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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05화 (105/200)

105화 내가 도울 자는

그러니까 이야기해 보자면.

닭튀김에 속았다.

이렇게 축약할 수 있겠다.

풀어 말하자면 닭튀김을 닮은 그 훈훈하며 바삭바삭하고 은혜가 육즙처럼 흐르던 황태자 전하의 미소에 홀려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분명 그날 저녁.

“북부 재건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 보았어요. 놀랍더군요. 그 외에도 작성한 것들이 많다 들었는데요.”

“자네의 세금 개혁 연구 보고서도 퍽 인상적이었어. 좀만 다듬으면 분명 쓰임 받을 수 있을 텐데. 아쉽군 아쉬워.”

세상 처음이었다.

그런 칭찬을 받아본 것은.

더군다나 그리 패악스럽다 소문난 황태자 전하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하여 이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으니 이리 두 분을 모두 뵙게 되어 반갑군요.”

너무나 부드럽지 않은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신 또한 승전식 행사에 있었다.

비록 가장 바깥, 말단에 자리했지만 그 먼 자리에서도 황태자의 고귀함을 보았다.

그리고 패기 넘치는 첫 발언도 똑똑히 기억했다.

세상에, 제국 강철성에 머무는 모든 신하와 귀족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신단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런데 그런 황태자 전하가 이리 직접 행차하여 자신과 아버지의 노고를 치하하다니.

얼마나 감격이었는지.

그렇게 아버지와 전하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감격에 북받쳐 한마디 말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자신이 인정받는 것보다도 늙은 아버지가 인정받는 장면이 더욱 기뻤다.

아버지의 지난 세월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이젠 아니까.

은퇴하던 날 아버지의 쓸쓸한 얼굴을 기억하니까.

한참을 대화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일어나신 후.

아이들과 부인은 자고 둘만이 남아 술잔을 기울일 때.

“고귀한 분이 오셨구나.”

“……!”

그제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던 걸까.

“아셨습니까?”

“은퇴한 지는 꽤 되었지만, 황가에서 일한 게 몇 년이냐. 직감적으로 알지.”

“그런데 어떻게 그리 태연하셨어요.”

“장단을 맞춰 주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실 수도 있는 법이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과 감정은 좀 다른 법이거든.”

아버지의 지혜에 아들이 놀라길 잠시.

아버지가 술에 취해 눅눅한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며.

“실은 전에 황성에서 날 불렀다. 젊은 적 제출했던 북부 재건 계획 연구서가 이번에야 빛을 발했다고. 하여 날 책임자로 부르고 싶다더구나.”

“왜 안 가셨습니까.”

“가 봤자니까. 이제 너도 알지 않니. 하루 이틀 한두 명 갖곤 어림없다. 결국 제자리걸음일 뿐이야. 그래서 거절했다.”

“그렇죠…….”

“방금 오신 분이 그 새로운 황태자 전하이시냐?”

“네, 맞습니다.”

“전에 들으니 태자 전하께서 내 보고서를 추천하셨다고 하더구나.”

“그랬군요.”

“이번엔 집에까지 와서 이리 소탈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었지. 아마 권유가 아닐까 싶다. 궁으로 오라는.”

“어쩌시겠어요.”

“너는 어찌할 거냐. 우리 두 부자를 부르고 싶어 하시는 모양인데.”

침묵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까.

처음엔 올바로 나아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탐욕스러운 귀족들과 고위 신하들이 각종 이유를 들어 공을 뜯어먹으려 할 테고.

다사다난하신 황태자께서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하시겠지.

각종 정치적 이유와 태생을 빌미로 자신들은 내쳐질지도.

오랫동안 높은 사람들을 보아 온 결과.

그들의 사고방식은 때로 이해하기 어려우리만큼 잔혹했기에.

아마 어쩌면 희생양을 구하는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일이 어그러지면 모든 죄를 저희가 뒤집어쓸 수도 있어요.”

“그렇겠지.”

“그래도 가시게요?”

아들의 진지한 물음에 주름진 눈가를 꿈뻑이던 아버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품었던 꿈은 한번 펼치고 가고 싶다.”

“…옆에서 도울게요.”

“고맙구나.”

그리 결심하고 복귀한 황성.

역시나 일이 몰아쳤다.

그래도 버텼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불러 쓰셨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이러다 죽겠습니다!”

아들이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러다가는 과로로 죽게 생겼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이 몇 개가 더해졌는지 모르겠다.

여튼 지금 부자는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

“이미 죽은 거 아닐까?”

아버지가 곧 자연사할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고.

“안 됩니다. 아버지 가시면 안 돼요!”

“난, 여기까지 인가, 보다.”

“저랑 남은 서류 작업까지 같이하셔야죠!”

“예끼 이 못된 놈아.”

둘이 웃을 힘도 없어서 마른 미소를 짓길 잠깐.

“안 되겠습니다. 전하를 찾아가야겠어요.”

“무슨 소리냐. 찾아가서 뭣하게.”

“죽기 전에 무슨 조처를 해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아서라. 선이 있는 법이야.”

“이대로는 죽어요. 심지어 요즘 회의도 참석 안 하시지 않습니까.”

“…….”

아들이 결의 어린 얼굴로 황태자 전하에게 항의하리라 그리 마음먹고 벌떡 일어설 때.

벌컥.

황태자가 직속 국정 계획실 문이 열리며 들어선 이들은.

“태자 전하의 교지를 받들라!”

바로 황제의 성지를 나르던 이들.

오늘은 황태자의 교지를 갖고 나타나니.

둘이 방금의 불만을 잊고선 헐레벌떡 땅에 엎드렸고.

수식어를 가득 붙인 허황된 말이 들려오길 한참.

“오늘부로 남작의 자리를 내리니 그의 아들은 준남작으로 대우할 것이며 공에 따라 녹을 올려 줄 터이니 그리 알라. 또한! 황태자 직속 국정 연구원의 원장과 부원장을 맡기리니! 직접 신하들과 말을 나누어 국정을 이끌어 가도록 하여라!”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남작이요?”

“준남작?”

한순간에 귀족이 되어 버렸다.

뿐인가 태자 전하의 직속 기관장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

그들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큼, 크흠 전할 말은 이 정도… 요. 여기 태자 전하께서 전하라 하신 서신이니. 읽어 봐라, 보도록 하시오.”

평소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던 자들이 그들에게 어색하게나마 존칭을 붙이곤 물러갔다.

황태자가 아끼는 이들이니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까닭.

그들이 무서운 게 아닌 황태자의 패악이 두려웠다.

모두가 나가고 텅 빈 집무실,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멈춰 있던 부자가.

“남작님?”

“준남작?”

“소장님?”

“부소장?”

감격한 표정으로 서로를 얼싸안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오랜 시간 황가를 위해 헌신했으나 먹는 놈들만 먹는 구조.

그런데 업적을 이루기도 전에 이리 상을 주시다니.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찌 황태자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리.

비록 영지도 없고 대를 이을 수 없는 일시적인 직위라 하더라도.

그들에겐 감동이었고.

“어서, 어서 확인해 보자. 다음 명령이 적혀 있을 거다.”

“네! 아버지, 아니 남작님! 소장님!”

부자가 감격한 얼굴로 황태자가 남겼다는 서신을 확인한 순간.

“…….”

기쁨 가득했던 얼굴이 까맣게 시들었다.

적혀 있는 단출한 말.

-남부의 따뜻한 햇살과 달콤한 과실이 궁금하여 떠난다. 국정이 싫어서가 아니니 넘겨짚지 말도록. 진짜다.

로이스 가문을 찾아가라. 국정을 진행하기 위해 안배한 수가 있으니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개고생, 아니… 고생하도록.

놀 생각은 마라. 갔다 와서 확인할 테니.

아, 편지를 읽은 순간 마구 피어났던 충성심이 싹 날아가 버렸다.

참으로 짧고 덧없던 충성심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릴 두고 놀러 가시겠다는 거지?”

“그렇네요.”

“…….”

“…일할까?”

“일하죠.”

그들이 뒤에 잔뜩 쌓인 서류를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지.

이왕이면.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요.”

“그러시겠지.”

무사히 돌아와 자신들의 일을 돌보아 주셨으면.

돌아와 방금처럼 노고를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부자가 창문 밖, 옅게 들이치는 햇볕 사이를 걷고 있을 황태자의 앞길을 축복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황태자의 무사를 기원하는 마음을 품은 자들이 강철성 곳곳에 있으니.

어머니의 우려처럼 아르한 홀로 진창 속에 피어난 것은 아니리라.

미친 망나니라 불렸던 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된 지 한 달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 * *

북부는 동토, 서부는 사막이라면 남부는 원시림이 존재하는 땅.

엘프라 불리는 신비한 원주민들이 사는 원시림은 남부 극단에 이르러야 만날 수 있는 곳.

극단에 도착하기 전까지 펼쳐진 풍경은.

“우와-! 오라버니 오라버니! 밖에 온통 꽃이에요!”

꽃밭을 비롯한 평야.

특히 스프링 필드라 불리는 남부의 거대한 평야는 제국의 중요한 곡창 지대로서 제국 전체를 먹이기 충분했고 더 나아가 제국의 가장 커다란 힘이기도 했다.

식량은 언제나 중요한 자원이니까.

“그러게, 꽃이구나.”

답 없는 나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유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고.

동생 또한 마주 미소 지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

“태자? 괜찮은가요?”

문득 어머니가 내게 물어왔다.

의아함과 걱정이 서린 둘의 얼굴을 보며.

“네, 괜찮습니다. 잠깐 생각할 것이 있었어요.”

눈앞에 떠올랐던 기억을 억지로 지워 냈다.

남부의 곡식이 가득했던 평야와 꽃이 가득했던 들판은, 전생에.

불타는 지옥이 되었다.

유황이 주렁주렁 맺혀 독기를 피워 냈고 악마들이 인간의 두려움과 내장을 거두어 식량 삼았고.

꽃들은 꽃향기를 퍼뜨리는 대신 지독한 악취와 치명적인 맹독을 품었다.

그때의 끔찍했던 광경이 지금의 평화로운 풍경과 겹쳐 혼란을 일으켰다.

눈에 고인 살기와 분노를 털어 내려는 때.

“국정이 걱정된다면 좀 더 늦게 와도 됐을 텐데요.”

어머니의 이어진 걱정에.

“마침 국정에 지친 참이었습니다. 남부 시찰 겸 아카데미 축사도 겹쳐 있으니 잘된 일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더군다나 동생의 입학식이니 어찌 오라비가 참석하지 않을까요.”

짐짓 따뜻한 얼굴로 어린 동생을 바라보았다.

유리엘도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는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쉽지 않은 아카데미 생활일 것을 짐작했으니까.

그뿐이었다.

그래도 강철성에서 떨어져만 있다면 목숨의 위협은 덜하리라.

공식 석상에선 이런 온정 하나 베풀 수 없기에 이것으로나마 힘을 얻었으면 했다.

“잠시 일어나겠습니다.”

차창 밖 스쳐 지나가는 들판을 일별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복도를 내뻗는 걸음 사이로 내려앉는 한낮의 햇볕이 따스했다.

곡식이 무르익을 만하구나.

팬텀은 박살 났고 의전용 차량은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어 남부로 향하는 황가 의전용 열차를 탔다.

황태자에게 허락되는 특권 중 하나.

한 칸이 꽤 넓음에도 자리를 차지한 건 어머니와 동생, 나. 셋뿐.

고풍스러운 공간이 휑하여 쓸쓸하기까지 했다.

첫 번째 칸을 거슬러 다음 칸으로 들어서자.

“전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안드레와 솔이 나를 보곤 눈을 둥그렇게 떴고.

“귀쟁이는.”

“마지막 칸에서 바이올렛 경과 함께 쉬고 있습니다.”

“알겠다.”

“수행할까요?”

“나는 괜찮고 들어가서 황비 마마와 유리엘과 함께 있도록. 공간이 쓸쓸해 보이더군.”

“알겠습니다.”

그들을 지나쳐 열차 마지막 칸으로 향하려다.

“귀쟁이가 깨어나서 한 말은 따로 없던가? 알프레드?”

알프레드의 이름을 부르곤 멈칫했다.

옆에 없구나.

다시 깨달았다.

살라스에게 들었다.

영림을 틀어막은 날, 홀연히 어딘가로 떠났다지.

아마 암철단으로 향했으리라.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 남겼던 말이 진짜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다짐이라면.

[유대가 강한 대상의 운명이 변하였습니다. 운명 가면, 거짓된 자아가 깨집니다. 새로운 운명이 싹틉니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획득합니다!]

이처럼 변하는 운명이라면.

무사히 돌아오겠지.

다만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였기에 없어서 아쉬울 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자.

“전하,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이올렛과.

“왔어? 들었어. 황태자가 되었다니. 축하해.”

블러디가 따로 마련된 침대에 앉아 찻잔을 꼭 쥔 채 파리한 얼굴로 날 맞이했다.

붉은 머릿결과 대비된 얼굴이 푸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했다.

“몸 상태는.”

“보다시피 엉망이야.”

“그 알 수 없는 차가 정말 효과가 있었나 보군.”

“놀라워. 어떻게 성자꽃을 피워 낸 거지? 대체 누가.”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마음결이 성자와 같으신가 보네. 여러모로.”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미안 감사하다는 인사가 먼저겠지. 고마워 살려 줘서. 그리고 치료해 줘서. 덕분에 살았어.”

“말로만 때울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사실을 모두 토해 내야 할 거야.”

단순한 선의가 아니었음을 말하자 비로소 블러디의 얼굴에 안심이 깃들었다.

그녀가 자신이 어쩌다 수도까지 흘러들어 왔는지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수도에 있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긴 싫었어. 진심으로.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어.”

변명으로 시작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축약하면 간단했다.

원시림이 병들었고 인섹터가 이끄는 곤충들이 숲을 휘젓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이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

블러디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아무리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했다.

그나마 떠오른 게 바로 북부에서 만났던 미친 황자.

제국까지 오는 험난한 과정에서도 혹여라도 애먼 사람들이 휩쓸릴까 봐 오지를 돌았고.

어쩔 수 없이 수도까지 흘러들어 왔을 때는.

자신이 지닌 신비를 이용하여 그들을 그러모았단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

거기까지 듣고는.

짜악.

자리에서 그녀의 뺨을 쳤다.

힘이 강했는지 그녀가 약해졌는지 풀썩 침대 위에 쓰러졌던 블러디가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고.

붉게 물든 뺨과 터진 입술 덕에 그나마 혈색이 돌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미련하다. 네가 통제할 수도 없는 적을 수도에 들여놓다니. 미리 연락할 수도 있었어.”

“…….”

“혹여 힘이 모두 떨어진 나머지 나에게 주었던 보석마저 부서져서라는 핑계는 대지 마라. 시간은 충분했다. 의심했겠지. 정말 도와줄까? 정말 내 말을 들어줄까? 내 말이 틀렸나.”

“아니…….”

“혹여라도 수도에 희생자가 나왔더라면 난 네 목부터 쳤을 거야.”

“그래. 미안…….”

“너희 오만한 원주민 전부보다 나에겐 제국민 하나가 더 소중하니까.”

“아파.”

“아프라고 하는 말이다. 뻘건 귀쟁이.”

그녀가 붉게 물든 자신의 뺨을 감싸며.

“아무리 생각해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황자, 황태자 전하 밖엔 없었거든. 북부의 사건을 보기도 했었고. 근데 솔직히… 의심했어. 평생토록-.”

아무도 없었거든, 날 도와준다는 사람이. 그래서 그랬어, 미안.

툭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쌉싸름한 고백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더불어 흩어졌다.

뿌우우우-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던 황가 전용 열차가 깊이 울음을 토해 내며 잠깐의 고요를 메꾸었고.

“그래서.”

분노를 풀었으니 이제 물어볼 차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도와달라는 거냐, 원시림을.”

잘못은 잘못이고, 나 또한 북부에서 그녀에게 받은 도움이 있으니 계산을 똑바로 해야겠지.

물음에 그녀가 잠시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질책으로 끝날 줄 알았던 걸까.

블러디, 제국 수배자이자 엘프도 인간도 아닌 자이며 결국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간 사냥개는 무엇을 원하는가.

[운명 반쪽, 혼혈, 증오, 혐오, 자책의 운명이 그녀의 몸을 강하게 옭아맵니다. 가녀린 운명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따라 운명들이 덩달아 요동쳤다.

이윽고 그녀가 붉게 번진 얼굴로 애원했다.

“도와줘. 남부를, 죽어가는 원시림과 엘프들을 살려 줘.”

그리하여.

“싫다.”

단번에 거절했다.

도와줄 듯 말하고는 거절하자 황당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어벙하게 풀어졌다.

멍청한 표정을 보자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심술궂은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내가 도울 것은 오만하며 자신들밖에 모르는 엘프들이 아닌.

“난 너, 블러디. 나를 도와 싸웠던 조력자를 도울 것이다. 남들의 목숨은 구걸치 말아라. 제국민 하나가 엘프 전체보다 귀하다 했지? 내겐 너 또한 제국의 일원이다.”

대답이 되었나.

재차 확인에 블러디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의 차창 밖, 저 멀리 떨어진 원시림의 끝자락과 더불어.

“전하, 플라워 밸리가 가깝습니다.”

마법과 학문이 아름답게 피었다는 협곡에 이르렀다.

우뚝우뚝 솟은 건축물들과 하늘을 짙게 덮은 마나 연기.

다양한 건축 양식이 따로 놀듯 어우러진 풍경.

여러 가지 색깔의 지붕들이 마치 꽃이 피어난 듯 보였다.

저것보다 더 많은 학문과 지식이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겠지.

후텁지근한 원시림으로 향하기 전, 이곳에서 이루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았다.

그래야 원시림 깊은 곳 그 징그러운 독충들과 오만한 원주민들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학문, 마법, 공학, 교육이 가득합니다. 깊은 곳 숨겨져 있는 악취를 맡습니다]

[당신의 운명 패악, 광기, 욕망이 요동칩니다. 얻을 운명들의 냄새가 달콤합니다]

떠오르는 운명 또한 이를 알리니.

“가자, 얻을 것이 많다. 죽여야 할 것들도.”

막 도착한 역, 차창 밖 불안한 눈동자를 데굴거리는 자들의 표정이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잡아먹기 좋은 표정들이로구나.

유리창에 비친 얼굴에 맺힌 미소가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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