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구원과 심판
갈런이 플라워 밸리에 발령을 받은 건 꽤 오래전.
황태자가 황자이던 시절.
그가 막 하수구 구역의 일을 해결하고 북부로 향했다는 소문이 돌 때 즈음이었다.
“이걸 좌천이라 해야 할지, 승진이라 해야 할지.”
전에는 조사관이었다면 지금은 조사반장을 맡아 더 커다란 권한을 얻었으나.
“팀원 없는 반장이라. 이거 엉망이로구만.”
정작 플라워 밸리에 도착하여 보니 그가 맡은 조사반은 막 신설된 곳으로 배정된 반원 하나 없었고.
일할 사무실마저 가장 구석, 외로이 놓여 있는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이름은 불법 약물 조사반.
꽤 무거운 중책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말려 죽이려는 거죠.”
갈런을 밀어내려는 속셈.
특히 지난 밤하늘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충분한 명분마저 있었다.
중요한 중책을 맡겨 놓고선 어떤 지원도 해 주지 않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거나 실적이 없어 점차 잊혀 가기 마련.
흔히 직접 건드리긴 껄끄럽고 놔두기엔 신경 쓰이는 자들에게 부리는 술수.
나름 짬밥을 먹은 갈런이지만 연고도 없고 지원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선 답이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반드시 돌아갈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 겁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늦은 밤, 싸구려 위스키를 앞둔 채 뱉은 결심.
“전하께서 보여 주신 믿음에 반드시 보답할 겁니다.”
취기가 올랐는지 붉어진 얼굴로 당시를 떠올렸다.
처음 경비대 조사관이 되었을 때 품었던 뜻.
범죄자들을 잡아들여 제국의 정의를 세우리라는 결심은 모조리 부정당했고.
깨지고 깨져 하수구 구역으로 좌천까지 당한 후.
처음 열정은 잊은 채 그냥저냥 흘러가던 대로 살아가던 시절.
아르한이 앞에 나타났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모두를 태워 버렸지.
그가 피워 낸 불은 식었던 갈런의 마음에도 새로운 열정으로 옮겨붙었고.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던 때에 그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다.
모두가 그의 길을 막을 때 황자, 지금의 황태자는 보여 주었다.
어떻게 길을 뚫어야 하는지.
이후 들려온 소식들.
북부와 서부를 구원하고 더 나아가 황태자가 되었단 소식에 얼마나 감격했던가.
변하지 않고 여전히 타오르고 계시구나.
누구보다 밝고 뜨겁게.
그런 그의 감동에.
“그리 대단한 분이시라니 한 번 뵐 것을 그랬군.”
달린도 대체 황태자가 어떤 분일지 궁금해했을 정도.
“그래도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셔서.”
늙은 마법사 또한 다시 열정을 찾은 갈런을 굳이 돕겠다 플라워 밸리까지 왔다.
하루하루가 고난스러웠다.
분명 밤하늘을 들이켜는 건 맞는데 증거가 없었다.
작은 꼬리라도 하나 잡으면 마탑과 학파 심지어 아카데미에서까지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던 중 베론을 만났고.
결정적인 단서, 아이들의 실종을 파악.
우연한 계기로 플라워 밸리 쓰레기장 깊은 곳에서 베론의 얼굴을 아는 아이를 찾아냈고.
공허한 눈동자, 텅 비어 버린 얼굴이 되어 버린 고아가 뱉은 전말은 끔찍했다.
그때부터 갈런은 미친 듯이 연기와도 같은 흔적을 쫓아 나갔다.
누구도 믿지 않았다.
플라워 밸리 전체를 넘어 황손까지 닿아 있으니.
예전이라면 감당 못 할 일이라 고개를 저었겠으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보았지 않은가. 꺼지지 않는 불꽃을.
그렇게 지독한 추격 끝, 다다른 곳은 플라워 밸리에서도 가장 크다는 정신 수양원.
남부 귀족들과 학파의 수장들, 아카데미 교수들을 비롯하여 플라워 밸리 고위직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유명지.
그뿐만 아니라 수도와 각 지역 귀족들이 찾아올 정도.
만일 드나드는 이들 모두가 마약을 했다면, 플라워 밸리는 물론 제국 전체가 흔들릴지도 모른다.
저곳을 건드릴 수나 있을까, 어쩌면 잘못 찾은 건 아닐까.
잠깐의 자기 합리화의 결말은.
“아니, 맞아.”
확신.
지난 세월 닦아 온 직감이 알려 주었다.
이곳이 맞다고.
그렇게 불안감을 털어 내며 들어서는 순간.
“어서 오십시오.”
“…이런.”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맞이하는 행복한 얼굴을 한 자들을 보며 난색을 표했다.
안으로 못 들어가게 철저히 막아 놓은 상태.
분명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건만, 아니 달린에게만 말해 두었건만.
모든 동선을 추적당하고 있던 것일까.
문득 뒤를 돌아보니 출입구 뒤편에도 같은 얼굴을 한 자가 즐비했다.
빠져나가기를 포기한 갈런이 담배를 물고는.
“후우, 시팔 새끼들 언제부터였어? 모두가 이딴 개짓거리에 동참한 게.”
연기와 함께 당당히 욕을 뇌까렸고.
“당신 또한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겁니다.”
행복의 가면을 뒤집어쓴 자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후 며칠간 협박과 회유, 마약을 강제 주입당했고.
그래도 소용이 없자.
갖은 고문을 통해 협력자 베론과 달린을 이곳에 부르라 강요했다.
하지만 굽히지 않았다.
깊은 지하,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 맞은편.
“…….”
“흐으으…….”
“으으, 으으으.”
공허한 얼굴로 허공을 더듬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굽힐 수 없었다.
처음엔 공포로 몸부림치던 아이들이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갈수록 무감정하게 변해 갔다.
강제로 상상과 행복을 빼앗긴 결과.
아이들을 보다 못한 갈런이 눈을 감을 때.
“분명 구하러 와 줄 거야.”
한 아이가 사위어 가는 얼굴, 타고 남은 재와 같은 표정 한구석에 작은 불씨를 보관하듯 소중히 읊조렸다.
“분명 구하러 와 주실 거야.”
아이의 외로운 속삭임에, 갈런이 자신이 여기 있노라고 분명 누군가 와 줄 것이라고 소리 질렀으나.
아이들은 그가 하는 말을, 행동을 보지 못했다.
격리된 채 말라 죽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봐야 할 뿐.
어떤 고문보다도 고통스러운 풍경 속.
“분명 베론 형이 구하러 올 거야.”
“형이 그랬어.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를 돌봐 주신다고. 그러니까 분명, 분명 구하러 올 거야.”
몇몇 아이가 끝까지 희망을 수군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마저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공허한 얼굴로 오늘도 빼앗긴 감정을 곱씹을 뿐.
새로 들어온 아이들도 마찬가지.
그중에서 감정이 아예 탈색된 아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마다 아이들과 갈런이 마른 눈물을 흘렸다.
벌써 며칠이 흘렀고 어느새 처음 지하에 갇혔던 날 보았던 아이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단 한 명.
베론의 이름을 언급하며 끝까지 작은 불씨를 지켜왔던 아이만은 지금껏 남았다.
“…….”
갈런이 있는 쪽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모습.
갈런이 피를 토하면서도 억지로 미소 지었다.
보이지 않아도 이렇게나마 아이를 위로하고 싶어서.
그때, 아이가 그에게 흐릿한 미소로 답했다.
보이는구나.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이는구나.
다급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뻑뻑한 머리를 돌려 보았으나.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미안하구나.
그래도 위로가 되었는지 아이가 조금 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생명을 다해 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웠지만.
그때,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더니.
“나와라. 너를 찾는 분들이 유독 많군.”
아이들을 관리하는 사내가 들어와 갈런과 미소로 대화하던 아이를 잡아 일으키곤.
“너의 상상이 어지간히 달콤한 모양이야.”
비릿하게 웃었다.
“이 개새끼야! 그만해! 그만하라고! 제발!”
끌려 나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갈런이 절규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지 못하는 천장,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또 다른 즐거움이 어렸다.
자리에 모인 그들에겐 모든 비극과 아픔이 한낮 유희 거리에 불과했다.
때로 과한 도덕적 과시와 지식의 범람 뒤엔 그 무엇보다 추악한 면이 자리 잡기도 하는 법.
지금 갈런과 아이들이 놓인 장소가 그러했고.
그때, 더럽고 너저분한 것들을 덮은 모든 가림막이 부서지며 무엇보다 뜨거운 불이 등장했다.
구원자였다.
* * *
아이는 기억했다.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불을.
고작 10살, 그러나 누구보다 굴곡진 인생이었다.
수도 뒷골목, 하수구에서도 가장 더러운 구석에서 쥐새끼처럼 쓰레기로 삶을 연명하던 때.
하필 마약을 만드는 공장에 잡혀가 죽지도 못하고 일만 했다.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며 애원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이 서글픈 인생 좀 끝내 달라고.
그런데 고약한 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화재.
그리 무섭던 왈패들을 죽이며 등장한 건 백금발의 고귀한 자.
그의 진홍색 눈동자와 주변에 피어오른 깨끗한 불이 마치 구원과도 같았고.
그렇게 새로운 삶을 찾았다.
이렇게 더욱 끔찍한 곳에 갇혔던 와중에도.
분명 구하러 올 것이라고, 그 아름다운 불을 품은 분께선 구하러 와 주실 거라고 그리 믿었다.
어쩌면 종교와도 같았다.
맹목적인 믿음.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모조리 비극으로 점철된 삶 중 단 한 번의 구원이 아이의 버팀목이었다.
“…….”
허나 이번만큼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고 많은 감정을 빼앗겼다.
정신은 버텨도 몸이 버티지 못한다.
점점 꺼져 가는 불씨처럼 아이의 눈동자에 맺힌 희망이 깜빡깜빡 빛을 잃어 갔고.
이내 도착한 지하 깊은 곳에 마련된 밀실.
햇볕 하나 없는 어둑한 곳, 행복한 얼굴을 한 이들이 아이를 보며 눈을 번들거렸다.
가장 귀중한 보석을 보듯, 진미를 음미하듯 눈에 어린 탐욕과 기쁨이 지저분했다.
이내 모두가 머리에 무엇을 썼고.
중앙 높은 곳엔 아이가 누웠다.
마치 제단 위에 어린 생명을 놓고 드리는 제사 같기도 했다.
그리 어려운 의식은 아니었다.
방안 가득 찬 밤하늘이 곧 귀족들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코와 혈관 속에 깊이 녹아들었고.
그들의 동공이 풀어지며 깊은 어둠을 마주했다.
아, 아아, 아아아.
온몸이 부유하는 기묘한 감각.
그들이 풀어진 얼굴로 기쁨을 만끽함과 동시에.
까아아악!
아이는 고통을 내질렀다.
본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어릴 적 품었던 환상을 잃어 간다.
지식에 가로막혀 현실에 가로막혀.
고아들 또한 현실에 내던져져 환상과 꿈을 잃은 듯하지만 가슴속 품은 간절한 바람은 그 누구보다 컸다.
그중에서도 지금 제단에 누운 제물은 어떤 고아보다도 안에 품은 희망이 커 유독 달콤한 환상을 맛보여 주었다.
곧 아이의 몸속에서 뽑혀 나온 하얀 희망이 새까만 시야에 흩뿌려졌고.
그들이 꿈꾸던 환상이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펼쳐졌다.
거부가 되는 자신, 가주가 되는 자신, 세상 모든 지식을 깨달은 자신, 막혀 있던 연구의 단초를 발견한 자신을 보았다.
모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풍경.
어떤 이는 그저 꿈이 가득한 환상향을 마주하기도 했다.
인간이 꿈꾸는 모든 욕망이 이루어지는 풍경 속.
머리에 무언가를 쓴 이들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눈가에 기쁨의 눈물이 줄줄 흘렀다.
평생 충족되기 어려운 욕망들을 이곳에선 단번에 만족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업적, 쾌락을 이룬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
그게 한순간의 꿈일지라도.
그리고 그 댓가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즐거움을 느껴 보지 못한 가련한 아이는 끝없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희망과 상상력이 빠져나간 자리엔 허탈과 절망이 자리했고.
마지막 남아 있던, 가장 굳건했던 희망의 불씨마저 사그라들려 할 때.
어두컴컴한 천장이 무너졌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환한 빛이 방금까지 펼쳐졌던 환상을 우그러뜨렸고.
검게 펼쳐졌던 밤하늘을 일시에 찢어발겼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빛이 깊고 깊은 지하, 마련된 밀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미로와 같은 복도들을 넘어 아이들이 갇혀 있는 감옥까지 미쳤다.
아니, 모든 어둠과 가로막는 것을 부쉈다.
시끄러운 소란에 그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방금 전까지 환상이 가득했던 검은 밤하늘 대신 시야를 채운 것은.
불과 광휘를 두른 심판자.
아니, 황태자.
그가 한 손에는 불타오르는 거검을, 등에는 빛을 날개처럼 뿜어내며 아직도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쏘아보았다.
휘날리는 백금발과 역겨움을 담아 일그러진 눈매가 아름다웠고.
“아아, 천사이시어.”
“우리를,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모른 채 환상에 취해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향해.
황태자가.
“그래. 구원해 주마.”
죽음이라는 구원을 내리기로 결정.
그대로 놈들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했다.
데구르르 굴러떨어지는 중에도 입가엔 여전한 미소.
피와 살점, 불과 광휘가 흩날리는 지옥도.
황태자의 고귀한 자태는 벌을 내리는 심판의 천사와도 같았고, 뿜어내는 흉악함은 지옥도의 주인 같기도 했다.
이윽고.
“괜찮으냐.”
황태자가 간절히 그를 기다려 왔던 아이 옆에 내려섰다.
메마른 땅과 같은 얼굴, 황태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아이가.
“역시 오셨네요.”
마른 미소로 구원자를 맞이했고.
“기도했어요. 구해 달라고.”
매 순간 바라 마지않았던 구원을 입에 담았다.
이제야, 이제야 오셨구나.
아이의 꺼져 가는 생명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에 서글픔이 어렸다.
황제는 모든 이의 아비다.
서글프게 죽어 가는 자식의 얼굴을 마주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문득 죽어 가는 아이와 자신의 동생이 겹쳐 보임은 왜일까.
평소 패악스럽기 그지없었던 황태자가 피 묻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늦었구나, 미안하다.”
새빨간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전하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아이가 마지막 미소로 황태자의 사과에 답을 하곤 말을 멈추었다.
입가에 남은 잔숨결이 흩어지는 게 생생했다.
끝까지 마음속 끈을 놓지 않았던 아이는 그렇게 서글픈 생을 마감했고.
행복할 리 없었던 마지막,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주변 가득한 가짜 행복과는 달리 진정한 구원을 담았다.
마침내 그리 기다리던 구원을 얻어서일까.
드디어 맞이한 죽음이 기꺼웠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답에 황태자가 묵묵히 아이를 보길 잠시.
손끝에 불을 피워올리자 적염이 아이를 감쌌고.
이어 광염의 밝은 빛으로 다시 아이를 칭칭 감더니.
“아직 숨을 놓을 때가 아니다.”
황태자의 알 수 없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어억.
흩어지던 숨이 다시금 빨려 들며 아이가 깨어났다.
곧 따뜻한 불꽃이 이리저리 퍼져 나가며 생을 잃어 가던 아이들의 몸에 깃들었고.
상상과 희망을 빼앗겼던 아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되돌아왔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따뜻한 불.
모든 걸 태우고 징벌할 것만 같았는데 이런 생명도 나누어 줄 수 있었구나.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풍경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보는 베론과 안드레.
갈런을 부여잡고는 분노하는 달린을 바라보며 명을 내리니.
“여기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내 직접 이 협곡을 심판해야겠다.”
그의 눈에 흐르는 피눈물이 새빨간 분노로 가득했고.
곧 수양원 곳곳에 숨어 있던, 남의 희망을 파먹고 살았던 쥐새끼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거두었다.
플라워 밸리 전역에 짙은 피 냄새가 끼기 시작했다.
싸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황태자는 피눈물을 흘리는 심판자가 되어 걸리는 모두를 죽였고.
안드레와 베론, 달린도 망설임 없이 학살을 감행했다.
금세 폐허가 되어 버린 수양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과 흐르는 피 사이.
하도 피를 뒤집어써 벌겋게 물든 황태자가.
“집에 가 쉬고 있으려무나.”
불과 빛으로 휩싸 안은 아이들을 어디론가 쏘아 보냈다.
* * *
[적염, 광염을 뜨겁게 달궈 식어 가던 아이들의 운명을 되살립니다! 운명 죽음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모두 투자하여 적염과 광염이 담은 생명력을 끌어올립니다! 당신의 속성 급속 회복이 불에 어립니다!]
[장소의 운명 전부를 포식합니다. 죽은 대상들의 운명을 포식합니다. 얻은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 전부를 염제심결에 투자합니다]
[운명 패악과 광기가 날뜁니다. 짙은 살의가 장소를 잠식합니다]
[새로운 운명 정화가 당신의 불에 깃듭니다!]
잠시 떠오르는 운명들을 외면하며 쏘아진 빛줄기들을 바라보았다.
길잡이의 능력을 발휘해 아이들을 피신시켰다.
목적지는 안가.
거기 있는 자들이 알아서 돌보아 주리라.
비록 이전 같지는 않겠지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들의 무사함을 확인한 뒤.
“늙은이와 평민은 죽은 자들의 머리를 모으고 증거를 수습해라.”
간단한 명령을 내리고는.
“오랜만이로군.”
베론의 등에 업힌 갈런을 마주했다.
전과 달리 파리한 얼굴과 만신창이가 된 몸.
허나 눈에 담긴 뜻만은 확고했다.
“전하.”
그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고.
“감사합니다.”
감사를 전하기에 잠시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문득 감사가 참으로 무겁다는 걸 느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지금.
[잠들어 있던 악의가 피를 먹고 깨어났습니다. 오래된 악마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크기를 견주려 합니다]
[운명 배반, 환상, 죽음, 거짓, 거짓, 거짓, 거짓-]
역삼각의 눈을 가진 악마가 세로로 찢어진 눈을 떴다.
분명 사라졌을 깊은 어둠이 다시 피어났고.
둥둥둥둥.
깊은 혐오감이 북소리와 더불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