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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20화 (120/200)

120화 숲 미치광이

이번 남부 스프링 필드에서 벌어진 싸움 소식이 수도 강철성에 도착했고.

역시나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허나 이후 나타나는 반응들이 달랐다.

황태자가 앞서 일으킨 사건들은 규모가 거대했으나 결국 결과가 좋았기에 별말 못했다.

북부가 그러했고 서부도 마찬가지.

이전 북부와 서부에서 벌인 일들은 결과적으로 외적을 막아 낸 일.

이후 잡음이 있었지만 제국을 구한 공이 커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만일 황태자가 북부에서 내려오는 에스키모를 막지 못했다면?

북벽이 무너지고 북부 전체가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북부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이 휘청였겠지.

서부 사막은 어차피 외인.

그들이 죽는다 해서 큰 문제는 없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서부에서부터 몰려온 악마들과 몬스터들이 서부 전체를 뒤집어 놓을 것은 자명한 일.

결국 황태자가 행한 일 덕에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으니 지금껏 큰 소란이 없었다.

실제로 그가 이룬 일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 남부 스프링 필드에서 벌어진 사건은 지금까지 그가 벌여 왔던 것들과 결이 달랐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고름을 짜낸 사건.

죽은 이가 한두 명이 아니었고 그들과 관련된 세력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황손 중 4황녀의 목을 베어 버리기까지 했으니.

평소라면 벌 떼처럼 황태자의 패악함을 성토해야 했겠으나.

웬일인지.

강철성 알현실.

어둑하게 늘어선 신하들과 귀족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침묵했다.

“…….”

자리에 앉은 황제가 손에 들린 서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는 동안.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흐릿한 눈동자로 서신을 읽어내곤.

“사후 처리는 어찌 되었는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었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건만 황제는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끔뻑일 뿐.

그나마 떠올린 사실 하나.

“아멜리아가 죽었다. 아르한에게?”

“그렇사옵니다.”

“…그렇군. 그래…….”

자식 간 상잔이 있었다는 말에 잠시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을 뿐.

금세 표정이 흐리멍덩하게 풀어졌고.

모두가 숨을 죽인 알현실.

황제의 숨 헐떡이는 가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서기관 또한 이를 어찌 적어야 할지 몰라 손을 떨었다.

귀족들과 신하들의 눈에 불안감이 팽배했다.

다만 황제 때문은 아니었다.

곧.

“폐하-.”

간드러진 목소리, 얼굴을 허옇게 칠한 내시가 총총걸음으로 황좌를 향해 다가가니.

모두가 고개를 숙인 알현실, 감히 고개를 든 자는 그뿐이었고.

무엄한 태도임에도 누구 하나 호통을 치지 못했다.

이윽고 내시가 황제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닥이고 나서야.

“들어라.”

황제가 힘겹게 입을 열어 쉰 목소리를 내어.

“해당 관련자들을 처벌하였으니 굳이 일을 벌이지 않겠다. 허나 앞으로는 악마를 비롯하여 헛된 것에 손을 대는 자들을 엄벌할 것이니 그리들 알라.”

전해 받은 결정을 그대로 읊었다.

그제야 자리에 있던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이 지금껏 침묵한 이유.

악마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군다나 이번 같이 깊게도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면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치 않았다.

하여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침묵하며 기다렸다.

황제가 아닌 황후의 결정을.

황후가 내린 결정은 기회를 주는 것.

황태자가 관련자 일체를 죽인 반면 그녀는 여기 있는 자들을 살리기로 했고.

방금까진 눈치를 보던 이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하더니.

“폐하! 죽은 자들 가운데 죄가 없는 자들도 있었나이다. 이에 관해 재조사가 필요함을 아뢰옵니다.”

“맞습니다. 밤하늘에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스프링 필드 전투에서 죽어 간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명예를 구하소서.”

“남부 스프링 필드에 피해가 심각하며 플라워 밸리 전체가 혼란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를 수습하고 자리를 채울 자들을 선정하심이 옳습니다.”

금방 와글와글 자신들의 빼앗길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혹은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떠들어 댔다.

특히.

“4황녀 전하의 죽음을 애도하고 지난 업적을 추모해야 함이 옳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처사가 과했음이니. 이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합니다.”

벌써부터 자신들의 죄를 부정하고 이를 황태자에게 씌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자들.

죄를 용서받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리 얼굴을 바꾸어 떠들어 댄단 말인가.

서기관의 얼굴에 혐오가 깃들었고 펜을 쥔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큼, 크흠.”

뒤에선 내시 하나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폐하의 은혜가 드넓으니 잘못한 자들은 엄하게 벌하셨고 죄 없는 자들을 구하셨다. 신하들 또한 지혜로움을 발휘하여 죄의 경중을 구별하라 청하니.

거기까지 적던 서기관이 결국 팬을 멈추었다.

문득 바라본 황좌.

몽롱한 표정으로 떠들어 대는 이들을 바라보는 황제와.

황제가 아닌 옆에 선 내시에게 제 사정을 살펴 주길 바라는 신하들이 튀겨 대는 침이 역겨웠다.

감히 존귀한 황제 폐하 옆에서 허연 얼굴을 치켜든 내시의 거만한 표정이 원통스러웠다.

서기관이 분이 가득한 얼굴로 울음을 삼키며 펜을 다시 들었고.

-현명하신 폐하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셨고. 죽은 딸, 4황녀 아멜리아의 죽음에 원통해 하셨더라.

황태자 아르한은 남부보다도 아래, 끝없는 수림이 펼쳐진 원시림으로 향하니, 다만 제국의 일을 돌보려-.

거기까지 적었을 때.

내시가 허연 얼굴을 들이밀며 무언가를 속삭였다.

어깨를 잡은 손과 귓가에 속삭이는 협박이 서기관을 흔들었고.

그가 적었던 글을 지우고는.

-황태자 아르한은 남부보다도 아래, 끝없는 수림이 펼쳐진 원시림으로 향하니, 다만 자신의 죄가 들킬까 염려하였더라.

고쳐 적었다.

그가 흘리는 비통한 눈물이 아롱져 실록 위, 기록된 거짓 위에 번져 갔다.

* * *

“전하? 전하.”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까?”

바이올렛의 걱정하는 얼굴이 보였다.

그 뒤 다른 이들의 얼굴들이 얼핏 보였다.

모두가 품고 있는 불안감.

잠시 숨을 내쉬고는.

“아니다.”

고개를 저었다.

방금 움직이는 운명을 보았다.

운명을 보는 눈이 맑아지며 멀리 떨어진 운명이 보였고.

저 먼 강철성, 진창 속에서 움직이는 구더기들의 소동을 느꼈다.

그 한가운데 놓여 있는 황제의 운명도.

점점 잠식되어 가는 운명 속, 흐린 표정을 하고 있을 그가 걱정이었다.

차라리 도망갔으면 싶었으나.

[대상이 강한 결의로 자리에 머무릅니다. 당신을 위한 운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운명 결의와 불굴이 새롭게 깃듭니다]

어찌 된 일인지 평생 도망만 다녔던 황제가 이번만큼은 스스로 남기로 결정했으니.

지켜보아야겠지.

주위를 감싼 놈들의 비열한 속셈에 바득바득 이가 갈렸으나 황제가 결정한 운명이다.

저렇게까지 견고한 결심으로 자리를 지키겠다 한 만큼 존중해야 한다.

그 또한 나의 뜻을 존중했고 끝까지 도와주었으니까.

내가 간섭할 수 있는 범위는 운명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까지.

직접 선택한 운명을 억지로 바꿀 순 없다.

억지로 뜯어낸 운명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니.

차라리 내 것이라면 포식이라도 하겠건만.

다만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개변 점수를 대상의 운명 결의와 불굴에 투자합니다. 상대의 정신이 조금 맑아집니다. 자신을 둘러싼 운명들을 밀어냅니다]

조금이라도 더 버텨 주길 바랄 뿐.

그렇게 멀리 떨어진 혈육, 아버지의 등을 받쳐 준 후.

“아하하하- 정말? 정말 그랬어?”

“그랬다니까요!”

“어머, 솔 마법사가 항상 고생이 많았군요.”

“솔이요? 마마, 절 솔이라 불러 주신 건가요?”

당장 앞에 있는 혈육들을 바라보았다.

참 기묘한 풍경이었다.

어머니와 유리엘, 솔이 같이 선 풍경.

주변에는 아직 어색한 표정의 고아들이 둘러앉았고.

솔의 너스레에 어머니와 유리엘이 웃는 사이.

아이들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그런 고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어머니와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쿠키를 나눠 주는 유리엘의 백금발이 찬란했다.

나와 같은 백금발이지만 참 따뜻하구나.

그렇게 잠시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오라버니?”

“태자.”

“전하!”

마침 나를 발견한 유리엘이 쪼르르 달려왔고.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난 고아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되었다.”

나를 마주한 고아들의 얼굴에 좀 더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이들이라도 구해서 다행이다.

잠시 유리엘의 말간 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떠나나요.”

어머니가 한결 차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이전 가득했던 불안함이 많이 사라진 표정.

아마.

“무사히 돌아와요.”

돌아오리라 믿는 거겠지.

그런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건강히 굳건히 잘 지내거라.”

“네, 오라버니.”

유리엘에게 인사를 남기며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피가 가득한 손을 굳이 아이의 순결한 머리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은 진창에 살아도 아이들은 깨끗한 것을 보아야지.

그리 뒤돌아서려 할 때.

손을 끄는 작은 힘을 느꼈고.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보드라운 감촉과 깨끗한 온기에 돌아보자.

“히, 꼭 무사히 돌아오셔요.”

오라비의 손에 머리를 집어 놓곤 배시시 웃는 동생의 표정에 내 얼굴에도 진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평소 얼굴에 띠는 웃음은 대부분 조소와 비소.

남들을 비웃고 깔아뭉갤 때 짓는 미소들.

이렇게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입꼬리의 어색한 움직임을 느끼길 잠시.

“다들 인사하자!”

유리엘의 외침에 자리에 있던 고아들이 머뭇거렸고.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갔다.

아이들의 머리 위에 축복하듯 손을 올리곤.

[대상의 운명에 개변 점수를 투자합니다]

하나, 하나 가장 미약한 운명에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유리엘의 운명 안전, 현명에 개변 점수를 투자합니다. 그녀를 감싼 운명의 변화가 조금 잠잠해집니다]

유리엘을 비롯하여 어머니의 운명 또한 축복했다.

비록 등을 받쳐 주는 것뿐이라 해도 지금 한 번만큼은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욕심을 부려 보았고.

마음에 싹트는 따뜻한 감정과는 달리.

“기다리지 마십시오.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간단한, 어찌 보면 차가운 인사 하나만을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 * *

단 한 번 뒤돌아보지 않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보는 이들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여전했다.

플라워 밸리에 가득했던 거짓 미소가 아닌 진짜 행복을 담은 미소.

점차 생생한 표정을 짓는 자들이 늘어가는 거리를.

황태자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걸었다.

이례적이었다.

평소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한 채 돌아다니던 황태자 뒤.

“전하께서 지나가시니 모두 예를 표하라!”

마치 전쟁이라도 나가듯 뒤에 늘어선 병력들이 살벌했다.

3, 4전투 마법사단과 청익 기사단을 비롯하여 사막의 전사들까지.

원래 사막 전사들은 예정에 없었으나 등대지기와 하란이 연이어 대규모 병력을 움직이느라 탈이 나는 바람에 함께하기로 했다.

여튼 덕분에 숫자가 크게 늘었고 모두 삼엄한 기세로 주변을 경계하며 플라워 밸리를 벗어난 뒤.

얼마 안 가 그들의 행군 소식이 곧 제국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남부 플라워 밸리에서 원시림까지 거리는 약 보름.

그중에서 며칠은 열차를 타고 이동했고 남은 날들은 지루한 행군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 경계선을 넘은 듯 순식간에 시야가 탁 트이는 평야가 끝났고.

습한 기운이 몰려오나 싶더니 금세 울창한 숲이 그들을 맞이했다.

억센 넝쿨과 빽빽한 나무 사이로 그들이 찬찬히 전진하는 중.

특히.

“아이쿠! 이게 뭐야.”

“정신들 차려! 여긴 사막이 아니다!”

사막 전사들이 완전히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곤 휘청였다.

물론 기사들과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

시야가 완전히 막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나.

“이쪽이에요.”

반대로 블러디는 제 세상이라는 듯 너무나 편하게 발을 옮겼다.

원시림에 사는 원주민, 엘프는 본래 숲의 축복을 받은 이들.

오만한 성정과 폐쇄적인 혈통주의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신비로운 이들로 여겨지는 이유.

거기에 외모까지 아름다우니 뭔 짓거리를 해도 신비롭게 보이는 건 덤.

물론.

“귀쟁이들은 아직인가.”

“설마 앞에서도 그럴 건 아니죠?”

“내 마음이지.”

황태자는 그런 것에 흔들릴 자가 아니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블러디의 눈가에 걱정이 어렸다.

황태자 못지않게 엘프들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알았기에.

어느 한쪽도 굽힐 성격이 아니었고 한쪽이 부러져야 끝날 일.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내심 대체 누가 이길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후텁지근한 숲을 얼마나 나아갔을까.

그 더운 사막을 제 집처럼 걸었던 전사들이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고.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두터운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이 주섬주섬 무장을 풀어헤쳤다.

그만큼 원시림의 환경은 지금껏 그들이 경험한 것과 차원이 달랐다.

모두가 서서히 지쳐 가는 와중.

“으하하하! 나는 몸이 없어서 덥지가 않거든!”

무명 기사가 당당히 제 굳건함을 과시했다.

잠깐이나마 그가 부러워지는 순간.

“쉬이-.”

문득 블러디가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순간.

원시림 전체가 스스스스, 기묘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참으로 신기했다.

지금까지 가까스로 뚫고 들어온 이 거친 원시림이 스스로 길을 내주듯 변하다니.

한결 편해진 걸음으로 황태자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섰고.

“원시림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일순간 시야가 탁 트이며 아름다운 풍광이 그들을 압도했다.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엘프의 마을.

자란 나무 그대로 집이 되었고, 어디선가 불어온 상쾌한 산들바람이 끈적한 땀을 씻겨 주었다.

돌아다니는 이들 중 아름답지 않은 이가 없었고.

탄탄하며 길쭉한 몸에선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을 살지만 늙지 않으니.

무한한 힘을 축적한다던가.

곧 새로운 손님을 본 엘프들이 자리에 멈추어 속닥였고.

몇몇이 블러디를 알아보기도 전.

황태자가 당당히 앞으로 나서며 온몸에 불을 휘감았다.

타타타타타타.

적염 사이 잘게 터지는 초적염이 아름다웠고.

곧 그가 뿜어낸 광염이 주변 가득했던 엘프들의 생기를 내리눌렀다.

황태자가 사납게 미소 지으며.

“귀쟁이들, 가면을 벗어라.”

엘프들을 향해 모욕을 건네니.

그들의 얼굴에 깃든 찬란한 생명력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분명 같은 얼굴인데 다른 얼굴.

방금 그 순수했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살벌하고 오만하며 사람을 벌레 보듯 보는 표정이 자리했다.

이게 그들의 실체.

더군다나.

“어디, 너희들의 원수이자 영광을 빼앗아 간 혈통이 왔는데 환영식이 고작 이 정도인가?”

별거 없네 엘프도.

황태자가 툭 던진 말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살기가 사방에서 솟아올랐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켜켜이 쌓인, 오래 묵은 진득하고 너저분하며 부글부글 악취를 뿜어내는 듯한 살기가.

물론 이를 마주한 황태자는.

어느 때보다 진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인정하자.

따스한 미소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짓는 이 살기와 광기가 그득한 미소가 본래 황태자의 미소.

그가 활짝 웃으며 불을 퍼트렸고.

엘프들의 마을이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신비를 훔쳐 간 건국제의 후손이 왔다! 숲 미치광이들아!”

이지러지는 불을 타고 황태자의 목소리가 화르르 타올랐고.

그를 마주 보는 엘프들의 미끈한 얼굴이 번들거리며 살기를 뚝뚝 흘렸다.

신비를 키우는 이들과 그 신비를 탈취하여 그들을 몰아낸 후손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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