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17화 (117/200)

117화 내가 죽였다

황태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알리굴과의 싸움이 끝난 후, 몰려든 이들을 마주했을 때부터.

본래 광기가 삼엄한 분이었으나 이번에 뿜어내는 광기는 훨씬 질척했고 위험했다.

“전하? 전하!”

“다가가지 마세요!”

수양원을 정리하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안드레가 황태자를 부르며 다가가려 할 때.

바이올렛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요? 무슨 일입니까. 이 상황은 다 뭐고요? 전하께서 무사하신지 확인해야 합니다.”

“심상치 않아요. 다가가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바이올렛의 경고에 안드레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상황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평소 보던 광기가 아니다.

다가가면 죽는다.

피어나는 살기가 경고하는 듯했다.

“안드레! 안드레! 어쩌지? 전하가, 전하가 이상해요!”

솔도 그걸 느꼈는지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다들 진정해라. 잊지 마, 녀석은 우리를 이끄는 자고 우리는 어떤 결정에도 뒤를 따라야 한다. 섬긴다는 건 그런 거야.”

살라스가 강철비를 내려 몰려드는 놈들을 쓸어버리며 당황한 이들을 수습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물음에 그가 자신이 본 풍경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했다.

높은 하늘까지 치달아 악마와 싸우던 황태자의 모습과 아래에 잠들어 있는 악마의 잔해에 관해.

처절한 싸움이었다는 말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말을 끝낸 살라스의 얼굴에 끼어 있는 죄책감과 걱정이, 그 또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주었으나.

“우리는 울어서도 안 되고, 실망해서도 안 된다. 녀석, 아니 황태자의 말대로다. 우린 싸워야 한다. 이끄는 자의 결정이 맞길 바라며. 아니, 맞게 만들어야지. 그게 우리의 의무니까.”

마음을 흔드는 감정들을 정리하곤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마법사다웠다.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자신이 향해야 할 명확한 목표와 차가운 이성을 앞세우는 족속.

황태자가 불꽃과 같이 뜨겁다면 지금 살라스는 억지로라도 차갑고 단단한 강철이 되려 했다.

그래야 균형이 맞을 테니까.

“그러니 요동하지 마라. 보아라. 우리가 따르는 이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의 물음에 안드레와 솔, 바이올렛, 달린과 베론의 얼굴에 굳건한 의지가 피어났다.

“다시 서실 때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도 옆을 지키겠어요. 살아서 끝까지.”

“이제야 도움을 드릴 기회가 왔네요. 지금껏 받기만 했으니까 갚아야죠.”

“…죽여야 할 이들을 죽이는 데 의심할 게 무엇입니까. 동참하겠습니다.”

“킁-! 전하께서 아이들이 가여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보답은 목숨으로 하겠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결심을 내뱉는 동안.

“자네들은 어찌하겠나. 굳이 강요는 하지 않겠다.”

살라스가 어느새 뒤에 몰려온 안가 소속 정보부 요원들과 특무대를 향해 물었다.

누구의 편을 들지 않아도 좋다.

방해만 하지 말라는 뜻.

살라스의 경계에 상황을 바라보던 특무대와 정보부 상급자들이.

“제국 특무대와 정보부는 황가를 따릅니다. 지금 안가의 주인은 황비 마마와 황태자 전하이시며, 정보부와 특무대는 안가에 머무는 분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금세 결정을 내렸다.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겠다 선언한 이들이 분분히 검을 뽑아 들었고.

뜨거운 살기와 차가운 철이 대비되는 가운데.

황태자를 향해 몰려드는 놈들을 베어 내기 시작.

그중에서도 솔과 안드레, 바이올렛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달린의 마법 전투는 일품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이 가운데.

황태자의 광기와 살기가 가장 화려했다.

주변을 모조리 태워 버리겠다 결심이라도 한 듯 검을 멈추지 않았고.

이내 공단 지역을 벗어나 플라워 밸리 곳곳을 달리며 중독자들을 베어 넘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반역의 죄로 다스리지 않겠다고 했어도 이렇게 악착같이 달려들다니?

그들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공허와 중독.

이미 밤하늘 없이는 살기 어려울 지경인 그들은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고.

누군가를 죽이라는 충동을 이겨 내지 못했다.

목소리가 끝없이 속삭였다.

너희의 원수, 즐거움을 앗아 간 황태자를 죽이라고.

알리굴은 죽었어도 놈이 뿌려 놓은 씨앗이 발아하여 황태자와 그의 세력을 위협하니.

하루, 이틀, 사흘.

중독자들과 황태자가 부딪치며 발생한 혼란은 며칠간이나 플라워 밸리를 뒤흔들었다.

거리 곳곳에서 비명과 피가 튀었고.

정신이 멀쩡한 이들은 집안 깊은 곳에 숨어, 어서 이 혼란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그간 알리굴과 숭배자들이 뿌린 씨앗이 얼마나 많았는지 중독자들이 끝없이 달려들었고.

황태자는 지치지 않는 광기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플라워 밸리 정리가 얼추 끝났을 때쯤.

“스프링 필드! 스프링 필드로부터 전언입니다!”

피와 피곤에 찌든 이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악마가 뿌린 씨앗은 비단 플라워 밸리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으니.

알리굴의 속삭임을 들은 중독자들이 제 세력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고.

행복한 얼굴, 피눈물을 흘리는 중독자들이 알곡이 가득해야 할 평야를 짓밟으며 몰려오고 있단 소식.

그래도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3, 4전투 마법사단과 청익이 태자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도착했나이다!”

황가의 깃발을 높이 든 마법사단과 청익 기사단이 스프링 필드에 도착하였고.

“남부 정보부, 특무대 전체가 황가와 안가를 지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안가 책임자의 요청으로 남부 전역에 퍼져있던 제국 정보부와 특무대 소속 요원들이 집합.

“전하를 따르라!”

“악마를 따르는 이들을 멸해라!”

“특무대-! 본분을 다할 시간이다! 몰려드는 이들을 베어라!”

“마법사단 전투 준비! 마나에 자비를 두지 마라!”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정예들이 황태자를 지키기 위하여 남부 세력과 부딪치니.

몰려드는 이들의 숫자와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나 정예병들의 분투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스프링 필드 곳곳이 전운에 휩싸였다.

불타오르는 평야, 흐른 피가 땅을 윤택게 했다.

과거 스프링 필드에서 건국제가 거인족들을 학살했다던가.

그들의 발구름이 땅을 평평하게 다졌고 거대한 시체가 땅을 기름지게 했다던데.

앞으로 한 세대 정도가 지나면 스프링 필드가 풍년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

치열한 싸움 한가운데.

살기를 번들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과 폭풍처럼 마법을 쏘아 내는 마법사들.

묵묵하고 잔혹한 손놀림으로 중독자들을 베어 내는 특무대 요원들 사이.

황태자의 불꽃과 검무가 아름답게 이지러졌다.

불 때문인지 피에 절어서인지 새빨갛게 물든 몸으로 끝없이 검을 휘둘러 대었고.

그새 광증이 더욱 깊어졌는지.

이젠 전장터가 아닌 어딘가 먼 곳을 향한 눈동자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허나 누구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심지어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광증이 깊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응? 다가가지 말라고? 왜지? 걱정 마라. 나는 괜찮으니까.”

막 청익과 함께 도착한 무명 기사가 바이올렛과 안드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에게 접근했다가.

토막 나는 걸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와하하하! 괜찮다! 괜찮아! 난 잘릴 몸통이 없거든!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육신이 없는 깡통 기사는 호기롭게 괜찮다 당당히 외쳤으나.

그 풍경이 더 소름 돋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황태자는 이후로도 한참, 남부 세력을 벼랑 끝에 몰면서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끝없이, 무서울 정도로 살기와 광기를 뿜어 댔다.

마침내 아이들을 납치한 장본인이며 밤하늘을 제국 곳곳에 뿌린 원흉.

4황녀가 제 세력을 이끌고는 등장했다.

그녀의 뒤에는 온갖 화려한 치장을 두른 용병단이 수천.

황금 용병단이라 불리며, 상인 연합의 금력 대부분을 투자하여 키운 정예병들.

“네가, 네가 모든 걸 망쳤어! 이 빌어먹을 놈!”

4황녀가 벌게진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타오르는 갈대밭, 황금으로 치장한 그녀의 얼굴이 표독스러웠다.

본래 어미가 상인 집안 출신으로 남들보다 고귀하지 못하단 이유로 무시받았고 어렵사리 세력을 키워 왔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탐욕스럽고 독하게 성장했다.

그녀가 고아원의 아이들을 납치한 이유?

커다란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밤하늘을 제국 곳곳에 판 이유?

돈을 긁어모을 수 있으니까!

밤하늘로 인해 제국이 병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내 제국이다!

고아들의 아픔보단 벌어들일 돈과 곤란해질 로이스 가문의 처지가 더 중요했다.

제국 상인 연합의 가장 큰 적은 로이스 자작가.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상인 연합의 세가 줄었고.

자연스레 4황녀의 위신도 타격을 입었다.

이미 예전부터 싸움은 시작되었던 거다.

“뭐? 로이스 가문이 아르한, 그 망나니 손에 들어갔다고?”

황태자가 로이스 가문을 포섭한 순간부터.

북부의 패권을 잡고, 심지어 서부 사막의 교역로를 삼켜 버렸다.

거기다 거금을 투자한 서부 공장들이 의문의 폭격을 당하는 바람에 지금껏 해 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일보 직전.

심지어 황태자의 자리마저 빼앗긴 뒤.

자포자기하듯 마구잡이로 일을 벌였다.

밤하늘의 유통을 확장했고 아이들을 납치했다.

더럽게 번 돈으로 제 위세를 유지해 나갔다.

황태자가 뒤바꾼 운명에 휩쓸려 절벽에 몰렸다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미 그녀는 전부터 밤하늘을 팔아 대고 있었으니 결국 맞이할 파국을 좀 더 일찍 맞이한 것뿐.

황태자가 어째서인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고.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황태자와 황녀의 싸움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니, 술래잡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오지 마! 오지 마! 이 미친 새끼야!”

“아하하하, 하하하! 같이 춤을 추어야지!”

아무리 표독스러운 황녀라도 황태자의 광기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는지 결국 도망쳤고.

아르한은 타오르는 갈대밭을 헤치며 그녀를 잡으려 했다.

불쑥불쑥 앞길을 가로막는 용병들은 갈대와 함께 베어 버렸다.

점차 번지는 불과 황태자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그녀의 주변을 조여 왔고.

마침내 그녀가 황태자를 마주했다.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이 비루하고 남루한 놈! 미친 새끼! 네놈의 어미가 누구의 피를 타고 태어났는지! 왜 마도 왕국에서 버려졌는지 다 알아! 다 안다고! 넌 제국을 멸망시킬 망종이다!”

도망치는 동선이 나름 작전이었는지.

그녀가 황태자를 끌어들인 곳은 교묘하게 따르는 이들과 먼 곳.

어느새 용병단이 주위를 둘러쌌고.

밖에선 안드레와 솔 등이 전하를 구하기 위해 분투했으나.

너무 오랜 전투 탓에 이미 지쳐 쉬이 전진하지 못했다.

“전하! 전하아악!”

“비켜! 비켜, 이 새끼들아!”

솔과 안드레의 악다구니를 배경으로 점차 좁혀 오는 용병단 사이 홀로 선 황태자의 자태가 오연했다.

갈대밭 전투의 끝이 이렇게 저물고 마는가.

내리는 노을이 어둑한 먹구름과 뒤섞여 검붉게 지는 평원.

켜켜이 쌓인 죽음과 아직 들리는 거친 싸움 소리들.

몰려오는 밤바람을 타고 불이 매섭게 번져 나갔고.

황태자는 묵묵히 다가오는 사냥꾼들을 기다릴 뿐.

현실감 없는 풍경이었다.

악을 써대며 황태자를 구하려는 이들도, 그들을 막아서는 이들도 문득.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헤집는 바람이 매웠다.

섞인 그을음과 피 내음이 코를 아릿하게 찔러 왔다.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사람들이 애쓰는 소리가 먹먹히 지워졌고.

갈대들이 몸을 비비며 신음하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모든 게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 중요한 순간,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 이러던데.

달린이 막 뿜어내던 마법을 멈추고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랜 경험이 알려 주는 신호.

그가 가장 싫어하는 순간.

이렇게 감각이 예민해지는 순간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때론 동료이기도 했고, 연인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자아 일부이기도 했다.

달린이 늙은 육신을 억지로 추켜세우며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은 이런 경험이 많다지만.

안드레, 솔, 바이올렛 등은 이런 경험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막 용병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던 안드레가 우뚝 행동을 멈추었고.

솔도 내뿜던 그림자를 거두었다.

바이올렛 또한 그렁그렁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볼 뿐.

모두가 느낀 탓이다.

중요한 순간이 도래했음을.

자신들에게도 지금 저 갈대 사이에서 얼핏 백금발을 휘날리는 황태자에게도.

하지만 이것 또한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 보이는 법.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지렁이들, 비겁한 용병들이 다가오는 운명에 압도된 이들의 뒤를 노렸고.

달린이 재빨리 계산해 보았으나.

모두를 살릴 재간이 없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가 어떻게든 셋 모두를 구하기 위해 마나를 개방하였고.

“정신들 차려!”

분명 계산으로는 불가능했을 영역에 닿았다.

어떻게? 의문이 들길 잠깐.

날카롭게 움직이는 마나를 보며 금방 깨달았다.

알리굴이 보여 주었던 환상, 그곳에서 영감을 얻었구나!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바라마지 않았던 이상향을 거부했더니 오히려 한 걸음 가까워졌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들이 막 덤벼드는 용병들을 마주해 다시 싸우려 할 때.

별빛이 검붉은 하늘을 찢으며 땅에 내려앉았다.

하나, 둘, 셋.

점점 늘어난 숫자는 순식간에 수백, 수천으로 불어났고.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부 사막의 일곱성과 홍련이, 가장 밝은 별 구원자 폴라리스를 지키러 왔나이다!”

서부 사막의 성주들과 전사들.

그들이 색색의 염료를 터뜨리며 가장 밝은 별을 지키기 위해 내려섰고.

생각지 못한 신비에 용병단이 당황.

순식간에 황태자를 둘러쌌던 진형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전하!”

홍련의 주인 이엘이 붉은 예복을 펄럭이며 내려섰다.

그녀의 주변, 염료가 춤을 추었고.

곧 용병단의 눈을 가리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사그락, 사그락.

갈대를 헤치며 나아가는 그녀의 궁장이 쓸리며 작은 소리를 내었고.

이내 앞을 가로막은 갈대 무리를 벌리자.

“아-.”

멍하니 선 황태자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지난날, 홍련에서 붉은 밤을 이루어 내고 보았던 그림이 위대함과 신비를 담았다면.

지금은 깊은 쓸쓸함과 외로움을 담았구나.

머리를 흔들어 대는 갈대 사이, 정적을 죽이고 선 그를 덮은 피와 멍하니 풀린 동공이 슬퍼 보임은 왜일까.

절대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왜, 왜 저리 아픈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정작 승리했건만 왜 흐르는 피가 눈물 같아 보일까.

이엘이 다가가려 할 때.

“위험합니다.”

누군가 경고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내가 위험할 때 와 주신 분이야. 죽이려 하시면 죽어야지.”

그의 주변에 감도는 광기와 살기를 알았으나 마음에 와닿는 슬픔이 더욱 커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여인이 붉은 궁장과 검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황태자 홀로 선 외로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애타게 그를 부르다 못해.

가슴팍을 쳐댔다.

일어나라고, 잡아먹히지 말라고.

자신은 고작 부족 하나 이끌며 느꼈던 중압감이 그렇게 컸는데.

제국을 이끄는 이는 등에 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혹여 그가 무너질까 봐 간절히도 가슴을 쳐 댔다.

이윽고 천천히 황태자의 눈을 가렸던 막이 허물어졌고.

그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와중에.

“…황후가 여긴 어쩐 일이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어왔다.

당황한 이엘이 숨을 들이켜며 멈춘 사이.

“홀로 외로웠겠군. 나 또한 외로웠소. 모든 죄업을 진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야.”

작은 속삭임이 바짝 붙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깨어나듯 나른하고 무거운 목소리와 작게 피어나는 입김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황후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황후라는 호칭에도 놀랐으나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는 황태자의 말에 더욱 놀랐다.

더군다나 이 패악스러운 황태자에게서 고맙다는 말까지 듣고야 말았다.

이런 말도 할 줄 알았구나.

자신의 약함을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생전 처음 느껴보는 오묘한 감각이 그녀의 마음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

“패자밖에 없는 풍경이로군.”

야속한 황태자께서는 금방 태도를 바꾸어 자리를 떠났고.

축축한 빗줄기 아래.

이엘이 홀로 남아 가슴을 깊게 내리누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찌르르 울리는 심장이 도저히 가라앉질 않아서.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홀로 설레는 자신이 미워 그렇게 빗속에 서서 가슴을 내리눌렀다.

* * *

싸움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수양원에 남아 있던 증거들을 취합하여, 많은 이가 밤하늘로는 부족하여 아이들의 상상력을 뽑아 쾌락의 재료로 사용했단 사실을 공표했고.

플라워 밸리 곳곳에 숨어 있던 이들을 찾아내어 죽였다.

허나 이번에는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했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는 아카데미의 개교와 입학식을 강행했다.

듬성듬성 비워진 단상, 사라진 교수들의 자리를 확인하곤 웅성거리는 재학생들.

어제 누구 교수가 죽었다더라, 아니 황태자에게 덤볐다가 죽었다더라.

불안한 추측과 소문들이 떠도는 와중.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카데미의 학장만큼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정도.

아직 앳된 입학생들은 극도의 불안함에 창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이내.

저벅, 저벅, 저벅.

황태자가 유독 긴 다리를 뻗으며 당당히 등장했다.

얼굴에 붉은 피를 찍어 바른 채.

몸에서 풍기는 혈향이 유독 짙어 넓은 강당을 가득 메울 정도.

천천히 단상에 오른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입학생들과 재학생들을 굽어보길 잠깐.

음성 확성기에 다가가서는.

“내가 죽였다. 너희들의 스승을, 너희들의 앞길을 막은 구태의연한 구더기들을. 슬픈가, 거짓말하지 마라.”

충격적인 발언을 내던졌고.

확장되는 동공과 놀란 얼굴들이 파란만장하게 고요한 소란을 피워 내었다.

경악을 마주한 황태자의 얼굴에 벌건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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