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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04화 (104/200)

104화 명분

황태자가 홀로 새로운 노예, 신하 삼을 자들의 집으로 향한 사이.

좀 멀리 떨어진 강 반대편, 강둑에 세워진 고급스러운 차 한 대.

유려한 곡선과 날렵한 형체가 은은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을 풍겼고.

새까만 색에 값비싼 백금 장식을 둘러 아름다움을 더했다.

마찬가지로 귀한 것들로만 채워 넣은 내부.

흐으음, 흐흐흐흐, 호오오오오.

달칵, 달칵, 달칵달칵.

외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콧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은 알프레드가 아닌 안드레.

그가 핸들을 비롯하여 여러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감탄했다.

“우와, 이거 진짜 편하네. 트렁크랑은 승차감이 다르달까? 이거 진짜 금인가? 이봐요, 가로등. 이것 좀 봐.”

평소 트렁크에서 굴욕의 세월을 감내해 왔던 그가 처음 앉아 본 운전석에 연신 감탄을 뱉었다.

심지어는 방방 뛰어도 요동치지 않는 승차감에 그가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리 편한 자리가 다 있었구나.

“이거 로이스 가문에서 새로 준 차. 이름이 뭐라 했었더라?”

“팬텀이요. 로이스 가문의 팬텀. 황태자 전하 전용 의전 차량으로 진상한 거라던데요.”

“우와- 그럼 전하께서만 타고 다니신다는 거잖아?”

“그렇죠. 마법을 얼마나 발라놨는지 설명서만 두꺼운 책 두 권이 넘는다고요. 공간 확장 마법에 추진 마법, 나중에는 공격 마법까지 달겠어요. 아주.”

조수석에 앉은 솔이 읽고 있던 두터운 책을 탁 덮고는 미간을 찌푸리길 잠시.

의미를 모를 버튼 중 하나를 조심스레 누르자.

철커덩!

뒷좌석 가운데가 열리며 거검 손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트렁크에 담겨 있던 브레이커를 불러낸 모양.

“우와-!”

안드레의 눈이 반짝였다.

버튼을 누르면 검이 나온다?

이건 못 참지.

그가 다른 버튼에 손을 가져가려 하자.

찰싹, 솔이 재빠르게 그의 손을 쳐냈다.

“뭐 하는 거예요! 이중에 자폭 버튼도 있단 말이에요.”

“자, 자폭?”

“그래요! 잘못 눌러서 터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자, 봐요. 요 빨간 게 가속 버튼. 방금 누른 게 뒷좌석 공간 마법 입구에요.”

“공간 마법! 그래서 뒷좌석에 그리 많이 실었구나?”

“네, 경량화까지 걸려 있어서 문제없다더라고요. 마탑에서도 협업해서 만들었대요.”

“나도… 조금은 편해지겠네. 트렁크가 넓으면 최소한 누울 자린 있겠지.”

“…힘내요.”

“소환 버튼 누르면 저기로 나오면 되려나?”

“…어, 그건 좀 보기 싫을 거 같은데요.”

“가로등, 무엄하다.”

“이익,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죠!”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다가 잠깐.

“알프레드 경이 운전하는 게 편한데 말야. 아까도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다고.”

안드레의 투덜거림에 솔이 멈칫 말을 멈추고는.

“후우- 그러게요. 아저씨는 어디로 간 걸까요? 갑작스럽게요.”

솔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피어나는 강 안개와 번지는 가로등 불빛이 왠지 우울해 보였다.

항상 황태자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알프레드가 황태자 책봉식이 있은 날부터 홀연히 사라졌다.

이유 불명.

황태자 또한 자신을 옆에서 섬기던 자가 떠나갔으면 찾을 법도 한데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듯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라져도 그럴까요?”

솔의 넌지시 튀어나온 물음에.

“무엄하다. 이번엔 진짜로. 말조심해.”

안드레가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다.

솔의 의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나.

“전하께선 더 큰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분이시지. 우리가 사라졌다 하여 신경 쓰시길 바란다면, 선을 넘는 거야. 우린 섬기는 사람이지 함께하는 이가 아니니까.”

안드레의 확고한 말의 솔의 얼굴에 아픔이 살며시 어렸다.

허나 안드레의 표정엔 한 점 흔들림도 없었고.

“방해되느니 죽겠다. 그런 결심이었겠지, 알프레드 경도.”

사라진 시종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 또한 그러했을 테니까.

안드레의 말이 참 차갑다고 생각하며 솔은.

“전 어떻게든 살아서 섬길 거예요. 방해도 되지 않을 거고요.”

“좋은 마음가짐이야.”

자신의 결심을 공고히 했고 안드레는 별말 없이 그녀의 마음을 응원했다.

섬기는 자의 마음이 다 다른 법이니까.

다만 한 가지.

“어? 저거!”

“불이다! 전하의 불이야!”

섬기는 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매한가지.

강 건너편, 타오르는 불을 발견한 안드레와 솔이 단번에 황태자의 불꽃임을 알아보았고.

“가자!”

“가요! 어서요!”

안드레가 다급히 엑셀을 밟았다.

급한 출발이었음에도 로이스 가문이 공들여 만든 차량이 마치 물살을 가르듯 부드러이 몸을 움직였다.

황태자의 불꽃과 빛이 터져 오른 근처.

“저기! 저기에 계세요!”

“주변에는 대체 뭐야?”

솔이 멀찍이 강둑 아래에 선 아르한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뻗었고.

안드레가 황자 앞, 강을 따라 흐르는 무수한 곤충 사체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그들도 들었다.

말벌의 거대한 날갯짓 소리를.

문제는.

“다리까지 너무 멀어! 빙 돌아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전하를 믿어야겠죠?”

황태자를 구하러 가려면 저 멀리 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당장 어쩔 수 없는 상황.

솔이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가로등.”

안드레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얼핏 내리깐 목소리와 번뜩이는 눈이 전하를 따라 하는 모양새.

“뭐 해요? 지금 장난칠 상황 아니에요!”

솔의 타박에도.

“우리가 전하께 배운 게 무엇인가.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 봐라.”

흉내를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 황태자의 광기가 멋드러진 태도가 부러웠던 모양.

물론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같은 대사, 같은 표정이라도 생긴 것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른 법이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하께선 보이셨다… 앗, 퉤퉤.”

하늘도 도와주지 않았다.

열린 창문 틈, 흘러드는 바람을 타고 들어온 종이가 막 분위기를 잡던 안드레의 얼굴을 덮었고.

그가 기분 나쁜 축축한 감촉에 도리질을 치고선.

“그러니까 그냥 건너자고! 다리 없이!”

이내 포기했는지 차를 돌려 건물을 한 바퀴 빙 돌며 속도를 높였다.

“그냥 건너자뇨! 안드레? 정신 차려요! 안드레!”

솔이 말려 봤으나 안드레의 눈은 이미 반쯤 돌아간 상태.

곧, 우우우웅-!

정확히 강둑을 향하여 치닫는 차와.

“간다아아아앗! 가속! 가속 버튼 눌러!”

“이런 미치이인! 왜 이러는 거야!”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안드레와 솔.

솔이 이대로는 강물에 처박힐 거 같아 설명서에 나온 대로 가속 버튼을 꾹 누르자.

와아아앙!

마나 타오르는 냄새와 더불어 몸이 뒤로 휙 젖혀질 정도로 속도가 붙었고.

마지막 순간.

로이스 가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고급 의전 차량 팬텀이 강둑을 타 넘는 와중에도 기품 넘치는 반동을 선보이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난다, 날고 있다.

잠깐의 부유감.

그래, 홍련의 섬이 떨어질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

“저은하아아-!”

“받으세요오오오-!”

안드레는 그저 신났고.

솔은 그래도 전하를 위해 브레이커를 그림자로 감싸 던졌다.

그때 느껴진.

충격.

황태자의 어이없다는 눈빛과 어디서 본 시뻘건 여인의 경악스러운 눈동자.

뭔가 잘못됐구나.

안드레와 솔이 불안한 느낌에 뻣뻣한 고개를 돌리곤.

“으아아아악!”

“끼야야악!”

정확히 차량 앞머리, 생전 처음 보는 거대 말벌을 보곤 기겁했다.

거대한 눈에 비치는 솔과 안드레의 경악한 표정이 수백.

뭐든 물어뜯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단단한 턱과 꾸물거리는 주둥이.

왜인지 놈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면 과장일까.

잠깐의 설레는 마주침 이후.

느껴진 건, 거친 충격.

강을 뛰어넘은 팬텀이 땅에 떨어져 내렸고.

각종 기술을 집약하여 만든 단단한 차체가 와중에도 충격을 분산하는 사이.

“끄아아악!”

“아아아악!”

말벌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안드레의 거친 생각과 솔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말벌의 눈동자.

쿠앙! 안드레가 달리던 속도 그대로 벽에 차를 갖다 박았다.

강둑 주변, 신축 공사 중이던 고급 주택 담벼락이 무너졌고 이로도 모자랐는지 벽을 부수고 들어가 건물에 2차 충돌.

그러고서야 팬텀이 멈추었고.

파앙!

강한 충격에 피어난 충격 완화 마법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우으으으-.”

“으윽-.”

아무리 완화했더라도, 각종 기술이 집약되었더라도 방금 충격은 가벼운 게 아니었고.

둘이 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말벌을 찾다가.

“해치웠나?”

“안 돼!”

안드레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솔이 기겁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독침이 차 본넷 위로 불쑥 솟아났다.

“아이! 진짜 평민 때문이야!”

“왜, 왜? 왜 나 때문이야?”

“바이올렛 경이 그랬단 말이에요! 해치웠나라는 말은 적을 살리는 주문이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

말벌은 둘의 대화를 이어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날카로운 독침을 차 안으로 푹푹 찔러 넣기 시작했고.

“으악!”

“끼약!”

솔과 안드레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 와중에도.

“자폭 버튼!”

“저거요!”

안드레가 참으로 성실하게 자폭 버튼이 있다는 주변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고는 뛰어내렸다.

인적이 없기에 한 선택.

그들이 내리고 난 이후에.

딴, 따라단, 따라단, 딴딴, 따.

음향 마법 기기를 타고 울리는 음악 소리.

더불어 부서진 차 곳곳에서 펄럭, 황가 의전용 차량답게 깃발이 펼쳐졌다.

저런 기능도 있었구나.

도망가는 와중에도 이딴 생각을 했고.

안드레가 아직 어기적거리는 솔을 붙잡아 재빨리 폭발 반경 밖으로 탈출.

“하압!”

솔이 급한 대로 그림자를 끌어올려 차를 감싸 안았다.

혹시 모를 민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폭발력을 모조리 말벌에게 쏟아붓기 위함.

바들바들 떨던 차가 자신을 마구 찌르는 말벌에게 복수라도 하듯.

콰아앙!

불꽃을 뿜어내며 터졌다.

가린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폭발이 살벌했다.

솔이 쏟아 낸 그림자가 일렁이며 꾸역꾸역 불길을 틀어막는 사이.

“비켜라!”

광기 어린 목소리가 그들의 귓바퀴를 베듯 날카롭게 울렸고.

둘이 성큼 흩어지는 중간.

황자가 빛과 불을 뿜어내며 날아들었다.

손에는 우는 브레이커가.

입가엔 비죽비죽한 미소가.

마치 폭발하는 불꽃과도 같은 표정으로.

“내가 죽인다!”

단번에 그림자 사이로 빨려 들어갔고.

순식간에 폭발이 사그라들었다.

이어진 건.

키에에에엑!

하하하하하!

날카로운 말벌의 비명과 황태자의 웃음.

그림자를 풀어헤친 자리.

얼핏 보이는 황자와 말벌의 대치.

갈가리 찢긴 팬텀, 그래도 마지막 숭고한 자폭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말벌의 날개도 너덜너덜했다.

날아오르려 했으나 날개가 없으니 땅을 기는 곤충일 뿐.

황태자가 놈의 독침을 브레이커로 연속해서 쳐 내리니.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길 잠시.

결국 말벌의 가장 큰 무기가 부러졌다.

직후, 놈의 가슴팍에 브레이커를 꽂아 넣고는.

와르르르릉!

날을 갈아댔다.

지금까지의 모든 충격과 불까지 막아 냈던 말벌의 갑피가 브레이커를 막아섰고.

터지는 불꽃 사이.

검이 갑피를 파고들수록 황태자와 말벌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감히, 제국의 영역을 넘보지 마라 버러지.”

황태자가 이글거리는 얼굴로 놈에게 경고를 전했다.

“여왕이 보고 있음을 안다. 독충들의 왕들아 제국의 황태자가 말한다. 제국의 살을 탐하지 말아라. 내 직접 가서 너희를 모두 태워 버릴 것이니.”

브레이커가 꽤 오래 말벌의 가슴팍을 헤집었고.

이윽고.

푸화학!

갈라진 갑피 사이 녹색 진액이 분수가 솟아오르듯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그러나 황태자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곤충의 생명력은 질기다.

죽었다 생각한 순간 벌떡 일어나 마지막 일격을 찌르는 것이 놈들.

그렇기에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몸을 반으로 가른 뒤에야.

브레이커가 벌건 숨을 헐떡이며 날을 멈추었다.

불꽃과 진액이 가득 쏟아지는 거리.

황태자가 그림자를 펼쳐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진액들을 막았다.

솔과 안드레를 바라보길 잠시.

“강둑에 블러디가 있다. 챙겨 오도록. 강철성으로 돌아간다.”

복귀를 명했다.

* * *

수도에서 있었던 사건의 전말.

암살자로부터 시작된 습격, 이후에 벌어진 말벌과의 전투.

주정뱅이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경비대들이 말도 안 된다며 입을 벌리며 고개를 저을 때.

“그래서 그 사내의 인상착의는 어땠는데?”

책임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고.

“어후, 잘생겼죠. 그리고 머리가 뽀얬지?”

“맞아. 머리가 뽀얗더라고.”

“그니까, 그 뭐더라. 은도 아니고 금도 아닌 것이 하야면서도 그런 느낌 있잖아.”

“백금?”

“그래!”

“맞아!”

잠시 가물가물한 기억을 뒤지던 그들이 백금이란 단어에 번쩍 눈을 뜨는 순간.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검은 단복을 차려입은 자들이 주점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부터 제국 특무대에서 사건을 맡기로 했으니 모두 물러나시오.”

“네? 뭐요? 무슨대? 특무대? 설마 그 특무대?”

“맞소. 제국 강철성 특무대.”

“강철성?”

“황가에서?”

곧 냉정한 표정과 말투로 단번에 현장을 접수.

“경비대에서 사건을 이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니 수도 경비대는 이번 일에서 손을 떼시오.”

“아니, 그래도 무슨 사정인지는-.”

“강철성에서 내려왔다는 소리 못 들었나? 지금 당신 목도 걸려 있는 거 같은데. 이야기해 줄까?”

“아닙니다. 나가죠.”

“거기 주정뱅이들은 남아. 여러모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었고.

경비대 사이에선 알음알음 황태자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으나 특무대가 무서워서 금세 사그라들었다.

자리에 있었던 주정뱅이들은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어느 날 성실히 일하는 모습으로 숨 쉰 채 발견되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다던 후문.

* * *

각설하고.

황태자가 강철성에 복귀한 이후.

이제는 황태자 성이라 불리는 이전 11황자 성.

“상태는 어떻지.”

“아직 깊이 잠을 자는 상태예요. 나름 여러 포션과 약을 처방받아 보았는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회복이 끝나지 않은 듯싶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 명령한 방에는 블러디가 잠들어 있었다.

차마 제국 유명 수배자의 얼굴을 함부로 내보일 수 없어 그림자에 꽁꽁 싸매어 들여왔다.

이후로도 안드레와 솔, 바이올렛이 돌아가며 며칠간 돌보았으나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뺨을 치면 깨어날까 하여 손바닥을 들어 올렸으나.

“…….”

반응 없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인 듯하여 손을 내렸다.

우선 사정을 들어야 무어라도 할 터인데.

그리고 사실.

“전하, 국정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이옵니다.”

“싫다. 꺼져라.”

“…전하?”

“가면 매일같이 개소리나 하는 놈들의 얼굴을 왜 봐야 한단 말이냐. 죽이기 싫어서 안 가는 것이니 책상에 대가리 박고 반성들이나 하라 이르라.”

“…예이.”

벌써 국정에 질렸다.

하나를 처리하자면 관련된 비리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고.

어제처럼 화끈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일은 더뎠으며 신하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얼른 일어나 상황을 설명해야 내가 남부로 도망을 가지 않겠나.”

솔직한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황성을 탈출해야 한다.

이 빌어먹을 진창 속에 잠겨 있다간 분명 다 죽여 버릴 거다.

자신은 더러운 것을 태우는 불꽃이지 진창을 정화하는 물이 아니다.

그건 다른 이들이 할 일.

그래서 어제 그런 이들을 구했더랬지.

그때.

똑똑똑.

-태자,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직접 다가가 문을 열자.

“아… 태자. 여기 화원에서 키운 막 핀 성자꽃을 다려왔어요. 이거라면 분명 깨어날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엘프. 아닌가요? 인간의 피가 섞였기는 했어도. 엘프에게 성자꽃은 꽤 좋은 약초거든요.”

“엘프인 건 어찌 아셨구요.”

“아, 미안해요. 알면 안 되는 사실이었나 보군요. 그저 짙은 풀냄새가 익숙해서요.”

어머니가 영롱한 차 한 잔을 받쳐 든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어머니의 드레스 자락을 꼭 쥔 유리엘.

“사람 시키지 않고 왜 직접 들고 오셨습니까. 번거롭게.”

“다릴 줄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저 말고는.”

“얼굴이라도 보셨습니까.”

“냄새로 얼굴까지 보진 못하니까. 이것만 전해 주고 잊을게요.”

어머니의 너스레에 미간을 찌푸리길 잠시.

맑은 동생의 눈동자를 보자.

떠오르는 사실 하나.

“참 유리엘, 아카데미 입학은 신청하셨습니까.”

“태자, 진심인가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심코 꺼낸 말에 어머니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마 책봉식 날, 멀리 떠나라는 말이 상처로 남은 모양.

물론 그때는 진심이었으나 지금은 좀 다른 의미였다.

“아마, 제국 아카데미가 스프링 필드 쪽에 있었지? 곧 개교기념식이기도 하고.”

스프링 필드는 남부로 향하기 전 지나야 하는 관문.

동생을 향한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즐거움이 차올랐다.

“오… 라버니……?”

아직 때 묻지 않은 동생의 맑은 눈동자에 경의를.

“찾았다.”

강철성을 빠져나갈 방법을.

어쨌든 블러디와 독충이 남부에서 왔으니.

겸사겸사 남부로 향하면 될 일.

이유는 깨어나고 들어도 늦지 않다.

“채비해라 떠나야겠다.”

그렇게 단숨에 아카데미행이 결정되었다.

명분은?

“어찌 오라비가 동생의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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