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03화 (103/200)

103화 강과 피 그리고 벌레

제국이 아무리 썩어 있다고는 하나 무법지대는 아니다.

즉 수도 페르마에서 일어난 사건 대부분은 조사관이 파견되어 범인을 색출하기 마련.

어젯밤, 엄밀히 말하자면 어젯밤과 오늘 새벽 사이 페르마 중앙을 가로지르는 템퍼강 주변.

난생처음 보는 끔찍한 풍경이 펼쳐졌다는 신고에 경비병들이 술에 찌든 얼굴을 정돈할 새도 없이 부랴부랴 출동했고.

“으왁. 이게 다 뭐야. 잠깐, 잠깐만.”

현장 진입 전부터 낭자한 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진액들을 보며 기겁했다.

“이런 멍청한 놈들아! 여기서 망설인다고 범인이 튀어나오냐? 당장 안 들어가.”

뒤에 선 책임자가 우왕좌왕하는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현장에 진입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욱-, 우읍.”

“미친, 나한테 토하면 뒈진다.”

“근데 이 정도면 마법사단이나 기사단이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님까?”

가관이었다.

피와 진액이 뒤섞여 진창을 이룬 바닥.

대체 무엇이 어떤 싸움을 벌였는지 단단한 돌벽에 가득한 무수한 상처와 그을음.

특히 사건 현장의 중심, 공사 중이던 주택 한쪽은 완전히 박살 난 상태.

사람이 하나도 다니지 않는 으스스한 거리, 아침 강바람에 섞여 피어오르는 비린내에 비위 약한 자들이 구역질해 대었고.

“야! 강으로 가서 해!”

마침 가까운 곳에 강이 있어 그곳에 토사물을 쏟아 내라는 말에 급히 달려가다가.

“으아악!”

“우워어억!”

눈앞 펼쳐진 풍경에 고함과 토사물을 게워 내었다.

놀라 고개를 돌린 장소, 이제 막 햇볕에 말라가는 강 안개 너머.

원래라면 우중충한 템퍼강이 흘러야 할 자리엔.

우웨에에엑!

수천 마리 벌레가 가득했다.

불에 그을려 새까맣게 타 버린 벌레 사체가 강을 막아 둑까지 넘쳐 날 정도.

벌레 무더기가 꿈틀거리듯 떠내려가는 풍경이 징그러웠다.

경비들을 비롯하여 책임자까지 처음 보는 풍경에 넋을 놓은 사이.

“저, 저기 한 주점에 있던 주정뱅이들이 사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경비 하나가 사건의 목격자들을 발견하여 데려왔고.

벌건 딸기코를 한 사내들이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싸구려 럼을 연신 들이켜며.

“어젯밤 술에 취해 거리에 오줌을 싸 갈기던 때였지. 그거 알아? 새벽 템퍼강 주변엔 항상 짙은 안개가 끼기 마련이거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그래, 그런 법이지. 그래서 간혹 강에 빠지는 머저리들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어제는 아주 이상했어. 이상했지.”

“깊은 밤 유독 거리가 조용했달까? 원래라면 우리 같은 놈들이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토악질해 대기 마련이거든.”

“아마 본능적으로 무언갈 느낀 모양이야.”

“클클 그런 점에서 우리야말로 진정한 주정뱅이라 할 수 있겠군.”

“덕분에 그걸 목격할 수 있었지.”

“그래, 엄청난 걸 보고야 말았어.”

주정뱅이들이 흐린 눈으로 찰랑거리는 술을 바라보다 알코올 가득한 숨을 내뿜으며.

“자네들 완전한 어둠을 본 적 있나? 빛 한 점 없는 어둠을 말일세.”

알 수 없는 소리를 게워 냈다.

어딘가 꿈을 꾸듯 몽롱한 표정이 술보다 더욱 강하게 그들의 정신을 잠식하는 듯했고.

깊이 취한 그들이 깊은 밤중 수도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주절거렸다.

* * *

일순간이었다고 한다.

유독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어가던 사내가 손을 튕긴 것은.

그리고 이어진 암흑.

어떤 폭우에도 담담히 길을 밝혔던 마나등마저 빛을 잃고 어두워지다니 처음 있는 일.

마치 무대의 불이 꺼지듯,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고 온통 암흑만이 남은 거리.

아니 이곳이 거리인가?

그야말로 귀신의 아가리 속은 아닐까.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리 생각했다.

이어서 들려온 건.

끄르륵.

작은 신음.

이후.

아무 소리도 없었다.

무언가 움직인다는 감각은 있었으나 눈앞에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번쩍.

누군가 빛을 흩뿌렸고.

번개가 터지듯 밝아진 시야 사이.

로브로 얼굴을 가린 자가 밝은 빛을 든 채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일시적으로 터진 빛에 시야가 아렸다.

흑과 백의 극명한 대비 사이 굳어 있는 자들이 석상 같았다.

대체 저리 멈춰 서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도 잠시.

보았다.

처음 손가락을 튕겼던 사내가 홀연히 빛을 든 자 뒤에서 솟아남을.

한 손에는 날카로운 날붙이, 한 손에는 상대의 목줄기를 쥐었다.

피가 분수처럼 터지는 순간.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침묵과 공포가 거리를 내리눌렀다.

번쩍.

다시 빛이 내리쳤고, 로브를 입은 자들이 창백하게 형태를 드러낸 순간.

그들이 빙 둘러선 바깥.

방금 그 사내가 이번에도 무리 중 하나를 단검으로 난도질했다.

소리는 없었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번쩍.

다시 내리친 빛, 연극에 올라선 단역들이 주변을 경계하는 장면.

그 뒤 단검을 높이 든 사내.

암전.

번쩍.

다시 떠오른 빛을 따라 창백하게 질린 적들.

누군가의 발목을 끊어 내는 황태자.

다시 암전.

번쩍, 번쩍, 번쩍.

빛이 터질 때마다 줄어드는 숫자.

단역의 퇴장은 참으로 덧없이 이루어졌다.

빛 덩이 하나당 목숨 하나.

차라리 빛을 켜지 않으면 죽지나 않을까 싶지만 그들은 참으로 성실하게 빛을 터뜨렸고.

어느새 남은 건 셋.

그중 둘이 황태자의 흉수에 사라졌다.

마침내 남은 단역은 하나.

“흐윽, 흐윽, 흐윽!”

침묵이 암살자의 덕목이건만.

마지막 남은 남자는 흘러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지독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독히 운이 나쁘다 해야 할까.

이런 이야긴 없었다.

분명 깊은 밤 강둑을 걷는 이를 죽여 주기만 하면 된다 했는데.

이런 괴물이란 말은 없었잖은가!

결국 피어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그가 암살자로서 받은 훈련보다 내면에 숨겨진 생존 본능을 택했고.

깊은 어둠을 내달려 도망쳤다.

연극은 끝났다.

단역은 멍청한 행동을 반복하는 대신 죽음이 가득한 무대를 벗어나고자 했고.

어딘지 모를 길을 계속하여 달렸을 뿐.

그런데 달리면 달릴수록.

방향 감각도 달리는 다리의 감각도 청각도 시각도 흐려졌다.

여기가… 어디지?

발을 멈추자니 뒤에 괴물이 따라붙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뒤에 있다!

자리에서 구른 그가 턱, 등 뒤에 닿는 단단한 벽의 질감을 느끼고는 안도했다.

아니, 안도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 앞에 있는 것 아닐까?

앞에서 벌겋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스멀스멀 잠식하는 공포.

덜덜 떨리는 손으로 준비한 섬광탄을 꺼내 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던 입장.

반대의 처지가 되니 더욱 큰 공포가 그를 짓눌렀고.

결국.

번쩍!

바보 같은 짓을 반복했다.

일순간 환하게 세상을 비추는 빛.

이 얼마나 안도되는 풍경인가.

트이는 시야에 감사를 올리기도 전.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그가 숨을 삼켰다.

처음 싸움을 시작했던 자리 그대로구나.

그리 오래 달렸건만 제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팔 끝부터 목덜미까지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가 머무는 곳은 여전히 무대 위.

단역은 무대에서 도망치고자 하지만, 아직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빛 때문일까 공포 때문일까.

창백해진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석상과도 같이 무감정한 자태로 자신을 보는 황태자가 보였고.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날붙이의 차가운 감각에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후로도.

여러 번.

황태자는 잔혹한 손속을 놀려 암살자의 가슴을 후벼 팠다.

꺼져 가는 시야.

석상같이 무미건조하게 빛을 빨아들이는 상대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의 주변, 살인자와 더불어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굽어보는 회백색 건물들만이 살인의 목격자.

팟.

암흑이 찾아왔고 단막극이 막을 내렸다.

* * *

“후우.”

떨리는 숨결을 깊이 내쉬자.

비로소 안에 품었던 광기와 패악이 한숨과 함께 흩어졌다.

승전식 이후 며칠간 피를 보지 못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다들 숨을 죽이고 살아 죽일 이가 없었다.

뭐 마음만 먹으면 지나가는 놈 머리통을 깰 수도 있겠으나.

그래서야 의미가 없지.

과거 폭군의 광기는 그랬으나 내가 품은 광기는 다르다.

달라야만 했다.

내가 품은 광기와 패악은 적을 위해 예비된 것.

머리를 내달리는 아찔한 살기를 매일같이 억누르려니 두통이 찾아올 지경이었는데.

때마침 나타난 습격자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후우, 후우.”

숨을 뱉어 내는 입술이 살짝 떨려 왔다.

오랜만에 맛보는 피에 흥분해서일까.

손을 흩뿌려 빛을 던지자 가로등이 다시 깜빡이며 길을 밝혔다.

비로소 주변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다.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거리.

그림자에 빨려 들어간 덕에 시체는 없으나 곳곳에 칠해 놓은 피가 끔찍함을 더했다.

“알아서들 하겠지.”

무슨 청소부도 아니고 피까지 신경 써야 하나 싶어 두었고.

포만감 어린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이 피 냄새가 그 피 냄새가 아니었어?”

비로소 알아챘다.

짙은 피 냄새와 더불어 뒤를 밟는 발걸음에 놈들이 전부인 줄 알았건만.

발걸음과 피 냄새는 별개.

광기와 패악, 살기가 머릿속에서 찰랑거려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사실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그냥 죽이면 될 뿐이니까.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려니.

두려움에 떠는 주정뱅이 몇이 보였으나.

그들에게서 풍기는 건 찌든 술 냄새와 땀 냄새뿐.

오줌 냄새도 좀 섞여 있군.

차르르르르.

그때 강 상류에서부터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가 거슬렸다.

감각을 집중해 보다 갑작스레.

강으로 몸을 던졌다.

강어귀 떠내려가는 로브를 보았기 때문.

이를 잡아 건지고는.

“블러디?”

익숙한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강물에 젖어 미역처럼 늘어진 붉은 머릿결과 파리하게 질린 피부.

본래도 새하얗던 피부가 지금은 푸르스름해 보일 정도.

숨을 깊게 들이쉬자 달큰한 피 냄새가 콧속을 찔러왔다.

그래 블러디의 냄새였구나, 그런데 평소와 달리 유독 쏘는 향이 강해 그녀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구지?

처음 든 의문.

제국에서도 악명 높은 수배자이자, 악명에도 불구하고 잡힌 적 없던 하프 엘프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자가.

“이봐.”

그녀의 뺨을 두들겼으나 소용이 없다.

숨을 멈춘 상태.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어.

퍼억.

가슴팍 중앙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치자.

블러디가 쭈우우욱, 물줄기를 뿜어냈다.

물고기인 줄 알았네.

이번엔 뺨을 강하게 내려쳐 깨우려니.

“때, 때리지 마….”

힘겹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말라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럼에도 계속 손바닥을 위로 올리자.

“깨어났어, 깨어났으니까.”

블러디가 손을 허우적거리는 걸 보곤.

“죽지는 않겠군.”

손바닥을 내렸다.

혹시라도 몸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당했다면 곤란했으니까.

“누구냐. 널 이렇게 만든 게.”

“대수림…….”

“여기까지 쫓아온 거냐.”

“그런 모양이야, 어서 도망쳐, 맞서면 위험…….”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르르르르.

지금 보니 물 흐르는 소리치고는 거칠었다.

가정이 하나 떠올라 물었다.

“설마 사람들이 다칠까 봐 강을 타고 내려왔나.”

“…그럴 리가. 놈이 물에 약해서…….”

“맞군.”

“…….”

내 확언에 블러디가 작게 숨을 내쉬고는 체념했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어서 도망-.”

그녀가 도망을 이야기하기 전.

“이미 늦었어. 놈은 우리가 도망치는 순간 주변 제국민을 모두 죽일 것이다.”

풍기는 살기에 직감했다.

도망치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협박.

놈의 악랄함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분노가 치밀고 가라앉았던 살기가 다시 피어났다.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어디서 패악을 들이미는가.”

그래, 내 앞에서 떠는 패악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려 주어야겠다.

[다가오는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독기, 육식, 철갑, 숙주, 군락이 무리 지어 쏟아집니다!]

놈의 운명이 우스워 벌겋게 미소가 퍼져 나갔다.

감히 내 앞에서 악한 운명을 자랑하다니.

육식? 먹어 봤자 살이나 파먹는 주제에.

난 제국을 씹어먹는 운명을 지녔다.

마치 활을 쏘듯 한 팔은 앞에, 한 팔은 깊게 당겨 적을 겨누니.

이해 못 할 행동에 블러디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마침.

촤르르르르-!

강을 타고 내려오는 수백 수천의 벌레무리가 보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 겉을 감싼 단단한 갑피와 날카로운 이빨, 꼬리에 달린 독침이 살벌했다.

휩쓸리면 형체도 남기지 못하겠지.

“남부 맹독 말벌인가.”

남부 원시림에서도 독기로 치자면 수위에 드는 녀석.

그 먼 거리를 날아왔을 리는 없고.

“이끄는 놈이 있겠지.”

저 많은 개체를 통솔하는 상위 개체가 있을 터.

이유는 듣지 못했으나 우선은.

“당장 죽어 주어야겠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태워 죽이리라.

훈련받은 병사들도 쉬이 물어 죽이는 게 원시림의 독충들.

놈들의 상대는 인간이 아닌 같은 독물이었기에 수도에 독충들을 두어선 안 된다.

황태자이니 곧 내 제국민이 될 이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지사.

하여.

“오라, 제국을 대신하여 맞이해 주마.”

당기는 시위에 불과 빛을 엮었다.

수백, 수천 가닥의 불줄기를 꼬아 내어 팽팽히 당기자.

빛과 불로 이루어진 밧줄 하나가 손과 손 사이에 어렸고.

금방이라도 용솟음치려 하는 불빛을 시야 가득 달려드는 독충 무리를 향해 쏘아냈다.

새까맣게 뭉친 말벌 무리에 비해서는 너무나 가늘고 작은 빛줄기.

일견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굴엔 한 점 불안함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이어서.

“퍼져라.”

확산을 명하니.

독충을 향하여 마주 달려가던 빛줄기가 올올이 풀려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안에 집약한 광염, 적염, 초적염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며 몸집을 불려 나갔고.

첫머리가 독충과 맞닿는 순간에는.

올올이 풀린 불과 빛의 크기가 몰려드는 독충보다 훨씬 커다란 몸집을 자랑했다.

촘촘히 짜여진 모습이 불로 이루어 낸 거대한 그물과도 같았고.

마침내 하늘을 덮을 듯 몸을 부풀린 불 그물이 독충 무리를 감쌌다.

일순간 불과 빛과 폭발이 수도의 강줄기 위를 가득 덮었다.

이후 벌어진 건.

학살, 폭발, 연쇄, 광기의 축제.

곤충을 타고 번져 나간 적염이 새빨갰고, 독충들의 갑피를 터뜨리는 폭발이 타타타타 시끄러운 폭죽 소리를 내었으며.

광염이 끝없이 분열하며 몰려드는 말벌과 맞서는 광경.

* * *

그 앞에 서서 활짝 웃는 아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체-.”

블러디가 경악했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그가 황자였을 시절, 북부에서 황태자를 도와 싸운 후.

응당한 대가를 약속받고는 남부로, 원시림으로 향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단 말인가.

오면서 얼핏 듣기는 했다.

서부에 검은 바다가 나타났고 그가 재해를 끝장내었단 소문을.

그리하여 발걸음을 서둘렀다.

뒤에는 독충이 따라붙은 상태.

과거 그에게 준 혈석을 따라가길 한참, 수도 페르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리 황자를 만난 것도 하늘의 보우하심이라 할 만했다.

순간 고민도 했다.

이대로는 황자가 위험하지 않을까.

그런데.

저 거대한 신비는 무엇이며, 신비를 저리 다루는 능력은 무엇이며, 단단해진 등은 무엇이란 말인가.

역류하는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백금발이 유독 전보다 찬란해 보임은 왜일까.

그녀가 아득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는 사이.

끝없이 타오르고 폭발하는 황태자의 불빛과 말벌 무리의 충돌이 끝났다.

치열한 격돌이 끝난 자리에는.

“너희가 졌다. 버러지들.”

독충의 사체만이 가득했다.

파르르 떨리는 날개와 산산조각난 몸뚱이가 강물을 덮은 상태.

허나 황태자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말벌이 손바닥만 했다면 그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강물 흐르는 소리 같았다면 지금 울리는 소리는.

폭포 소리.

이윽고 날갯짓 소리가 귀청을 뒤흔들었고.

곧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람만 한 새까만 몸통, 꼬리에 달린 침이 롱소드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여왕인가.”

“여왕은 아니고… 군단장쯤?”

“놈만 잡으면 끝인 건 맞겠지.”

“맞아. 일단은.”

맹독 말벌 무리를 이끄는 군단장.

놈이 거대한 눈을 희번득거리며 황태자에게 달려들었고.

황태자가 놈을 겨누자.

놈이 불을 피하고자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방금 폭발을 보았기 때문.

“물에 약하다며?”

“불보다는 나은가 봐.”

블러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태자가 웃고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말벌이 솟아나길 기다리니.

어찌 보면 방만, 어찌 보면 삶을 포기한 듯한 자세.

곧.

푸화학!

군단장이 강물 가득한 말벌들의 사체를 흩으며 모습을 드러냈고.

놈이 꼬리 끝에 달린 맹독침을 내미는 순간까지도.

황태자는 쏟아지는 강물을 맞이하며 담담히 서 있을 뿐.

“뭐 하는-!”

블러디가 급히 막아 보려 했으나 마나가 남아 있지 않았고.

신비를 사용하기에도 너무 지쳤다.

의식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상태.

미약하게 긴 손가락을 뻗어 황자의 옷자락이나 붙잡아 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가망이 없다.

허망하게 뻗는 손과 담담히 선 황태자의 뒷모습.

그를 노리는 포악스러운 말벌이 튀어 오른 물보라와 같이 덧없게 느껴지는 순간.

시야 바깥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무언가.

차.

그래, 차.

맞다. 그 차다.

특별한 자에게만 허락된 이동 수단.

그런데 땅을 달려야 할 차가 왜 허공에?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멈칫하는 사이.

군단장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잠시 멈칫한 짧은 틈.

수도의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른 차가 놈을 공중에서 받아 버렸다.

“저은하아아-!”

안에 탄 안드레의 고함이 늘어지듯 울렸고.

“받으세요오오오-!”

솔이 냅다 그림자로 감싼 거대한 무언가를 던지자.

거검 브레이커가 허공을 날아 황태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가 말벌을 휩쓸고 사라진 자리.

푸화하학!

으르르릉!

불꽃과 울음이 한꺼번에 피어났다.

말벌보다 더욱 위협적인 독침을 든 황태자가 하늘로 쏘아졌다.

자리에 불티와 거친 울음만이 남았고.

견디지 못한 블러디가 결국 혼절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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