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02화 (102/200)

102화 진창

상석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자리한 아르한의 어머니, 황비가 문득 떠올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들이 변하기 시작한 때가.

매일같이 어미를 원망하고 표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아들이었다.

시기심이 과하여 어린 동생에게까지 못나게 굴었다.

그래도 두었다.

아들이니까.

아들을 훈육하지 못한 어미를 탓해도 어쩔 수 없었다.

먼 마도왕국, 본래의 영광스런 자리를 버리고 택한 제국행.

사실 팔려 왔다.

그래, 자신은 마도왕국에서 제국의 황제에게 팔아넘긴 딸이자 공물.

팔릴 것을 알고선 먼저 황제에게 요청했다.

자신을 황비로 삼아 달라고.

기뻐하던 왕국 수뇌부의 얼굴이 어찌나 징그럽던지.

제국에 와선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고, 누구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힘없는 어미가 아들에게 무슨 자격으로 훈육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하여 이리 사는 꼴인데.

스스로를 학대하듯 아들의 패악을 두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첫 변화는 참으로 사소했다.

“마마, 어젯밤 전하께서 누구도 죽이지 않으셨다 하네요. 축하할 일입니다.”

“아르한 전하가 기사들과 훈련을 하신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사실을 확인해 볼까요?”

사람을 죽이지 않고 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는 소식.

참으로 웃긴 일이다.

사람 구실 하는 것이 축하받을 일이로구나.

처음엔 그녀조차 내심 황자의 변화를 믿지 않았다.

잠깐일 뿐이라 생각했다.

간혹 이상한 바람이 들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다가도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르한 전하께서 북부에서 전공을 세우셨다 합니다! 홀로 에스키모를 막아 내셨다 합니다!”

“글쎄, 녀석이 어전에 들어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뭔지 아시오? 욕이었소 욕! 신하들을 향해 온갖 욕을 뱉어 대더이다!”

“아르한 전하께서 서부에 나타난 검은 바다와 악마들을 물리치며 나아가신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마마.”

황자의 업적이 위대해졌다.

작은 것부터 시작한 그의 변화가 주변을 변화시키더니 종국에는 북부를, 서부를 구해 냈다.

매일 밤 올렸던 기도가 응답이라도 받은 걸까.

어느새 어미는 황자의 변화를 위해서가 아닌, 안전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매일 깊은 새벽마다 창가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황자가 황궁에 돌아온 이후에도 밤잠을 잊은 채 기도했다.

옆에서 본 그의 자태가 너무 위태로워서.

남들은 변화하는 영림을 보며 놀랐으나 그녀는 오히려.

“무사히,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소서.”

아들의 무사를 기도했다.

옆에는.

“오빠야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셔요-.”

조금은 자란 딸아이의 기도가 울렸다.

오라비에게 받았던 상처는 이미 모두 잊었는지.

간절히 모은 고사리손이 꼬물거렸다.

그렇게 맞이한 승전식 아침.

“오라버니가 너무 멋져요.”

딸아이가 양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그만큼 황자의 자태는 위대했다.

“어머니, 우셔요?”

품에 안긴 유리엘이 어머니의 눈물에 물어 왔다.

감동이 밀려온 탓일까.

주변의 시기 어린 눈길에도 어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아들이 귀해서? 그가 세운 업적이 위대해서? 그의 변화가 놀라워서?

아니.

‘제발 저 아이를, 저 아이를 살리소서. 지키소서.’

여전히 위태로워 보여서.

예전 대륙 동부 끝자락, 수도사들이 키운다던 귀한 꽃 한 송이를 얻어 온 적이 있다.

천년연꽃이라는 이름에 매료되어 오랜 시간 키웠더랬다.

진창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꾸역꾸역 살아남아 화려한 꽃망울을 틔웠을 때 얼마나 감동했는지.

더러운 진창 속,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꽃잎이 너무나 아름다워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년연꽃의 또 다른 이름은 성자꽃.

힘껏 피워 낸 아름다움과 생명을 진창에 나누어 주는 성자.

화려함은 잠깐, 진창에 머무는 벌레들과 더러운 물을 정화하곤 새까맣게 죽어 버린 마지막에.

남몰래 눈물지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묵색의 진창 위, 홀로 피어난 아들의 모습이 천년연꽃과 똑 닮아 가슴이 시렸다.

금세라도 고개를 숙인 벌레들이, 주변에 서린 어둠들이 그를 뜯어먹을 것만 같다.

제국이 깨끗해지는 대신 그가 생명을 잃을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여.

‘모두를 죽이더라도, 아이가 살도록 기도하니. 죄는 어미에게, 영광은 자식에게. 부디 기도합니다.’

간절히 감는 어미의 눈꺼풀 아래, 눈물이 줄기를 이루어 떨어졌고.

이기적이며 헌신적인 어미의 간절한 기도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런 어미의 속내도 모르고 말간 얼굴을 빛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녀, 우린 강철성을 떠나야만 해요.”

황비가 쓸쓸한 사실을 전했다.

지난 황제궁에서 이루어진 살벌한 식사 자리가 끝난 후.

황자는 말했다.

강철성을 떠나라고.

이 더러운 진창을 떠나 유리엘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에 있으라고.

자신을 홀로 두라고.

그래야 안전하다며 몰래 남긴 말.

이후 그는 자신과 유리엘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네? 어머니, 왜요? 왜 성을 떠나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의 물음에.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딸을 꼬옥 안아 주었다.

힘이 되어 주지 못하고 짐만 되는 제 처지가 서러워.

홀로 남아 진창에서 분투할 아들의 삶이 걱정되어.

황비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서글프게 울었다.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황태자는 참 얄궂게도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두가 황태자와 황비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리는 중에도.

다만 굳건한 등으로, 어머니에게 괜찮노라 전할 뿐이었다.

* * *

황태자의 덕목이란 무엇인가.

굳건한 의지? 뛰어난 정치력? 고강한 무력? 모두를 아우르는 지혜?

확실한 건.

황태자란 초인이어야 하는 법.

과중한 업무와 정적들의 견제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법.

황제가 되기 위한 당연한 덕목이며 고난의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한 필수 능력.

황태자란 가장 영광스러우면서도 가장 고난스러운 자리기도 하니.

분명 그런 면에선 아르한 황태자 또한 초인이긴 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좀 다른 의미로.

방금까지 충분히 공들여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뭘 봐. 그딴 식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처 알아들으라는 거지.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다.”

황태자는 참으로 뻔뻔하게 신하들의 탓을 했다.

승전식과 황태자 책봉이 동시에 이루어진 날로부터 시작된 국정.

제국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매일같이 신하들을 마주한 황태자는.

“그러니까 지금 북부에서 도망친 모지리들을 다시 받아 주라는 말 아닌가.”

“태자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오라.”

“자꾸 핑계 대지 마라.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지킬 생각도 없어 도망친 놈들을 왜 받아 주는가.”

“하지만 본래 그들이 통치하던 땅이지 않나이까. 명분도 있고 또한 비어 버린 땅에 있는 영지민들을 살피셔야 함이 옳습니다.”

“그들은 북부에 어려움이 오기도 전에 명예를 버리고 도망친 이들이다. 놈들이 명예와 의무를 버린 순간, 특권도 버린 셈이야.”

“그렇게 따지면 변경백 가문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 또한 북벽에서 도망쳤다가-.”

신하의 고집에.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황자가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

어찌 그리 잘 던졌는지 뭉친 종이가 거세게 신하의 얼굴을 때렸고.

그가 으윽, 신음을 흘리며 코를 부여잡자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모두가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사이.

“감히 북벽의 명예를 입에 올려! 북벽의 검과 병사들이 너희를 대신하여 피를 흘렸고, 이후 아비의 유지를 받아 숲을 휩쓴 이들이 많다! 제 목숨 하나 살리자고, 재산 지키자고 도우려는 생각도 없이 도망쳤던 이들과 비교를 해!”

“…그, 그것이-.”

“누구냐! 누구에게 돈을 받아 처먹었어! 여봐라! 이 발칙한 자를 하옥하고 누구에게 돈을 받아 처먹고 이딴 개소리를 내뱉는지 샅샅이 조사하도록! 아니면 그전에 개소리를 내뱉은 혀를 잘라 줄까!”

벌겋게 타오르는 황태자의 분노가 살벌했다.

“분명 북부 정벌의 공을 논하여 백작가에서 새로운 직위를 내렸을 터! 그런데 이제 와 그들의 공을 빼앗자고? 오냐. 어떤 놈들인지 내 직접 그 탐욕스러운 얼굴을 봐야겠다!”

그가 옆에 세워 둔 거검을 잡아들자 앉아 있던 신하들이 히익, 숨을 들이켰고.

“나가! 아까부터 개소리만 해대는구나! 꼴도 보기 싫다. 다 나가!”

황태자의 호통에 신하들이 일제히 회의실에서 뛰쳐나간 후.

“다들 어디 간 거야! 지금 국정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거냐! 이 버러지 새끼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나온 노호성에.

“전하! 대령했사옵니다. 여기 서부 관련 영주들의 보고서가-.”

“전하! 이번 제국 아카데미 개교기념식 초대 연설 관련 요청이-.”

“얼마 전 이루신 강철성 오색화림에 대한 생태 보고서를 작성하고 싶다는-.”

도망쳤던 신하들이 우르르 들어와 중구난방으로 다시 보고를 이어 갔다.

황태자가 이제야 좀 공손해진 신하들의 태도를 즐기는 듯 고개를 까딱였고.

얼마 가지 못하여.

“서부 영주들의 간청이 있었습니다. 지난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사막의 권리 일부를… 흡.”

신하 하나가 실언을 하곤 숨을 멈추었다.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눈을 굴려 눈치를 보는 모습.

다른 자들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곧 떨어질 진노를 걱정하였고.

황태자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찢어야겠지? 그 말 같지도 않은 보고서.”

자리에서 쫘악, 쫘악, 쫘악! 서부 영주들의 아부가 가득 담긴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래도 이번엔 무사히 지나가는가.

모두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그런데…….”

그냥 넘어가려던 황태자가 문득 상을 쾅 내리쳤다.

“생각해 보니 열받네. 지금 국정이 장난이야? 너희 지금 제국의 녹이 우스워? 이딴 개같은 서신을 거르지도 않고 그냥 가져와? 방금 냈던 화가 우스웠구나?”

“전하. 그, 그것이 아니오라.”

“고정하시옵-.”

“나가! 당장 꺼져!”

찢어진 서신들이 허공에 갈기갈기 흩뿌려짐과 동시에 그들이 다시 쫓겨났다.

물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지금 어딜 도망친 거야! 이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당장 안 들어와!”

황자의 거친 고함이 쏟아지니.

그들이 다시 회의실로 들어섰고.

보고를 이어 가기 직전.

“그대들은 배알도 없는가? 어찌 이리 뻔뻔할까.”

황태자의 심드렁한 물음에.

흑, 흑, 흐윽.

한 늙은 신하가 울음을 터뜨렸고.

비로소 그날의 회의가 끝이 났다.

* * *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수도 페르마의 한 골목.

유독 푸석한 얼굴의 중년 사내가 기름 냄새가 짙게 풍기는 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수도에서도 꽤 오랜 시간, 대를 이어 인기 있는 먹거리.

아버지께서도 퇴근길에 자주 사 오셨다.

지금은 자신이 대를 이어 사러 온 참이고.

“거, 튀긴 닭이랑 감자 좀 넉넉히 담아 주쇼.”

“예이! 오늘 일이 힘드셨나 봅니다! 얼굴이 푸석할 땐 기름기가 필요한 법이죠.”

주인장의 너스레에 강철성에서 퇴근하던 관리가 피식 웃었다.

“뭐, 요즘 일이 쉽지 않더군.”

“황성 일 때문입니까? 태자 전하께서 성정이 거치시다지요?”

“거칠다면 거치시긴 한데. 딱히 틀린 말을 하시는 분은 아니라. 다 같이 죽어나는 중이지. 우리는 오히려 좋아.”

“그렇습니까? 골목 소문은 흉흉하던데 말입니다.”

“뭐랄까, 오해받기 좋은 성격이시긴 하더라고. 그래도 내려오는 지시들을 보면 뭐랄까… 가장 옳은 선택을 하신다고 해야 하나? 보통 이런저런 간섭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추진하시니 일복 터진 게지 뭐.”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지 힘들긴 해도 표정이 좋아 보이십니다. 여기 감자 넉넉히 담았으니 아이들이랑 맛있게 드세요.”

값을 치르고 돌아서자 튀긴 닭과 감자에서 올라오는 기름 냄새가 구수했다.

손에 어리는 열기와 습기가 날아갈까 봐 발걸음을 서두르다가.

문득.

“하이고. 녀석도 그러려나.”

처음 닭튀김을 사들고선 집으로 향하던 날을 떠올렸다.

강철성에 입성할 때만 해도 모든 게 탄탄대로일 줄 알았건만.

첫날부터 품었던 이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은 내팽개친 채 귀족들의 뒤나 닦아 주러 다녀야 하는 처지를 깨달았다.

누구 라인을 잘 타느냐가 승진의 밑거름이라는 것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늦은 저녁 어릴 적부터 맡아 왔던 튀김 냄새에 이끌려 튀김 한 꾸러미를 사고는 깨달았다.

아, 아버지도 그러셨구나.

삶이 어려울 때, 괴로울 때, 지겨울 때.

가족들 웃는 모습이라도 보고 힘을 내려고 뭐라도 사 오셨구나.

그날 흩어지던 입김과 봉투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이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이제 막 앞니가 빠져 웃을 때 우스꽝스러운 아들들이지만 언제고 성인이 되면 같은 마음으로 집에 먹을 걸 들고 오겠지.

그때가 되면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모른 척 반가운 미소로 맞이해 주어야겠다.

그래도 태자 전하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만 해 주신다면 좀 더 살기 편한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자.

“아버지! 오셨어요!”

“아빠, 다녀오셨어요!”

“여보!”

아이들과 부인이 나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이 안온한 풍경이 최고다.

밝은 갈색 머리 엄마를 똑 닮은 아들들이 빠진 앞니 그대로 환히 웃으며 아버지를 반겼고.

“여기! 닭튀김 사 왔다!”

아버지가 곧 터질 환호를 기대하며 꾸러미를 들어 올렸으나.

“어? 어어? 어떻게 해요? 엄마?”

“그러게. 여보도 사 올 줄은 몰랐는데.”

“와! 닭이 두 마리!”

예상과 다르게 첫째와 부인이 당황했고 아직 어린 막내만 양이 두 배가 되었다며 좋아했다.

여보도?

나 말고 누가 닭튀김을 사 왔단 말인가?

“아버지 오셨어?”

그럴 만한 분은 아버지밖에 없는 터라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그렇죠. 그래요! 이야, 이걸 이리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을 줄이야. 참으로 놀랐지 뭔가요.”

“그래서 홀로 이런 걸 썼단 말이지요?”

“그렇다니까! 우리 아들이 이렇게 마음 맞는 분과 일하고 있을 줄이야. 축복이 따로 없네요.”

안에서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 하나와 어딘가 낯설면서도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하나.

들뜬 건 아버지의 목소리가 분명하건만, 나머지 하나는 누구란 말인가.

어디서 들었지?

치미는 불안감을 삼키며 들어선 응접실.

이젠 허옇게 센 머리를 끄덕이던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했다.

“아, 왔니? 마침 강철성에서 일하는 동료께서 오셨단 말에 맞이하고 있었다. 어찌 알고 닭튀김까지 사 오셨더구나. 친하신 분이라고.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어서 앉아라.”

입가에 핀 환한 미소가 반가웠으나.

아버지의 앞에 앉은 이를 본 순간.

털썩.

손에 든 꾸러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아-.”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깨끗한 백금발과 진홍색 눈동자, 오만하면서도 권태로운 표정이 한데 어우러진 그림과도 같은 존귀하신 분이 어찌하여 이 평범하디평범한 가정집 거실에 계신 걸까?

마법인가? 환상인가? 꿈인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에.

“아깝게 음식을 버려서야 쓰나.”

황태자 책봉식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지금 듣는 목소리가 겹치며 보이는 풍경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음식 아깝다며 아들들과 부인이 소란을 피우는 모습.

황태자 앞에 앉아 태연히 맥주를 마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곧 피로 가득 찰 것 같아 두려운 와중에.

그가 얼른 무릎을 꿇어 용서를 빌려 했다.

죽어도 혼자 죽겠다.

이 죄 없는 가족들만은 살려 달라 빌어야겠다.

그리 결심한 순간.

황자가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쉬이-.

침묵을 요구했고.

“앉아. 우리 같이 논할 국정이 참 많아.”

그를 향해 참으로 깨끗하고 선하게도 미소 지으니.

과거, 북부 재건 국정 보고서를 작성한 아비와 현재 국가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아들을 포획하러 온 황자의 배부른 미소였다.

* * *

[대상들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운명 실망, 포기, 체념을 포식합니다. 새로운 운명 충성, 열의, 대의를 속에 품습니다]

[황태자의 운명 속 기울어 가는 국정이 조금은 바로 섭니다]

황태자 책봉을 마친 순간.

제국의 운명 일부를 엿볼 수 있었고.

진심으로 한탄했다.

어째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거칠게 신하들을 몰아붙였다.

쭉정이들은 거르고 알곡들만 남기기 위하여.

그 와중에.

“북부 재건 보고서를 작성한 국정 연구원은 어디에 있지?”

이전 북부 재건 보고서를 작성한 은퇴한 연구원을 찾았고.

그의 아들이 강철성에 있다는 말에 이름을 확인하곤.

“직접 가야겠다.”

존귀한 발걸음을 비밀리에 옮겼다.

아비는 북부 재건 및 다양한 발전 보고서를 올린, 묻혀 있는 국정 연구의 대가였고.

아들은 평민이란 신분을 딛고 국가의 재정을 바로 세우려던 훌륭한 자.

전생엔 억울하게 탈세의 누명을 써 죽었더라지.

사실 국고를 털어 가는 못된 귀족들의 현실을 알리는 탄원서를 썼다가 죽었다.

사후에야 그의 탄원서를 바탕으로 제국의 창고를 털어 가는 못된 쥐새끼들을 잡았으니까.

더불어 그가 작성했던 다양한 세법 개혁안이 참 인상적이었지.

과거엔 인정 하나 받지 못하고 진창 속에 묻혔을 이들이지만.

“잘들 해 보자고 앞으로.”

이번 생엔 잠잘 시간도 없이 굴릴 테니, 즐거운 비명을 지를 것이다.

굳이 내가 나서 모든 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

능력 있는 자들을 굴리고 또 굴리면 답이 나오겠지.

이런 새카만 속셈도 모르고 자신을 알아준다며 기뻐하는 얼굴들이라니.

킥킥거리며 밤 깊은 수도의 대로를 걷고 있으려니.

“퍽 경치가 좋군.”

주변 풍경이 꽤 좋았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가.

흐린 강 안개가 번진 대로, 곳곳에 켜진 마나등이 메케하게 번져 시야를 뿌옇게 물들였다.

깊은 밤이라 대부분 잠든 모양.

몇몇 늦게까지 운영하는 가게이 꿈뻑이며 졸린 빛을 거리에 던질 뿐.

끼익거리며 을씨년스럽게 흔들리는 주점의 간판만이 내 발걸음과 맞추어 춤을 추었다.

가는 길은 비밀스러웠으나 오는 길마저 비밀스러울 이유는 없지.

며칠 피를 못 보았더니 광기가 근질근질하거든.

그렇게 홀로 밤길을 걷다.

“이봐, 나올 거면 나오고 아니면 말지.”

짙게 풍기는 피 냄새에 비로소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니.

깊은 밤, 어둑한 골목 곳곳에서 피를 먹고 살아가는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겪는 암습에.

“사람들 잠 깨우지 말자고.”

딱, 손가락을 튕겼고.

거리 전체가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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