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이번엔 낚아야지
숫자는 개인의 강함을 압도한다.
흔한 논리.
실제로 전쟁에선 숫자가 강함을 대변하기도 한다.
병력의 숫자가 두 배라면 실질적 전투에서 느껴지는 체감은 두 배 그 이상.
더하기의 개념이 아닌 곱하기의 개념.
두 배의 전력 차이는 네 배의 무력 차이를 낫는다.
더군다나 일 대 다수라면 실질적으로 이기는 것이 불가능.
상상 속에서야 흔히 술자리에서 떠드는 17 대 1의 전설을 쉽게 재현하겠으나.
삶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대부분 홀로 맞서는 자들은 숫자에 질려, 여럿이 뭉친 자들은 숫자에 힘입어.
개인 간의 무력을 뒤엎는 일이 종종 있다.
가령 오크 수십이 오우거 하나를 잡는 풍경처럼.
삭막한 겨울에는 그런 일이 종종 벌어졌다.
먹을 것 없는 환경, 굶주린 오우거와 오크 무리가 만났을 때.
보통이라면 오크들이 겁을 먹고 줄행랑치겠지만.
만일 그들 또한 더는 먹을 게 없다면?
그때부턴 서로 죽이는 싸움이 벌어진다.
종종 오크들이 오우거의 시체와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들고 부족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학자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죽어 버린 오크들의 시체 또한 일용할 양식이 되니까.
이렇듯 절대적인 것은 없다.
숫자를 압도하는 무력도 때론 뒤집히는 법.
헌데 지금 보이는 풍경은 좀 달랐다.
황태자가 손에는 울어대는 거검, 뒤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배경으로.
“뭐야. 아무도 없나?”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주변에 선 자들을 쓸어 보았으나.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지금 몰려든 이들의 숫자는 수백.
개중에는 플라워 밸리를 지키는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있었으며.
“이, 이게 지금 무슨!”
4황녀를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황태자는 상업 지구 가득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에도 주눅 들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저 고고하고 당당하게 살기를 흩뿌리며 모두를 노려볼 뿐.
개인 하나가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때론 지닌 전력을 압도하는 것들이 있다.
사기, 지형, 순수 전투력, 전략 등을 넘어 어떤 절대적인 가치로 전력의 틈을 메꾸어 버리는.
감히 반항을 생각지도 못하게 하는 절대적인 무엇.
그런 자들을 세상은 소드마스터, 대마법사 등으로 불러왔고.
지금 황태자가 뿜어내는 기세 또한 그러했다.
고귀함인지, 아니면 패악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품은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히 누구도 그의 뜻에 반하려는 자가 없었다.
지위를 넘어선 무엇이 황태자에겐 있었고 자리에 있는 자들이 본능적으로 이를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광기일지도 모를 일.
오우거와 오크의 격차 정도가 아닌, 과장을 보태서 드래곤과 오크가 맞선다면 이러할까.
그래도 개중엔 덤비진 못해도 직언할 줄 아는 이가 있었고.
“어찌 이리 패악스러운 일을 저지르셨단 말입니까?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 번의 부덕함이 지금껏 이룬 공을 무색하게 할 수도 있나이다.”
어느 학자의 조언에.
“걱정해 주는 건 고맙다만, 늙은 학자.”
황태자가 비웃음을 유지한 채로 뻔뻔히 답했다.
“한 가지 묻도록 하지. 남들의 시선을 걱정하여 제 몸에 가득 묻은 똥을 치워 내지 않는다면 그만한 병신이 있을까. 남들의 눈만 가리면 주변 가득한 오물이 저절로 사라진다던가?”
“…네?”
“그러니까 개소리하지 말란 소리다. 한 번의 부덕으로 모든 공을 무색하게 해? 미친 소리.”
모두를 쏘아보는 시선엔 한점의 호의도 없다.
주변에 선 이들이 날카로운 광기를 이겨내지 못하곤 분분히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내리깔았다.
늙은 학자 또한 황태자의 말을 기다릴 뿐.
“쓸데없는 위신과 남들의 시선에 갇혀 사느니 죽겠다. 숨통을 조이는 것들을 끊어 내겠다. 그러니 여기 모인 너희가 내 말을 전해라. 그딴 쓸데없는 것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죽는다고. 내가 직접 죽이겠다고. 그러니 가서 잠도 자지 말고 고민해라. 너희들의 죄가 무엇인지.”
황태자의 삼엄한 경고가 흐드러지는 불꽃과 그림자를 배경으로 모두의 얼굴을 붉고 검게 물들였다.
삼엄한 배경 속, 새빨갛게 빛나는 황태자의 눈동자를 보며 느꼈다.
진심이구나.
지금 저 사람이 하는 말 모두가 진심이구나.
“자, 환영식은 끝났다. 다들 꺼지도록.”
황태자의 차가운 축객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리에 있던 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황태자가 정확히 찌른 플라워 밸리의 이상한 풍습에 대해 의문을 품은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황태자의 방만함과 자신들이 쌓아 놓은 공고한 성이 모욕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듯했다.
물론 패악하고 오만한 황태자는 그들의 의문과 분노를 모조리 비웃을 뿐.
붉게 타올랐던 노을은 완전히 사위어 침침한 밤이 찾아왔고.
황태자가 베고 태워 버린, 방금까지만 해도 상업 지구에서 가장 비싼 것들만이 그득했던 백화점은 한낱 재로 변해 밤을 밝혔다.
이젠 그마저도 거뭇한 잔해만이 남아 타닥타닥 미열과 잔불만을 남겨 두었을 뿐.
모두 떠나간 자리, 홀로 남아 자신이 쓰러뜨린 괴물의 최후를 지키듯 물끄러미 꺼져 가는 불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얼굴이 유독 매캐했다.
안드레와 바이올렛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래. 전하를 모실 때 간혹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는 듯한 표정과 분위기.
이윽고.
“이리 덧없는 것이지.”
황태자가 알 수 없는 감상을 뱉고는 자신이 무너뜨린 잔해에서 시선을 뗐다.
그가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주변에 대기하던 화재 진압반이 잔해에 남은 불을 끄러 다가갔으나.
“어? 없습니다.”
“남은 불이 없습니다.”
“여기도 모두 꺼졌습니다.”
이미 잔해에 붙어 있던 불은 황태자가 회수한 뒤.
어느 곳에도 번지지 않고 딱 4황녀의 건물만을 태운 채 사라진 불에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는 동안.
“그래, 방구석 마법사들의 감상은 어떠했지?”
황태자가 살라스 주위에 늘어선 마법사들을 보며 물었다.
어느새 올라있던 지붕에서 내려온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길 잠시.
“그 불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물음에 물음으로 되물었다.
역시 호기심에 미친 마법사다운 행동.
황태자 또한.
“이름은?”
“신드로입니다. 살라스 전하를 도와 뇌격 마법을 연구 중입니다.”
“앞서 보았던 놈들보다 한결 낫군. 답을 아직 못 들었다. 감상은?”
사회성이라면 그들 못지않게 결여되어 있었기에 물러서지 않았고.
“으음, 솔직히 말씀드립니까?”
“최대한 솔직히 답해라.”
“그렇다면 솔직히 답하겠습니다.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하니 평가가 불가합니다. 그뿐입니다. 처음 보는 것에 함부로 말을 얹지 않은 성격이라서요.”
“다음, 자네는?”
“으음, 저는 말을 얹는 성격입니다. 제가 보기엔 마법도 아닌 것이, 심지어 주술도 아닌 것이 참으로 요상한 불이었습니다. 근데 전하랑 잘 어울립니다. 그게 말로만 듣던 신비인가 싶군요. 참 제 이름은 하킨입니다.”
“저도! 한마디 보태겠습니다! 그 불! 제 불보다 강합니다! 강하고 굳세고 이지러집니다! 그,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야말로-!”
죽여주는 불이지 말입니다!
한 마법사가 붉어진 얼굴로 황태자의 불을 칭송하니.
다른 마법사들이 저 불에 빠진 미친놈이 또 시작이구나 혀를 차는 동안.
황태자는 오히려 즐거운 듯 칭송을 받으며.
“이름.”
“크로아! 크로아! 불은 예술이고 폭발은 천상의 하모니! 그리 믿습니다!”
그의 이름을 듣고는.
“이리 즐거운 자들이 곁에 많으니 황자 노릇 하기가 싫었겠군. 안 그래 살라스?”
묻자 살라스가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뭐 미친 인간들이 맞긴 하지, 너만 하겠냐마는.
그의 솔직한 고백에 한 차례 크게 웃은 황태자가.
“서로 인사들 하도록 한쪽은 기술만 있는 공돌이들, 한쪽은 골방에서 꿈만 꾸는 방구석 마법사들이다.”
자신의 앞,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이들을 서로 소개했다.
소개 문구가 이상스럽긴 했으나 어차피 그들 또한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라 그러려니 하는 모양.
마치 경기라도 펼치듯, 상업지구 대로에서 서로 악수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심지어 대도서관 소속 마법사들은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운지 눈길을 피하며 고개만 숙이는 자들이 있을 정도.
그러나 장인들 또한 외골수가 많은 편이라 오히려 동질감을 느꼈다.
뭔가 두 집단의 성격이 완전히 다른데 닮았다.
서로 내심 밀려오는 동질감을 애써 외면하며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동안.
“이제부터는 둘이 합심하여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할 거야. 반론은 없다. 황태자의 명이니 따르도록. 살라딘 네가 이들을 이끌어라. 서부에서 살라딘이 얻은 깨달음이 크니 다들 그에게 질문하도록.”
“어? 어어?”
그리 확답을 내린 황태자가 휘적휘적 그들 사이를 지나쳤고 얼떨결에 사람들을 이끄는 직책을 맡은 살라스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잘 부탁드립니다, 살라딘 마법사님.”
“아니, 잠깐.”
“화이팅입니다, 살라딘 마법사님.”
“아니, 그러니까.”
“살라딘이란 이름 잘 어울리네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공단 책임자입니다, 살라딘 마법사님.”
“얻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바꾼다니요. 당장 알려 주십시오!”
“잠깐! 잠깐만! 미친놈들아, 그만!”
어느새 몰려든 마법사들과 공단 관계자들의 아우성 속.
살라스가 몸서리치며 그들을 밀어내려 했으나.
이미 황태자의 명은 떨어진 뒤.
더군다나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 쉽게 물러날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형의 곤란한 꼴을 보며 황태자가 짙게 웃었다.
남에게 일 맡기는 게 제일 즐겁다.
* * *
대도서관, 보통 마법을 오래 연구하는 마법에 미친 자들이 가득하다는 곳.
마법에 대한 지식이 가장 방대하다고도 일컬어지는 집단.
처음 그들을 맞이했을 때 내심 놀람을 삼켰다.
아는 이름들이었으니까.
신드로. 뇌격 속성 마법의 대가, 동남부 공작가의 장자 백뢰와 비견되던 마법사.
나중엔 반란군의 중요 간부 중 하나가 되었지.
저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왔나 했더니 대도서관 깊은 곳에서 마법 연구를 하며 지냈구나.
다음으로 하킨이란 이름을 들은 곳은 북부가 패망하고 난 뒤, 북부 재건을 목표로 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지.
별명은 방벽, 방어 마법만을 연구한 북부 출신 마법사로 비원 또한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벽을 만들어 북부를 지키는 것.
그러나 지킬 땅이 사라졌고 미쳐 버린 마법사는 눈보라 속에서 한없이 헤매었다.
마지막으로 폭탄마 크로아.
놈은 앞선 수식어 하나로 충분했다.
제국 최악의 범죄자이자 나에겐 최고의 조력자였던 놈.
죽어야 하는 놈들을 어찌 그리 잘 죽여 대는지, 놈의 폭발과 불이 한 번 휩쓸고 나면 제국이 조금은 깨끗해졌었지.
결국은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을 이들의 운명이.
[대상들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그들의 앞길에 예비되었던 비극적 운명들이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품습니다!]
이전과 달라졌다.
나를 향해 뇌전을 뿜어냈을 반역자는 반역의 대상을 잃었고, 북부를 찾으러 짙은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던 사내는 여전히 처음 꿈을 간직했다.
불에 미쳐 살인과 혐오로 제 인생을 태웠던 미치광이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불을 발견하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이전 당연했던 비극적 운명들이 사라지고 새롭게 피어나는 운명들이 살가웠다.
특히.
[대상들의 운명을 파악합니다. 서로의 비원이 맞물려 새로운 운명들을 싹틔웁니다. 살라스의 운명 영감, 깨달음 마도공학, 위대한 발명, 시대 변혁이 그들의 운명을 앞에서 이끕니다!]
공단 장인들과 골방 마법사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는 순간, 마치 속성이 다른 마나들이 맞붙듯 새로운 운명들이 타타탁 스파크를 튀겼다.
기술이 있으나 지식이 없으니 열매를 맺기가 어려웠고, 지식은 있으나 실행하지 않으니 결과가 없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자들이 만났고, 명확한 비원을 가슴 속에 품은 자가 이들을 이끌어 줄 예정.
[살라스의 중요 운명 대마법사가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갑니다. 커진 운명이 다른 이들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원래 제 혼자만을 생각했던 이기적인 황자가 이제는 남들을 품을 줄도 알게 된 모양.
마음에 들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그 거대한 비원.
마유와는 다른, 악마의 기름이 아닌 새로운 동력원을 만들겠다는 꿈이 저들과 함께라면 이루어질지도 모르지.
아니 이루게 할 것이다.
저들이 피운 꽃이 만나 이룰 변화는 분명 제국을 살릴 열매가 되리라.
그렇게 변해 가는 운명에 만족하다 문득.
“살라딘! 장장 튀어와라!”
심술이 나 살라스를 거칠게 불렀다.
저런 재미있는 놈들을 데리고 있었으니 황자 할 맛이 났겠는가.
살라스 이 고얀 놈이.
생각해 보자니 괘씸했다.
저런 좋은 재원들을 옆에 끼고 도는 바람에 전생엔 도움 한 자락 받지 못했다.
난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아, 심지어 날 죽이려고까지 했었지?
“살라딘! 이 고얀 마법사야! 당장 오라니까!”
“아니 왜 또? 왜 또 그러는데?”
내 신경질적인 부름에 살라스가 투덜거리면서도 참 성실하게 달려왔다.
그런 그를 보며 입술을 뒤틀었고.
“부른다고 바로 오는군.”
“…….”
“지나가던 강아지도 이렇게 성실하게 오진 않을 거다.”
“……?”
“이젠 아주 황자로서의 품위도 잊고선 잘 달려-.”
“아니, 뭐 때문에 짜증 나서 지랄인데? 개소리 그만하고 빨리 용건 이야기나 해. 미친놈이 진짜.”
놈이 화를 내고 나서야 뒤틀렸던 속이 진정되었다.
혼자만 행복하게 둘 순 없지.
“내가 왜 4황녀의 소유를 태웠는지 아나?”
“그걸 어떻게 알까. 그냥 평소처럼 또 저러는구나 싶었지.”
“진심이라면 실망이다.”
“…빌어먹을.”
“밤하늘. 알고 있지?”
“그래. 아멜리아 그것이 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밤하늘을 팔아먹는다는 사실은 유명하니까.”
“죽여야겠지?”
“죽여야지. 언젠간. 지금은 못 죽여. 여기에 없다.”
살라스의 투덜거림에 짙게 웃고는 뒤에선 마법사들을 향해 물었다.
“혹여 여기서 밤하늘을 경험해 본 자가 있나?”
처벌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살라스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으나.
“명정한 이성으로도 찾아지지 않는 마법의 비밀을 어찌 그런 헛된 것으로 채우겠습니까.”
“그런 것에 의지하던 장인들은 금세 손을 떨어 쫓겨났습니다.”
다행히 이들 중엔 밤하늘과 같은 헛된 것에 빠진 이는 없었다.
하여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여기에 없는 건 문제가 아니다. 끌어내면 되니까. 아멜리아뿐만 아니라 밤하늘에 관련된 자 모두를.”
“어떻게? 일일이 결투 서신이라도 보내게?”
“살라딘, 주변을 둘러봐라. 메케하게 피어난 연기와 어둑한 하늘 뒤 얼핏 비치는 이리들의 눈동자가 느껴지지 않나.”
“…느껴진다.”
“이 많은 눈과 귀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겠나. 잘 생각해 봐라. 오늘 네가 걸은 거리를. 무언가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표정을 본 적 있나?”
“빌어먹을.”
오늘따라 살라스가 거친 욕을 자주 뱉었다.
그가 보기에도 이상한 것들이 가득하였겠지.
나보다도 더 확실히 느꼈을 거다.
오랜 기간 이곳에 살았으니까.
살라스가 고백하듯 자신이 본 위화감을 늘어놓았다.
“풀린 동공과 어색한 미소를 보며 느끼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되겠지.”
“그래, 네가 지내던 계곡에 혼몽함이 내려앉았더군. 많은 이가 그러했어.”
“왜지.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어. 내가 서부로 갈 때까지만 해도.”
“네가 없는 사이에 플라워 밸리를 손아귀에 넣는 게 쉬웠겠지.”
주변 느껴지는 은밀한 시선들에 미소를 피워올리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전생엔 살라스가 있었기에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면 지금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밤하늘의 전파가 전생보다 훨씬 빨랐던 이유.
어디선가 풍기는 익숙한 악취가 콧속을 찔러 왔다.
“여긴 이미 흑해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잘 되었어. 덕분에 쉽게 끌어낼 수 있겠군.”
어쩌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본래 위기감 없는 위기야말로 진정한 위기니까.
꽃이 가득한 협곡엔 이미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독이 가득하니.
“항해를 준비할까요.”
바이올렛의 물음에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지식과 문명이 물결처럼 이는 곳, 단순히 건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니, 이번엔 낚아야지. 이번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참이다.”
이번엔 깊은 꽃밭 속에 숨은 악마들과 이리들을 건져 내야 하리라.
차라리 잘되었다.
이른 혼란 덕에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되었으니.
마침.
“저은하-! 저은하!”
월척이 펄떡이는 소리에 입가에 선한 미소를 지었고.
저 멀리 골목 어둑한 곳에서부터.
황소와도 같은 덩치로 숨을 씩씩거리던 자가.
“이 배신자!”
알 수 없는 고함과 함께 달려 나왔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놈의 우직한 몸통박치기를 우아하게 빗겨 내며.
“오랜만의 인사치곤 과격하구나.”
거검의 옆면으로 달려들던 놈의 몸을 후려쳤다.
뻐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멀리멀리 날아가는 형체를 알아본.
“베론?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안드레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과거 하수구 구역에서 만났던 고아, 미친 황소 베론.
뒷골목을 접수하는 대신 고아원을 세워 주기로 약속했었지.
오랜만에 만난 덩치 큰 동생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며 안드레가.
“너 왜 이렇게 커졌냐?”
뭐 잘못 먹었나?
실없는 안부 인사를 전했고.
“어휴, 이 인간아. 그게 할 말이냐?”
살라스의 타박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쪽을 보지 않았다.
내가 하는 미친 짓은 괜찮지만 남이 하는 미친 짓은 부끄러운 법.
나만 이상해? 나만 미쳤어? 안드레의 혼잣말이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