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승전식 아침
오랜 세월 강철성엔 특별한 장소들이 존재했다.
가령 정령의 화원.
정령의 화원에는 정령의 씨앗이라 불리는 근원들이 맴돌았다.
하급 정령이 되기 전 정령의 속성만을 띤 무언가.
보통 깊은 원시림, 그중에서도 특별한 땅에서만 볼 수 있다던 정령의 씨앗들이 돌아다니는 신비로운 풍경.
협곡 또한 마찬가지.
공간의 찌꺼기들이 모여 깊은 골짜기를 이룬 장소.
깊은 어둠 속엔 버려진 건물들과 물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던가.
얼마 전, 협곡을 통하여 침입한 암살자로 인해 대대적인 청소 작업에 들어간 결과.
사람의 유골도 여럿 나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외에도 무엇을 위해 세워 놓았는지 모를 높다란 탑과 하늘을 떠도는 비고가 그러했고.
매일같이 위치를 바꾸는 강철성 자체가 특별한 풍경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봐 온 만큼 익숙해졌을 뿐.
그중에서도 영림.
영림의 음습하고 불길한 그림자는 이제 강철성의 일부나 마찬가지.
황성이 생기고 꽤 오랜 세월을 자리했으니 지금 강철성에 머무는 자들에겐 당연한 풍경 중 하나.
그런데.
“영림이 바뀌었습니다.”
“보았어요. 아마 강철성 주변에 머무는 자들 모두가 보았겠지요.”
당연한 풍경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었다.
그림자가 가득했던 숲에 새벽부터 오색 비가 내리더니 아침이 찾아오자 그림자를 완전히 몰아내었다.
어두침침했던 나무들이 오색 생명을 함빡 머금었고 가지 끝에는 불꽃과 폭발이 화사하게 피었다.
그야말로 오색화림(五色火林).
꽃이 아니라 불이 피어난 숲.
지금껏 보았던 풍경과 지금의 풍경이 너무나 달라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황자는 증명한 것이다.
이전 북부와 서부에서 세운 공이 우연이 아님을.
강철성에 뿌리내린 오랜 저주를 직접 뽑아내며 선포한 거다.
이래도 날 의심할 거냐고.
동시에 자신의 힘을 과시한 사건이기도 했다.
지금껏 영림을 정화하려던 자가 왜 없겠는가.
황가에 머무는 기사단과 마법사단만 스무 개가 넘는다.
그들을 모두 그러모아 마법을 쏟아붓고 진격하여 숲 하나 초토화하는 것 정돈 가능했다.
다만 그냥 두었던 건 그만큼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
죽어 나갈 기사들과 마법사들, 소요될 시간, 그동안 텅 비어 버릴 제국의 치안을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교환이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와 손 안 대고 정적을 처리하고자 하는 은근한 욕망이 영림을 존속시켰다.
그런데 황자는 단 두 개의 무력 단체를 끌고 들어가 직접 영림을 정화했다.
아니, 정화한 정도가 아니다.
“영림을 자신의 업적으로 삼겠다고 했다 합니다.”
완전히 제 능력으로 뒤바꾸었으니 이제 강철성에 황자의 이름이 길게 남겠지.
강철성 한복판에 황자 아르한의 이름이 길이 남으리라.
그가 이룬 업적을 두고 모두가 입방아를 찧어 댈 테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던 자들이 북부와 서부의 일을 믿겠지.
기껏 퍼트린 허튼 소문들이 사라질 거다.
“영림의 모든 그림자가 없어졌다 하옵니다. 황자는 승전식 당일까지 영림에 있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창백한 얼굴을 한 내시의 보고를 들으며 황후가 입술을 깊게 짓씹었다.
입술에 매달린 분노와 굴욕이 피가 배어 나오듯 붉게 번졌다.
분명 막으라 했을 텐데.
“영림으로 향했던 병력들은 대체 뭐를 했단 말인가요. 어째서 그들이 영림으로 들어가지 못했나요.”
“살라스 황자와 마법사들의 방해가 있었다 합니다.”
“그들을 밀어내고서라도 들어갔어야지!”
결국 황후가 참지 못하고 노호성을 내질렀다.
가서 아르한의 폭주를 막고 황성을 보호하라, 그리 일렀다.
나름 정치적 수완이 있는 자들이니 분명 알아들었을 거다.
그런데 밖에서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다니.
“지금까지 나에게서 받아먹은 게 얼마인데! 그 간단한 명령 하나 처리하지 못한단 말이야!”
쨍그랑!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든 잔을 내던졌고, 곁에서 그녀의 머리와 장신구를 치장하던 시비들이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그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변에 있는 집기들을 마구잡이로 던지길 한참.
체통마저 잊고 씩씩 몰아쉬는 숨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녀에게 황자가 이룬 공은 다른 의미였다.
가문의 오랜 비원을 황자가 연이어 깨 버렸다.
서부에 이어 영림까지!
거기다 영림에 깃든 귀신은 가문의 힘이자 비밀.
놈에게 바다를 준다는 것은 모두 거짓.
고작 귀신에게 그 귀한 장소를 줄 리가 있겠는가.
영황은 오래전, 가문이 공과 시간을 들여 키워 온 제물.
흑해를 온전히 하고 가문의 비원을 이룰 ‘그것’을 부를 희생양이었는데!
황자는 대체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미친개에게 목줄을 잡힌 것만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감히! 감히이-!”
영림에 숨어 있겠다니.
분명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리라.
황후가 살기와 분노를 마구 토해 내며.
“살라스! 계승권마저 내려놓은 유약한 황자가 어떻게 했길래 발걸음을 멈추었단 말이야! 아니, 나를 우습게 본 것이겠지! 나에게 받은 은혜가 우스운 것이겠지!”
광분할 때.
“폐하의 성지를 갖고 등장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내시가 그들을 위한 변명을 던졌고.
황후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 뭐라?”
“폐하의 성지를 갖고 나타났습니다. 살라스 황자가. 폐하께서 영림을 아르한 황자에게 맡긴다는 성지를 들고 명분을 외치니 어쩔 수가 없었나이다.”
“성지? 폐하께서 아르한의 횡포를 놔두셨단 말이냐? 아니, 허락하셨다고?”
생각지 못한 소식에 황후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황제의 성지가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길 잠시.
“모두 나가라.”
시비들을 일제히 쫓아내고는.
“성지라니. 분명 폐하가 내린 성지는 모두 확인하지 않던가요.”
내시를 향해 물었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왔다.
자신 모르게 성지를 내리다니 어떻게?
“분명 올린 약도 드셨을 터. 정신이 흐려지셨을 텐데 어찌 살라스에게 그런 성지를 내렸단 말이지요? 먹는 걸 확인한 게 맞나요?”
“네, 분명 드시는 걸 확인했나이다.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제대로 폐하를 지켜보지 않은 탓이겠군요. 변명해 보세요.”
“이전에 만들어 두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폐하와 살라스 황자와 독대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었다?”
위험한 발언이었다.
황제를 감시하다 못해 정신을 흐리는 약을 먹였다는 발언이니.
허나 여기는 황제궁, 그중에서도 황후의 처소.
감히 황후의 말을 엿들을 이는 없었고.
이미 분노한 그녀에게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폐하가 지금 살라스와 아르한의 편을 들었단 말이지요! 대체 왜! 나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다.
아르한이건 살라스건, 황제건!
감히, 감히!
“나를 두고 황자의 편을 들었단 말이에요!”
황후의 눈가에 벌건 살기가 번져 나갔다.
분명 황제는 자신의 말에 수긍했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는가.
자신이 휘어잡고 있다 생각했는데.
항상 자신의 말을 따라왔던 그였는데.
요즘 들어 중요한 순간마다 자기 일에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서부에 살라스를 보낸 것도 폐하셨지요.”
황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본래 자신이 보내려 했던 인사는 6황자.
잔혹한 성정과 더불어 자신의 말을 퍽 잘 듣는 아이였기에 서부에 보내 멸망을 부추기려 했으나 황제의 강권으로 살라스를 보냈었지.
그뿐만 아니다.
“서부에 공을 이룬 아이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서부에 1황자를 보내자 했을 때 했던 말.
누군지 특정하지 않았던 대상.
그래도 믿었다.
자신의 남편이기도 했고 지금껏 뜻에 반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오는 장님과도 같았던 황제이기에.
헌데 아르한이 나타나고 나서부터 달라졌다.
자꾸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에게만은 악하게 대한 적이 없건만 어찌하여.
그래도 황제라고 대우해 주었건만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는단 말인가.
황후의 눈에 어둑한 기운이 어렸고.
“당장 폐하를 보러 가야겠다. 채비하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황제의 처소로 발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을 막을 자가 없었다.
내시들도 시비들도 심지어 황제 처소 앞을 지키는 기사들도 황후에게 고개를 숙일 뿐.
그녀가 입은 물빛 드레스 자락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묵색의 복도, 모두를 내리깔며 걷는 황후의 걸음이 다가오는 중에.
“후우-.”
황제는 꿈뻑꿈뻑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잡아 두려 애쓰는 중.
주변에 있는 자들을 모두 몰아낸 채, 앞에는 암철단의 수장만이 홀로 섰다.
“폐하, 대역이 준비되었습니다. 피신하시지요.”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말에.
“과연 모를까.”
황제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알아도 어쩔 수 없나이다. 피신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폐하.”
“무엇을 위해 난 도망치려 하는가.”
어딘가 공허한 그의 눈동자에 암철단의 수장이 미간을 찌푸리길 잠시.
“암철단은 황가와 황제를 위한 집단. 폐하를 지키고 살리는 것이 최우선. 지금은 피하셔서 미래를 보셔야 할 때입니다.”
다시금 폐하에게 간곡히 조언했다.
황후와 대립하기 전부터 대역을 준비해 두었다.
황제와 가장 닮은 자, 그에게 자리를 넘길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황후의 마수를 피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작 황제가 마지막 순간 고개를 저었다.
“그대에겐 내가 황제로 보이는가. 시종장.”
“…아셨습니까.”
“어찌 모를까. 그러니 답해 보게. 자네가 보기에 난 황제인가. 아니면 부인의 치마폭에 쌓여 정신을 잃은 꼭두각시인가.”
황제의 말에 암철단의 수장이 몸을 움찔 떨었다.
과거 황제가 황자이던 시절 그를 모시던 시종장이었던 자.
사실 모든 황손의 시종장은 암철단이 도맡았다.
그래야 누가 황제가 되든지 암철단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황손이 죽으면 그 또한 죽는다.
황제가 되면 살아 암철단의 수장이 된다.
어릴 적 유독 유약하던 황자를 돌봐 왔던 암철단의 수장이 오랜만에 시종장 때를 떠올리며.
“그때나 지금이나 존귀하신 폐하이십니다.”
작게 미소 지었다.
그거면 되었다.
황제가 그리 생각하곤.
“작성하여 둔 성지를 발표하라. 난 여기 남겠다.”
“폐하?”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깊은 새벽, 살라스가 황제궁에 찾아왔던 순간.
“가져가거라.”
미리 작성하여 놓은 성지를 건넬 때.
“폐하?”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표정이 눈동자 깊숙이 들어왔다.
놀라움과 걱정을 담아 보던 아들이 조심스레.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버지를 걱정했고 그제야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
“방금 무엇이라 했더냐.”
“괜찮으시겠냐고 물었습니다.”
“…왜.”
“아르한과 저를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폐하께서 괜찮으실까 걱정입니다.”
“황후 때문에 그러하냐.”
“…네.”
“아르한은 무어라 했느냐.”
“녀석은 그저 폐하에게 가서 허락을 맡아오라 했습니다. 뒷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지요.”
“뒷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
“그러니 다녀나 오라며 윽박지르더군요. 그리고.”
“그리고?”
“무리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리 전해 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든 아버지가 다 큰 아들들끼리 싸우는 데 누구 편들어 줄 필요까진 없다더군요. 버릇없는 놈이지요.”
그래도 기껏 이리 도와주시는데 말입니다.
일곱째의 볼멘소리에.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황제가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참으로 맑고 따뜻하니, 이렇게 웃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항상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모두를 대했다.
혹여 자신을 해하지는 않을까, 속으론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거 같아 생긴 자격지심.
그리하여 아들들마저 저 멀리 두어 대화를 나누었다.
문득 아르한이 제국을 태우는 불꽃이 되겠다 선언할 때 떨어져 있던 거리가 떠올랐다.
발걸음으로 오십 걸음.
참으로 멀었구나.
그럼에도 이 아비를 걱정해 주는 자식들이라니.
단번에 못된 말 속에 섞인 진심을 파악했다.
참으로.
“못된 놈 같으니라고.”
부족한 아비가 아닌가.
발칙한 아르한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모자란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장성한 아들들이라지만, 아비가 도망쳐서야 체면이 살지 않는다.
아들들이 분투하는데 자신도 짐을 나누어야겠지.
“나는 도망치지 않으려 하네.”
“폐하!”
“성지를 가져가라. 황후가 오고 있을 게야. 내가 떠나면 모든 분노를 두 아들이 감당해야 하는데 어린 아들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야.”
“…굳이 이렇게까지 관여할 이유가 있나이까. 결국은 두면 결론이 날 것입니다.”
“그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이겨 나의 뒤를 잇겠지. 그냥 두면 그럴 걸세. 허나 아비로서도 황제로서도 덕목이 아님을 알지 않는가.”
“…….”
“황제로선 제국의 미래를 위해. 아비로선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니 따라 주게. 오랜 정에 기대어 부탁하네.”
암철단의 수장이 작게 숨을 내쉬곤.
“원래 그리 정이 많으셨지요. 알겠습니다. 그것이 폐하의 뜻이라면 그리하소서. 신은 그저 따르겠나이다.”
“성지를 전하게. 승전식 날 황가를 비롯한 수도에 발표하여 뜻을 확고히 할 생각이야.”
이를 마지막으로 암철단의 수장이 사라졌고.
대역 대신 남은 진짜 황제가 깊이 숨을 내쉬는 사이.
드르륵!
벌컥 문이 열리며 황후가 들어섰다.
눈에 담긴 기운이 살벌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자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황제가 잠시 눈을 감아 통증을 진정시키는 사이.
허락도 없이 들이닥친 황후가.
“폐하. 첫째를 황태자로 세우소서.”
갑작스레 탐욕을 밝혔다.
그러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소.”
“어째서요! 첫째가 지금껏 제국을 위해 헌신해 온 것이 얼마인데요!”
“그대도 말하지 않았소. 서부에서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아이를 황태자로 세우겠다고.”
“폐하! 진정!”
그녀의 고함에 황제의 처소가 부르르 떨려왔다.
날카로운 눈빛과 목소리가 날뛰며 머리를 헤집었다.
푸르게 번지는 기운이 음산하게 공간을 내리눌렀다.
그래, 저게 그녀의 본래 모습.
정적들을 상대할 때 보였던 잔혹함이 엿보이는구나.
“설마 아르한을 황태자로 세울 생각입니까.”
담담한 황제의 눈을 바라보며 황후가 짓씹듯 물어보았고.
“공이 크고 약속된 자리이니 그래야겠지. 성지를 이미 내렸소. 내일 제국 전체가 알게 될 것이오.”
황제가 쐐기를 박았다.
결심은 했으나 막상 황후를 마주하자 두려운 것도 사실.
허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그리하여.
“내 뜻은 확고하니. 이미 발표하기로 한 성지를 돌이킬 방법은 없소. 내일 아르한은 황태자가 될 것이고, 준비한 대로 승전식이 치러질 것이오.”
더욱 강하게 나갔다.
이리하면 아르한과 살라스에게 향할 분노가 조금은 줄어들겠지.
곧 터질 황후의 고함을 기다렸으나.
“…….”
그녀는 그저 습기 가득한 눈동자로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눈이 그를 감싸는 듯 번졌다.
황제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는 것을 본 그녀가.
“뜻대로 하세요. 우선은.”
무미건조한 말투를 끝으로 뒤돌았다.
방금까지 치솟던 분노는 거짓이었던 양 고저가 사라진 억양이 더욱 소름 끼쳤다.
본래 황후는 철혈의 영애, 누구보다 차갑게 사람을 죽이는 여인.
그녀가 지금은 물러나기로 하며.
“이제 기회는 없을 겁니다.”
황제에게 마지막임을 고했다.
그녀가 떠난 후.
홀로 남은 부군이 회한에 잠긴 눈을 들어 위를 보며.
“제국을 태운다 하였지. 해 보아라. 나 또한 장작이 되어 줄 터이니.”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깊이 내쉬는 숨을 끝으로 깊은 잠이 몰려왔다.
약 기운과 더불어 몰려온 잠 속, 뜨겁게 타오르는 꿈을 꾸었다.
승전식의 아침이 밝아 왔다.
* * *
승전식 아침.
모두가 황자의 공을 기리기 위해 모인 자리.
강철성 한복판에 만들어진 거대한 광장 주변, 늘어선 묵색 깃발 속 그려진 은빛의 쌍두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듯 바람에 펄럭였고.
덩달아 어둑한 예복을 차려입은 귀족들이 낮은 수근거림으로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동안.
강철성 전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온통 어두운색뿐이었다.
늘어선 깃발도, 주변 궁전들도, 늘어선 사람들도.
화려하나 어딘가 음침했다.
강철성에선 익숙한 풍경이었다.
가장 상석, 자리에는 황제와 황후.
황제 또한 묵색 예복을 입은 채 흐린 눈으로 강철성의 풍경을 담고 있을 뿐.
옆에는 황후가 눈을 번뜩이며 귀족들을 위압했다.
그녀가 입은 묵색의 드레스와 화려하게 묶어 올린 머리는 아름다웠으나 정작 표정과 눈은 냉막하여 모두를 불편케 했다.
당연한 일이다.
첫째가 아닌 열한 번째가 황태자가 될 것이라 이미 모든 이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발칙한 자는 언제쯤 온다지요?”
승전식의 주인공이었어야 할 황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와 황후가 등장하였음에도.
한참을 기다리느라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랐건만.
“그게, 준비가 끝나면 오겠다고 영림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황자는 그저 영림에서 준비를 하겠노라 핑계를 댔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황후가 뿜어내는 기세가 흉흉해졌다.
귀족들의 얼굴에도 칙칙한 근심이 어렸다.
어제 새벽 일어난 영림의 변화를 모두가 알았고.
아르한 황자가 황태자가 될 것이라는 흉측한 소문이 떠돌았다.
진실이 밝혀질 아침이니 모두가 긴장하는 것도 당연지사.
한참이 지나도 주인공이 나타나질 않아 다들 당황하던 차에.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고.
신장의 가면을 쓴 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묵색의 광장, 오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