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철괴
방금 있었던 황태자와의 싱거운 인사가 지나간 후.
공단은 평소처럼 망치 소리와 마법 장치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워지기 시작.
최첨단 기술들이 집약된 플라워 밸리인 만큼 생소한 장비들이 마나를 뿜어내며 돌아갔다.
“이봐! 거기 출력 좀 높여!”
“이것 좀 옮기자고!”
거대한 집게가 묵직한 쇳덩이들을 들어 옮겼고.
건장한 구릿빛 장인들이 각종 마공학 장치로 세심한 손놀림을 발휘하여 복잡한 문양들을 새기는 모습들과.
그들의 손짓을 따라 피어오르는 불씨들이 화려했다.
어떤 이들을 한 손엔 집게 장치, 한 손엔 거대 망치를 들고는 거대한 쇳덩이를 내려치니.
땅, 따당, 따다당, 땅, 따당.
곳곳에서 울리는 맑은 소리가 맞물려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 냈고.
곧 장인들이 하나가 되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들의 노동요가 공단 곳곳에서 흘렀다.
고된 노동 중에 누리는 유일한 즐거움.
맞물려 울리는 망치질 소리와 장인들이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에 공단 가득한 마나가 공명하기 시작하더니.
우우우웅.
마공학 장치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노동요와 작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쩌엉!
갑작스레 불규칙하고 불쾌한 잡음이 끼어들었으나.
누군가의 실수라 치부한 장인들이 흔들리지 않고 노래를 이어 나갈 때.
쩌엉! 쩌어어엉! 쩌엉!
방금 울렸던 소리가 반복하여 들려왔고.
“아니, 썅! 대체 누구야? 누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거야?”
“미친놈인가. 일 하루 이틀 해? 정신들 안 차려?”
“야! 소리 낸 놈 오늘 일 그만하라 해. 마누라랑 싸우고 나왔나. 왜 심술질이야?”
우락부락한 인상의 장인들이 거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욕을 뱉어 내며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눈을 빛냈다.
서로를 의심하길 잠깐.
“뭘 봐! 아니야! 나 마누라랑 잘 지내!”
“누가 뭐래?”
“행복하다고! 행복!”
“…행복한 거 맞지?”
“씨발놈아! 행복하다니까!”
“아니, 왜 화를 내고 지랄이야.”
허나 망치질로 단련된 장인 중에선 감히 그럴 자가 없었고.
범인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 할 때.
다시 그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아래?”
발밑에서.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은은한 진동.
찌르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기묘한 감각에 다들 멍하니 있는 사이.
쩌엉!
대체 무엇을 두드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다시금 울렸고.
이번엔 작정하고 두드렸는지.
우르르릉.
땅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방금까진 종아리까지 미쳤던 진동이 이번엔 무릎을 넘어 정수리까지 치달았고.
“우윽.”
“뭐야 이게.”
장인들이 뒤틀리는 속과 띵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사이.
푸스스스, 건물 곳곳에서 켜켜이 쌓인 먼지와 철 가루가 피어올랐다.
다시 충격이 터졌고.
이번엔 건물 바닥에 늘어놓은 장치들과 각종 잔해들이 덜덜덜 몸을 떨었다.
또다시 강한 충격이 공단을 휩쓸자.
이내 공단 가득한 마나들이 공명했다.
보통 공단 건물 하나에서 작업하는 장인이 수십이며 조수가 수백.
그들이 합심하여 한 호흡으로 망치를 두들겨야 건물 내에 있는 마나가 공명했다.
심지어 노동요에 참여하려면 최소한 10년 이상 경력을 쌓아야 가능하거늘.
그런데 지금 울리는 소리는.
“야! 야! 마나 장치 잠궈!”
“뭐 해? 이대로는 건물 무너져!”
홀로 공단 전체의 마나를 뒤흔들어 재정립시켰다.
수백이 건물 하나 흔들기도 쉽지 않건만.
단 하나의 소리가 이 넓은 공간에 펼쳐진 마나 전부를 휘어잡다니!
이윽고 하나의 울림이 이루어 낸 공명이 마나를 넘어 건물, 장치들에 스며들었고.
미처 끄지 못한 장치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이상 징후를 보였다.
이젠 장치를 넘어 건물 전체가 일렁일 정도.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다, 다들 나가! 나가!”
“책임자들 공장 폐쇄 장치 가동해!”
대참사를 예측한 장인들이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 둔 공단 전 장비와 건물을 멈추는 폐쇄 장치를 가동하기 직전.
우우우웅-
비로소 소란이 멈추었다.
신호는 명확했다.
방금까지 널뛰던 마나가 가라앉았고.
마나가 가라앉자 장치들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파는 남았다.
모두가 어벙벙한 얼굴로 방금 그 울림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해할 때.
“황태자 전하……?”
누군가 한 가지 가정을 꺼냈다.
평범한 일상, 새롭게 나타난 변수라면 방금 그들에게 이름을 묻고는 홀연히 사라진 황태자밖에 없지 않은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 장인들의 눈이 제1공단으로 향했고.
푸스스스, 피어오른 먼지와 마나들이 무언가 벌어질 것을 암시하듯 음산하게 공단을 감싸고 돌았다.
그리고 사건의 중심인 황태자는.
“좋다. 좋은 단단함이다.”
한껏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는 중.
“저, 전하! 괜찮으십니까?”
“의료진! 의료진 불러!”
“으아아, 전하! 전하아!”
다만 다른 이들은 즐겁지 않았다.
거대한 철괴 한복판 깊게 파인 사람 형태의 구멍에서 들려오는 웃음을 듣고 어떻게 침착하겠는가.
황자가 처음 거대한 철괴에 몸을 부딪친 순간.
거센 불꽃과 울림이 터졌고.
이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온몸을 저 거대한 철괴에 부딪치는 기행을 선보였다.
그것도 전력으로!
사람의 몸이 부서지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황태자는 더욱 거세게 몸을 부딪칠 뿐.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의 몸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철괴가 움푹 패였다.
몸이 철을 이겼다!
터지는 불꽃과 광기로 온몸을 내던지는 황태자를 바라보는 장인들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사람이 어찌?
그리고 이어진 공명과 심상치 않은 변화.
점점 상황이 위험해지는 걸 느끼곤 다급히 전 장인들에게 대피를 명령하기 직전에.
황태자가 들이받는 걸 멈추었다.
깊은 구멍 속,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치이이이-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황태자의 육신이 드러났다.
방금의 충격 덕에 해진 겉옷, 매끈한 근육이 비쳤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잘 짜여 있는 근육이 올올이 움직이며 제 존재감을 뽐냈다.
눈으로 보아도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
하지만 사람의 육신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걸까.
장인들의 의문 속, 철괴 밖으로 빠져나온 황태자가.
“후우우우, 아쉽군.”
한숨과 함께 깊은 아쉬움을 뱉어 냈다.
* * *
중심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처음 철괴를 마주한 순간 눈앞에 떠오른 운명.
[무구의 운명이 두터운 껍질에 휩싸여 보이지 않습니다. 중심에 담긴 운명에 닿아야 무구의 획득이 가능합니다]
지난 귀족들을 솎아 내는 과정에 날 찾아온 자.
그가 지닌 운명 중 영광을 잃어버린 무기를 엿보았다.
하여 그와 거래를 했다.
그가 빼앗긴 걸 찾아 줄 터이니 너는 가진 무기를 내놓으라고.
다만 그가 이끄는 장인들이 역에서 만난 이들처럼 미련한 자들이었다면 무기만을 얻고 버리려 했다.
결국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면 되니.
비겁한 생각이라 하겠으나 그러면 어떠랴.
나는 황태자이며 폭군의 운명을 지닌 자다.
의리와 온정 따위 없다.
오직 나를 위해, 제국에 필요한 이들만을 살릴 생각.
그나마 그들이 앞서 만난 머저리들과 달랐고 그저 그 차이가 그들을 살릴 이유가 된 것뿐.
중앙에 담겨 있다는 운명을 잡기 위해 전력으로 몸을 부딪쳤으나.
[운명의 중심에 도달하기엔 지닌 신비 강철의 강도가 약합니다. 영광을 잃어버린 무기의 본질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두터운 껍질에 쌓인 운명의 일부를 엿봅니다. 운명 제련, 생명,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지난 영림에서 얻은 신비 강철이 아직 충분히 단단하지 않아 중앙까지 가지 못했다.
얼추 반절.
따지고 보면 반의반이라 하겠으나 어쨌든 목표까지는 지금보다 두 배는 단단해야 했다.
그래도 무기의 정체를 유추하기에 정보는 충분했다.
진실과 생명을 벼리는 망치, 진생철퇴(眞生鐵槌).
과거 브레이커, 스타 레인에 이은 건국제가 즐겨 쓰던 무기 중 하나이며 제국에서 유실한 무기.
황가 비고 깊은 곳, 멸망을 막기 위해 건국제의 신비를 찾으려 애쓰던 중 찾아낸 문헌에 쓰여 있던 기록에 따르면 거짓과 죽음을 부수고 진실과 생명을 두드려 탄생시킨다 했던가.
그 크기와 강도가 문헌에 적힌 대로, 운명 또한 알려진 대로.
이러니 정체를 모를 수가 없다.
다만 브레이커, 스타 레인도 크기가 컸는데.
“이렇게 무식하게 커서야 어떻게 휘두른다는 건지. 꼰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괴물 같은 걸 남겨 둔 거야.”
진생철퇴는 무기의 범주를 벗어난 수준.
왜 이렇게 크기에 집착하는 걸까.
뭐 다른 콤플렉스라도 있나?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곤 잠시 스멀스멀 제 모습을 되찾아가는 철괴이자 철퇴를 바라보았다.
분명 시간은 많지 않았으나.
[지닌 신비 강철이 시련을 거듭하여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새로운 속성 금속화를 획득합니다]
“해볼 만해.”
무작정 불가능을 외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방법이 없다면? 몸으로 때울 참이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계속.
“전하, 날씨가 싸늘합니다. 걸치시지요.”
어느새 자신의 웃옷을 벗어 내민 안드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상태를 깨달았다.
상의는 물론 하의도 멀쩡한 곳이 얼마 없었다.
뭐 육체도 나무랄 곳 없이 훌륭했으나 이런 꼴로 다닐 순 없겠지.
“필요 없다.”
안드레의 호의를 거절하며 자연스레 몸에 그림자를 둘렀다.
널널하게 몸을 감쌌던 그림자가 바짝 줄어들며 방금 걸치고 있던 정복을 그대로 재현했다.
형태는 같았으나 그림자 안에 어린 빛무리가 마치 밤하늘을 옷으로 만들어 두른 것 같아 유독 아름다웠다.
강철 같은 몸을 감싼 은하수, 그 위 광염으로 만들어 낸 단추와 장식들이 번쩍이니.
“세상에.”
“저게 무슨 옷이지?”
“아니, 옷감이 달라. 방금 몸을 저절로 감쌌잖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장인들이 놀랄 정도의 고귀함.
그들의 감탄을 배경음 삼아.
“소장은 나오라.”
처음 나를 인도했던 자를 불렀고.
“신 그레이 블랙스미스. 전하의 앞에 나아왔나이다.”
그가 정중히 예를 표했다.
공단의 주인 중 하나이자.
과거.
“이것이 그대의 선조들이 만든 무기임을 알고 있는가.”
건국제가 진생철퇴를 만든 위대한 대장장이 가문의 후손.
지금은.
“빼앗긴 땅에 나머지가 있나이다.”
영지도, 명예도, 영광도 빼앗긴 처지.
“좋다. 물건을 확인했으니 계산을 치러야겠지.”
대가로 그에게 모든 걸 되찾아 주기로 했으니.
이를 위해선.
“걷는 걸음을 따라오다 보면 저절로 되찾을 것이다. 땅도 영광도 잃어버린 명예도. 따라오겠는가.”
“따르겠습니다.”
먼저 플라워 밸리를 좀먹는 것들부터 걷어내야 했다.
“그렇다면 답하라. 밤하늘을 관리하는 자가 누구라 하던가. 아니 밤하늘을 이 계곡에 뿌리는 자가 누구냐.”
으르렁거리듯 플라워 밸리를 패망시키려는 흉수를 물었으나.
“플라워 밸리의 많은 이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모두 뱉도록.”
그레이가 목울대를 일렁이며 쉬이 고백을 토해 내지 못했고.
깊은 지하이건만 불안감이 팽배하게 피어났다.
분명 여기 있는 자들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자들일 터.
실제로 공단 소장들과 책임자들 중에서도 그를 따르는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
서로를 이은 단단한 신뢰와 강한 유대가 운명으로 떠오를 정도.
그런데 저리 망설일 이유가 무언가.
문득 불쾌했다.
“지금 제국의 황태자 앞에서 감히 망설이는가. 누구도 나를 해하지 못함이다. 말하라. 누구냐. 누가 감히 앞에 선 황태자보다 더 공포를 자극하는가.”
치밀은 분노에 몸에 두른 그림자와 광염이 어둡게 사위었고 밝게 타올랐다.
선명한 대비가 주변을 잠식했고.
철괴를 향해 다시 몸을 부딪치려 하자.
“플라워 밸리의 관리자들, 아카데미의 교수들,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 다수와 …네 번째 황녀! 네 번째 황녀가 관련되어 있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소문이라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그제야 그가 다급히 망설인 이유를 밝혔다.
플라워 밸리의 권력자들과 4황녀.
아마 그중에서도 4황녀의 이름이 가장 두려웠겠지.
자그마치 황가의 후손이 관련된 일이다.
잘못하면 그를 비롯한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이 날아가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4황녀가 언급되자 눈을 감아 버린 자들도 있었다.
귀를 막지 못하니 눈이라도 감아 도피하고 싶었던 모양.
방금까지 불꽃과 뜨거움이 가득했던 깊은 지하에 어느새 축축한 서늘함이 맴돌았다.
몇몇이 목덜미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라도 떨어진 듯 뻣뻣해진 어깨를 떨었다.
물론.
“흥, 그게 무슨 무거운 이름이라고 겁들을 내는지.”
나는 그저 조소로 그들의 두려움을 대했다.
황녀? 고작 황녀가 두려운가?
“너희 앞에 있는 자는 제국의 황태자다. 나를 제외한 누구의 이름 앞에서도 두려움을 내비치지 마라.”
단호한 명령에 자리에 있던 자들이 고개를 숙였으나.
눈에 담긴 두려움을 지우진 못했다.
그래 원래 인간이 그런 법이다.
실증을 보여 주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
물론 그저 공단의 장인들에 불과한 이들에겐 황태자도 황녀도 모두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이겠지.
이해하나 이해하기 싫었다.
이제 그들은 나를 따르는 자들, 그렇다면 세상 그 무엇도 내 위에 있어선 안 된다.
말로만 이루어진 충성과 두려움은 덧없는 법.
방금 철괴에 몸을 부딪친 것만으로는 모자랐던 모양.
하여.
“보여 주어야겠지. 따라오도록.”
그들에게 보여 주기로 했다.
4황녀, 아멜리아.
지난번 자신의 세력을 보내어 감히 북부를 건드리려 했던 건방진 황녀이자 누이.
어차피 한 번 부딪혀야 했던 이.
지난번엔 제대로 인사를 못 했더랬다.
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모두 죽여 버렸지.
아마 아직도 북부의 차가운 눈밭 속에서 썩지 못한 시체로 남아 있지 않을까.
“상업 지구로 간다.”
당시에 나누지 못한 인사를 나누기 위해 황태자가 공단 밖으로 향했고.
뒤에 따르는 이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번졌다.
그래, 단정한 인사는 나와 맞지 않는다.
사실 단정한 적도 없지만.
옮기는 발걸음에 짙은 살기와 광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피를 볼 시간이다.
* * *
제국 곳곳엔 황가에서 마련한 안가(安家)가 존재했다.
제국 정보부와 특무대에서 관리하는 저택으로 공공연한 비밀.
왜 공공연한 비밀인가 하면.
어차피 황족이 머무는 저택, 아무도 모르게 숨길 순 없다.
그래서 안가라는 이름을 붙이고 삼엄히 관리했고.
명확한 규칙 하나를 세워 놓았다.
건드리면 죽는다, 일가친척을 비롯한 관련된 이들 전부.
안가를 건드리기만 해도 반역죄로 다스린다.
지켜만 보아도 정보부 위험인물로 물망에 올라 집요한 감시에 시달린다.
설령 그것이 고위 귀족일지라도.
원칙 하나가 명확하니 누구 하나 안가 근처에 오지 않았다.
굳이 제국 정보부와 특무대 전체를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으니까.
제국은 넓고 기회는 많은데 굳이 벌집을 쑤실 이유가 없으니까.
항상 정보부의 눈과 특무대의 검이 머무는 안가는 꽤 안전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황비 마마, 황녀 전하께선 안가를 향하셨고, 황태자 전하께선 공단으로 향하셨단 첩보입니다.”
“전원 상황을 대비하라 이르도록.”
실제로 황태자와 황비, 황녀가 갈라진 순간, 안가에선 정보부와 특무대 인원들이 무장한 채 대기.
그들을 따라붙은 정보원들이 전하는 첩보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계산된 동선.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치워 두었고.
심지어 황태자의 갑작스러운 행동도 계산 범위 안.
본래 황태자의 날뛰는 광기는 유명했으니 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듣고는 일정이 통째로 변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의 동선이 공단에서 끊어졌단 소식에 몇몇 정보부와 특무대가 출동한 사이.
“오셨나이까. 황비 마마, 황녀 전하.”
안가 담당자가 기다렸다는 듯 황비와 황녀를 맞이했고.
앞으로 일정과 안가 이용에 관해 설명하는 동안.
다급한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소란을 감지한 안가 담당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안가를 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 험하다는 정보부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은퇴한 자들.
나이는 먹었을지언정 오랜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정보부의 생명은 의태와 첩보.
어떤 상황에서도 다급함을 들켜선 안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한 정보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
몇몇 예외가 있을 순 있겠으나 황비 마마와 황녀 전하가 오신 첫날, 심지어 처음 안가를 소개하는 자리에 소란이라니.
요즘 정보부가 많이 빠지긴 했구나.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히며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가려는 순간.
“담당자님.”
급한 발걸음 소리에 이어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마마, 전하.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야기가 필요할 모양입니다.”
담당자가 애써 신색을 감추며 자리를 벗어난 후.
“이- 개새끼들이 너희 정보부 맞아? 지금 마마와 전하 계신 거 몰라?”
폭발한 그가 막 후배들의 부족함을 질책하려는 때.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네 번째 황녀께서 세우신 건물을 베어 버리셨답니다.
뭐? 뭘 베어?
순간 상황을 이해 못 하고 후배를 탓하려던 담당자의 얼굴에도 다급함이 피어났다.
지금 잘잘못이 문제가 아니다, 일단 수습해야 한다.
“코드 레드. 정보부와 특무대 본대에 연락 넣어 지원을 요청해라. 지원 요청 범위는 남부 전체로.”
어서.
이번엔 다급히 달려가는 후배의 뒷모습을 보며 화내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담당자가 안가의 창밖 붉게 내리기 시작하는 노을을 바라보며.
곧 밀어닥칠 광기와 피비린내를 떠올림은 과장이 아니리라.
안가를 비롯하여 플라워 밸리 전체에 질척한 노을이 핏물처럼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