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모조리 허상이다
플라워 밸리에 각종 학파와 마법사들이 모여 있듯.
각종 세력 또한 플라워 밸리에 모여 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제국의 정세를 쉽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플라워 밸리에 머물라.
이리 평하기도 하니.
제국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플라워 밸리엔 세력이 많았다.
학파와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이룬 학연은 물론이요, 정치적으로 규모가 큰 귀족 집단. 가령, 북부, 남부, 서부, 동부로부터 시작하여 친척들이 따로 모여 세력을 이루는 혈연.
심지어는 각종 상업과 산업, 자원 등 돈줄로 묶여 있는 금연까지 있을 정도.
한 사람이 학파의 학자이며 연구소의 소장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어딘가의 귀족이라 소개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세력에 속해 있음을 표명하는 의식.
한 명이 여러 세력에서 활동하기도 하며 각 세력이 연합하기도 하고 반목하기도 여러 번.
“어제 남서부 상인회가 깨졌다던데?”
“뭐, 그러다가 다시 뭉치겠지. 아니면 남부 상인회에 들어가던가.”
“아니, 남부 상인회도 일주일 전에 빠그라졌다더군.”
“저들끼리 섞여 새로운 집단을 만들겠구만.”
“주변 단체들은 별말 없고?”
“뭐, 자기들 쪽에 사람 많아지길 바라는 눈치던데.”
깨지고 뭉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고.
“지난 서부 영지에서 일어난 변고는 아직 피해 복구 중이라지?”
“그래, 안 그래도 서부 영주들이 피해 복구한답시고 지원을 끊어서 서부 쪽 애들이 기가 죽었어.”
“잘됐군, 연구 발표나 신제품 생산이 줄어들면 우리야 이득이지.”
“그쪽에 아는 사람 있지? 좀 만나서 기술을 넘겨 줄 수 있나 제안해 봐. 값은 충분히 치르겠다고.”
“아예 우리 쪽에 들어오는 걸 제안해 보지.”
제국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다.
매일매일 제국 전체의 판도가 바뀌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플라워 밸리의 판도도 바뀌었다.
당연히 황손의 세력들도 머물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각 세력은 이미 나름대로 황손들을 모시고 있었다.
모시는 황손의 계승권에 따라 각자의 위상이 달랐고.
그만큼 많은 이가 스스로를 강한 황손을 섬기는 사람이라 칭했다.
본래 기사들 중에는 철사자, 1황자를 따르는 이들이 가장 많았고.
학자들과 아카데미 출신 전략 및 행정가들은 주로 6황자의 휘하.
아르한이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엔 둘이 가장 황태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따르는 이도 많았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바로 살라스.
그는 유일하게 바깥의 평판과 관련 없이 플라워 밸리에서만큼은 강한 위세를 뽐냈다.
바로 대도서관에서 평생 연구만을 하는 정치 따윈 상관치 않는 미치광이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
그렇다면 최근 책봉된 황태자의 세력은?
북부와 서부의 구원자이자 감히 황후와 맞선다 소문이 난 전 11황자 현 황태자의 세력은 얼마나 많을까.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던 플라워 밸리 아닌가.
그러나 없었다.
그래, 없었다.
그 누구도 현 황태자를 모신다 칭하지 않았다.
아, 몇몇 로이스 가문 소속 장인만이 은근히 황태자의 업적을 칭송했으나.
대부분은 그가 폭군의 자질이라며 비난하기 바빴다.
패악하고 미쳤으며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자.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북부와 서부의 패망이 미래의 폭군을 제거할, 제국에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며 황태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결국 그 또한 제 이익을 챙기기 위해 북부의 문을 걸어 잠근 탐욕 많은 자라며 투덜거렸다.
어쨌든 편협하며 이성적인 학문이 자리 잡은 플라워 밸리에 충동적인 황태자를 응원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전하가 황태자의 밑으로 들어가셨다니요!”
“네에? 황태자요? 제국의 황태자가 있었어요? 누구요? 아르한? 열한 번째? 그 미치광이? 그 미치광이를 응원하시기로 하셨단 말입니까? 왜요? 미치셨어요?”
“정신 차리십시오! 이봐, 가서 정신감정 장치와 해독 포션을 가져와. 다들 마법을 준비해. 분명 정신 착란 저주에 걸리신 게 틀림없어.”
살라스를 따르던 마법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서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왜 자신이 아르한을 따르는지 이야기했으나.
마법사들은 충격을 받은 듯 소란을 떨어댔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너! 살라스가 아니구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가짜로다!”
“살라스 전하께선 정신이 맑고 이성이 확고하셨다. 이 가짜 놈!”
분명 오랜만에 돌아온 황자를 맞이하는 자리.
서부의 변고 소식을 들었기에 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할 겸 혹여 새로 발견되었다던 검은 비라는 물질을 구경할 수 있을까 하여 모였던 이들이.
지금은 손가락질하며 살라스를 욕했다.
저놈은 가짜라고, 현명하신 살라스 전하께서 그런 미친놈을 지지할 리가 없다며.
“야, 이 미친 새끼들아! 그만해! 너희 일부러 그냥 욕하는 거지! 마나 보면 내가 살라스인지 아닌지 알잖아! 이 빌어먹을 늙은이들아!”
결국 살라스가 분노를 터뜨리고 나서야 마법사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비난을 멈추었다.
어쨌든.
“후우, 그렇게들 알아. 나는 계승권을 포기하고 아르한에게 제국을 맡기기로 했으니까. 싫은 사람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가고.”
살라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무리 세상 소식에 어둡다던 그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지금의 황태자는 폭군의 자질이라 들었다.
그런데 왜?
평소 살라스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가깝게 지냈던 마법사가 손을 들고는.
“왜 하필 그 사람입니까? 황태자가 된 이유가, 살라스 전하께서 그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참으로 무엄한 질문을 건넸다.
황자에게 감히 이런 질문을 할 자는 많지 않았으나 여기는 유독 사회성이 떨어지는 미친 마법사들이 모인 곳.
다들 딱히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지 물끄러미 살라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잠시 고민하던 황자가.
“미친놈이라 골랐다. 지금의 제국을 바꾸려면 미친놈이 필요하니까.”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타당한 답을 내놓았다.
물론 마법사들의 표정은 일그러진 상태.
그러길 잠깐.
“뭐, 그렇다면 그렇겠죠.”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이니 그러려니 합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
“광기가 필요한 시대이긴 하죠.”
나름의 해석을 마친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라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원래 이런 이들이었다.
자신들 또한 마법에 미쳐 살았으니 철저한 이성과 계산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있고.
이를 광기와 매몰로 메꾸어 왔다.
그리고 사실 세상엔 크게 관심이 없는 이들이니, 황태자가 누구든 황제가 누구든 본인의 연구만 하면 될 뿐.
정치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가뜩이나 연구도 복잡한데 머리 아픈 이야기 오래 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살라스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이야기는 흑해의 비밀.
마법사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깃들 때.
“저! 살라스 전하! 살라스 전하!”
누군가 급히 살라스를 찾았고.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대도서관 입구.
“저, 저기!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어린 소년 하나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열린 문 사이로 비치는 붉은 노을이 왜인지 불안감을 자극했다.
살라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기다리려니.
“흑해보다 더 위대한 걸 보여 줄 테니 모두 오라 하셨습니다!”
“누가?”
“그, 모릅니다. 대충 ‘살라딘 튀어와라.’ 이리 말하면 아실거라고-.”
“이런 빌어먹을 놈이. 어디로 갔다더냐?”
“그, 상업 지구! 상업 지구에 도착하면 자연히 알 거라 하셨습니다!”
“알겠다. 당장 가지.”
소년의 말에 단번에 직감했다.
이 미친 황태자가 또 사고를 치려 하는구나.
살라스가 대도서관에 들어선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아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고.
“저, 저도 가겠습니다!”
“흑해보다 신비로운 것이라니. 무엇인지 보아야죠.”
마법사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곤 그의 뒤를 따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햇빛에 비틀거리는 자들이 있을 정도.
곧 살라스를 선두로 한 대도서관의 마법사들이 막 상업 지구로 향했고.
성미를 이기지 못하곤 마나를 뿜어내어 날아올랐다.
몇몇 다른 학파 사람이 정중치 못한 일이라며 혀를 찼으나.
어쩌겠는가 매일 골방에서 마법만 연구하던 자들이 이 긴 거리를 걸을 만한 체력이 없는 것을.
살라스 또한 철을 밧줄처럼 내뿜어 건물 사이사이를 건넜고.
곧 상업 지구 주변에 도달했다.
“알 수 있다며?”
분명 피와 광기, 비명이 난무할 줄 알았던 거리는 생각 외로 조용했다.
황태자의 장담과는 다른 풍경에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
“으어억!”
설핏 들린 경악에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저기구나.”
단번에 황태자의 등장을 알아챘다.
그럴 만도 했다.
황가 의전 차량, 주변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우르르 따라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는 꼴이 아마 공단 사람들 아닌가 싶긴 한데.
왜 저들을 저리 주렁주렁 매달고 왔단 말인가?
생경한 풍경에 상업 지구, 대로에 가득한 사람들과 가게 주인들이 기웃기웃 구경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천천히 나아가던 차량이 우뚝 멈추어 섰다.
기묘한 침묵이 길거리에 차올랐다.
곧.
“전하? 어어? 진짜요?”
차량에서 내리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안드레와 바이올렛.
당혹감이 가득한 것을 보니 황자가 또 괴상한 명령을 내린 모양.
저 자리에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감상도 잠시.
정작 황태자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차와 직선으로 놓여 있는 대로 끝.
“어? 저 건물은?”
자그마치 10층짜리 복합 건물이 자리했다.
사치품 가득한 상업지구 대로 중에도 각종 명품과 고급품들이 가장 가득한 곳.
플라워 밸리 상업 지구에서도 꽤 유명한 종합 상가 건물, 누군가는 모든 게 있다 하여 백화점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야말로 허락받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남들은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가격의 물건들을 거래하는 곳.
그러나 살라스에겐 건물이 시사하는 의미보다도.
“아멜리아. 그 불여시 소유일 텐데?”
건물의 소유주가 중요했다.
4황녀가 직접 지시하여 만든 상업 지구의 명물이자 그녀의 돈줄이기도 한 장소.
그녀를 따르는 세력들이 저들이 가진 가장 귀중한 것들을 진상하는 이유.
4황녀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 위해서였기도 하나 실제로는 백화점에서 팔아먹기 위해.
지난번 북부에 간섭하려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북부의 특산물인 백설수정과 예티의 털을 확보하려는 심산이었겠지.
저 미친 황태자는 당연히 혼쭐을 내주었을 테고.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또 짐작 가는 점 한 가지.
“저긴 황녀의 돈줄 아닙니까? 왜 저기로 가는 걸까요?”
“황태자가 되셨으니 계승권 싸움도 끝난 것 아닙니까. 세력 다툼인가요.”
“세력 다툼? 세력 따위 신경 쓸 위인이 아니야. 아멜리아가 예전부터 밤하늘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있었지.”
“뭐, 소문이라기보단 사실이죠. 모두가 쉬쉬하는 사실.”
“저 녀석은 쉬쉬하는 성격이 아니다. 직접 깨부수는 편이지.”
“직접 징치라도 하려는 걸까요?”
“징치? 징치 정도면 다행이게. 놈은 작정한 거다. 저건 선전포고야.”
“선전포고요? 밤하늘을 사들인다는 이유 때문에요? 고작 그거 때문에?”
의아함이 가득한 마법사들의 얼굴을 보며 살라스가 입가에 조소를 띄워 올렸다.
“고작이라… 고작이라 넘기기엔 너무 큰 피해니까, 제국에. 그래서-.”
악마를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겠으나 그는 경험해 보았다.
서부에서 보았던 그 지독한 풍경.
분명 밤하늘 또한 악마의 부산물이라 하였다.
황태자는 제국에 해가 되는 이라면, 또한 악마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이라면.
그것이 설령 황녀라 할지라도.
“죽이려는 거다.”
반드시 죽이리라.
녀석이 왜 자신을 비롯하여 마법사들을 불렀는지 알겠다.
“곧 커다란 폭발이 있을 거다. 주변 건물들을 보호하고 모두 진화를 준비하도록.”
살라스의 명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우르르르르!
황태자가 탄 차가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얼핏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아르한의 입가엔 평소 보던 그 미소가 걸려 있었고.
이윽고, 땅에 짙은 자국을 남기며 차가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어어어? 어어어!”
“어어? 달리는데? 어어! 저러다 부딪힌다!”
땅에 모여 있는 장인들도 지붕 곳곳에 자리를 잡은 마법사들도 모두 같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 벌어지는데 뭔지는 모르겠는 상태.
물론.
“차가 너무 자주 망가진다고 뭐라 할 거 같은데요.”
“어쩔 수 없죠. 전하께서 하신 일이니 감히 뭐라 할까요.”
안드레와 바이올렛은 이제는 적응되었다는 듯 황태자의 광기를 지켜만 볼 뿐.
아니 적응된 척하는 거지 사실 떨리는 손과 불안한 눈동자를 감추진 못했고.
“어휴… 저 돌아 버린 놈.”
살라스 또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 하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아까 철괴에 부딪히는 황태자를 보았다면 놀람이 덜했을까.
철괴보단 건물이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이윽고.
와장창!
황태자가 탄 차가 백화점의 정문을 부수며 진입.
안에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이 익숙했고.
곧 퍼펑- 굉음과 함께 차가 터졌다.
헌데 피어오르는 불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화재가 번지는 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한 법이건만.
폭발과 동시에 건물 전체를 휘감은 불에.
“저건! 마법이 아니구나?”
“신비다!”
“진정 신비란 말인가?”
마법사들이 소란을 떨었고.
장인들은 안에 담긴 물건들의 가치를 알기에 경악했다.
개중엔 자신들의 노고를 착취하는 백화점의 행태에 불만을 품은 이들도 있었기에 차라리 황태자의 행동에 시원함을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상업 지구에 화재 발생!”
“시민들 대피시켜!”
“피해자는!”
상업 지구에 존재하는 가게 중 가장 거대한 위세를 자랑하는 백화점이 타오르는 중.
아니, 4황녀를 상징하는 건물이 타오르는 장면에.
플라워 밸리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곳곳에서 화재 경보가 울렸고.
건물 안에 있던 귀족과 직원들이 다급히 뛰쳐나왔다.
다행히 모두가 멀쩡했다.
진짜 불이 아닌 황태자가 피워 낸 신비여서 그러하겠지.
번지는 노을, 타오르는 10층짜리 건물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고.
곧 출동한 소방 마법사들이 물을 쏘아 냈으나 불은 줄어들지 않았고.
마법사들과 경비들이 처음 겪는 혼란에 어찌할 줄 몰라 우왕좌왕할 때.
“어쩐 일들인가?”
건물의 가장 높은 곳, 이빨이 비죽비죽한 거검을 든 황태자가 불을 두른 채 그들을 굽어보며 물었다.
분명 다급한 상황임에도 몸에 두른 옷과 태연한 표정엔 그을음 하나 없었다.
역류하는 바람에 휩쓸린 황태자의 백금발 아래, 불을 등진 진홍색 눈동자가 마치 맹수와 같아 자리에 선 자들이 침을 꼴딱꼴딱 삼켰고.
“왜 왔느냐 물었는데?”
재차 떨어진 물음에.
“어, 어째서 이리 불을 일으키셨나이까. 상업 지구에 사람이 많습니다. 위험하니 내려오소서.”
그나마 가장 직위가 높은 자가 사정했으나.
“싫다.”
패악스러운 황태자는 단번에 그의 부탁을 잘라내었다.
그리고는.
“황태자가 다른 황손의 기강을 잡는 게 너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가?”
삼엄한 불을 휘날리며 모여든 모두에게 물었다.
더 새빨간 불에 놀란 노을은 이미 얼굴을 감춘 채 빼꼼 눈치를 살필 뿐.
황태자가 두른 그림자와 위에 어린 빛무리가 초저녁 하늘보다 깊었고 주변에 두른 불이 더욱 신묘한 색으로 모두의 눈을 홀렸다.
어둡게 내려앉은 날카로운 콧대와 절벽처럼 날카롭게 떨어지는 턱선을 간지럽히는 순결한 백금발이 어떤 보름달보다 곱게 흩날렸다.
어느새 주변엔 공단의 장인, 대도서관의 마법사들을 비롯하여 플라워 밸리의 각 세력들의 눈이 즐비했다.
그런 그들을 조롱하듯 비웃음을 피워올린 황태자가.
“명확히 알아 두어라. 허튼 꿈을 꾸는 놈들아. 너희들이 제국을 이끈다 착각하지 마라. 제국이 없으면 너희도 없다. 땅에서 발을 떼어 낸 채 썩어빠진 정신으로 검은 하늘을 보아 봤자 보이는 것은-.”
말을 맺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거검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모조리 허상이다.”
검은 그림자를 거검에 둘러 그대로 건물을 베어 버렸다.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단칼에.
와르르 무너지는 백화점을 불로 태웠고 광염으로 분쇄하였으며 그림자로 싸그리 먹어 치웠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탑이.
단번에 사라졌다.
“불만이 있는 자는 나아오라. 내 직접 무너뜨려 주지.”
황태자가 거검을 겨누며 모두를 협박하니.
그래, 이제야 폭군의 자질이 플라워 밸리에 왔음을 모두가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