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06화 (106/200)

106화 너의 이름은

[지식은 꽃이며 학문은 열매다.]

과거 지혜와 지식의 기반을 쌓았다던 대륙의 첫 번째 현자가 생을 정리하는 회고록 첫 줄에 적었다던 문구.

지식은 꽃이며 만발한 지식은 서로에게 꽃가루를 전해 주듯 영향을 미친다.

하여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인 지식이 열매를 맺으니 그것이 학문이며, 이 학문은 세상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의의가 있다.

하면 윤택이란 무엇인가.

윤택은 사람의 생을, 더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혹자는 물질적인 풍요가 윤택의 전부라 말하지만 공허한 재물은 악용되기 마련.

정신과 영혼을 배불리 먹이는 것 또한 윤택의 일부라 하겠다.

그러니 후대에 지식을 습득하여 학문을 이룰 후배들에게 부탁하노니.

홀로 갇혀 있지 말라.

많은 이와 함께 진리를 탐구하고 서로의 지식을 나누어 세상을 이롭게 하라.

대륙에 나타난 첫 현자가 남긴 가르침은 많은 학자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서로 비슷한 뜻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학파를 세우니.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여 진리를 깨우쳐 세상에 퍼뜨렸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며 폐쇄적이기 이를 데 없던 마법사들이 학파의 발전에서 영감을 받아 마탑을 세웠다.

참 놀라운 사건.

본디 홀로 비원을 연구하길 즐기던 이들이 모이다니.

한 연구자에 따르면 학파와 마탑이 생겨난 이후 지식과 마법 발전 속도가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빨라졌다고 하니.

그런 결과를 보고 나온 의문.

“왜 완성된 이들만 모여 학파를 이루는가? 어릴 적부터 모여 다양한 지식과 관점을 습득한다면 그야말로 기쁜 일 아니겠는가.”

“왜 결국은 뜻이 비슷한 자들만 모이는가? 뜻이 다른 자들이 모여 토론하면 더욱 바른 학문이 탄생하지 않겠는가?”

제국의 한 황제는 그 의문에 대한 답으로.

“많은 학파와 마탑이 모여 연구할 수 있는 곳을 정하라. 또한 풍성한 지식이 모여드는 곳에 새싹들을 키울 장소를 마련하라. 교육을 위한 곳이니 이름은 아카데미. 이것으로 충분하겠군.”

플라워 밸리와 제국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지식은 꽃이라던 첫 번째 현자의 뜻을 받들어 꽃이 만발한 협곡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렇게 대륙 제일, 최대의 학문과 마법이 집약된 도시가 탄생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뛰어난 이들이 많았고 대륙에도 마도왕국의 초마탑, 상업연합국의 골든힐과 같은 나름의 첨단 도시가 있었으나 결국은 플라워 밸리를 따라 한 아류일 뿐.

그중에서도 백미는 제국 아카데미.

지금껏 수많은 아카데미가 제국 아카데미를 따라잡겠다 선언했으나.

결국 지금까지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평가받는 곳은 단 하나.

제국 아카데미가 유일했다.

남부 스프링 필드, 플라워 밸리 초입.

뿌우우우우-

저 멀리 알곡이 익어 가는 들판 너머,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다가오는 열차의 위용이 삼엄했다.

단단한 묵색 머리 가장 앞에는 황가의 문양인 쌍두독수리가 백금으로 양각되어 있었고.

이어 들어오는 칸도 일반 열차에 비해 유독 단단하고 거대했다.

황가 전용 열차, 그중에서도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허락된다는 백금호가 플라워 밸리 역에 모습을 드러냈고.

땡땡땡땡-

시끄러운 경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재 역내에 황가 의전 열차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기 중인 제국민 여러분들께선 예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현재-.”

안내원이 황태자의 도착을 알리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지난번처럼 일반 시민들은 자리에 없었다.

황가 열차, 그것도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에 하루 동안 모든 열차 운행을 중지한 상태.

역 안에 있는 것은 모두가 플라워 밸리와 아카데미 소속 고위 관계자들.

황태자 전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끝마치고 지금까지 기다리는 중.

보통 황태자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일을 해냈는지 대화를 나눌 법도 하건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묘한 침묵과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한 역사.

드디어.

터벅.

황태자가 존귀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소문대로 순결한 백금발과 그렇지 않은 사나운 진홍색 눈동자.

입가에 매달린 조소는 그들의 예의를 비웃는 것일까 아니면 늘 달고 다니는 미소일까.

그들의 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뭐냐, 너희들은.”

황태자의 느슨한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냐니.

설마 우리를 보고하는 말인가?

“대가리 처박고선 그리 엎드려 있으면 뭐. 밟고 지나가기 전에 일어서서 누군지 밝혀.”

그제야 황태자의 질문이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파악한 이들이.

“저는 실존파이자 해체파의 제자이며 또한 오랜 비원을 연구하는 자연, 그중에서도 불꽃을 연구하는 적색 마탑의 갈래 중 하나인 폭발 마학도 중 세부 마학 미세폭발학을 연구하는 원구원이자 아카데미-.”

“전하, 소신은 과거 먼 옛날부터 전해지던 지혜를 탐구하는 혜학을 연구하는 연구자이자 건축과 수학을 함께 연구하는 건수학파를 이끄는-.”

“아카데미의 졸업생이자 현재 상념, 혜학, 농업 학파를 스승으로 두고 있는 자이며-.”

시끄럽게도 자신들을 소개했다.

말하는 사람조차 혼란스러운지 몇몇은 돌림노래처럼 말을 반복하거나 더듬더듬 억지로라도 자신의 소속을 늘려 소개하는 소란 속.

“어어… 어어어?”

“뭐라는 걸까요?”

“…하아. 여전하군요.”

안드레와 솔은 겪어 본 적 없는 혼란에 당황했고 바이올렛은 익히 아는 그들의 허례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우리 존귀한 황태자께서는.

“개소리들 그만.”

자태와는 대비되는 천박한 단어로 단번에 그들의 입을 봉하사.

“내 귀에는 개새끼, 소새끼, 쌍노무 새끼라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니 이름, 직위 이 두 가지만으로 말해라. 지랄들 그만하고. 아니면 이름조차 제대로 말 못 하는 머저리들인가?”

그들에게 단호히 명하였다.

저런 격조 없는 말이 황태자의 입에서 나오다니.

모두가 술렁이며 어찌하지 못할 때.

“평민, 가로등, 영애. 치워라. 제 이름도 모르는 병신들이랑은 할 말이 없구나. 너무 배우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황태자가 걸음을 옮겼고.

“잠시만요. 어- 그러니까, 실체, 해존파 두목? 어쨌든 비켜 주세요.”

“건어물파를 이끄시는 분도 비켜 주시구요. 거기 중년의 아카데미 졸업생도 좀 비켜 주세요.”

“아니, 건수학파-.”

“알았으니까 건수학파든 건어물파든 비키셔요.”

안드레와 솔이 그들을 밀어내며 길을 뚫었다.

바이올렛은 별말 하지 않고선.

철컥.

“태자 전하의 앞길을 막으면 벱니다.”

검 손잡이를 굳게 움켜잡으니.

불만을 토하던 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아, 저걸 생각 못 하다니!

안드레의 탄식을 뒤로하며 황태자가 고고한 자태 그대로 플랫폼을 떠났고.

“…….”

꽤 긴 걸음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자신의 이름을 대지 못했다.

기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태자가 떠난 자리, 그는 끝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황태자에게 들려줄 화려한 소개말을 준비했던 이들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 * *

“지랄 맞은 풍습이군.”

차에 올라 짧은 감상을 뱉었다.

그들이 날 얼마나 기다렸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바이올렛 또한 동의했는지 쓰게 웃을 뿐.

“이름 위에 거적때기를 켜켜이 쌓아 봤자 더러울 뿐이지. 무슨 갑옷 차려입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들인지.”

날카로운 말로만은 성에 차지 않아 방금 역에서 만났던 머저리들을 향해 불만을 뱉었다.

플라워 밸리, 황족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안가를 향하는 길.

따로 준비시켜 둔 차량에 올라탄 채 지나가는 풍경 속.

분명 주변 지나다니는 이들의 복장은 윤택했으나.

활짝 웃는 표정들이 어딘가 어색했다.

서로를 스쳐보는 얼굴들엔 경계가 가득했고 몇몇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조차도 다른 이들을 경계하느라 입을 가린 채 대화하는 중.

보면 볼수록 기가 막혔다.

전생엔 와 보지 못했던 플라워 밸리, 방문은 처음이었으나 머저리 같은 모습에 실망이 컸다.

저렇게 입을 가리는 이유가 먼저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나누는 대화는 부덕함의 소치라서라지?

사실 그건 핑계.

학자라는 자들이 저리 입을 가리고 대화를 나누는 건 누가 혹시라도 자신들의 대화에서 깨달음의 단초를 얻을까였다.

자신들의 편협함을 들키기 싫어 이유를 붙인 것.

옹졸한 마음을 가리기 위하여 그럴싸한 논리를 가져다 붙이다니.

참 책벌레들다운 짓.

“우선 앞으로 일주일 후, 입학식과 더불어 개교 기념 연설이 있습니다. 원래 오후 일정에 아카데미 학장과 식사가 있는데 취소할까요?”

“아까 그 얼간이 중 있었나?”

“네.”

“취소해.”

“알겠습니다.”

“그냥 모든 일정 모두 취소하도록. 혹시라도 투덜거리면 말해 줘라. 만나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네, 알겠습니다.”

머저리들에게 쓸 시간은 없다.

알프레드를 대신하여 일정을 돌보기로 한 바이올렛의 정중한 답에.

“오와… 어떻게 그리 대답을 잘하십니까?”

안드레가 감탄했다.

차는 총 세 대.

안드레가 운전하는 차에는 나와 바이올렛이, 어머니와 유리엘이 탄 차에는 솔이, 블러디와 살라스는 알아서.

“평민, 네 녀석과 태생이 다른데 어찌 같겠나.”

“그건 그렇죠.”

알프레드가 비운 자리를 바이올렛이 썩 잘 소화해 내니 아무래도 그게 부러웠던 모양.

그러고 보니 최근 솔의 비약적인 발전과 바이올렛의 새로운 역할에 비해 안드레는.

“평민, 운전석은 맘에 드나?”

“매우 맘에 듭니다! 트렁크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얻은 게 없었음에도 만족스러운 모양.

대체 저런 녀석을 반역까지 하게 만든 전생의 폭군은 얼마나 나쁜 놈이었던 거냐.

아파 오는 골에 관자놀이를 짓누르고는 잠시 눈을 붙였다.

둘의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가 찬찬히 가라앉았다.

아마 모시는 분의 잠을 신경 쓰는 탓이리라.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할 일이 많았다.

전생에 플라워 밸리를 방문한 적 없었던 이유.

내가 폭군을 대신하여 황제가 되었을 땐 이미.

플라워 밸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카데미도, 학문을 연구한다던 편협한 학자들과 골방에서 마법 서적에 둘러싸인 채 계산에 열중하던 마법사들도.

플라워 밸리는 죽음의 계곡이 되었고.

활짝 폈던 학문과 지식은 오염되어 남아나질 않았다.

덕분에 전생의 제국은 그간 쌓아 왔던 학문과 마법, 공학의 근간을 잃었으며 더 나아가 악마들이 도래했던 때.

대처할 지혜가 사라져 삶을 연명하는 데만 급급했다.

쌓아 온 과거를 잃어버리니 미래가 사라졌고 발전 없는 현재만이 남아 모두의 숨통을 옥죄었다.

이러한 비극의 가장 큰 원인.

[대상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운명 마약, 정신착란이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대상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운명 마약, 중독, 살인이 주변에 맴돕니다]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리는 약, 밤하늘.

과거 하수구 구역에서 보았던 것이 플라워 밸리에선 오래전부터 비약으로 취급받았다던 소문.

영감과 환상, 깨달음을 전해 준다던가.

밤하늘이라는 빌어먹을 이름도 플라워 밸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지.

다만.

끝도 없이 떠오르는 운명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많은 이가 밤하늘을 접했다고? 벌써?

분명 하수구 구역을 청소했고 플라워 밸리의 패망은 아직은 먼 미래.

경종을 울리는 운명이 시끄러워 눈을 뜨자 보이는 창밖 풍경은 풍요와 윤택.

맑은 하늘 아래 색색 지붕과 행복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늘어선 가게들에 진열된 물건들은 고급이 아닌 것이 없었고.

햇볕이 모두를 축복하듯 내리쬐며 살금 열린 창 사이로 훈풍이 불었다.

그런 아름다운 풍경과는 반대로.

[장소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운명 허례허식, 관료주의, 오만, 술수, 비열함이 가득합니다]

[운명의 변화로 인해 장소 전체에 중독, 마약, 부패, 허무가 이르게 장소를 잠식합니다]

답답한 운명들이 시야를 짓눌렀다.

가장 뛰어난 지혜가 모여 있다는 풍요의 계곡, 풍성한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썩은 것들로 가득하니.

이런 변화의 원인은.

[변한 운명의 시작점이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나.

마치 나를 탓하듯 뾰족하게 떠오른 운명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짙게 미소 지었다.

지금껏 세상을 여러 번 뒤흔들었다.

어딘가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어딘가는 일찍 생명을 잃겠지.

처음 주어진 운명을 변화시키면서 각오했던 바.

그렇다고 하여 나 때문이라 자책 따위 할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이 운명마저 바꾸리라.

결국 나의 목적은 썩은 제국을 태우고 되살리는 것.

그 원동력을 얻기 위해선 플라워 밸리가 품은 열매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당장 남부 원시림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제국의 변화를 위해서라도.

다만 그전에 깊은 곳에 고인 고름부터 짜내야겠지.

썩어 버린 땅에서 피어난 열매들 또한 독을 품고 있을 게 뻔하니.

그리 결심했고, 결심한 김에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영애, 공단으로 가자. 가서 확인할 것이 있다. 살라스는 블러디와 함께 도서관으로 가 자료를 찾으라 전하고. 솔은 황비 마마와 동생을 안가에서 보호하도록.”

변덕스런 명령에 바이올렛이 안드레에게 찬찬히 길을 알려 주었고.

점점 깊어지는 음침한 운명들 사이.

과하게 밝은 얼굴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뚫고 나아갔다.

변한 운명을 돌려놓기 위하여.

꽃이 가득한 계곡을 좀먹는 독을 빼내기 위하여.

그 전에.

“빼앗아야 할 것도 있고.”

찾아야 할 물건도 있으니.

이전 귀족들을 솎아 내는 과정에서 만난 자가 지녔던 운명을 확인하러 플라워 밸리에서도 가장 첨단 기술만이 모인다는 공방으로 향했다.

* * *

플라워 벨리엔 단순히 마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자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학, 제조 등 여러 실용적인 학파들도 많았고.

그들이 모인 곳을 흔히 공단이라 불렀다.

혹자는 공단을 꽃이 열매가 되는 곳이라 칭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와 마법사들은 그들을 괄시했지만.

나름의 자부심으로 가득한 공단은 지금.

“다, 다들 나와! 당장! 황태자 전하의 차가 이쪽을 향하고 있단 소식이다!”

역을 떠난 의전 차량이 공단을 향하고 있단 소식에 소란이 일었다.

본래라면 바로 아카데미나 대도서관을 향하리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가장 괄시받는 여기에?

의문도 잠시.

정말 황실 전용 차량이 공단 앞에 들어섰고.

아르한이 귀한 자태를 드러냈다.

분분히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는 사람들을 바라본 그가.

“이름.”

예를 표한 이중 하나에게 인사도 생략한 채 이름부터 물었고.

“어… 할리입니다. 현재 이동수단 관련 공단에서 일하고 있나이다.”

“너의 이름은?”

“음… 알베르토입니다. 그, 하늘을 나는 차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합격.”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그리곤.

“공단 지하 가장 깊은 곳, 녹슨 고철 덩어리를 보러 가자.”

공단 관계자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일한 몇만이 아는 은밀한 비밀을 입에 담았다.

고철 덩어리?

그때.

“오셨나이까. 전하. 잠시 작업 때문에 늦었나이다.”

얼마 전, 황태자를 만나러 가겠다던 공단 책임자 중 하나가 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급히 나와 부복했다.

보통이라면 귀한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며 타박했겠으나.

“괜찮다.”

웬일인지 패악스럽다던 황태자는 소문과는 달리 참으로 가볍게 그의 실책을 넘겼고.

안내하는 그를 따라 공단 깊은 곳으로 향했다.

우뚝우뚝 솟은 굴뚝들이 뿜어내는 짙은 마나를 헤치며 나아간 곳.

제1공단 그중에서도 중심.

오래된 철제 승강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황태자와 그를 모시는 자들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공단 주요 책임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

“우와-!”

“저건?”

안드레와 바이올렛의 감탄을 배경으로.

자그마치 길이 수십 미터, 높이 수 미터짜리 철괴가 놓여 있었다.

“고철치고는 거대하군. 치워라. 가까이서 보아야겠다.”

이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길 잠시.

철괴를 억누르던 각종 마법과 공학 장치들이 거두어진 틈.

탁, 탁, 탁타타타탁!

“저, 전하!”

누군가 붙잡기도 전에 내달린 그가.

그대로.

철괴에 몸을 부딪치니.

쩌어엉!

머리통을 울리는 소리가 지하 전체를 뒤흔들었고.

흔들리는 눈빛, 무너지는 풀썩 먼지가 일어나는 천장, 다급한 비명들 속.

황태자가.

“좋다!”

만족감을 표하며 다시.

쩌어엉!

몸을 철괴에 들이받았다.

“어, 원래 저러십니다. 취미 같은 거죠.”

“네, 맞아요. 맞아. 일상이죠. 우리에겐.”

바이올렛과 안드레의 빈약한 변명이 뒤흔들리는 공단 지하에서 가녀리게 울렸다.

문득 자리에 없는 솔이 부러웠다.

참, 알프레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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