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여름 맞이
안가 가장 깊은 곳.
안가에서 지내는 황손들도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
오직 제국의 눈과 귀인 정보부, 이를 위해 뛰는 특무대 요직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곳에.
“…….”
“음-.”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군.”
조금은 생소한 조합이 자리했다.
평민 안드레, 고아 베론, 공단 책임자가 된 장인 그레이, 대도서관을 대표하여 자리한 살라스와 신드로.
사실 살라스와 신드로의 얼굴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한창 중요한 연구 중이었는데 부르다니.
실제로 신드로는 수첩을 꺼내어 홀로 수식을 적어 내려가는 중.
이런 자투리 시간마저 버릴 수 없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우리는 왜 부르신 걸까요.”
“뭐, 들어 봐야지.”
또 갈런과 달린도 자리했다.
갈런은 지난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
심지어 오른다리는 텅 비어, 바지만 덜렁였다.
그런 그를 걱정하는 달린의 늙수그레한 얼굴을 보며.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사건 수사하다 보면 원래 어디 한두 군데 날려 먹기도 하는 법이죠.”
갈런이 아직 상처 그득한 얼굴로 웃어 보였고.
그제야 달린도 쓰게 미소지었다.
“어휴, 은퇴해서도 남 걱정하는 처지라니.”
부단장 시절에도 저런 후임들이 있었기에.
그들뿐만 아니라 자리엔 홍련 족장 이엘과 몇몇 성주도 자리했다.
사실 다들 황태자를 만나기가 두려워 도망가려 했으나 제비를 잘못 뽑아 남은 자들.
그래서인지 문이 조금만 흔들려도 흠칫흠칫 놀랐고.
이엘은 어딘가 몽롱한 얼굴로 하염없이 황태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는.
“큼, 크흠.”
안가의 책임자와 남부 정보부, 특무대 담당자의 얼굴에 불편함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나름 제국에서도 가장 은밀한 조직이라 불리는 정보부와 특무대다.
심지어 몇몇 귀족과 강철성 대신들은 그들을 귀신처럼 무서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정보부와 특무대란 이름에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안드레는.
“어,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면 물 한 잔이라도 주는 거 아닌가요?”
정보부 요원들에게 물까지 요구했다!
요원들의 얼굴에 피어난 경악에도 불구하고 안드레가 참으로 뻔뻔하게 당당한 얼굴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그제야.
“마, 맞군. 으음. 손님들에게 마실 것을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심문 대상이 아니니까.”
안가 담당자가 오랜만에 느끼는 황당함을 헛기침으로 감추며 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그래도 은퇴해서 다행이다.
그가 그리 생각할 때.
“저, 쿠키도 있으면 조금만…….”
베론이 냄비 뚜껑처럼 넓적한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쿠키를 요구.
장내가 일시에 싸늘한 침묵에 휩싸였다.
다들 잊고 있었지만 베론은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창 쿠키를 좋아할 나이.
생긴 건 독한 위스키를 안주도 없이 병나발로 벌컥벌컥 들이켤 것 같았으나.
실제로 베론은 버터가 듬뿍 들어간 쿠키를 우유에 찍어 먹는 걸 제일로 좋아했다.
한 번에 쿠키 한 바구니, 우유 한 양동이를 먹어 대서 문제였지만.
그래, 이건 심문이 아니야. 이건 심문이 아니지.
잠시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은 안가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식탁 위에 차와 다과가 준비되었다.
정보부 요원들도 이젠 포기한 표정들.
그러거나 말거나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이들의 얼굴엔 편안함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남부 정보부 책임자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여기가 불편하거나 정보부나 특무대가 껄끄럽진 않습니까?”
냉막한 표정과 흐리멍덩한 눈빛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남부의 뱀이라 불리며 수많은 반역도를 잡아들이고 타국의 요원들을 삼킨 자.
보통은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겁을 먹기 마련인데.
“뭐, 그냥저냥요.”
“차를 잘 타시네요.”
“쿠키 조금 더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 마법 계산기 같은 것도 있습니까? 정보부니 있을 법도 한데요.”
“으음, 사막에도 이런 기관을 만들면 어떨까요?”
모두 태평한 반응.
물론 이들에게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다들 그 녀석과 더한 아비규환을 헤쳐 나온 이들이야. 일반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살라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건넨 조언에 정보부와 특무대 책임자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스프링 필드 작전 때 보지 않았는가.
황태자의 광기와 살벌함은 감히 보고서에 적힌 몇 줄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단 것을.
그가 이룬 업적은 다 알고 있다.
여기 있는 자들이 그 과정을 함께했단 것도.
그렇다면 지금의 반응도 이해갔다.
산전수전 다 겪고 온갖 미친놈들을 다 보아왔던, 독하디독한 범죄자들과 각국의 정예 스파이들을 심문해 본 그들이었으나.
생전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미치고 지독한 사람은.
허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깊이 존경이 피어났다.
너무 깊이 썩어 버려 자신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는데.
황태자는 더욱 거칠고 잔혹한 방식으로 일을 매듭지어 버렸다.
아니 꼬인 매듭 자체를 잘라 버렸다.
누구나 생각은 해 보지만 함부로 실행은 못 하는 방법.
정보부와 특무대가 추구하는 방향성과도 닿아 있으니.
황태자를 따르는 게 맞다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다들 모였나.”
황태자가 거칠게 문을 박차며 등장했고.
“정보부와 특무대는 혹시 남부에서 살아나간 놈들이 있으면 추적하여 죽여라. 후환은 걱정 마라. 내가 내린 명령이니, 책임도 내 것이다.”
책임을 져 주겠다는 말에 더욱 충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 더해 마도왕국과 신성왕국의 동태를 주의 깊게 감시하도록. 특히 신성왕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
비열한 중독자들을 마저 벌하라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국 밖에 일에도 신경 쓰라는 명령.
보통 제국의 힘을 과신하여 다른 국가들을 무시하고 정보부의 활동을 폄하하기 마련이거늘.
“명심해라. 제국이란 숲을 지키기 위해선 그대들의 노고가 필요하다. 내부에서 자라는 독버섯을 자르고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독사들을 죽이도록.”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황태자의 말이 은은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황태자는 곧 떠날 작정이라도 한 듯 이런저런 명령들을 내렸다.
“살라딘, 갈런의 다리를 고쳐 놔라.”
“잘린 다리를?”
“그렇게 자랑하는 마법이랑 공학은 뒀다 뭐 하게. 고쳐 놔, 긴히 쓸 자다.”
“…알겠다, 알겠어.”
“갈런 수사반장.”
“네! 황태자 전하!”
“몸은 어때.”
“건강합니다!”
갈런의 우렁찬 대답에 쯧, 불만스럽게 혀를 찬 황태자가 툭 두꺼운 봉투 하나를 던져 놓곤.
“임명서다.”
“임명서요?”
“이번에 신설한 기관이다. 얼추 마약 및 인신매매 단속 기관이라고 보면 돼. 범위는 제국 전역. 자네가 믿을 수 있는 이들을 경비대에서 차출하도록”
“제국 전역이요?”
“뭐, 특별 승진이라는 거지.”
“…감사합니다.”
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갈런의 얼굴에 오묘한 감정이 깃들었다.
기쁨과 슬픔, 후회와 결의.
슬픔과 후회는 지나간 일에 대한 감상일 것이고, 기쁨과 결의는 미래에 대한 감상이겠지.
그렇게 여러 생각이 버무려진 채 임명서를 받아든 그에게로 다른 이들의 박수가 쏟아졌고.
“그러니 다음엔 멍청하게 혼자 움직여서 남들 고생시키는 일 없도록 해. 갈런 수사단장.”
“네! 송구합니다!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바치지 마. 필요 없어. 다리 한 짝 잃어서 볼 손해가 얼마인 줄 알아? 신체 멀쩡해야 오래 부려 먹지.”
황태자의 못된 소리에도 갈런이 밝게 웃었다.
그래, 맞아.
몸이 멀쩡해야 오랫동안 나쁜 놈들을 잡지.
역시 전하께선 지혜로우시구나.
“정보부와 특무대는 갈런을 도와. 자네들이 못하는 일은 갈런이, 갈런이 손대기 어려운 곳은 너희들이. 어려운 명령 아니지?”
“알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황태자의 시원한 명령에 안가 책임자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찌 저렇게 생리를 잘 알까.
양지와 음지가 다루는 영역이 다른 법.
서로가 합하여 일할 때야말로 썩은 부위를 제대로 뿌리 뽑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정치적 이유와 영역 다툼으로 인해 이루기 어려운 일을.
황태자는.
“헛짓거리들 하지 말고 제대로 협력해. 수틀리면 모가지 날려 버릴 테니까.”
직장 말고 어깨 위에 있는 진짜 모가지.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충성심으로 무마해 버렸다.
참 놀라운 기지.
아니, 고도의 정치적 술수인가?
이젠 헷갈릴 지경.
그러고도 모자라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자세히도 지시했다.
갈런은 몸을 회복하는 대로 정보부와 협력하여 남은 밤하늘과 4황녀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을 것.
정보부와 특무대는 내부의 악마 숭배자들을 찾아내고 타국의 움직임을 경계할 것.
홍련과 사막은 사람을 파견하고 등대를 이용하여 대도서관, 장인들과 협력하여 오색 모래의 새로운 사용법을 찾아낼 것.
더 나아가 스프링 필드, 플라워 밸리까지 교역로를 뚫어 서남부의 세력을 장악해 갈 것.
“로이스 가문과는 별개로 4황녀를 잃은 상인 연합을 흡수하여 진행해. 아마 지금쯤 소피아와 자작은 과로사 직전일 테니.”
다만 로이스 가문과 차별화를 두어 세력을 다양화하겠단 뜻을 밝혔다.
과하게 쌓이면 썩는 법이니까.
“영애, 북부의 상황은?”
“현재 새롭게 임명한 영주들과 협력하여 땅을 되살리고 있다 합니다. 더 나아가 로이스 가문의 조력으로 북부 개발에도 한창이라 하더군요. 숲에 가득한 질 좋은 나무들이 도움이 되나 봅니다.”
“흡족하군. 박차를 가하라 이르고 산맥 방벽과 동북부와의 협력도 공고히 하라고 해.”
“명을 전하겠습니다. 참, 산맥에 특이한 장소를 발견하였다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백작님께서요.”
“딸내미에게 다른 말은 안 하던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하시더군요.”
“자네도 동의하나?”
“언제 북부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안 괴롭힌 지 좀 됐지?”
아버지를 괴롭혀 주겠다는 말에 딸이 함박웃음을 지으니.
북부 가문의 취향이 특이했다.
그렇게 한동안 각자 맡아야 할 일들을 하달했다.
무엇을 위하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여쭐 법도 했으나.
다들 자신이 할 일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황태자의 명이니 따를 뿐.
그들만의 신뢰였고 관계였다.
황태자가 내리는 명을 이해하려 해 봤자 머리만 아프다는 사실을 알았고.
결국은 그가 세우는 큰 뜻이 올바름을 알고 있으니 불안하지 않았다.
반면 황태자는 그들이 자신을 따를 것을 알기에 별달리 설명하지 않았다.
또한 어떻게든 해낼 것을 알기에 자세한 과정은 믿고 맡겼다.
어쩌면 귀찮아서일 수도 있겠으나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여기 있는 자들을 믿는다는 뜻.
참으로 놀라웠다.
지금껏 쌓아 온 정보부의 황태자에 대한 데이터가 한 번 더 바뀌리라.
본래는 황태자가 패악과 광기로만 이들을 이끈다 적혔으나.
이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공고했으며, 황태자는 거칠지언정 합리적이었고, 그를 따르는 이들은 행실이 가벼울지언정 충정만큼은 누구보다 무거웠다고.
결정적으로 그러한 황태자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내심 정보부와 특무대 인사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보았지 않은가, 그가 지닌 광기와 무력을.
저런 자를 적으로 돌리느니.
‘그냥 은퇴하고 말지.’
이게 솔직한 심정.
그렇게 얼추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근데 저분께선 아까부터 얼굴은 왜 가리고 있는 겁니까. 누가 보면 수배자인 줄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경계도 누그러졌는지 특무대 책임자가 황태자와 함께 들어온 자를 향해 농을 건넸다.
처음부터 황태자가 대동한 자는 둘.
하나는 북부의 영애 바이올렛이었고 하나는 로브를 깊게 내려쓴 의문의 인물.
당연히 황태자를 섬기는 이겠거니 하여 가벼운 농담을 한 것.
이제 같은 처지이니 섞이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는 물랐다.
자신의 직책이 특무대 간부였다는 점, 얼굴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와 회백색 눈동자가 살벌했다는 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제국 특무대 내에서도 수배자를 잡아 족치기로 유명한 자.
흔히 잡히면 화장당한다고 하여 잿가루라 불리는 이의 농에 누가 웃을까.
다만.
“크크큭. 크크크큭.”
옆에 앉은 정보부 남부의 뱀만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혀를 낼름거리며 웃는 뱀과 옆에서 흉터를 꿈틀거리며 웃음을 참는 잿가루.
그들을 따라 다른 요원들도 작게 웃어대는 걸 보아.
나름 정보부나 특무대에선 통하는 농담이었던 모양.
분명 농담이었는데.
“딸꾹!”
안드레가 답지 않게 딸꾹질을 하다가 입을 틀어막았고.
태연했던 이들의 얼굴이 구겨지더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니까 그들의 표정은 한마디로.
어떻게 알았지?!
뜨악한 표정.
이리저리 분산되는 시선과 터져 나오는 헛기침들이 수상쩍었다.
이 정도의 반응이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
당연히 정보부와 특무대 인원들이 긴장한 사이.
“괜찮으니까 로브를 벗어라.”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졌고.
이윽고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넌!”
“이런 제기랄!”
역시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피가 쏟아지듯 붉은 머릿결이 찰랑였고 두 눈동자는 석류보다 붉게 빛나니.
블러디.
제국 최악의 수배자 중 하나의 등장에.
자리에 있던 이들이 막 무기를 뽑기도 전.
“뽑지 마라. 내가 허락했다.”
황태자의 한마디가 모두의 움직임을 억제했다.
아마 전 같았으면 당장 뽑았을 테지.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이미 황태자가 남부 평원에서 어찌 싸웠는지 보았다.
블러디보다 황태자의 분노가 위험하다고 판단.
그들이 이를 갈아대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고.
“흥, 말 잘 듣는 개들이 따로 없네.”
“감히!”
그녀의 비아냥에 몇몇이 화를 냈다.
“네가 죽인 요원들이 몇인 줄이나 알아!”
“그들도 날 죽이려 했잖아.”
“넌 수배자다!”
“수배자지만 무고한 자들을 죽이진 않았어. 너희가 원시림에서 빼앗아 간 게 얼마인진 알고 그러는 거야? 납치하고 죽인 엘프가 몇인데!”
블러디와 정보부 책임자의 날 선 공방이 오가길 잠시.
“사과해.”
“뭐? 전하!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서로 죽이려 했고 내가 이겼을 뿐이야!”
“알아.”
“근데 왜 사과하는데?”
“네 처지가 그러니까.”
황태자의 차가운 말에 블러디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내 처지.
그의 말이 속을 아프게 찔러 왔다.
저번 열차에서부터 대체 왜 이렇게 아프게 만드는 걸까.
그녀가 잠시 입을 우물거렸다.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그림들이 많았다.
곤충, 죽어 가는 엘프, 병든 나무들, 자신을 이용만 하려는 자들, 믿어 주지 않는 이들, 밖으로 내몰렸던 기억들.
그것만으로도 힘겨웠는데.
문득 옆에 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날 도와줄 사람…….’
이 맞겠지?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북부에서 본 그의 희생과 눈물을 기억했고, 독충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던 넓은 등을 기억했다.
열차 안, 뺨을 때린 후에 했던 말도.
제국민 하나는 엘프 전체보다 소중하며 너 또한 나에게 제국민이라 했다.
블러디가 잠시 눈을 감아 감정을 정리했다.
이건 어쩌면 제국민이 되어가는 과정일지 모르겠다.
인간과 엘프의 중간, 엘프에겐 혼혈이라 무시받고 인간에겐 엘프라 이용만 당했던 삶.
자신은 어디를 선택해야 하는가.
인간? 엘프?
결국 인간인가.
그녀가 결심을 공고히 하려 할 때.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얻는 유치한 선택이 아니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으나 그의 날카로운 콧대와 움직이는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네 처지를 인정하란 말은, 고작 선택을 강요하는 말이 아닌.”
너의 그 어설픈 존재 모두를 인정하란 말이다.
항상 이렇구나.
뺨을 치고 나서야 원하는 답을 알려 주는구나.
이윽고 눈을 뜬 그녀의 눈가엔 그렁한 눈물이 입가엔 여린 미소가 피어났다.
처음으로 블러디란 독한 이름이 아닌.
“숲의 버림받은 자녀, 붉은 석류가 지난 싸움과 죽음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비극적인 결말로 상처 입으셨던 모든 분에게요.”
붉은 석류란 자신의 순결한 이름을 꺼내 놓았고.
이내.
“하여 부탁드립니다. 남부의 원시림이 병들었고 생명의 나무가 죽어 가고 있어요. 곤충들이 숲을 넘어 남부 평야를 노리고 있으니… 우리를 살려 주세요. 숲을 도와주세요.”
그녀의 하얀 볼 위로 눈물 한 줄기가 아롱졌다.
모든 걸 뱉어 내고 나자 후련한 기분이 마음을 감쌌고… 블러디, 하프 엘프 붉은 석류가 여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얼굴들이 한가득.
여기 있는 이들 중에 황태자에게 도움받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윽고 만족스런 답을 들은 황태자가.
“사과했잖아. 용서해. 잊어라. 과거의 원한은.”
화해를 강요했고.
“웃어, 방금처럼 웃으라고.”
둘에게 웃음을 강요했다.
결국 남부의 뱀과 잿가루가 아까와 같은 흉악한 웃음을 짓고 나서야.
“좋아. 이제 잘 들어라. 우린 남부로 간다. 가서 원시림을 넘어 평야 전체를 잡아먹으려는 곤충들을 쓸어버릴 거다. 물론 오만한 엘프 귀쟁이 새끼들도 혼쭐을 내주어야겠지.”
휘하 세력을 이끌고 남부로 향하겠다 선언.
봄, 꽃이 만발한 계곡을 평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습하고 곤충이 득시글거리는 여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