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오래된 악마
수양원 지하에 마련된 밀실과 감옥, 미로와도 같이 복잡한 복도들 아래.
더욱 깊은 토굴.
“허억, 허억-!”
한 사내가 반쯤은 기듯 달렸다.
황태자의 등장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 빨리 꼬리를 잡힐 줄은 몰랐다.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걸까.
최근 자신들을 추적하던 마법사와 고아 애송이에게 들은 것일까.
황태자의 옆에 선 그들을 보았다.
놈들과 함께 지하에 갇혀 있는 수사반장이란 놈을 찾아왔나.
수도에서 연이 있다 들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쫓겨난 것이고.
우습게 봤던 놈이 어찌어찌 수양원까지 왔을 때는 꽤 놀랐다.
물론 쉽게 당할 리는 없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가 수양원의 정체를 캐내고 또 분노하여 달려들었을까.
개중엔 플라워 밸리 고위직들도 있었고 심지어 아카데미의 학장과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모두가 인정했다.
남의 상상력을 빌려 꿈꾸는 완전무결한 미래가 달콤하단 것을.
결국 인간은 같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벽을 자랑하는 이라 해도 속에 담은 욕망은 솔직한 법.
솔직히 아쉬웠다.
“놈도 맛을 봤으면 거절하지 못했겠지.”
궁극적으로 황태자를 오염시키는 게 목적이었는데.
그래서 굳이 갈런이란 놈을 죽이지 않고 계속하여 뒤흔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마침내 황태자마저 잠식하려 했으나.
그러기엔 황태자의 성미가 너무 불같았고 잔혹했다.
설마 했는데 모두 죽여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길을 막으라 보낸 이들 또한 모조리 죽였다지.
그들의 생은 덧없이 흩어졌으나.
“덕분에 덕분에 드디어 이르렀구나.”
그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으리라.
플라워 밸리에 자욱이 피어난 피 안개와 수양원에 흐르는 피가 많았다.
비록 순결한 피는 아니었으나 황태자가 죽인 숫자가 많아 충분할 터.
수양원의 주인이자 오랫동안 악마를 섬겨온 숭배자가 깊은 토굴을 쥐새끼처럼 달리며 킥킥 웃어 댔다.
얼굴 가득 번들거리는 땀이 피어난 미소와 더불어 역겨웠다.
오랜 세월이었다.
인간의 길을 버리고 악마를 섬겨 온 지.
그래서인지 그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소악마와 비슷했다.
마침내 도착한 가장 깊은 곳에 형성된 동공.
피에 찌들어 온통 붉은색인 장소.
중심엔 지금껏 제물을 바쳐 온 제단이 놓여있었고.
근처에 다가간 그가 무언가를 만지기 시작하자.
그르르륵.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둥그런 천장이 빼꼼 열렸고.
그 사이로 질척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느리게 떨어져 내린 피가 제단과 이어졌고.
꿀꺽, 꿀꺽 제단이 더러운 이들의 피를 마구 삼켰다.
불만스러운 듯 몸을 바르르 떨자.
“죄송합니다. 깨끗한 아이들의 피가 없어 어쩔 수가 없었나이다. 지금 불을 품은 자가 오고 있으니 용서하소서.”
숭배자가 간곡한 어조로 용서를 구했고.
불을 품은 자라는 말에.
허공에 피가 아롱지며.
-불은 어떠했지.
글자를 만들어 냈다.
그 와중에도 떨어지는 피를 탐욕스럽게 삼키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붉고, 폭발하며, 빛났습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렵나이다. 사악한 것에겐 한없이 뜨거웠으며 순결한 것에겐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대상을 구별하는 불이라.
“또한 제가 듣기론 북부의 에스키모, 서부에 내린 마유를 물리쳤다 하더군요.”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것인지 제단에 잠들어 있는 악마가 더욱 빠르게 피를 집어삼켰고.
곧 제단이 실제로 심장과도 같이 움찔움찔 떨려 왔다.
드디어.
드디어 깨어나는구나.
악마 숭배자의 얼굴에 희열이 피어났다.
지금껏 섬긴 세월이 얼마인가. 바친 아이들의 심장과 피가 얼마인가.
탄생이 얼마 안 남은 시점, 순결한 피가 아닌 더러운 이들의 피를 바치는 것이 아쉽긴 했으나.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니 이해해 주시리라.
‘너희는 고작 꿈으로 이상을 일구었다면 나는 진짜를 얻을 것이다.’
충성의 결과로 얻을 부와 명예, 능력을 생각하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푸화학!
제단 가득했던 피가 역류하듯 허공으로 솟아났고 휘감기듯 피어난 피의 꽃 중앙을 찢으며.
“불을 품은 자가 나의 존재를 눈치챘구나.”
세로로 찢어진 눈 세 개가 역삼각을 이룬 얼굴.
깨달음을 상징하는 제3의 눈에 반하는 역삼각의 악마이자, 거짓의 악마. 환상과 꿈을 심어 주며 헛된 지식과 죽은 교양의 주인이라 불리는 악마가 현현했다.
고대 악마 알리굴.
놈이 깡마른 몸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 엎드린 숭배자를 살폈다.
“네가 나의 숭배자이냐.”
막 피막을 뚫고 태어나서일까 어딘가 어설픈 발음에 숭배자가 희열이 감도는 얼굴을 깊이 수그렸고.
곧 악마가 나뭇가지 같은 손을 숭배자의 머리 위에 올렸다.
악마의 축복을 받은 자 그 힘을 나눠 받으리니.
그가 곧 내려질 힘을 기대했고.
몸을 채우는 힘에 부르르 떨었다.
가슴에 충만한 능력이 느껴졌다.
아, 보답을 받았구나.
곧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지금껏 손에 피를 묻혀 가며 바라 마지않았던 환상들.
거대한 부를 쥐었고 힘으로 세상을 호령했으며 그 누구보다 고대 악마의 가까운 곳에서 권력을 누렸다.
그가 꿈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광경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네 마지막 충성 달게 받아 가마.”
눈앞에 펼쳐진 환상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심장이 뽑히는 중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숭배자 또한 다른 이들이 그랬듯 행복한 가면을 쓴 채 생을 마감했고.
한껏 피와 심장을 취한 악마가 세 개의 눈을 굴리고는.
핏물과 함께 구멍으로 솟아났다.
먹을 게 필요했다.
사람의 심장과 깨끗한 피가.
태어나기 직전 마신 피가 불순하여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상태.
불을 담은 심장.
그것이라면 전성기의 힘 이상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솟아난 놈이 발견한 것은.
“악마인가 천사인가.”
쌓여 있는 시체 위, 불과 빛을 두른 황태자.
잔혹함과 고귀함을 동시에 품은 그의 자태에 고대의 악마마저도 놀라 감탄했다.
“아름답고 잔혹하구나. 너, 인간이 맞는가.”
정말 인간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정도.
알리굴이 살던 오래된 시대에도 저런 자는 흔치 않았다.
특히 인간 중에는 더욱 희귀했다.
대부분 이종족과 악마들의 먹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악마가 오랜만에 보는 훌륭한 먹잇감에 입을 쭈욱 찢으며 미소 지었다.
비죽한 이빨 수백 개가 더러운 침을 머금고는 빛났다.
“심장, 심장이 맛보고 싶다.”
“자식들의 원한을 받으려 한다.”
“아이들의 순수한 피와 심장이 나의 양식이었다. 네가 그들의 아비인가.”
“제국의 황태자이니 모두의 아비가 될 자. 내가 죄없는 고아들의 아비다. 깊은 죄를 업고 참회의 검을 휘두를 테니. 죗값을 달게 받도록, 거짓의 악마여.”
“너, 나를 아는구나-.”
“그래, 잘 알지.”
황태자가 피눈물 흐르는 얼굴로 악마를 마주하곤.
“환상으로 사람들의 생을 빼앗는 비겁한 악마, 마약으로 삶을 연명하는 중독자! 너를 태우러 왔다! 알리굴! 깨달음과 지식을 거부하는 거짓된 환상이여! 네 목을 내놓아라! 나도 네 심장을 씹어야겠다!”
노호성을 지르며 빛이 되어 쏘아졌다.
좌측엔 달린, 우측엔 안드레, 뒤에선 베론이 자리를 지켰다.
플라워 밸리 깊은 곳, 아이들의 희생으로 태어난 악마와 제물이 되어 버린 아이들의 아비를 자처하는 황태자가 뒤늦은 참회로 놈의 목을 베려 하니.
어느새 거검이 악마의 몸을 갈랐고.
“뜨겁군.”
악마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제 몸을 붙이고는.
“아픈 것이 참으로 좋다.”
이 고통마저도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이에 굽히지 않고 빛살로 화해 여러 번 놈을 갈라대었으나.
처음으로 불에도 빛에도 사멸하지 않는 존재를 마주했다.
악마가 깊은 비웃음으로 황태자의 불을 흩었고.
주변에 어둠과 피가 어렸다.
“덧없다, 너희의 힘이. 덧없다, 쌓아 온 지식이. 인간들아 아무리 갈고닦아도 너희는 동물이며 또한 우리들의 노리개다. 너희들의 고귀함과 강함은 그저 우리의 장난 거리일 뿐이야.”
놈의 비웃음에 맞서 황태자가 다시금 거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엔 알리굴의 몸을 베지 못했다.
아니, 베었으나 그저 통과했다.
반면.
“그 몸에도 신비한 힘이 깃들었구나.”
악마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황태자의 몸을 훑자.
그가 두른 그림자가 찢어지며.
끼기기긱!
황태자의 강철과도 같은 몸이 괴로운 신음을 내었다.
철괴에 부딪혔을 때도 멀쩡했던 억센 피부가 쩌억 갈라지며 피를 울컥 쏟았다.
물론 황태자는 자신의 상처 따위 돌보지 않고선 그대로 달려들었고.
이번엔 거친 적염과 초적염을 휘감은 채 놈에게 마구 불을 쏘아 대었다.
터지는 불꽃 사이, 검에 새까만 그림자를 둘러 그대로 베었으나.
“모두 거짓이다.”
지금껏 모두를 태우고 부수어 왔던 신비들이 덧없이 흩어졌다.
끔찍한 일이었다.
허나 황태자는 멈추지 않았다.
백번을 공격하면 한 번은 닿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지 끝없이 베고, 찌르고, 터뜨렸다.
이에 반해 악마는 그저 낭창낭창 휘어지며 그의 공격을 받아 주었다.
이를 악물어 불거진 턱 근육에 서린 결의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터지는 피가 붉었다.
악마의 세로로 찢어진 눈이 비웃음을 머금어 휘어졌다.
놈의 손이 살갗을 훑을 때마다 황태자의 몸이 괴로운 신음을 흘려대며 피를 쏟았고.
끼이이익, 끼이익.
악기를 연주하듯 움직이는 손에 즐거움이 서렸다.
반면 아르한은 작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와 날것의 살기로 적을 추격할 뿐.
불꽃과 피, 악의와 살기가 난잡하게 튀어 오르는 무대 위.
악마와 황태자가 춤을 추듯 합을 맞추길 잠시.
황태자가 흘린 피가 알리굴의 몸으로 흘러들었고, 고대의 악마가 조금 더 생생함을 머금고는.
이윽고 황태자의 심장을 취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전세는 금세 뒤바뀌었다.
이번엔 아르한이 알리굴의 손을 피해 뛰어다녔고.
악마가 도망치는 파트너의 손 대신 심장을 잡기 위해 날뛰었다.
그림자를 타고 멀리 떨어진 황태자가 불과 빛으로 밧줄을 꼬아 던졌으나.
악마가 확장하려는 신비를 한 손에 잡아 으깼다.
찔러오는 그림자를 찢었고 몰아치는 폭발을 삼켰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쏟아 내는 신비 전부를 무력화하며 다가가니.
굳건했던 황태자의 얼굴에 균열이 인 순간.
놈이 끈적한 웃음과 함께 메케한 어둠을 뿜어내어.
황태자를 감싸 버렸고.
어둠과 불이 영역을 다투느라 생긴 잠깐의 틈.
“그만! 우리가 상대하겠습니다!”
“우어어어!”
“전하! 피하셔서 미래를 도모하소서!”
달린과 베론, 안드레가 죽음을 각오하며 달려들었다.
달린이 양손에서 다중 마법진을 생성, 불, 물, 번개가 번갈아 가며 놈의 몸을 때려 대었고.
안드레가 숨을 멈추었다 뱉어 내며 검을 수십 번을 뻗었다.
그사이 베론이 온 힘을 다해 악마에게 주먹을 휘둘렀으나.
놈은 손을 뻗어 모든 공격을 막아 낼 뿐.
“다들 비켜!”
달린이 작정한 듯 로브를 부풀리며 마나를 개방.
작은 마법진 수십을 동시에 짜 올리더니.
연쇄적으로 이를 쏘아 내었고 낮은 써클의 마법이 비처럼 악마를 향해 쏟아졌다.
그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터진 마나와 흩어진 속성을 그 자리에서 재배치.
계속해서 마법을 이루어 냈고.
각 속성과 중첩된 마법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전투 마법의 대가이자, 높지 않은 써클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전투 실력 하나만으로 강철성 1전투 마법사단의 부단장까지 올랐던 강자.
화력의 연쇄 속 마나의 미세한 컨트롤, 부족한 속성을 다른 마법으로 채워 넣어.
거대한 마법진 하나를 이루었고.
일순간 한점으로 응축되었던 마나가 화려하게 폭발했다.
5서클 익스플로전.
흔히 폭발 마법으로 알고 있는 중상위급 광역 폭발 마법이나.
지금 달린이 펼치는 익스플로전은 특별했다.
그야말로 그간 쌓아 온 마법 전투 경험의 결정체.
악마의 주변을 정신없이 잠식했던 하위 마법들이 화력을 더하여 거대하며 화려한 폭발을 이루어 냈다.
“하압!”
달린이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듯 양손을 강하게 조이며 기합을 내뿜자.
파르르륵!
그의 로브가 거칠게 펄럭임과 동시에 주변 마나를 통제하여 익스플로전의 폭발을 억제.
광역 마법의 폭발력을 일시에 대인 범위에 쏟아부으니.
사방의 마나가 요동치며 달린의 통제에 순응했다.
분명 이 정도라면 타격은 입혔을 거다.
달린이 후속타를 준비하다가 문득.
‘왜 마나가 부족하지 않지?’
고양된 감각에 의아함을 느꼈다.
방금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쌓아 온 깨달음의 정수이자 마법사로서의 비기.
원래라면 고도의 집중력과 가진 마나 전부를 쏟아부은 탓에 식은땀을 흘리며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야 정상.
그런데 지금은 후속타를 준비할 만큼 몸 상태가 완벽하게 멀쩡했다.
집중력 또한 흐트러짐 없었고 몸에는 마나가 넘쳐 났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아니면 분노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까.
아니, 그의 냉정한 이성이 떠오르는 가정을 일시에 소거했다.
지금 느껴지는 고양감과 기시감의 정체는 바로.
“환상이구나.”
환상.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보고 있다.
용솟음치는 마나가 그 증거였다.
재능은 있었으나 태생이 미천하여 마나를 접하는 것이 늦었다.
아쉽게도 수재는 되었으나 천재는 못 되었는지 늦어진 첫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하였고.
마음이 조급하여 닥치는 대로 하다 정작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쳐 버렸다.
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
언제나 한 발 늦는구나.
자괴감을 안고선 황가 전투 마법사단에 투신.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새로운 재능에 눈을 떴다.
바로 전투.
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전투 마법의 대가로 명성을 떨칠 때마다.
만일 조금만 더 일찍 마법을 배웠다면, 헛된 곳에 시간을 쏟지 않았다면, 최소한 조급함 없이 기초를 제대로 다지고 마나 서클을 제대로 형성했다면.
더 큰 힘을 손에 쥐지 않았을까.
더 많은 동료를 구하지 않았을까.
아쉬움 또한 커졌다.
이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은퇴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찾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서.
그런데 지금 그가 원하던 이상향을 마주했고.
“어떤 마법도 펼칠 수 있겠지.”
여기서라면 자신이 꿈꿔 왔던 마법을 펼치고 이를 이용한 전투를 펼쳐 볼 수 있으리라.
원래라면 허락되지 않았던 마법식을 사용해 볼 수도 있겠지.
호기심의 충족과 새로운 깨달음의 단초를 얻을지도 모른다.
욕망이 일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눈감으면 평생을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닿아 볼 수 있다.
혹시 아는가, 이 단 한 번의 경험으로 현실에서도 새로운 경지를 이룰지.
그가 떨리는 손을 바라보길 잠깐.
“지랄하지 말라지.”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몸에 느껴지는 마나도 머리를 채운 정신적 고양감도 모두 외면했다.
오직.
죽어 가던 아이들의 공허한 눈동자만을 떠올렸다.
행복한 가면을 쓴 채 거짓된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이들의 추한 말로를 떠올렸다.
사실 자신 없었다.
앞에 놓인 전능감을 한 번이라도 맛보는 순간, 평생 잊지 못하고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두렵다.
노력 없는 열매가.
믿지 않았다.
대가 없는 쾌락을.
오랜 세월을 살아 속에 품은 욕망도 후회도 컸으나.
그래도 헛된 세월은 아니었는지 그만큼의 인내심도 더불어 길렀다.
달린이 억지로 마나를 억누른 채 몸을 바들바들 떨던 중에.
눈앞에 화한 빛이 번져 나갔고.
곧.
“잘 참았다. 늙은이.”
구원자, 황태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변을 감싼 환상이 산산이 부서짐이 느껴졌다.
괜스레 늙은 눈가에 눈물이 어렸으나 곧 이를 떨쳐 내곤.
“눈을 떠도 되나이까.”
“그래, 헛된 환상은 지워 냈으니.”
다시 추락했을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아-.”
깊은 탄성을 토해 냈다.
분명 거짓된 환상을 지워 냈다 들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무어란 말인가.
그의 앞에는.
“너희 환상을 엿보았다. 놀라운 기예를 이루었더군.”
백금색 가면을 쓴 황태자가 서 있었다.
얼굴엔 오색으로 물든 신장의 근엄한 얼굴.
뿜어내는 기세가 이전보다 한참이나 무거웠다.
몸에 두른 검은 불꽃이 일렁이며 환상을 일그러뜨렸고.
피어나는 오색 염료와 밝은 광휘가 자욱한 어둠을 찢어 내고 지워 냈다.
이내 황태자의 백금면신장이 악마를 마주했고.
“놀라운 환상이다.”
악마가 또 한 번 감탄했다.
앞에 선 인간은 대체 자신을 얼마나 놀라게 만들려는 것일까.
마치.
“마왕과도 같구나.”
인간의 또 다른 정점.
마법의 시초이자 건국제의 등장 이전에 위세를 떨쳤던 또 다른 해방자.
마왕(魔王).
오랜 숙적이었던 자를 떠올렸다.
그 또한 저러한 환상을 부렸었지.
“내 오랜 속삭임에도 넘어오지 않았던 자였어.”
옛 추억을 떠올린 낡은 악마가 키들키들 웃는 동안.
“늙은 마법사여. 이리하였던가?”
황태자의 가면에 그려진 색이 천변만화하였고 주변에 피어난 염료 또한 변하는 무늬를 따라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두른 검은 불꽃이, 방금 달린의 로브가 그러했듯 다급한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달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지금 황태자가 펼치는 것은.
“맞습니다. 제 독문 전투 마법식 연쇄 폭발입니다.”
방금 달린이 환상 속에서 적에게 쏟아부었던 필살기.
한데 지금 황태자는 그 과정을 마법도 아닌 자신이 지닌 신비로 재현하려 하고 있었다.
곧 염료와 불로 빚어낸 마법들이 주변을 가득 메웠고.
“꽤 멋진 기술에 비해 그리 멋진 이름은 아니군. 새로 생각해 보도록.”
가볍게 혀를 차고는 일제히 악마를 향해 쏟아부으니.
명멸하는 빛이 악마의 자태와 주변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