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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97화 (97/200)

97화 안과 밖

강철성을 지키는 자들은 쇠뿔 기사단을 비롯하여 제국의 정예병들과 성내에 있는 13기사단 잔여 기사 전부를 포함한다.

어쩌면 제국의 어떤 요새보다 더 단단하며 안전한 황성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종종 사람이 죽어 나가고 암살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아무리 위대한 기사들이 보호하고 있더라도 틈이 있는 것이리라.

실제로 얼마 전에는 강철성 협곡에 암살자가 침입하기도 했으니까.

그를 막아 낸 게 지금 황성에 돌아온 열한 번째 황자 아르한.

아직도 그가 협곡을 통하여 침입한 암살자를 어떻게 막아 냈는지는 의문.

“오늘도 안전하게.”

“오늘도 굳건하게.”

평소와 같이 안전한 하루를 바라며 강철성 곳곳에서 교대가 이루어졌고.

제국의 정예들이 날카로운 눈빛을 뽐내며 사방을 경계했다.

이상을 느낀 것은 깊은 새벽 즈음이었다.

어두운 하늘, 깊은 밤을 두른 채 별을 헤아리며 혹시 모를 위협을 경계하던 때에.

강철성 요주의 지역 중 하나인 영림에서 벌어진 심상치 않은 신호.

“어? 저거 뭐야.”

“이봐, 저거 보이지?”

“오로라?”

“미친, 극지방에 나타나는 오로라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럼 저건 뭔데.”

“어?”

몇몇이 아닌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의 시작을 알아챘다.

강철성 한복판에서 피어난 오색찬란한 빛.

이후 벌어진.

펑, 퍼펑, 퍼퍼펑!

새벽 공기를 뒤흔드는 폭발음에.

“다들 경계!”

“어디야! 상황 보고 확인해 봐!”

강철성이 소란에 휩쓸렸다.

처음엔 적의 침입을 예상했으나.

“영림이다! 영림 방향 쪽이야!”

“영림이면 아르한 전하께서 사냥 중인 곳입니다.”

“아르한 전하? 홀로?”

“청익 기사단과 3전투 마법사단이 따라간 것으로 압니다.”

이내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영림임을 확인, 황자가 사냥터 사용 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에 내부에 경계를 서던 인원을 제외한 병력들이 일제히 영림을 향했다.

혹시라도 양동작전을 우려한 조처.

쇠뿔 기사단 일부를 선두로 각 기사단과 마법사단 잔여 인원들과 뒤에는 정예병들이 한가득.

혹시 모를 변고를 우려하여 단단히 무장한 모습들.

처리할 변고가 영림일지 아니면 황자일지는 모르는 일.

그때, 영림 앞까지 급히 몰려온 그들 앞에 알프레드가 정중히 예를 표하며

“전하께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황자의 명령을 전달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누구도 간섭지 말라.

물론 황자의 말에, 더군다나 고작 그를 모시는 시종장의 말에 물러날 이들이 아니었다.

“비키게. 황성에서 일어난 일이니 상황을 파악해야겠네.”

자그마치 황가의 제일 기사단.

당연히 시종장이 막을 수 없는 직위.

허나.

그들이 움직이자 알프레드가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 의 길을 막았고.

“황자 전하의 명령입니다. 누구도, 영림에, 발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지러지는 오색 빛줄기와 폭발을 배경으로 알프레드가 나지막이 황자의 명령을 다시금 전했다.

내리깔린 눈빛이 스산했다.

스스스- 땅이 기어 다니는 소리가 얼핏얼핏 귀에 들렸다.

위협적인 기세를 마주한 쇠뿔 기사단의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우리를 강제로 막아 서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가소로웠다.

상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나 결국은 시종장.

감히 누구에게 무력행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그리하여 다시 발을 뻗는 순간.

목이 꿰뚫렸다.

알프레드를 무시하던 기사가 발걸음을 멈추었고.

목을 쓰다듬고는 일시적으로 본 환상임을 알아챘다.

주변에 선 기사들의 표정엔 의아함이 어렸다.

어째서 발을 멈추었는지 모르는 모양.

기사가 이마에 슬며시 배어나는 땀을 느끼며 눈가를 좁혀 알프레드를 쏘아보았다.

“감히.”

명백한 위협.

허나 사실 불쾌감보다 놀라움이 컸다.

살기를 다루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보통은 살기로 주변 분위기를 제압하는 것이 기본.

하수들은 무기와 인상으로 상대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경지가 높아질수록 풍기는 기세만으로 주변을 제압하는 법.

그런데 지금 앞에 선 중년의 시종장은 무기 하나 들지 않고 환상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 자신만 콕 짚어서.

전설적인 암살자들은 벼린 기세만으로 대상을 암살한다고 했던가.

그런 전설 속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의 실력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놈은 경고를 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너는 죽는다.

꽤 거칠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아마 황자에게 배운 방식이리라.

물론 황자였다면 당장 누구 하나를 베어버리곤 협박했겠지만.

잠 시간의 대치.

시종장에 불과한 자 하나와 강철성의 기사들이 대치한 가운데.

“황후 마마께서 명하시니 당장 영림에서 일어난 수상한 일을 확인하라 하셨나이다.”

내시 하나가 허여멀건 한 얼굴을 들이밀며 균형을 깼다.

명분이 생겼다.

지금껏 알프레드를 경계하던 기사가 검 손잡이를 움켜잡고는.

“황후 마마의 명이다. 막으면 베라.”

한껏 살기를 피워 올렸다.

알프레드의 것과는 다르지만 주변을 충분히 압도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

막 그들이 알프레드를 짓밟고 숲을 진입하려는 찰나.

“멈춰라! 당장 그 무엄한 발걸음들을 멈춰!”

그들의 뒤에서부터 차 밖으로 몸을 빼낸 이가 급히 외치자.

“전하?”

몇몇 마법사가 그의 정체를 파악하곤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7황자 살라스.

그가 탄 황가 전용 차량이 급히 알프레드와 기사들 사이에 멈추어 섰고.

벌컥 문을 열며 뛰어 내린 그가 손에 쥔 종이를 팔락이며 당당히 외치니.

“봐라! 승전식이 열릴 때까지 황자 아르한에게 영림에 대한 전권을 일임하겠다는 폐하의 성지다!”

살라스가 당당히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들 앞에서 가슴을 폈다.

“자, 황후의 명과 폐하의 성지! 무엇이 우선인지 다들 알겠지! 당장 물러나라! 진입하는 자는 폐하의 명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여 내 직접 엄벌을 내릴 것이다!”

꿀릴 것 없다.

황후를 부담스러워하는 살라스였으나 그녀가 무서운 것이지 나머지 떨거지들이 무서운 게 아니다.

살라스, 매일같이 미친 동생에게 치여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 또한 황자.

위엄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고 일신의 실력 또한 부족하지 않았다.

심지어.

“4전투 마법사단! 내 옆으로 오라! 우리는 영림을 지킨다! 폐하의 명을 따르리라!”

그의 외침에 외곽에 빠져 있던 4전투 마법사단이 우르르 살라스의 옆으로 향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마법사들 중 본래 권력에 큰 관심이 없거나 중립을 지키던 자들이 황제의 성지라는 말에 움직이더니.

어느덧 황후의 명을 따라 영림으로 진입하려던 이들을 가로막았다.

비록 숫자는 한참 부족했어도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어서 가벼이 볼 무력이 아니었고.

특히 황자라는 직위와 손에 든 성지가 균형의 추를 맞추었다.

어찌 보면 살라스가 마법사들 사이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성지를 앞에 두고도 영림에 들어가겠다는 거냐.”

한편으론 황제보다 황후를 따르는 이들이 이렇게 많음을 보여 주기도 하는 장면.

살라스가 이를 갈아붙이며 놈들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감히 황제의 명을 앞에 두고도 뻔뻔하게 자리에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쇠뿔 기사단과 강철성을 지키는 기사들, 병사들은 명확히 이야기하라. 너희는 폐하의 뜻이 아닌 황후의 뜻을 따르겠다는 건가.”

살라스의 살기 어린 말에.

“우린 황가의 뜻을 따릅니다. 황성의 규칙을 따릅니다. 그러니 과한 억측은 삼가 주십시오. 황성의 변고는 폐하와 제국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전하.”

이들을 이끄는 이가 답하니.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 정치적 한 수.

살라스가 분노로 얼굴을 구겼다.

기사가 아니라 정치가구나.

살라스의 멈칫거림에 기세를 잡았다 생각한 상대가.

“들어가진 않겠나이다. 하지만 주변을 탐색하게는 허락하소서.”

정중을 가장하여 황자의 뜻을 흔들려 했고.

살라스가 부스스한 회색 머리카락을 긁적대다가.

“지랄하지 마라.”

단칼에 놈의 희롱을 잘라내었다.

“다시 말한다. 당장 꺼져라. 이 썩은 고기를 탐하는 이리 떼 같은 새끼들. 피 냄새에 발정 난 개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죽인다.”

그리곤 폭언을 거침없이 쏟아 내니.

입가에 떠오른 잔혹한 미소가 어디서 많이 보던 것과 똑 닮았다.

바로 동생 아르한 특유의 광기와 살기 어린 미소.

비록 그처럼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위태로움과 고귀함을 품지는 못했으나.

유약한 얼굴로 뱉어 내는 광기 어린 말이 꽤 위협적이었고.

마법사 특유의 광기와 퍽 어울렸다.

순간 말을 잊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주춤하는 사이.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모두 전투 준비.”

홀로 중얼거리던 살라스가 마나를 피워 내어 마법식을 짜 올리기 시작.

순식간에 강철을 뽑아내어 주변을 채움과 동시에.

그를 따르는 마법사들이 각자 마법을 준비하여 기사들과 병사들을 겨누었다.

살기와 광기가 몰아치는 현장.

“숲으로 다가오는 놈들을 죽여라!”

살라스가 발광하듯 고함을 치자.

“모두 물러난다. 우선 바깥에서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그러니 고정하소서, 전하.”

그들을 이끄는 기사가 살라스의 광기를 이겨 내지 못하곤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을 선까지 멀찍이 물러섰다.

멀어진 그들을 확인하고서야.

“후우, 후우.”

살라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척비척 숲을 바라보니.

잠깐이었지만 급박했던 상황에 정신이 아찔했다.

아버지를 찾아가 허가를 받아 낸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황제의 명령에도 놈들이 버틸 줄이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게 바로 아르한의 광기.

어차피 버틸 거라면 확실히 보여 주리라.

내심 황제의 명보다 황후의 명을 우선시하는 놈들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깐의 체험 결과.

“놈은 미친놈이야. 어떻게 이런 짓을 매일같이 벌인단 말이야.”

다리가 풀리고 손이 떨리는 경험이었다.

그저 미쳐서 광기를 뿜어낸다고만 생각했는데.

보니까 심력 소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전신에 땀이 줄줄 흐르지 않는가.

살라스가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땀을 닦으려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알프레드가 먼저 옆에서 손수건을 내밀며 작게 미소 지었다.

어딘가 기특해 보이는 표정에 살라스가 뚱한 얼굴로 땀을 닦아 내고는.

“여튼 이렇게 고생시켜 놓고 뭐 하나 못 건져 오기만 해 봐라.”

멋쩍음을 아르한을 향해 풀어 내었다.

잠깐의 대치 동안, 숲 전체를 감싼 오색 불꽃이 화려하게도 피어올랐다.

본래 검은색이 전부였던 숲에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자리했고.

가지 끝 타오르는 불꽃과 폭발이 무성하게 어린 풍경.

“참 화려한 게 녀석답군. 여기는 내가 지킬 테니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살라스가 힐끗 알프레드를 살폈고.

“…다녀오겠습니다. 전하를 부탁드립니다.”

시종장이 굳은 얼굴로 황자를 부탁했다.

그의 부탁에.

“그건 걱정하지 말고. 혹시라도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 이 살라딘 마법사가 나설 테니. 이제 한배를 탄 입장이니까.”

살라스가 알프레드를 돕겠다 했으나.

“말씀 감사합니다. 혹여 전하께서 걱정하시면 전해 주소서. 진짜가 되어 돌아오겠노라고.”

스산한 말을 남긴 알프레드가 스르륵 사라졌고.

살라스가 이젠 더욱 거칠게 타오르는 숲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손수건은 돌아오면 주도록 하지.”

이왕이면 돌아오라는 말을 넌지시 남기곤, 자신을 따르는 마법사들과 함께 영림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멀리 선 내시들과 황후를 따르는 기사들이 호시탐탐 영림을 노렸다.

강철성에서 출발한 마차들이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승전식을 앞두고 많은 정치적 거래가 오가기 시작했고.

철사자 데카론은 강철성으로 복귀를 거부, 서부에서 병력을 규합하며 강한 불만을 표했고.

11황자궁에 더 많은 눈길이 쏠렸다.

새벽이 더욱 깊어가듯 강철성의 공기 또한 차갑게 얼어 갔다.

* * *

바깥에 휘도는 전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림 내부에선 뜨거운 전투가 한창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나로 방어벽을 세운 사이.

기사들이 푸른 날개와 같이 그림자들을 막아선 채 검을 휘둘렀다.

황자가 만들어 낸 오색 귀신이 이리저리를 떠돌며 염료를 뿌려 댔고.

솔이 쓰러진 귀신들을 되살려 그림자 군대를 통솔했다.

쏟아지는 오색 비와 흩뿌리는 염료에 귀신들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었고.

기사들의 검이 실체를 갖춘 놈들의 몸을 갈랐다.

이어 떨어진 마법사들의 마법이 놈들의 몸을 산산이 부쉈다.

조각나는 그림자들 사이.

“으랴앗!”

육신 없는 무명 기사가 나서자.

더욱 깊은 숲에서 뛰쳐나온 백면귀신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무명 기사의 검은 실없는 농담과는 다르게 단정했고 무거웠다.

검이 천천히 떨어질 때마다 귀신들이 갈라졌다.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그의 검은 무거운 검.

또한.

쿠웅.

발을 구를 때마다 주변이 찌르르 울리며 적들의 움직임을 가로막으니.

그가 지닌 신비를 짐작게 했다.

다만 때때로 검 끝이 떨리는 것을 보니 무언가 고민하는 모양.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에서.

“시원하군.”

황자는 홀로 하늘을 바라본 채 자신이 쏟아 낸 비를 맞고 있었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아비규환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꼴이 너무나 태연자약하여 얄미울 정도.

다만 그의 깨끗한 백금발이 너울거리며 오색 비와 염료를 함빡 머금었고, 찬란하게 빛을 뿜어냈다.

하늘로 우뚝 솟은 콧날을 타고 비가 흘러내렸다.

목울대로 흐르는 빛물이 그의 고귀함을 더욱 강조하는 동안.

이내 숲이 완전히 물들었다.

영림이라 불릴 만큼 그림자 일색이던 숲이 황자의 색으로 물들었다.

오랜 원한을 담은 땅이 정화되었고.

생명을 잃은 채 귀곡성을 뿜어내던 나무들이 요란한 생명을 품었다.

그 안에서 싸우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시시각각 새로운 성장과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

영황의 세력이 사라지고 있다.

“자, 언제쯤 그 무거운 엉덩이를 뗄 것이냐.”

황자가 두 손을 모아 하늘을 바라보며 약속된 적을 기다리는 동안.

저 깊은 곳, 처음으로 검은 안개가 몰아쳤다.

마치 오색 비를 밀어내려는 듯, 염료를 물리치려는 듯.

다급히 영림을 다시 검은색으로 물들이려는 검은 돌풍 사이.

-누가 감히 황제의 영역을 침범하는가.

음산한 목소리가 일시에 타오르는 숲을 억눌렀고.

그때껏 하늘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황자가.

“나다, 가짜 새끼야.”

당당히 적을 도발했다.

말다툼은 길지 않았다.

숲 전체가 흔들린다 싶더니 불쑥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크기만 해도 무명 기사를 압도할 정도.

손에는 거검을 들고 등에는 활을 맨 자.

얼굴엔 사납고 위엄 넘치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모습.

그가 달려오는 발끝을 경계로 새까만 불꽃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까만 불에 닿은 오색이 부식되며 생생함을 잃었다.

무명 기사의 말대로였다.

모두가 잠시 몰려오는 강대한 적을 바라만 볼 때.

“괜찮겠나, 깡통. 네가 모시던 자를 죽여도.”

“……!”

갑작스러운 물음에 무명 기사가 침음을 흘렸다.

여전히 태평한 황자의 얼굴에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았고.

제 스스로도 깡통이란 충격적인 모욕에 놀란 것인지, 지금 다가오는 영황.

아니 생전 모시던 황자의 등장에 놀란 것인지 모를 지경.

그가 고개를 털고는.

“깡통이라 마음이 없습니다. 남은 충의도 없습니다. 남은 아쉬움도 없습니다. 전 무명 기사. 깡통이라 부르셨듯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죽이소서. 이제 제가 섬기는 주군은 살아 있는 육신을 지닌 오롯한 전하입니다. 영혼이 뒤섞여 귀신이 된 자는… 주군이 아닙니다.”

영황은 자신의 주군이 아니라 선언했다.

말은 당당했으나 목소리에 서린 아픔이 절절하여 심금을 울렸다.

물론.

“마지막 순간 네가 직접 가슴에 검을 꽂아라. 명이다.”

황자에겐 누군가의 감정 따윈 사치에 불과했고.

그가 마주 거검을 들어.

“평민, 깡통은 따라오라. 나머지는 계속하여 숲을 망치도록.”

달려오는 가짜 황제를 마주했다.

황자의 손에 든 거검이 울고 불티가 휘날렸다.

적 또한 비슷한 모양새의 검을 들어 당당히 맞부딪히는 순간.

검을 던졌고.

브레이커가 놈의 검에 튕겨 날아가는 사이.

“이거나 처먹어라.”

어느새 손에 쥔 구슬 하나를 놈의 얼굴에 던지고는 맹장이 그려진 가면을 써 그림자를 펼쳤다.

곧.

번쩍번쩍 콰르르릉!

물감통을 터뜨리듯 세상이 온갖 색으로 점철되는 순간.

새까만 그림자가 넷을 감싸며 자취를 감추었고.

남은 이들이 전투를 계속하는 동안에도.

고요해진 숲, 비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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