한 창백한 얼굴이 우수수수 솟아났고.
수십, 수백 현자의 머리통에서 꿈틀꿈틀 핏줄이 일그러지듯 움직이자.
머리통이 가득 심긴 땅 한가운데.
새빨간 나무 하나가 서서 살아 있는 듯 가지를 흔들었다.
그때.
“과실을 피워라, 대적자를 죽여야 함을 잊지 말라. 우리의 뜻을 이루리라.”
“추수를 이루리라.”
“추수를 이루리라.”
“파멸을 이루리라.”
땅 가득한 머리들이 파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의 이마에 가득한 핏줄이 움직거릴 때마다.
꾸드드득, 나무뿌리에서부터 불거진 핏줄이 기둥, 가지를 지나 이파리까지 가득 차올랐다.
피가 뚝뚝 흐를 듯 묘한 윤기가 흐르는 표면과 춤을 추듯 일렁이는 가득한 핏줄이 기괴했다.
현자들의 노래에 맞추어 끼이이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던 나무 끝.
보라색 열매 하나가 맺혔다.
열매를 잉태하는 데 모든 힘을 다 쓴 것일까.
윤기가 가득하던 새빨간 나무가 순식간에 말라 힘을 잃었고.
현자들이 심긴 검은 땅은 비옥함을 잃고 푸석하게 변하니.
그들이.
“파멸을 이루리라!”
“파멸을 이루리라!”
“파멸을 이루리라!”
끝없이 파멸을 부르짖는 동안.
열매 안, 작은 생명 하나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추수의 때를 상상하는 현자들의 흑백이 뒤집힌 눈동자에 핏빛 광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 *
길을 걸어가던 중 문득.
[거대한 운명이 변화합니다. 뒤틀렸던 파멸이 제자리를 찾으려 합니다]
거대한 운명의 변화에 하늘을 바라보려니.
하늘 가득, 인력으로 어찌 못할 흐름이 느껴졌다.
분명 수도엔 겨울이 찾아오지 않았건만.
“어후, 왜인지 춥네요. 전하.”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지나갔고.
솔과 안드레가 어깨를 움츠리며 불안에 떨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던 고용인들도 마찬가지.
모두가 느낄 정도의 불길함이 하늘을 덮었다.
어인 일인가.
운명 포식자의 눈을 넘어 피부로 느껴지는 불길함이라니.
눈을 데굴거리는 이들의 표정에 불안감이 어렸고.
새들이 피신하듯 하늘로 급히 날아올랐다.
멀리 까악, 까악 울어대는 까마귀 울음이 스산한 가운데.
엄습하는 소스라치는 감각에 몸이 절로 떨렸다.
무언가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듯 불쾌한 감촉.
“깨어나는가…….”
전생엔 이 빌어먹을 감각에 익숙했다.
고위 악마가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 느껴지던 음산함.
제국의 멸망이 가까웠던 당시.
하루가 멀다고 이런 더러운 느낌이 피부를 간질였지.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와 새삼스레 불쾌한 감각을 다시 느끼려니.
“이 빌어먹을 새끼들.”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마 현자 무리겠지.
전생이었다면 황제가 되기 위한 탐욕에 가득 찬 폭군이 수많은 생명을 제물로 바쳤겠으나.
지금은 바칠 생명도, 놈들에게 협조할 폭군도 없다.
본래라면 서부와 북부의 비극, 이후 벌어질 동부 전선의 전투와 남부 원시림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피와 공포를 취했으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가로막혔고 앞으로도 가로막힐 것이다.
나로 인해서.
반드시 그리 만들겠다 결심했다.
지금껏 전생 폭군이 종종 벌인 학살극들이 그저 놈이 품은 광기와 패악 때문인 줄 알았건만, 이제 와 보니 악마에게 바칠 피가 필요하여 벌인 일이었구나.
문득 이 몸이 역겨웠다.
남아 있는 폭군으로서의 자아와 욕망들이 역겨워졌다.
제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악마에게 죽음과 피를 팔아넘긴 놈의 비열함이 끔찍했다.
머릿속 짜증이 가득 차올라.
“어서 뛰어오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마침 어기적어기적 등장한 자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저 멀리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다급히 달려왔다.
“청익 기사단과 3전투 마법사단이 전하의 부름을 받고 왔나이다.”
앞에 무릎을 꿇는 이들은 바로 북부에서 함께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
북부에서 임무를 끝마치고 바로 황성으로 복귀.
내가 내린 특별 임무를 수행해 왔다.
결과물을 확인해야 할 때.
“그래, 내놓아 보도록.”
내민 손에 그들이 커다란 양피지를 올려놓았고.
이를 펼치자.
-강철성 영림 지도
그들이 그려 놓은 숲의 약도가 가득했다.
먼 바깥부터 안으로 스며들 듯 이어진 그림들.
나름 자세히 조사했는지 지형지물과 영역마다 서식하는 백면귀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적혀 있다.
“중반까지 진행했는가.”
“그렇사옵니다.”
“중반까지 모든 영역을 확인하였습니다.”
나의 물음에 단장들과 뒤에 선 기사와 마법사들의 표정에 은근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아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조사했겠지.
하지만.
“제국 최고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치고는 부족하군.”
나의 기준엔 못 미쳤다.
“지형지물을 잘 그려 놓았으나 결국 고정된 결과. 영림이 항상 변한다는 건 알 텐데. 안 그래?”
“흐름을 기록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따라-.”
“변명하지 마라. 속도에만 치중해 진짜를 놓쳤구나. 흐름이란 본디 처음을 잡으면 이후엔 한결 쉬워지는 법. 기초가 가장 중요한 법임을 몰랐는가? 검도 마법도 마찬가지이거늘.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와 마법사란 자들이.”
“송구합니다.”
“송구해야지. 깊이 송구해야 할 거다. 기껏 내린 명령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다니. 안에 들어가서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면 그땐 정말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북부에서 갈라질 때 기사단과 마법사단에게 내린 명령은 영림 초입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만들어 두라는 것.
영림의 환경은 끝없이 변했고 초입의 작은 줄기가 흘러 흘러 중반의 거대한 그림자 줄기가 되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서라면 기본적으로 유동적인 흐름을 잡아 마나로 그려 놓아야 했건만
이들은 그저 속도에만 치중했다.
단순히 길을 몰라 명한 일이 아니었다.
영림의 흐름을 파악하는 동안 필수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백면귀들과 전투를 치르며 익숙해지라는 뜻을 내포.
겸사겸사 그림자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강구해 놓길 바랐건만.
정말 바보같이 지도만 그리고 다녔던 건지.
흔히 있는 공적을 위한 과잉 충성으로 인해 생긴 실수.
“지도를 그리란 말과 함께 무엇을 명했지?”
“백면귀를 상대하고 그들을 무력화할 방법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래, 결과가 이것뿐인가.”
“아닙니다.”
“믿어도 되겠는가.”
“보여 드리겠나이다.”
“나에게 잘 보이려 하지 말고 너희의 임무를 바로 하여 행동으로 증명해라. 그래야 곁에 올바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단번에 핵심을 관통하는 말에 그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고.
[작게 싹트던 운명 과잉 충성, 아부를 짓밟았습니다. 개변 점수를 소량 획득합니다]
자칫 잘못 자랄 쭉정이의 싹을 처음부터 밟아 버렸다.
문득.
‘전하께서는 재배자이며 추수자이시지요.’
늙은 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 또한 재배자이자 추수자이지.”
맞는 말이다.
그들이 파멸과 죽음을 심고 거둔다면.
나는 생명과 신비를 심고 거두니.
그 위에 피와 광기로 만든 비료를 뿌려 열매를 키우는 셈.
끝이 어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낫을 날카롭게 갈 시간이다.”
어찌 되었든 놈들의 열매를 가르기 위해선 낫을 갈아야 했고.
의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지도를 그린 미련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이끌어야 했다.
내 알 수 없는 혼잣말에 의문을 띄워 올리는 얼굴들을 바라보며.
“영림으로 진입한다. 우리의 목표는 가장 깊은 곳-.”
전보다 더욱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소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그림자, 악의, 고결, 포식, 당신을 맞이합니다]
[숨겨진 운명 잊혀진 존재들이 당신의 접근을 경계합니다]
[신비 그림자와 백면맹장에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투자합니다! 속성 영류(影流)를 획득합니다. 영림에 흐르는 다른 영류들 사이를 유영할 수 있습니다]
이전엔 보지 못했던 운명들이 소란을 떨었다.
포식자가 발을 들이밀자.
그림자가 갈라지듯 길을 열었다.
“영림의 주인이다.”
황가에 깃든 귀신을 퇴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