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사과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
숲 미치광이.
먼 옛날 엘프들을 일컬어 불렀던 멸칭.
물론 이를 입에 올렸던 자들은 모두 엘프들에게 추살당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잊혀진 단어.
실로 오랜만에 듣는 지독한 모욕에 엘프들의 얼굴이 고목처럼 굳었다.
심지어 엘프 중에서 어린 이들은 숲 미치광이라는 단어를 모를진대도 깊은 불쾌감을 느꼈다.
저 깨끗한 백금발을 보는 순간부터 그랬다.
심지어 지금 뿜어내는 불은 그들의 숲을 휘감은 채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니.
그 모습이 마치 조롱하는 것 같았다.
본디 성정이 오만하고 괴팍한 엘프들이라곤 해도 처음부터 모두를 배척하진 않는다.
속으론 상대를 깔보더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더군다나 여긴 원시림 초입에 위치한 마을.
여기 사는 이들은 인간에 대한 호의와 엘프의 전형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베테랑들.
신비로운 숲의 관리자라는 직함을 연기하기 위해 훈련받은 정예들이나 마찬가지.
허나 오랜 세월 가면을 써 온 그들마저도 황태자의 도발엔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황태자는 엘프들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과 말로 단번에 엘프들의 가면을 벗겨 버리고는 홀로 웃었다.
찐득한 분노와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이였다.
스스로가 가장 오롯하며 오만하고 귀한 존재.
남들의 불쾌함 따위 알 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뭐냐, 연기를 제대로 못 하면 혹시 혀라도 잘리는 건가? 숲 미치광이, 귀쟁이, 신비 재배자, 신비 도둑들아. 언제까지 그렇게 입 꽉 다물고 있을 것이냐.”
재미없게.
황태자는 그들의 반응이 미지근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아무래도 불만족스러운 모양.
기껏 제대로 도발을 걸었건만 딱딱하게 굳어 살기만 쏟아 내고 있으면 일이 되질 않으니까.
그가 원한 건.
“너희들의 원수를 보고 달려들 생각도 없는 건가?”
피와 죽음.
엘프들이 황태자의 도발에 못 견뎌 달려들길 바랐더랬다.
그래야 놈들의 대갈통을 깨고 오만을 징치할 테니까.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어떻게 해야 여기 있는 놈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까.
못된 생각을 품는 동안.
“그 멸칭은 누구에게 들었지.”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 채 서늘한 시선을 보내던 엘프 중 하나가 꽉 막힌 목소리를 내었다.
앞으로 나서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모양.
금 간 평정, 살기가 부스스 떨어지는 얼굴로 물어왔다.
* * *
“주인의 신비를 빼앗다 못해 주인들을 몰아낸 이에게 들었지.”
“…탈취자에게 들었다? 그는 죽은 지 오래되었을 텐데.”
“말은 바로 해야지. 탈취자가 아니라 해방자이자 건국제다.”
내 정정에 엘프들의 얼굴에 꿈틀꿈틀 분노가 피어났다.
그래, 본래 인간들은 악마와 이종족의 노리개이자 노예였다.
그중에서도 남부 엘프들은 사람을 길러 신비를 잉태시키고 이를 수확했다던가.
흔히.
“왜, 고작 신비 노리개들이 이리 활개 치는 모습이 눈에 걸리나?”
인간을 신비 노리개, 신비 재배지라 불러왔다.
건국제, 과거 엘프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신비 재배지이자 노리개였던 이에게 들었던 역사는 끔찍했다.
진생철퇴에 들은 파사의 힘을 얻은 후.
남부로 오는 길에 꿈에서 보았던 건국제의 환상.
과거 북부에선 에스키모와 싸웠던 시절 그대로.
서부 사막에선 별빛으로 이루어진 형상이었다면.
이번 꿈에서 만난 그는 젊고 앳된 얼굴로 등장했다.
“그래, 엘프들이라. 놈들이 요즘은 숲의 관리자라 불린다지. 그 오만하고 괴랄한 놈들이?”
얼굴은 어렸으나 표정은 다 산 늙은이의 것과 같이 씁쓸했고 회한이 가득했다.
과거를 떠올리듯 아련한 시선으로 멀리 바라보자.
주변 풍경이 뒤바뀌었다.
깊은 숲, 문명이 세워지기 이전의 세상.
환상일까, 아니면 염료로 그린 추억일까.
흐릿한 그림들이 점차 뚜렷해졌고.
이내 인간들의 괴로워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본래 인간은 한낮 노리개에 불과했지. 악마들에겐 두려움과 공포로 배를 불려 주었고 거인들은 인간의 피와 살을 간식처럼 먹어 대었어.”
악마가 인간들의 두려움을 마시며 춤을 추는 모습, 거인이 거대한 입을 쩍 벌려 누런 이빨 사이로 사람들을 욱여넣는 모습이 징그러웠다.
“그중에서도 엘프들, 숲 미치광이들은 인간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해 왔지. 어쩌면 더 악랄하게 말이야.”
건국제가 겪었던 일들을 직접 그림으로 풀어내었다.
아, 어쩌면 깊은 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풍경이 이랬을지도 모르겠다.
동화의 내용이 끔찍해서 문제였지만.
숲 미치광이들이 인간들을 이용하는 방식은 퍽 특이했다.
“놈들은 고자나 다름없지. 신비를 잉태하지 못하는 고자.”
엘프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수와 젊음이라는 신비를 갖고 태어났고.
혜택에 대한 반동일까, 놈들은 다른 신비를 잉태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기예를 닦아 보아도, 극한의 상황에 놓여도.
절대 다른 신비를 품지 못하였다.
참으로 슬픈 일.
심지어 저 악마들도 제 신비를 자랑하며 대륙을 희롱하건만.
오만한 성정이 자신들의 결점을 인정할 리 없었고.
떠올린 해결책이 바로.
“그래서 인간에게 신비를 위탁했지. 참 비겁한 놈들이야. 짧은 생을 대신하여 어떤 종족보다도 쉬이 신비를 품는 인간에게 신비의 씨앗을 심고선 이를 거두었다.”
그리곤 수확한 신비를 저들이 키워 냈지.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은 비극적인 역사.
“우리가 누렸던 문명의 역사보다 더 긴 세월을 그렇게 지냈다. 엘프들을 대신해 신비를 잉태했고, 비참하게 빼앗겼다. 참 철두철미했어.”
이어 건국제가 보여 주는 풍경들에 몸을 떨었다.
메마른 얼굴을 한 엘프들이 인간들을 험지로 몰아넣었고 온갖 시험과 고난을 내렸다.
와중 많은 이가 죽었으나.
신비를 품지 못한 자들의 생명은 돌볼 가치조차 없었다.
처음엔 대부분이 죽어 나갔고 살아 있는 자들도 멀쩡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신비를 피워 내지 못했다.
엘프들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더 커다란 신비를 품을까?
마치 지금 인간이 땅을 보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알곡을 얻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숲 미치광이들은 인간을 보며 같은 고민과 여러 실험을 이어 갔고.
재능에 대해 깨달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들은 재능이란 관념이 없었다.
“놈들은 그저 오랜 세월을 살아가니까. 세월만큼 휘두르면 결국 오르는 게 경지지.”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느리게 도착하지만, 결국 모두가 도착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100년이고 200년이고 휘두르다 보면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마나를 쌓다 보면 깨달음 없이도 써클이 열렸다.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신비를 잉태하진 못해도 경지를 이룰 재능은 되었다.
하여 간절함이 없었다.
그런데 인간은 달랐다.
짧은 생, 먼저 출발하고 먼저 도착하고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짧은 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많아 간절함이 컸다.
그리하여.
“미치광이들이 새로운 조련법을 떠올렸다. 인간에게 저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지. 재능에 따라서. 참 웃긴 일이지? 인간에게 능력을 쥐여 준 이유치고는.”
검을 잘 쓰는 자에겐 검을, 마나를 쉽게 느끼는 자에겐 마법을, 자연과 교감하는 자에겐 정령을, 손재주가 뛰어난 이들에겐 기술을.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삶은 짧다.
고작 인간의 재능으로는 자신들이 쌓아 온 세월을 극복할 수 없다.
심지어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은 알려 주지 않았고 틈만 나면 고난으로 내몰았다.
많은 이가 죽어 갔으나 배운 만큼 신비를 품은 이들 또한 늘어 갔다.
놀라운 수확.
엘프들의 나무가 풍성해졌고 신비를 이용하여 자신들을 몰아세웠던 거인들과 악마들을 물리쳤다.
연이은 승리에 오만한 성정이 더욱 오만해졌고.
마침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놈들은 생각했던 거지. 어쩌면 인간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것인 줄도 모르고.”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한 엘프들이 오랫동안 이어 온 철저한 관리를 느슨히 풀었고.
인간들 중 재능은 있으나 신비를 품지 못한 자들을 선발하여 직접 다른 인간들을 가르치게 했다.
참 쉬웠다.
자신들은 나설 것도 없이 인간이 인간을 기르고 그들을 전쟁에 내보내어 신비를 얻은 자를 불러 그 신비를 취하는 과정이.
그리곤 이를 갖고 소중히 키워 엘프들의 힘으로 만드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편함과 즐거움, 오만은 눈을 가리는 법.
“놈들은 몰랐던 거지. 인간들이 짧은 인생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얼마나 들불처럼 번져 나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건국제의 얼굴이 더욱 앳되었다.
이젠 소년의 모습.
태어난 순간부터 자유는 없다.
엘프들의 재배지로서 키워진다.
그래도 그는 특별했다.
누구보다 재능이 있었으니까.
엘프들 사이에서도 저 어린 인간이 품을 신비가 기대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
그렇게 그가 처음 신비의 씨앗을 마음에 품은 순간.
“아이야, 아이야. 인간의, 인간의 자유를 위해 싸워 다오. 네 불꽃을 우리가 지키겠다.”
“들어라, 네가 품을 신비는 우리가 숨겨 온 오랜 전승이다. 저 엘프들은 따라 하지 못할, 인간의 삶을 똑 닮은 신비이며 비밀리에 이어진 희망이란다.”
그를 가르쳤던 스승들이 나섰고.
주변에 가득했던 동료들이 나섰고.
그보다 먼저 신비를 품었던 이들이 남긴 지혜가 놀라웠다.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해방을 꿈꾸며 켜켜이 쌓아 왔던 노력과 희생이 많았다.
인간의 삶은 덧없이 짧았으나 이어지는 의지만은 길고 뜨거우니.
준비는 끝났다.
인간들은 한 점의 불씨를 바랐고.
당대 가장 재능 있던 자, 모든 고난을 뚫고 영웅이 된 소년은 그렇게.
해방자 카이론이 되었다.
그를 따라 인간들이 산불처럼 일어나 숲을 태웠다.
모두가 그의 앞을 지켜 주었듯.
“직접 엘프들의 목을 치고 또 쳐냈다. 징그러운 싸움이었지.”
이번엔 그가 모두의 앞에 섰다.
그리고 여기서 든 의문 한 가지.
“그럼 꼰대는 왜 엘프들을 살려 둔 겁니까. 다 죽이지 않고.”
건국제는 이전 많은 영웅들이 실패했던 업적을 이룰 만큼 강했으면서 왜 엘프들을 살려 두었는가.
충분히 멸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연한 물음에.
건국제가.
“놈들이 당한 만큼 돌려주어야지.”
어디선가 자주 보았던 미소를 띄워 올렸다.
지독한 조소와 광소.
의미를 알아채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살 만한 대가를 지불한 겁니까.”
“그래, 맹약했다. 우리가 놈들의 신비 재배지가 되었던 것처럼 그 고약한 숲 미치광이 녀석들은 우리의 방파제가 되어 주기로 했거든. 멸망하지 않는 대가로.”
“곤충에게서요?”
“맞다. 놈들이 살던 숲을 평원으로 만들고 덥고 끔찍한 원시림으로 집어넣었다. 그곳에서 평생 그 긴 세월 동안 인간의 발전을 보며 후회하라고. 그리 무시했던 인간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호령하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인간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바라만 보라고.
그리 말하는 건국제의 눈가에 번지는 광기가 붉었다.
과거의 원한에 깊이 빠졌는지 그가 얼굴을 주무르길 잠시.
“그들이 만들어 낸 곤충, 인섹터에게서 우리의 곡식 창고를 지키는 것이 놈들과 맺은 언약이다. 그러니 가서 분명히 전해라. 너희의 임무를 다하라고.”
“독충들 또한 그들이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래, 인간들을 위한 고난이었지. 지금은 저들의 고난이 되었지만.”
“맹약을 어긴 대가는 무엇입니까?”
“네가 품은 불꽃 속에 이미 모든 답이 들어 있단다.”
건국제가 나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맑게 웃었다.
번지는 미소가 산불과 같이 뜨거웠고.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기억들과 맹세한 약속이 심장의 고동을 타고 선명히 번져 나갔다.
아아, 그래, 그렇구나.
그의 말대로였다.
이미 내 심장에 담긴 불은 맹약을 어긴 대가를 어떻게 받아 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이젠 나도 알았고.
“가서 보여 주어라, 네가 나의 후손임을. 너에겐, 나의 후손이자 죽어 간 이들의 후손인 너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자비로서 남겨놓은 신비들과 이를 보관하는 신비 보관대 또한 불태워 버리겠다고 경고해라.”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죠.”
그렇게 오랜 선조와 오랜 후손이 서로 같은 뜻을 품고는 미소지을 때.
문득 의문 하나가 치밀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이렇게 큰 걸 좋아하는 겁니까. 대체 저 빌어먹을 철퇴는 어떻게 옮기라고 저따위로 크게 만든 거예요?”
“응? 진생철퇴 말이냐? 멋있잖냐. 난 잘만 들고 다녔는데? 떼이잉-! 설마 요즘 것들은 비리비리해서 저만한 거 하나 못 들고 다니는 거냐?”
“저렇게 무식하게 큰 걸 왜 들고 다닙니까.”
“이 녀석아. 나 때는 커다란 게 최고였어! 산만 한 거인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악마들의 몸통을 찢으려면 큰 게 최고였단 말이다.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잔소리는… 나중에 봐라. 우리 선조님이 다 뜻이 있으셨구나! 감탄할 테니!”
“솔직히 답해 봐요. 큰 거 고집하는 거 콤플렉스죠?”
“아냐! 안 작아!”
“뭐가 작다 했는데요?”
“아, 아무튼 안 작아! 너 이 못된 후손 놈 같으니 일로 와서 앉아 봐라! 설교가 더 필요하겠어! 내 우람함을 보면 절로 고개 숙인 남자가-.”
이후로도 홀로 난리 치는 건국제를 그대로 둔 채 꿈에서 깼다.
마지막 발언들은 잊자.
* * *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황태자의 입가가 심술궂게 뒤틀렸고.
건국제에게 들었던 역사를 찬찬히 풀어 설명했다.
자리에 있던 인간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블러디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슬픔이.
엘프들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황태자의 말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지.”
튀어나온 엘프의 말은 참으로 무감각했다.
사실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아닌 결론을 내놓으라는 듯 물끄러미 황태자를 바라볼 뿐.
“결국 너희들은 우리의 기술로 문명을 이루었고 신비를 가져갔지. 우리는 그 대가로 이 습한 땅에서 곤충들을 막고 있고. 결론은 나지 않았나.”
이미 끝난 이야기다.
심지어.
“그래도 카이론의 불을 잘 보관하고 있다니 놀랍군. 분명 황가는 이를 잊었다고 들었는데. 으음, 그의 불 전부는 아니지만 매우 흡사해.”
“건국제를 보았나?”
“싸우기도 했지. 가르치기도 했고.”
놈은 건국제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이.
분명 인간을 노예처럼 부린 기억이 있을 터.
허나 죄책감 하나 없었고.
황태자 또한.
“좋아, 과거의 일은 잊어야지. 오래된 역사로 따지면 세상에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갈 자가 어디 있겠어.”
생각 외로 쉽게 납득했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로.
그러나 곧.
“근데 한 가지 확실하게 넘겨짚고 가자.”
황태자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리에 있는 엘프들을 훑어보곤.
“난 사과를 못 받았는데. 누구 마음대로 결론을 맺어.”
거친 살기를 쏟아 냈다.
치욕을 당한 세월이 얼마인데.
죽은 사람이 얼마인데.
감히 결론을 입에 담는가.
“결론은 내가, 제국의 황태자이자, 건국제의 후손인 내가 내린다. 이 귀쟁이 새끼들아.”
그의 당당한 발언에 인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엘프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의 사과를 받아야겠다. 가장 아름다운 나무, 그곳에 너희들의 잘못과 사과를 구구절절이 적어라. 그리하면 살려 주지. 아 마지막 줄에 ‘신비 고자 새끼들 올림’도 잊지 말고.”
어느새 귀쟁이에서 고자로 위상이 격하되었고.
드디어 엘프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들이 일제히 황태자를 향해 무기를 겨누자.
뒤에 선 인간들이 엘프들에 맞서려 했다.
과거 있었던 싸움을 재현하려는 모습.
그리고 그때와 다르게 인간을 지키려는 것이 아닌 이번엔 사과를 받으러 온 황태자가 거검으로 달려드는 엘프들을 가르려다 말고 멈추었다.
아니, 모두가 멈추었다.
파르르르르르.
어디선가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날개 떨리는 소리다.
한둘이 아닌 듯 거대한 울림이 되어 진동했고.
곧 수림 위.
“인섹터다!”
“곤충이다! 모두 전투 준비!”
엘프들의 피와 살을 노리는 벌레들이 등장했다.
하늘을 올려다본 황태자가.
“실드 전개. 보호 범위는.”
인간만.
얄밉게도 펼쳤던 모든 신비를 거두어 딱 제 사람들만을 보호하며.
“선택해. 뒈질래. 사과할래?”
선택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