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22화 (122/200)

122화 단풍

숲 전체를 태웠던 불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생명력 넘쳤던 숲이 어느새 메마른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덮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찌 된 일인가.

분명 이 숲은 엘프들의 손길로 돌보았건만.

어떤 비에도, 어떤 건기에도 잎이 시들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전투 준비! 모두 나무둥치 안으로 들어가!”

“안에서 대형을 갖춰라.”

그들을 보호해 줄 생명력이 일제히 사라졌다.

“불! 불 때문이야! 불 때문이라고!”

막 몰아치려는 곤충들을 피해 나무 안으로 들어가던 엘프 하나가 황태자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이 모든 원인은 저기 저 불길한 미소를 지은 채 선 자 때문.

하나가 고함치자 모두가 황태자를 노려보았고.

그가 모두의 시선을 즐기며.

“선택해. 뒈질래. 사과할래?”

뻔뻔하게도 선택을 강요했다.

물론 사과할 마음이 없는 엘프들은 말없이 나무 안으로 들어갔을 뿐

메마른 나무 안 원망으로 빛나는 엘프들의 눈동자와 그들을 삼키러 내리치는 곤충들의 날갯짓 아래에서.

황태자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 * *

맞다, 모두 내 의도다.

이를 알아채다니, 역시 오래 산 만큼 멍청하진 않다는 걸까.

근데, 뭐 어쩌라고.

그러한 뻔뻔함을 담아 나를 쏘아보는 놈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내가 의도한 일이라면 너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물음을 담아.

방금 그러지 않았는가.

어쩌라는 거냐고.

인간에게 행했던 비극적 역사는 지나간 일이니, 결론이 났으니 더 할 말이 없다고.

하여 나 또한 할 말이 없기에.

곤충들을 불러 모았다.

숲에 일어난 불은 어디서든 잘 보였을 터.

자신들이 침범할 땅임을 알아채곤 몰려왔겠지.

이후는 간단했다.

[신비 염제심결이 숲에 깃든 짙은 생명력을 잡아먹습니다. 생명력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선택할 기회를 주었고 놈들의 선택에 따라 합당한 결과를 내렸다.

그들이 키워 온 숲의 생명력을 앗아 갔고.

위를 덮은 지붕을 치우자 곤충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만일 놈들이 사과하겠다 순순히 답했다면 오히려 숲에 생명력을 더해 주었겠지.

진생철퇴의 운명을 쥐며 몸에 깃든 힘은 파사가 끝이 아니니.

[진생철퇴의 운명 그릇에 얻은 생명력을 담습니다]

진생철퇴의 커다란 크기는 단순히 적을 분쇄하기 위함뿐만은 아니었다.

바로 불이 빨아들인 적들의 생명력, 피, 악함을 담기 위한 그릇.

실제로.

[진생철퇴 운명 연옥에 담긴 알리굴의 악의 중 일부가 생명력으로 변하였습니다]

이전 플라워 밸리에서 잡아넣은 알리굴 또한 진생철퇴 속에서 참회하는 모양.

놈의 힘 일부가 생명력이 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워 더욱 즐거이 웃으려니.

“전하, 전하! 살려 주세요. 제발 제가 사과할게요.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제발!”

블러디의 애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벌써 안으로 들이닥친 독충들이 숲을 누비며 엘프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고.

숲이란 보호막을 잃은 엘프들이 나무 깊은 곳에 숨어 분투했으나.

독충들의 단단한 갑피와 턱은 마른 나무 채로 엘프들을 씹어 버릴 정도.

싸움이 처절했다.

그 오랜 시간 연마했다던 기예를 펼쳐 맞섰으나 독충의 숫자가 너무 압도적이었고.

몇몇 신비를 지닌 이들이 힘을 다했으나 전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엘프들이 밀리기 시작.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중에.

“제발! 살려 주세요! 죄송해요. 그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어요.”

학살을 배경 삼아 한 하프 엘프가 인간에게 간절히 청하는 모습이 아롱졌다.

흐르는 눈물에 붉은 눈이 보석처럼 빛나니.

붉은 석류라는 말이 퍽 어울리는 얼굴.

그 애절한 모습에 많은 이가 측은함을 느꼈으나.

“너의 사과는 이미 끝난 일. 네가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모두가 죽어요.”

“블러디, 기억해라.”

내가 듣기에도 차가운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황태자로서 난 제국민만을 보살핀다. 말했지, 엘프 모두보다 제국민 하나가 더 소중하다고. 내가 여기 온 것은 너의 간청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야에 위협이 되기에, 더 나아가 제국민의 먹을거리를 위협하는 놈들이기에 온 것이다. 내 발걸음에 엘프들을 향한 자비는 없다. 나에게 자비를 구걸하지 마라.”

엘프 모두보다 제국민 하나가 더 소중하다고.

여기에 온 이유는 제국의 안녕을 위함이라고.

“나는 세상의 구원자가 아닌 제국의 황태자다.”

확고한 사실에 블러디가 입을 다물었고 뒤에 선 자들이 굳건한 표정으로 나의 뜻을 존중했다.

착각하나 본데, 나는 자선 사업가도, 성자도, 오지랖 넓은 영웅도 아니다.

고귀하며 오만한 제국의 황태자.

정의와 인정은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날 움직이게 하는 건 패악과 광기.

태생부터가 폭군이니, 최근 누군가를 좀 구해 주었다 해서 근본이 어디 가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원은 심판에서부터 오는 법이지.”

내가 살기 위해, 제국을 살리기 위해선 썩은 부분을 정화하고, 태우고, 부수고, 죽여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의무이며 신비가 지닌 책임.

필연적으로 피와 고름, 죽음이 함께하는 길.

울리는 엘프들의 비명과 독충들의 괴성 사이.

새까맣게 죽어 가는 나무와 널브러진 시체들이 가득한 가운데.

“블러디, 내가 너희들을 구원할 거라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알려 주지. 착각에서 깨도록.”

순진한 하프 엘프를 착각에서 일깨웠다.

뒤에 선 자들의 착각을 깨부쉈다.

이 멀리 떨어진 원시림까지 고귀한 발걸음을 옮긴 이유.

“난 재앙이며 심판자이다. 엘프들은 선택해야 할 거야.”

종족의 멸절과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살아갈 삶 중에.

아무런 대가 없이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놈들은.

“죽음을 택한 이들이라면 죽어야지.”

죽음을 택했다.

하여 두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게 울부짖어도, 아무리 처절하게 싸워도 그저 지켜만 보았다.

과거 인간들이 죽어 갈 때 놈들도 그러했으니까.

야만스러운 거인들과 악마들을 상대하여 처절히 죽어 가는 인간들을 보며 신비를 이루어 내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외면했으니까.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다.

다만 항상 피해자가 같으리란 법은 없지.

차가운 눈동자에 죽어 가는 숲이 생생히 틀어박혔다.

싸움은 길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엘프들이지만 결국 곤충들의 압도적인 숫자가 쌓은 세월을 이겨 냈고.

마지막.

“흐악! 흐아악!”

홀로 남은 엘프 하나가 온몸이 검푸르게 중독된 채로 검과 마나를 휘둘러댔다.

주변에 가득한 독충들이 그를 희롱하듯 휘도는 중.

점점 몸이 굳어 가는 중에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는 엘프의 정신력이 고결했으나.

“말해 봐라. 그 수많은 인간 중 얼마나 너희처럼 죽어 갔지?”

“…크아악!”

“얼마나 많은 이가 너희가 만들어 낸 이 독충들에게 죽어 갔는가.”

“으흐흐- 으흐흐흐-!”

계속되는 독충들의 공격과 이보다 더욱 깊게 심장을 찔러대는 물음에 정신이 나갔는지 엘프가 웃기 시작했다.

“몇천 년의 세월이었다. 그딴 걸 세 보았을 리가. 당시 너희들의 목숨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하였거든.”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한 자들에게 패배하여 이리 숲속에 갇혔나? 업보로군, 고자.”

“인간 주제에! 감히!”

엘프가 눈앞에 가득한 독충보다 나의 조롱이 더 신경 쓰였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집어 던졌다.

빛살처럼 날아온 검에 모두가 놀랐으나.

[당신의 운명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놈이 던진 검은 나의 운명을 뒤바꾸지 못하니.

“두어라.”

콰드득, 힘이 모두 빠져 실드조차 깨지 못했다.

다만 악에 받쳐.

“그래! 인간들은 가축에 불과했다! 너희는 제 살을 내어주는 가축에게 사과하는가? 너희는 우리에게 신비를 내어주는 가축에 불과했단 말이다! 카이론! 카이론! 카이론! 네가 모든 걸 망쳤다! 모든 걸 망쳤어! 이 빌어먹을 배은망덕한 인간 놈! 인간이 감히 엘프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답하는 세월이 얼마나 갈 것 같아!”

끝까지 모든 잘못을 건국제에게 돌렸고.

“너희들의 영광은 잠깐일 뿐이야! 반드시, 반드시 과거의 영광이 찾아오리라!”

마지막 장렬한 외침과 함께.

푸욱, 독충의 독침이 놈의 가슴을 깊게 찌르고 나서야 피거품을 뿜어내며 쓰러졌다.

“저게 엘프들의 본성이다.”

감상은 짧았다.

나 또한 놈들의 오만을 익히 알았다.

전생, 남부를 점령한 악마들.

그 전에 드넓은 평야를 먼저 망쳐 놓은 자들이 있었다.

바로 엘프들.

놈들은 야비하게도 제국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건국제와 맺었던 맹약을 깨 버렸고 곤충들을 밖으로 몰아 제국의 먹을거리를 망쳐 놓았다.

평야에 머무는 곤충들을 몰아내 주는 대가로 과거의 영토를 주장했다.

생각해 보니 참으로 고됐구나.

플라워 밸리는 밤하늘에 찌들어 기능을 상실, 평야엔 징그러운 독충들이 가득했고.

엘프들은 과거의 맹약을 깬 주제에 오만한 표정으로 제국민들의 목숨줄을 쥐고 협박하니.

이미 끝난 결론이라고? 개소리.

너희들이 벌일 미래를 아는데 어떻게 끝난 일이란 말인가.

잠시 충격에 휩싸인 이들이 자신들이 알던 엘프에 관한 관념들을 고치는 사이.

우우우웅.

* * *

제 배를 채운 독충들이 이번엔 인간들을 향해 눈을 돌렸고.

기사들과 마법사들, 사막의 전사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방금 보지 않았던가.

그 날카로운 검과 화려한 마법, 이젠 드물다 일컬어지는 정령을 사용하던 엘프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찢겨 죽었는지.

분명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기사단, 마법사단 간부들 못지않았는데도.

다만.

“쯧, 역시 버러지들답구나.”

황태자는 그러한 독충들의 식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찰 뿐.

겸사겸사.

“겁먹지 마라. 대체 제국의 정예라는 자들이 이리 담이 작아서야. 남부 평야에서 뭘 배운 거냐.”

뒤에선 이들에게도 한 소리 했다.

그래도 황태자를 모시는 이들이 적을 보고 겁을 먹다니.

기사도와 마나에 대한 맹세, 이전 흑해에서 보았던 기개는 어디 갔냐고.

잔소리하려다 문득.

어디서 많이 본 꼰대와 닮아 간다고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신비를 이어받은 거로 족하다.

그의 잔소리까지 이어받을 필요는 없겠지.

쓸어 보는 눈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눈을 피하며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결국 보여 주어야 믿겠구나.

그리 생각한 황태자가 홀로 실드를 벗어나 독충들을 마주했다.

“전하! 위험합니다!”

“전하!”

“잠시만요!”

항상 뒤에서 따랐던 안드레, 솔, 바이올렛을 비롯하여 이엘이 옆에 섰고.

“그대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

황태자의 물음에.

“외로워서요. 외로워 보이셔서요.”

홍련의 족장이 알 수 없는 대답으로 응수했다.

생각해 보니 자연스럽게 사막 전사들 사이에 섞여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다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껏 그녀가 조용히 있었던 탓.

황태자가 이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막 통치에 문제만 없게 하도록.”

“네, 전하.”

결국 옆에 머무는 걸 허락했고.

그제야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 잠깐 사이 파르르르 날개를 떨어대던 독충들이 대화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고.

“나름대로 예의가 있는 버러지들이로구나.”

황태자가 그들의 예의를 칭찬이라도 하듯.

짜악-!

양손을 거세게 맞부딪혔다.

눈앞을 가득 메운 독충들을 앞에 둔 것 치고는 너무나 미약한 손짓.

과거 수도에서 만난 말벌들을 상대로 피워 냈던 불 밧줄을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고작 이런 박수가 저 독충들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감상은 거기까지.

“어?”

“이건?”

박수에 이어 황태자를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진동에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익숙함을 느끼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남부에서 느꼈다.

플라워 밸리에서 전투가 일어났던 날.

남부 전체를 뒤흔들었던 진동!

규모는 작았으나 마나를 넘어 정신마저 뒤흔드는 감각만큼은 같았고.

터져 나온 파장이 마법사, 기사, 전사들을 넘어 달려오는 독충들까지 삼키자.

키에에에엑!

참으로 믿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졌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심지어 건국제를 가르쳤다던 엘프마저 뜯어먹었던 독충들이.

황태자가 친 손뼉 한 번에 바닥에 나뒹굴며 고통을 호소했다.

단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그 풍경이 감격스러웠던 걸까.

“그렇지. 버러지들은 바닥에서 굴러야지.”

황태자가 선연히 미소를 지으며 연이어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때마다 퍼 져나오는 충격파에.

독충들이 독물을 게워 내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

마치 그의 손바닥 사이에서 놀아나는 듯 보일 정도.

그렇게 얼마나 찬사를 보냈을까.

황태자가 손뼉을 멈추었을 땐 이미 모든 독충이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뒤였다.

“정리하도록.”

이후 처리는 간단했다.

이미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곤충들을 죽이기만 하면 될 뿐.

그런데.

“으윽, 이거 왜 이렇게 안 잘려?”

“눈, 눈을 노려 찔러.”

“이봐! 망치 없어? 뭐 단단한 것 좀 줘.”

그마저도 쉽지 않아 다들 낑낑대며 곤충들의 연약한 살을 찾아 검을 찔러 넣거나.

그것마저 싫은 자들은 단단한 물건으로 머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그러다가 문득.

만일 놈들이 멀쩡했다면 어떨까 가정을 떠올려 봤고.

금세 돋아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비단 한 명만이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이 단단한 갑피를 가르기도 쉽지 않은데 끝에 달린 독침들과 날카로운 이빨을 보자 자신감이 뚝뚝 떨어져 나갈 정도.

만일 황태자 전하 없이 평야에서 이들을 맞이했다면?

“제국의 위기였겠군.”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가 벌레 사이를 태연히 걸어 아직 쌕쌕 숨을 내쉬고 있는 엘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푸르딩딩한 얼굴을 마주보기 잠시.

“블러디.”

모두 죽어 버린 마을을 보며 망연자실해 있는 블러디를 불러.

“마주해라, 진실을.”

굳이 자신의 옆에 세웠고.

“죽어 가는 고목아. 여기 선 어린 엘프에게 해 줄 말은 없나? 그래도 너희의 죽음을 아파한다만.”

넌지시 건넨 말에.

“하! 엘프? 저 더러운 년을 엘프라 지칭한 거냐? 미친놈!”

건국제를 가르쳤다던 오래 산 엘프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표독스레 외쳤다.

독에 불어 터진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독살스런 마음 때문인지 참으로 추레했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블러디를 쏘아보며.

“이 빌어먹을 년, 역시 인간의 피를 이어받은 녀석들을 살려 두어선 안 되었건만! 인간에게 붙어먹은 게야! 넌 엘프도 인간도 아닌 잡종이다! 옆에 있는 저 괴물 같은 자에게도 버림을 받고야 말 거다! ”

마지막까지 저주를 퍼붓고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고.

블러디는 그런 그를 아픈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아마 이러한 취급이 익숙해서였으리라.

다만 황태자는 외인이었기에 다른 가정을 입에 올렸다.

“너희가 다음으로 선택한 신비 재배지가 이 불쌍한 아이들이로구나.”

“……!”

“…….”

순간 장내의 공기가 차갑게 굳었다.

신비 재배지라면 방금 들었던 아픈 역사의 단면 아닌가.

그게 왜 지금?

“이 개같은 새끼들. 너희 엘프들은 아직도 신비에 대한 욕심을 못 버리고 또 다른 희생자들을 찾고 있었구나.”

황태자의 으르릉거리듯 뇌까리는 물음에.

“…프흐. 너희들의 세상은… 잠깐일… 뿐.”

놈이 미소로 긍정하곤 숨을 거두었다.

황태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곤 그대로 놈의 목을 쳐냈고.

“아아, 아아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블러디의 몸을 붙잡고선.

“돌봐라. 이대로는 미칠지도 모른다.”

이엘과 바이올렛에게 넋을 놓기 시작한 가련한 하프 엘프를 맡겼다.

문득, 보이는 풍경 모두가 역겨웠다.

갑작스런 곤충들의 발호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가.

이 깊디깊은, 습기 가득한 음침한 숲에선 어떤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가.

너무나 오래 쌓인 욕망과 비열함이 마치 생명을 얻은 듯 깊게, 깊게도 황태자의 폐 속을 파고들었고.

이에 그가.

“엘프들아. 너희는 오랜 맹약을 저버렸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했다. 너희는 명분을 잃었고, 나의 신비는 명분을 얻었다.”

맹약을 어긴 대가로 너희는 재해를 마주하리라.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몸에서 신비 적염이 뿜어져 나와 살아 있는 듯 숲을 태우니.

방금 마을을 감쌌던 것과 달리.

온 사방, 습한 원시림 전체를 물들이듯 번져 나갔고.

“여기 너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풍이 도래했으니 한번 막아 보아라.”

온 숲이 붉은색을 머금자.

그의 발아래에 붉게 물들어 떨어진 이파리들이 융단처럼 깔렸다.

걸음걸음 단풍을 몰고 원시림을 휩쓰니.

이번엔 황태자가 아닌 심판자로서, 재앙으로서 원시림에 도래했다.

엘프들이 오래 가꿔 온 숲에 단풍이 역병처럼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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