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16화 (116/200)

116화 오랜 광기

꽃밭에 지옥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거리엔 토사물과 피를 뱉어 내는 이들이 한가득.

방금 이어진 의문의 충격파로 거리 가득했던 마나등이 꺼졌고.

플라워 밸리 곳곳 마공학 장치들이 오작동을 일으키더니.

펑, 퍼펑! 연쇄적으로 검은 연기와 더불어 제 기능을 상실했다.

아무리 첨단을 달린다고 하나 망가진 이상 고철일 뿐.

“엄마, 엄마-.”

“일로 오렴. 일로 와.”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얼굴에 불안함이 피어났다.

평소 밝음이 가득했던 것과 달리 어둑한 창밖, 얼핏 비치는 달빛 아래에서 동물처럼 허리를 굽힌 채 우웨에엑 소리를 내는 자들이 가득했다.

아직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 어미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끼었다.

그때.

덜컥, 덜컥!

문을 뒤흔드는 소리에 아이와 어머니의 몸이 흠칫 굳었고.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문을 바라만 볼 때.

“괜찮아? 둘 다 집에 있지?”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

안도하며 급히 달려나가니.

아내와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는 아버지의 눈이 부산스러웠다.

그가 곧 문의 잠금장치를 단단히 잠그고는 가족을 소중히 껴안았다.

얼굴에 맺힌 땀이 그 또한 두렵다는 걸 보여 주었으나 어린 딸과 아내 앞에서 티 내지 않았다.

가장이니까.

“무슨 일이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아빠, 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

둘의 물음에 그가 쓰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 집에 안전하게 있자.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잠깐 문제가 생겼나 봐.”

“당신도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응, 옆에 있을 테니까.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막 가족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에 숨으려 할 때.

펑, 퍼퍼펑!

굉음이 울리더니 멀리 벌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폭발과 고함, 마법이 빗발치기 시작했고.

곧 거센 살기를 품은 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더니.

“죽여라!”

“황태자! 황태자를 찾아!”

일제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을 덮은 토사물과 피가 너저분했으나.

이미 등이 꺼진 거리는 어두워 그들의 역겨운 꼴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벌겋게 번지는 폭발 속,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만이 거리를 둥둥 떠다닐 뿐.

밤하늘에 손대지 않았던 자들이 공포에 질려 숨을 죽였다.

다행이라면 마약을 잃은 중독자들의 광기와 살기가 애꿎은 이들을 향하지 않았다는 점.

그나마 정신이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피난을 도모했고.

이미 깊이 오염된 자들은 자신들의 즐거움과 환상을 앗아 간 황태자를 죽이기 위해 이를 갈며 무기를 들었다.

그야말로 반역.

허나.

“황태자를 죽여도 반역이 아니다!”

“이히히히! 죽여! 죽여 버리자!”

이미 이지를 잃은 그들은 황태자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고.

자신들의 행동을 반역이 아닌 정당한 항의라 여겼다.

원래 비뚤어진 자들은 자신이 비뚤어졌다는 걸 모르는 법이니까.

물론.

“와라. 너희들의 분노를 내게 보여다오. 원래 미친놈과 어긋난 놈들끼리 놀아야 재미가 나는 법이지.”

그들을 맞이하는 황태자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 * *

그래도 나는 내가 미쳤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허나 지금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은 자신들이 어긋났다는 사실도 모른 채.

플라워 밸리를 지키겠노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유독 입에서 역한 냄새를 풍기는 놈의 몸을 갈라내곤.

“그래! 플라워 밸리를 망치러 왔다! 그러니 나를 죽여라! 날 죽이면 너희들이 옳고!”

어느새 뒤로 짓쳐 드는 기사의 팔과 다리를 자르곤, 높이 뛰어 거대 마법을 준비하는 마법사들 사이로 뛰어내리며.

폭발을 일으키니.

놈들이 일제히 불꽃에 휩쓸려 나갔고.

그 가운데서.

“내가 살면 내가 옳다!”

억센 고함을 질렀다.

악마 하나로는 부족했는지, 아까 죽였던 수양원에 있던 오물들로는 모자랐는지 머리를 치고 달리는 광기와 살기가 요동쳤다.

작은 파도로부터 시작하여 큰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광기, 오랜 친구.

이리 즐거운 것들이 한가득인데.

어떻게 마약 따위를 하겠는가!

거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아 내어 덤벼드는 이들을 죽이니.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아비규환이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갑니다. 운명 헛된 죽음, 폭동, 상잔, 사냥이 더 큰 운명 아비규환 속에 휘말립니다]

[당신의 운명 패악, 광기, 현혹이 장소의 운명 아비규환과 중독된 자들의 운명을 일시에 끌어들입니다! 장소 플라워 밸리를 넘어 스프링 필드 전체의 중독자들이 당신을 향해 몰려듭니다!]

[운명 제법 커다란 행운, 속성 구사일생의 영향으로 당신을 보호하려는 이들이 몰려듭니다!]

문득 떠오르는 운명을 보며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 모두 몰려와라, 모두 죽여주마.

밤하늘의 무서운 점은 중독, 마약에 중독된 자들은 결국 이지를 상실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전생에 플라워 밸리가 망했던 결정적 이유.

고대 악마 알리굴이 깨어난 순간.

끔찍한 상잔이 일어났다.

밤하늘에 취한 부모가 자식의 목을 졸랐고.

제자가 스승의 등을 찔렀으며.

방금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였던 연인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저 인간의 두려움과 괴로움을 먹어 힘을 회복하기 위한 알리굴이 벌인 장난.

악마들이란 그런 놈들이다.

인간의 비극이 그들에겐 그 무엇보다 훌륭한 식사였으며 유희 거리에 불과했다.

그 꼴을 참기 힘들어 과거 건국제와 마왕 같은 영웅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던 것이겠지.

장난을 벌일 알리굴은 진생철퇴에 먹혀 사라졌으나.

분명 밤하늘에 중독된 자들이 잠잠할 리 없다.

하여 놈들에게 놀이를 제안했다.

다른 이들의 피와 살을 탐하지 말고 너희들의 즐거움을 앗아 간 나에게 오라고.

죄없는 자들을 핍박하기 전에 내 앞에 와 목을 내놓으라고.

“전하! 전하!”

나의 주변에서 싸우며 나를 걱정하는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저들도 잘못이 없기는 마찬가지.

글쎄 다른 방법은 모르겠다.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방법 따윈 없다.

그저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두 죽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덤벼드는 놈들을 죽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룰 생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럴 것이다.

너무 야만적이지 않냐고, 너무 잔혹하지 않으냐고.

어쩌면 역사가 나를 꾸짖을지도 모르겠다.

폭군의 자질답게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노라고.

그렇다면 그들에게 물으리라.

“기록할 제국이 사라지면 역사가 다 무슨 소용이지?”

그들에게 따지겠다.

“모든 일엔 적법한 절차와 과정이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너희가 욕심을 채울 땐 왜 그런 절차를 따르지 않는가.”

그들에게 분노하겠다.

“왜! 왜! 왜! 너희의 욕심만을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가. 어째서 썩어 가는 것들을 보지 않고 몸에 오물을 덮은 채 숨만 내쉬는 게 옳다 말하는가!”

문득 중독자들의 거뭇하게 죽어 가는 얼굴들과, 전생에 날 둘러싼 채 가만히만 있으라던 신하들의 새까만 얼굴들이 겹쳤다.

묵색으로 가득한 알현실, 답답한 말만 뱉어 대던 놈들이 미웠다.

죽어 가는 제국은 생각지도 않은 채 그저 이리해야 옳다 저리해야 옳다, 올바른 과정만을 이야기하던 놈들.

정작 죽어 가는 이들은 살려 달라 외치건만, 놈들은 눈과 귀를 막고는 그저 제국의 법도를 따르라 읊어 댔다.

물론 와중에 떨어지는 달콤한 꿀들은 모조리 저들의 것.

그 구태의연한 고집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날려 먹었는가.

“네놈들이 잡아먹은 목숨이 몇이고! 네놈들이 앗아 간 희망이 몇이며! 네놈들이 날려 먹은 기회가 몇이냐!”

덤벼드는 신하들을 상대로 거검을 마구 휘둘렀다.

터지는 피와 불꽃 그리고 광기!

새빨간 숨을 헐떡이며 주변의 선 자들을 노려보자.

창피함을 모르고 달려들던 놈들이 그제야 멈칫거렸으나.

“지금 와서 용서를 빌어도 소용없다.”

피어나는 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죽어 간 이들의, 죽어 간 제국의 원한을 풀리라.

이번만큼은 그때처럼 무력하게 당하지 않으리라.

곧 어디선가 강렬한 마나가 피어났고.

숨어 있던 놈 하나가 거센 번갯불을 양손 가득 모아.

“죽어라!”

나에게 쏘아 내었다.

세상이 느려졌다.

흩어지는 숨결과 광기가 선명했고.

몰아치는 번개의 결이 올올이 눈에 들어왔다.

갈라진 균열의 틈.

많은 운명이 떠올랐다.

허나.

“헛짓거리다.”

그중에서 나의 몸을 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대로 번개 다발을 찢어발기며 돌진.

경악한 표정 그대로 베어 내었다.

어떤 놈은 검으로, 어떤 놈은 창으로, 어떤 놈은 괴상한 무기로.

나를 노렸으나.

검과 더불어 통째로 갈랐고 창을 꺾어 상대의 목을 찔렀다.

괴상한 무기?

“뭐냐 그 쓸데없는 장난감은.”

신성한 알현실에 감이 저딴 장난감을 가져오다니.

마치 길쭉한 원통을 여러 개 붙여 놓은 모양새.

옆에는 알 수 없는 것을 길게도 매달아 놓았다.

놈이 나를 겨누곤.

“이제 마법의 시대는 끝났다!”

장난감을 쏘아 대자.

마나 타는 메케한 냄새와 더불어 불꽃이 터지며 작은 철덩이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투투투투투투!

땅을 헤집는 모양새가 꽤 살벌했으나.

나는 여전히 놈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는 중.

마법의 시대가 끝났다는 장대한 외침과 다르게.

따다다다다당!

내 몸에 닿은 것들이 덧없이 튕겨 나갔다.

나름 따끔하긴 했으나 결국은 그뿐.

강철의 신비를 품은 내 몸을 파고들기엔 무기의 위력이 형편없었고.

오히려 몸이 단단해지는 기분이 만족스러울 정도.

“으음- 나쁘지 않구나? 새로운 진상품인가?”

안 그래도 알리굴과의 싸움 덕에 몸이 찌뿌둥했는데 살살 몸을 때려 주는 맛이 퍽 훌륭했다.

아니지, 매일같이 지루한 국정을 논하느라 찌뿌둥했던가?

환상과 현실이 겹쳐 언제가 언제인지 헷갈렸다.

어쨌든.

놈에게 불 한 덩이를 선물해 주고는.

“어디 보자.”

주인을 잃은 무기를 번쩍 들어.

“죽여라! 저기 황태자가 있다!”

새롭게 몰려오는 적들을 겨누어.

이젠 잿더미가 되어 버린 놈이 했던 대로 튀어나온 부위를 꾹 누르자.

다시금 뾰족한 철 덩이들이 마구 튀어나왔고.

몰려오던 자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몸이 날랜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실드까지는 무력화하지 못했으나.

마구 튀기는 불꽃과 날뛰는 사람들의 작태가 즐거웠다.

“아하, 아하하하! 더 날뛰어 봐라. 그래! 춤을 춰라!”

문득 지금 펼쳐지는 풍경이 연회 같았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마법, 터지는 불꽃이 조명이었고, 서로 검을 맞대고 춤을 추는 자들이 가득한 연회.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이들의 꼴이 우스워 소리 내어 웃었다.

강철성에서 이리 즐거운 연회를 즐길 수 있다니.

처음 알았구나.

왜 이제야 알려 준 거냐.

은쟁반에 적들의 머리를 얹어 놓고 피와 죽음을 음미하는 연회로구나.

보라, 쓰러진 자들의 얼굴에 웃는 표정이 만발하지 않았는가.

다들 즐거워 널을 뛰는구나.

그렇게 점차 깊은 광기를 담아 홀로 춤을 추었다.

적을 부수고 가르고 죽였다.

무희 파트너가 수시로 바뀌었다.

내 춤을 감당할 자가 많지 않았다.

상관없다.

광휘와 불을 뿜어내어 주변을 밝혔고 그 사이로 그림자를 내뿜어 무대를 만들었다.

거검을 잡고 휘도는 동안, 배경이 수시로 바뀌었다.

강철성이었던 풍경이 어느새 플라워 밸리로, 플라워 밸리였던 눈앞이 다시 강철성으로.

주위를 돌아보니 나는 여전히 가짜 황제였고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어 댔다.

끝나지 않는 연회.

나와 춤을 추고 싶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모르겠다.

-전하, 전하- 남부 귀족들이 스프링 필드를 가득 메우며 몰려오고 있습니다!

-3, 4전투 마법사단과 청익,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도착했나이다!

-남부 정보부와 특무대를 불렀습니다. 플라워 밸리에서 맞이하시지요.

-하란! 하란이 좌표를 설정했습니다! 사막에서 연락입니다!

-홍련의 지원이 별빛이 되어 몰려옵니다!

종종 누군가의 보고와 목소리가 울렸으나.

들리지 않았다.

플라워 밸리라니? 스프링 필드라니?

지금 내가 선 곳은 강철성의 연회장.

피와 시체, 죽음을 쌓아 놓고 홀로 춤을 추는 중이건만.

서부는 무엇이고, 청익은 무엇이고, 홍련은 무엇이란 말인가.

홀로 오랜 시간을 견뎠다.

누구도 찾지 않는 외로운 골방, 가짜가 되기 위해 견뎠던 시간들.

폭군을 따라 하기 위해 거울을 앞에 두곤 오랜 시간 연기를 해 왔다.

나를 지우고 다른 이의 가면이 되기 위해.

어쩌면 지금 머리를 짓누르는 지독한 광기는 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 아닐까.

홀로 골방에 서서 폭군의 얼굴과 목소리,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할 때마다.

언젠간 오를 황좌를 떠올렸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묵색의 황좌와 두려움에 떠는 신하들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 내었다.

광기 오랜 친구여.

당시를 견디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지독한 상상과 환상.

이후 가짜 황제가 되어 매일같이 무너져 가는 제국을 보면서도 끝없이 꿈꿨다.

멀쩡한 내일을.

그래 어쩌면 지금까지의 과정들은 모두 지독한 상상 아니었을까.

어쩌면 지금껏 무너진 제국의 강철성 중심에서 춤을 추어 왔던 건 아닐까.

환상과 현실이 뒤섞였고 전생의 삶이 현생으로 부상했다.

죽이고 또 죽였다.

끝없이 널뛰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춤을 추었다.

그렇게 모든 걸 잊고선 강철성 황좌 주변을 맴돌고 있을 때.

“아르한-!”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자, 이번에 누구냐.

누가 황좌를 빼앗으러 왔는가.

저 멀리.

“감히! 네놈이 모든 걸 망쳤구나!”

아, 누군지 아는 얼굴이다.

홀로 춘 춤이 오래되어 참으로 외로웠는데.

흔들리는 배경 사이로 창백한 얼굴이 불쑥 튀어 올랐다.

4황녀 아멜리아, 전체 황손 중에선 8번째.

그녀가 이지러지는 갈대 사이 분노한 얼굴로 나에게 화를 토해 냈다.

“네가 네가 모든 걸 망쳤어! 이 빌어먹을 놈!”

더러운 마도의 종자! 네놈의 어미에게 받은 더러운 피는 못 숨기는구나!

그녀의 신랄한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원래 아르한의 핏줄과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였지.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폭군에게 비참히 죽었을 몸인데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아, 과거의 망령인가 보구나.

그래도 아는 얼굴이 반가워 활짝 웃었다.

그녀의 분노가 처절하고 불쌍하여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팔을 활짝 벌리며 핏줄을 맞이했다.

“오라! 나와 함께하자! 오랜 춤에 지친 참이다!”

앞을 막아서는 것들을 베어 내며 달려들었고.

황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녀의 얼굴에 짙은 죽음이 드리웠다.

그래, 보고 싶었던 표정이다.

마침내 두려움에 주춤주춤 물러나는 황녀의 목을 베었고.

피를 뒤집어쓰며 선명하게 미소 지었다.

제국을 망치려 한 죄를 물어 죽였다.

“죄명이 뭐였더라.”

다만 죄명이 기억나지 않았다.

꽤 심각한 것 같았는데, 뭐였지, 뭐였지, 뭐였지.

머리를 간질거리는 의문과 뒤섞인 기억들이 뇌 안쪽을 쿡쿡 찔러 댔고.

“그만!”

모든 게 지겨워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춤추는 것이 지겹다.

흥도 이만큼 풀었으면 고통이다.

가만히 홀로 남아 강철성을 휘돌아 보았다.

아무도 없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혼자구나.

회한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

터엉, 터엉, 터엉, 터엉.

가슴께에서 작은 울림이 치밀었다.

몸을 흐르는 파동에 주변을 메웠던 풍경이 파스스 스러졌다.

문득.

“알리굴.”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상으론 나를 흔들지 못한다.

내가 흔들리는 풍경은 비극.

허물어지는 외로운 풍경 속 악마의 작은 웃음소리도 같이 흩어졌다.

죽는 순간에도 나를 잡아먹기 위해 남겨 둔 놈의 마지막 안배.

가슴께에서 작은 울림이 계속되며 거짓을 몰아내었다.

누구일까, 누가 자꾸 나를 일깨우는가.

황후? 왜 그대가 여기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워 속에 품은 이야기를 풀어 내려니.

비극적이며 현실적인 거짓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현생의 기억들이 전생을 밀어내며 제자리를 되찾았다.

차츰 회복되는 시야.

문득 서 있는 자리가.

“갈대? 스프링 필드?”

드넓은 스프링 필드 중에서도 갈대가 가득한 평야임을 깨달았고.

주변 타오르는 불과 가득한 연기가 방금까지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알려 주었다.

갈대를 적신 피가 선명하여 눈이 아려 왔다.

주변에 널려 있는 시체와 쓰러진 4황녀.

좀 떨어진 곳에는 익숙한 얼굴들과 처음 보는 얼굴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중.

그들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피곤과 마른 피가 애처로웠다.

하아아, 참았던 숨을 내쉬자 깊은 광기가 흩어졌다.

아직도 가슴을 두드리는 손길이 있어.

고개를 내리니.

“전하! 전하! 이 미친 인간아 정신 좀 차려 봐요!”

주변 가득한 피와 같이 새빨간 옷을 차려입은 홍련의 족장 이엘이 보였다.

죽음을 각오한 듯 눈을 꼭 감은 채 가슴팍을 두드려 대는 중.

아, 파사의 힘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구나.

황당한 결말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고.

“어? 어어?”

그제야 이엘이 조심스레 눈을 뜨곤.

“전하? 전하 정신이 드세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물어오기에.

“그래, 이제야.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군.”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의 주먹을 붙잡았다.

보니 퉁퉁 부어 있는 게 단단한 몸 때문에 다친 모양.

잠시 새빨간 풍경, 창백할 정도로 하이얀 이엘의 얼굴을 보다가.

“이번엔 내가 그대에게 구원을 받았군.”

고마워.

한마디에 그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다행이라며 울먹이는 그녀를 자리에 둔 채.

“모두 고맙다. 여기까지 따라와 주어서.”

피곤한 얼굴을 한 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니.

툭, 투툭, 투투투툭.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우수수 쏟아지며 달아오른 몸과 타오르는 갈대밭을 식혀 주었고.

“싸움은 끝났다.”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치달았던 광기가 끝났음을 알리자.

그제야 주변에 선 이들의 얼굴에 어린 불안감과 피곤함이 씻겨 내려가며 표정이 맑게 개었다.

* * *

“패자밖에 없는 풍경이로군.”

식어 가는 갈대밭을 둘러본 황태자가 쓸쓸한 감상을 툭 뱉어 냈다.

빗물이 흐르는 얼굴, 광기와 분노가 씻겨 내려간 자리에 질척한 슬픔과 아릿한 슬픔이 떠올랐고.

바닥을 구르는 4황녀의 얼굴에도 빗물이 고여 눈물처럼 흘렀다.

황태자 세력이 황녀를 비롯한 남부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거둔 날부터, 스프링 필드 전역에 많은 비가 내렸다.

피와 죽음, 슬픔을 씻어내리듯.

많이, 많이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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