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천직
봄은 만발하는 꽃들과 태동하는 생명력이 가득한 계절.
여름은 생명력이 무르익다 못해 농익어 모두를 헐떡이게 하는 계절.
그럼에도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과 짙푸르게 물들어 일렁이는 초원이 퍽 아름답기 마련.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지난 시간 동안 쌓아 온 생명력을 폭발시키듯 많은 알곡과 열매를 주렁주렁 피워 낸다.
풍족한 추수가 끝나고 나면 곧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어쩌면 가을에 거두는 추수 또한 척박한 겨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리라.
산에 사는 이들은 나무를 베어 장작을 쌓았고 눈이 올 것을 대비해 마른 음식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겠지.
농부들은 품종 좋은 씨앗들을 골라, 봄을 기다리겠지.
병사들은 소슬한 바람을 맞으며 곧 찾아올 추위에 투덜거릴 것이고.
마법사들은 글쎄, 계절과 관계없이 여느 날과 같이 마나를 탐닉하리라.
그래도 모두가 느끼는 감상은.
아 올해의 끝이 다가오는구나, 라는 실감.
가을의 끝자락, 겨울의 첫 자락 사이 찾아오는.
척박함을 예고하는 의식.
단풍(丹楓)과 낙엽(落葉).
붉게 사위어 가는 나뭇잎들이 마지막 생명력을 자랑하며 온 산을 물들이는 풍경.
아름다움은 잠깐이고 곧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이 몸을 굴려 가며 차가운 바람 위에 쓸쓸함을 더했다.
어느 지역에선 가을을 마법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그라드는 생명력이 이룰 수 없는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던가.
썩 듣기 좋은 이야기.
허나 지금 원시림을 물들이는 단풍은 마법도, 척박한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도 아닌.
“재해입니다! 맹약을 벌하는 재해가 숲에 피어났습니다!”
원시림에 찾아온 재해.
멀리, 숲의 초입에서부터 펼쳐진 풍경에 경악한 목소리가 울렸고.
자리에 모여 있던 엘프의 장로들이 미간을 찌푸리곤.
“재해라니, 무슨 재해 말이냐.”
“단풍, 단풍입니다!”
숨넘어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그들답지 않게 다급한 걸음으로 향한 높다란 나무에 뚫려 있는 창문 너머.
붉게 물들어 가는 원시림이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황가는 탈취자의 불을 잃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신비를 잃은 지 꽤 오래이건만, 다시 불을 이은 자가 나타났단 말인가?”
푸르름 일색인 숲에 피어난 붉은 반점은 역병의 증표.
열기를 품고 번져 나가는 붉은 물결이 공포로 다가왔다.
물결의 중앙, 낙엽이 진자리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휑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마치 시체가 썩고 난 자리에 남은 백골과도 같았으니.
오랜 세월, 심지어 건국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살아온 늙은 엘프들마저 불안함을 품은 얼굴로 숲에 막 피어난 열병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누구냐. 누가 숲에 왔기에 저런 일을 벌이는 것이야.”
장로들의 물음에.
“황태자. 제국의 새로운 황태자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엘프 하나가 상황을 보고했고.
이어서.
“첫 번째 이파리 마을이 멸절했다는 소식입니다. 누구도,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이파리 마을을 비롯하여 세 번째 나뭇가지가 말라붙고 있나이다.”
“황태자가 걸음 하는 곳에 단풍이 번지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레인저들이 숲 곳곳에서 수상쩍은 무리를 확인, 그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황태자의 이동과 실시간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물론.
“보인다. 어찌 저렇게 붉게 빛나는 단풍이 안 보이겠느냐.”
“지금 번지는 방향이 황태자가 움직이는 방향이겠지.”
장로들 또한 번지는 단풍을 보고 있는 중.
아직은 드넓은 원시림 중 작은 점에 불과했으나.
퍼지는 속도를 보았을 때 금방이라도 숲 전체를 물들일 것만 같았다.
아직 자리에 앉아 비통한 듯 눈을 감고 있던 장로 중 하나가.
“맹약을 어긴 벌이로구나. 황태자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라 하던가.”
“아직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다만 마을에 있던 엘프들이 모조리 죽었으며 자리에는 곤충들 또한 가득했다는 보고입니다.”
“조건을 말하면 바로 보고하도록.”
황태자의 조건을 들어볼 듯 말하자마자.
“웃기는 소리! 지금 혹여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이라 칭하는 얼뜨기들의 말을 들어주자는 말인가?”
“조금만 참으면 어차피 지나갈 일이야. 한순간의 불안함으로 대계를 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8장로?”
“레인저들을 준비시켜라. 역병이 퍼지기 전에 제거하면 그뿐 아닌가.”
역시나 오만한 엘프들이 거세게 항의했고.
“저 신비를 억누를 자가 여기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 건국제를 이긴 자가 누구이며 목숨을 구걸했던 세월은 잊었단 말이오?”
“건국제가 아니라 탈취자겠지. 그가 우리에게 끼친 피해가 얼마인데. 더군다나 이미 죽은 자를 두려워하여 무엇한단 말이냐.”
“본래 그들의 신비였지요. 죽은 자? 죽은 자가 두렵지 않아서 이리 오랜 시간 숲에 숨어 지냈습니까? 황가의 힘이 약해질 때까지 눈치나 보면서?”
“감히! 치욕스러운 역사를 입에 담지 말라! 어린 네 녀석이 무얼 알아!”
“그놈의 나이 이야기 좀 그만하십시오! 살아온 시간이 이천 년입니다!”
“고작 이천 년 살고 뭘 안다고 떠들어!”
“지금 이러는 꼴들을 보니 세월 오래 살았다고 잘 아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만?”
“뭐? 뭐어!”
나이가 어린 장로들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 유치한 말싸움을 벌였다.
젊더라도 수천 년 살았다는 것에 반해 오가는 말이 너무 저열하여 할 말이 없었으나.
결국 젊은 신진 장로들은 맹약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태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주였고.
나이 먹은 장로들은 과거의 영광을 들먹이며 잠깐의 혼란을 참고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언제까지 과거의 영광만을 바라볼 참입니까.”
“결국은 원래대로 될 것이다! 작은 위기에 흔들려 자리를 내준 탓에 이리 고생을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야!”
“그 결정을 누가 했는데요!”
“우리가 너희처럼 어릴 때 했지! 차라리 그 당시 원로들의 말을 들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비참한 꼴은 안 봤을 거야!”
“다 죽었겠지요!”
네 녀석들이 정녕!
젊은 엘프들의 따가운 말대꾸에 원로 엘프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화를 내었고.
그들이 더욱 날 선 말로 서로의 뜻을 난도질하려 할 때.
“도착했습니다!”
마침 그들이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하였다.
“두 번째 이파리 마을에서부터 황태자가 보낸 전언입니다!”
숲을 붉게 물들이는 원흉의 전언.
과연 무어라 말할까.
과거 인간들에게 저질렀던 짓에 대해 탓을 할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걸 원하는 걸까?
모두의 시선이 향한 자리.
잠시 머뭇거리던 엘프가 결심하듯 깊게 심호흡한 후.
“너희들이 건국제와 맺은 맹약을 안다. 너희들은 제 역할도 하지 못했고 인간을 신비 재배지로 삼지 않는 대신 비열한 방법으로 탈출구를 모색했다. 이 개같은 고자 새끼들아.”
서늘한 이야기를 뱉어 냈고.
자리에 있던 장로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음에도 전언을 가져온 엘프는 아직 끝나지 않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너희들이 가꿔 온 신비는 명분을 잃었고 내가 품은 신비는 명분을 얻었으니 우열이 확실한 바. 난 숲을 망가뜨릴 것이며 너희들의 부끄러움을 가린 나뭇잎을 모조리 치워 너희들의 치욕을 드러낼 생각이다.”
꿀꺽.
장내에 들어차는 긴장과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엘프들 너머.
“드러난 살을 너희들이 키워 낸 독충들이 파먹을 것이며 뛰는 심장을 직접 뽑아낼 것이니. 기다리도록. 심판이 도래했고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이다. 너희들이 가진 그 알량한 세계수와 거기에 매달린 신비들도 마찬가지.”
퍼펑!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붉은 폭발이 터져 올랐고.
묘한 진동이 숲을 울렸다.
그리고 반대편 더욱 깊은 숲에선.
우우웅.
독충 무리가 까맣게 일어났다.
개중에 섞인 인섹터들의 날카로운 고함이 엘프들의 길쭉한 귀를 파고드니.
앞에는 독충, 뒤에는 단풍과 폭발.
모두가 본인들의 업보.
“정말 이게 사소한 위기가 맞습니까?”
젊은 장로 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터지는 불기둥과 물드는 숲, 몰려오는 곤충들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되뇌었다.
그가 보았던 나름 긴 세월 동안, 여러 번의 싸움이 있었으나.
“명분을 잃었다는 말이 작은 위기란 말입니까? 정녕? 진심으로? 그리고 우리의 치부라니요. 대체 무엇을 알기에 저렇게까지 분노한단 말입니까.”
이번만큼은 늙은 장로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해 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들을 벌여 온 것입니까!”
그들 또한 알고 있다.
과거 엘프들이 인간들을 어찌 대했는지.
건국제와 어떤 맹약을 맺었는지.
하지만.
“우리가 독충을 키웠다니요? 맹약을 어기다니요? 비열한 방법으로 마련한 탈출구라니요?”
그 외에는 모르는 사실들이 너무나 많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때.
“다들 잠잠하도록.”
장로들이 모인 장소.
새싹처럼 솟아난 엘프 하나가 뱉은 말에 모든 소란이 뚝 그쳤다.
푸르른 머릿결과 진녹색 눈이 유독 숲을 닮은 자.
다만 얼굴에 가득한 습기가 원시림과 같이 음습한 기운을 더했고.
그가 등장하자 모든 장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바로 엘프들의 대장로.
엘프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엘프라 불리며 그들의 근원인 세계수를 관리하는 자.
뒤틀린 입매와 떨리는 눈꼬리가 지금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했다.
곧 대장로가.
“그의 말은 거짓임이 분명하니. 다들 현재 맡은 일을 다 하도록. 그대들이 할 일은 엘프들을 지키는 것이니 의심과 불만으로 분열시키는 게 아님이야.”
단호한 말로 황태자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하곤.
“레인저들을 준비시켜라. 우선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오만한 인간을 잡아오도록. 그 뒤에 죄를 묻도록 하겠다.”
아, 뒤에 달린 인간들은 전부 죽여도 좋다.
여전한 태도를 고수했고.
고개를 숙인 원로들의 얼굴엔 깊은 만족감이, 젊은 장로들의 얼굴엔 불만과 불안함이 피어났다.
그들의 뒤에 물드는 단풍과 앞에 몰려오는 곤충들이 점점 거대해졌고.
위기의 순간,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이는 오만을 버리지 못했다.
엘프의 오래된 명운이 기우는 순간이었다.
* * *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깊은 이기, 오만, 고립, 편협이 진실을 가립니다. 젊은 엘프들의 운명들이 깊은 고뇌에 시름합니다]
[장소 끝에 도사린 운명 악독, 군단, 충왕이 당신이 일으킨 운명 단풍을 보고 일제히 날개를 폅니다]
[지닌 신비 염제심결 적염이 맹약의 결과에 따라 새로운 속성 단풍을 획득했습니다. 숲의 생명과 운명이 당신의 손아귀에 잡힙니다]
참으로 멍청했다.
그리 오랜 세월을 살면서 결국 쌓아 온 것은 편협한 시야와 단단한 아집.
이리 붉은 단풍을 보았으면서도 끝까지 저들의 힘을 신뢰했고 자신을 돌아보려 하지 않다니.
하긴 그랬다면 이리 원시림에 박혀 이 오랜 세월 굴욕을 감내하지 않아도 됐겠지.
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일이니 알아서 감당하리라.
거기까진 생각하곤
“정리는 끝났나?”
“끝났습니다.”
뒤에 도열한 기사들의 답에.
“아쉽게 되었군.”
앞에 무릎을 꿇은 엘프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아, 안 돼!”
단번에 뜻을 이해한 엘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앞선 마을과 달리 선택을 강요했을 때 사과를 택한 자들.
하여 그들만을 살리고 나머지는 죽였다.
내 손이 아닌 벌레들의 손으로.
마을은 이미 휑하니 낙엽이 진 뒤.
쓸쓸히 떨어지는 붉은 이파리가 푸르딩딩하게 독이 오른 사체와 원망 가득한 동공 위를 덮어 주는 풍경.
“부, 분명 사과를 하라 그리 전했습니다! 그리 전했어요! 왜? 왜!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마을을 책임지는 최고령 엘프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며.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다른 엘프들 또한 고개를 숙이니.
오만한 엘프들이 인간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드문 광경.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과오를 사과하고 사죄하겠다 했다.
과거의 죄도 지금의 방만도.
억울하겠지.
“너희가 사과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기껏 자존심을 굽히며 사과했거늘.
결국은 파국이라니.
“재해는 멈추지 않으리라.”
명확한 선언에 자리에 머물던 단풍이 다시 번져 나갔고.
순식간에 주변 수 킬로를 붉게 물들였다.
물결치듯 몸을 파르르 떠는 벌건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사이.
후우.
작게 숨결을 불어넣자.
옅은 바람결에도.
우수수수.
시야 가득한 단풍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호우보다 더욱 짙은 적엽우가 되어.
눈이 따가울 정도의 화려한 풍경 속.
“적이다!”
“전열을 정비하라!”
몸을 숨긴 채 다가오던 엘프들이 드러났다.
얼굴을 가린 두건, 몸에서 풍기는 짙은 풀 향과 습한 기운.
누군가는 활을 메었고 누군가는 검을 찼으며 누군가는 마나를 몸에 둘렀다.
레인저.
흔히 아는 숲을 관리하는 레인저와는 달리 진짜 레인저.
남부에도 유명한 청매 레인저가 있으나 그들 또한 엘프의 레인저들을 따라 한 것에 불과했다.
은신이 들켰음에도 태연하게 나무 위에 머물러 있길 잠시.
“그대가 제국의 황태자요? 이 풍경의 원인이고?”
정확히 날 보며 물었다.
답을 하지 않자.
“엘프의 대장로께서 당신을 데려오라 명하셨소. 따르도록.”
그리 막무가내로 발언하곤.
“단, 배신자들부터 처단할 테니 기다리시오.”
제 멋대로 일정을 정해 버린 후.
등 뒤 멘 활을 풀어 살을 겨누었다.
화살촉에 어리는 바람이 날카로웠다.
뿐만 아니라 주변 가득한 레인저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는.
누군가는 바람을, 누군가는 뇌전을, 누군가는 독을, 누군가는 폭발을, 누군가는 약점을 파악하는 눈을, 누군가는 적의 정신을 휘어잡는 소리를.
수많은 신비를 뿜어냈다.
엘프 레인저.
그들은 엘프 중에서도 전사들이자 그들이 재배하고 가꿔 온 신비를 물려받은 귀중한 자들.
신비를 기예로서 다듬고 그 무한한 가능성을 오랜 삶 동안 가꾸어 온 특별한 정원사.
그들의 살벌한 기세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가득 열렸고.
곧 첫 화살을 쏘아 내니.
향한 곳은 바로.
“전하!”
내가 아닌.
“……!”
블러디.
다음으로 몰아친 공격들이 향한 방향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엘프들.
특히 자신들을 향해 공격을 가할 줄은 몰랐는지 놀라는 마을 엘프들의 일그러진 표정들을 보자.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진짜 못 봐줄 정도로구나.
지금껏 선택을 기다려 주었으나, 더는 기다릴 필요도, 용서할 필요도 없다.
인간에게 사과한 엘프들을 배신자라 칭하며 목숨을 앗아 가려는 행태가 역겨웠다.
남부에선 유독 역겨운 풍경들을 많이 마주한다 느꼈다.
그렇기에.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아라. 여기 옆에 선 하프 엘프는 내 제국민이며 나에게 고개를 숙인 자들 또한 나의 백성이다. 그들은 사과했고 나는 용서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도록.”
“당신에게 참견하라 말한 적 없습니다.”
“참견? 참견이 아닌.”
명령이다.
그 말을 끝으로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바닥에 붉게 깔렸던 낙엽들이 일제히 되감듯 솟아올랐다.
명분을 얻은 신비는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품었고.
온전히 나의 명을 따르니.
“휩쓸어라.”
[지닌 신비 적염이 속성 적야와 단풍을 머금고 더욱 붉게 몰아칩니다! 새로운 운명 공간지배가 깃듭니다!]
곧 단풍이 새빨간 공간이 되어 몰아쳤다.
레인저들이 품은 신비가 덧없이 흩어졌고.
그들의 시야가 붉은색에 완전히 먹힌 순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엘프들 마저 자아를 잃고 그대로 물들었다.
꽤 오랫동안 붉은 잎이 몰아치고 나서야 이윽고 드러난 풍경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형태도, 숨결도, 품었던 신비도.
그저 깊은 숲에 남은 건 그들이 뿜어낸 짙은 풀 향과 습한 기운뿐.
수십의 정예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그리고 멀리서부터.
“레인저들이 사라졌다! 죽여라!”
몰려오는 엘프들을 보며.
“와라, 오만한 귀쟁이들아 너흰 내 백성이 아니니. 모조리 죽여주마.”
붉게 미소 지었고.
다시금 단풍이 휘몰아쳤다.
몸에 켜켜이 붉은 밤과 붉은 바람과 붉은 이파리를 두른 채.
붉은 숲의 주인이 되어 나아갔고.
숲의 관리자를 자청했던 오만한 엘프들이 덧없이 흩어지는 풍광.
끝없이 몰려오는 엘프들과 세계수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곤충들을 보며 선명히 웃었다.
정원사들이 가꾼 소중한 원시림이 망가뜨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 천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