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25화 (125/200)

125화 세계수

황태자가 입에 담은 사실은 충격적이었던 만큼 믿기 어려웠다.

머릿속에 마구 변명이 떠올랐다.

그가 뱉은 발언들은 철저히 인간의 입장에서 엘프의 지난 역사를 해석한 것.

그가 보고 들은 역사는 이와 같지 않았으니 비교해 봐야만 한다.

엘프로서 고귀함을 내려놓는다는 건 곧 죽겠다는 말.

심지어 그의 직책이 이파리를 책임지는 자도 아닌 나뭇가지를 관장하는 장로임에야 당연한 일이다.

흔히 엘프들의 마을은 이파리로 시작, 이러한 이파리 마을 수십이 모여 가지를 이룬다.

다시 가지 여럿이 모여 한 나뭇가지를 이루었고 그 거대한 나뭇가지를 책임지는 자를 장로라 불렀다.

그러한 장로가 총 서른.

반은 오래전부터 엘프를 이끌어 온 원로들.

나머지 열다섯 중 다시 열은 원로라기엔 젊지만 나름 굵직한 세월을 보낸 이들이며.

마지막 다섯은 젊은 엘프들 중 유독 능력이 뛰어나고 공을 세운 자들이 맡아 다스렸다.

지금 황태자를 찾아온 자는 신진 장로 다섯 중에서도 가장 젊고 활발히 활동하는 흰 바람.

나이가 2,000세가 넘었으나 엘프들 사이에선 젊디젊었다.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오래였고 나름 아는 것도 많았기에.

낙엽이 지는 자리, 죽음을 각오하고 황태자와 설전을 벌였다.

자신이 아는 엘프의 역사와 지난 세월을 들먹였으나.

“개소리 좀 그만해라.”

단번에 부정당했다.

황태자는 눈에 비치는 광기와 다르게 논리정연했고, 흰 바람이 말하는 역사의 빈틈을 순식간에 파고 들어왔다.

“독충이 그저 나타났다? 그저? 너희가 그 오랜 세월 숲을 관리했으면서 독충의 태동을 몰랐다? 그러고도 너희가 엘프인가?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너희 엘프의 근본인 숲의 관리자라는 직책을 부정하는 것인데?”

“모든 숲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모든 숲? 하! 뻔뻔하기 그지없군. 그럼 묻지. 독충이 정말 그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라면 왜 하필 인간을 고기 방패 삼은 거냐. 왜 하필 엘프가 사는 숲이냐.”

“…….”

“설마 그 시절엔 원래 그랬다 그딴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본래 거인, 악마들을 상대로 싸우던 인간들을 왜 불러들였냐 물은 거다. 진실로 너희가 독충을 막지 못해서였나?”

“아니오.”

“이유가 있겠지? 굳이 독충의 태동을 미리 저지하지 않고 애꿎은 인간들을 불러 먹이로 던져 준 이유가.”

“…그렇군.”

쓰디 쓴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후로도.

“하프 엘프들을 재배지로 이용한 적 없다? 이들의 처지가 불쌍하여 숲에 받아들여 주었다? 그럼 물어보자. 이들의 부모가 누구냐.”

“…….”

“오래 살았다며. 그리 오래 처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하프 엘프의 부모, 하다못해 그와 관계된 이를 본 적이라도 있나?”

“…없소.”

“참으로 바르게도 처 사셨군. 그 오랜 세월 의심 한 번 해 본 적 없다니. 아주 놀라워.”

황태자의 비아냥거림에 흰 바람의 길쭉한 귀가 벌겋게 물들었다.

“자 또 물어볼 것이 있나?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지.”

“정말 저 아이들은 사냥개로 이용당한 것이오?”

“이런 제기랄. 몇 번을 물어보는지 모르겠군. 너희들이 한 명령을 나에게 묻는 건가? 장로 이 귀쟁이 새끼야. 너는 이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닌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 신비를 훔친 인간을 죽이라 한 적이 없나?”

“있소.”

“그럼 묻자. 대체 인간 중 얼마나 많은 이가 너희 신비를 훔쳐 갈 수 있겠나. 아니. 그 정도로 허술한가? 너희 엘프들은? 그래 놓고 그렇게 뻔뻔하게 오만을 떠는가?”

“아니오.”

“그럼. 그 신비는 어디서 온 것이며 대체 왜 이들을 시켜 사냥하는가. 정말 신비를 도둑맞아서? 아니면 숲 밖으로 나가면 죽는 저주 때문에? 그걸 믿는 병신이라면 미리 말해라. 지금 당장 죽여주지.”

“아니로군.”

“그 질긴 목숨 더 이어 가겠군. 운이 좋아. 실제로 회수한 신비 중에는 너희들 것도 있겠고, 아닌 것도 있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황태자의 스산한 말에 흰 바람이 침을 꿀꺽 삼켰고.

“여기 있는 하프들만이 신비를 거두고, 이를 삼키고, 더 나아가 융합하고, 발전시키고, 새로 잉태할 수 있으니까! 그게 너희의 노림수였지. 아닌가? 눈을 똑바로 보고 답하라! 알았으면서 모른 척하면 죽는다! 제대로 눈을 보고 답해!”

황태자의 벌건 분노가 주변을 휘감았다.

그래, 하프들을 시켜 인간들의 신비를 빼앗은 이유.

맹약에 묶인 엘프들이 숲 밖으로 나가면 죽어서?

개소리, 한 100~200년을 산다면 모를까 1~2년 정도는 문제없다.

다만 숲에서만큼 전신 능력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고 오래 머물수록 몸이 오염되는 건 사실이나.

숲에 돌아오면 결국 맹약을 지킨 것이니 회복되는 법.

비겁한 변명이다.

하프 엘프들에게 신비까지 쥐여 주어 가며 인간들을 추살한 이유.

신비를 이용한 전투를 통해 새로운 신비를 잉태할 확률을 높이고 인간에 대한 반감을 키우기 위해.

“여기 블러디, 너희의 이름으로는 붉은 석류 또한 제국의 범죄자가 되었지. 인간 세상엔 섞이는 게 불가능해졌고 오직 너희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 여기 증거가 있으니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아라. 너희는 정녕 이 사실을 몰랐는가?”

만일 알고도 이리 의뭉을 떠는 것이라면 죽이리라.

그리 마음먹었고.

흰 바람이.

“정녕 몰랐소.”

죽음을 각오하고 진실을 뱉었다.

붉은 단풍이 그를 휘감았으나.

흩어지지 않았다.

정녕 몰랐던 거다.

이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의심 한 번 해 본 적 없는 거다.

단풍은 맹약을 어긴 자들을 죽이는 바람.

“정녕 나는 맹약을 어길 생각도, 누군가를 괴롭힐 생각도 없었소. 내 잘못이라면… 그래, 오만에 빠져 현실을 의심하지 못한 것 그것뿐이오. 과거에 우리가 인간에게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사과하오. 난 그 값을 치루고 있다 굳게 믿고 있었소. 미련하게도…….”

그의 솔직한 고백에 주변을 휘돌던 거친 낙엽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곧 흰 바람이 서글픈 눈동자로 황태자와 블러디를 보며 뇌까렸다.

“미안하오. 헛살아서, 미안하오. 남의 아픔을 외면해서, 미안하오. 무엇도 막지 못해서. 내 잘못… 내 잘못이니. 죽여도 할 말이 없소.”

엘프의 회한 어린 사과가 쓸쓸히 떨어져 내렸고.

저도 모르게 내뱉은 진심 어린 사과가 그를 살렸다.

허나 그는 살고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미안하구나. 내가, 내가 너에게 못된 명을 내렸구나.”

“용서했습니다.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말뿐이었어, 의심 한 번 하지 못했다. 무관심했다는 뜻이며 불찰이다.”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특히 블러디에게.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모두에게 미안하단 말씀을 드리오. 이 한마디 말로 모든 오해가 씻겨 나갈 순 없겠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구려.”

황태자를 비롯하여 뒤에선 인간들에게.

참으로 놀라웠다.

엘프들 중에서도 귀하다는 장로가 사과를 건넸고.

뒤에 선 나머지 엘프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를 오연히 내려다보는 황태자가.

“고귀함을 내려놨구나. 마지막 사과가 널 살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분명 선언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고.

“살려 주는 것이오. 황태자.”

“그래, 진심이 담긴 사과만 있다면 단풍은 너희를 해치지 않는다. 물론 앞으로도 맹약을 지켜 나간다는 전제하에.”

“약속하지. 맹약을 지키는 것은 물론 쌓아 온 악업도 청산하겠다고. 그래야 진정한 고귀함을 되찾을 수 있겠지.”

흰 바람의 결의에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맹세하듯 말을 반복했다.

비록 몇 명 안되는 초라한 인원이었으나.

진정으로 변화를 원하는 이들.

“좋다. 그 맹세. 내가 이루어 주마.”

황태자는 숫자 따윈 개의치 않았고.

그들마저도 제 세력에 포함했다.

어느새 단풍이 짙게도 든 숲.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붉은 잎이 그의 백금발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곧 그가 반듯한 코를 찡긋거리길 잠깐.

“붉은 석류.”

블러디의 진명을 부르곤.

“원하는 곳을 말하라. 너의 억울함이 가장 깊게 서린 곳을. 그곳부터 무너뜨려 주겠다.”

그녀의 소원을 말하라 했다.

“네가 사과한 순간 제국민이 되었고. 아비는 자식의 억울함을 넘기지 않는 법.”

“여기 사과를 한 자들도 마찬가지로 제국민으로 생각해?”

“그래, 진심으로 죄를 뉘우친 이들은 모두 제국민이다.”

하아, 블러디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사과를 시켰어. 대체…….”

지난 플라워 밸리에서 정보부와 특무대 책임자에게 사과를 종용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저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함인 줄 알았는데.

구하기 위해서였구나.

사과 없이는 자신의 피 반쪽에 속하는 엘프의 피가 단풍 앞에서 흩어질 테니까.

자신이 없다면 이러한 과정 없이 그저 모두를 벌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또한 지금 칼날 위를 걷는 중이었구나.

그가 펼친 단풍이란 재해는 위대한 신비, 이러한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운 맹약 앞에 당당해야 하는 법.

그는 블러디가 사과한 순간 결심한 것이다.

그녀를 용서했던 것처럼 사과하는 모든 엘프를 용서하기로.

그리해야만 지금 걸어 들어온 걸음과 펼친 단풍이 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어쩌면 뛰어난 모략, 어찌 보면 과한 자비.

자신 하나를 위하여 사과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기로 마음먹다니.

“미안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어쩔 줄 모르던 그녀가.

“저는 용서하였습니다. 모든 건 전하에게 맡길게요. 모든 걸. 용서와 사과, 자비… 모든 걸.”

전권을 위임했다.

이젠 그만큼 그를 믿었고.

“그 결정 후회하지 마라. 나중에 가서 이용당했구나 원망해도 소용없다.”

황태자가 다시 짓궂은 말을 던졌으나.

“후회하지 않아, 절대. 설령 이용하였다 하더라도.”

그게 전하의 뜻이라면.

그녀가 방금까지 붉게 피었던 분노를 깊이 감내하며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 앞에선 황태자의 눈에 맺힌 분노엔 가련한 하프 엘프들을 위한 몫도 있구나.

대신 화내 줄 사람이 있구나.

그렇다면 잊으리라, 잊고 자신을 대신해 모든 업을 감당하는 전하를 도우리라.

처음이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누군가를 돕겠다고 생각한 것이.

상황에 몰려, 남들에게 떠밀려서가 아닌.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하고 돕겠다 생각한 것이.

이게 함께한다는 감각이구나.

용서받고 용서하고 함께한다는 것이구나.

곧 블러디가.

“꽃이 필요하다 하였지? 꿀과 꽃가루가 필요하다고.”

황태자가 필요한 것을 물어 왔고.

“최선을 다할 테니 원하는 대로 쓰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야.”

어색한 존댓말로 나름의 경의를 표하며 다시금 자신의 신비를 펼치자.

독살스런 향기를 뿜어냈던 꽃들이 이번엔 몽환적인 향기와 꽃가루를 틔워 냈다.

가지를 듬성듬성 채웠던 신비가 이제는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

점차 낙엽이 진 자리를 채워 나갔다.

“명분을 얻은 신비는 닳지도 않고 힘겹지도 않은 법이지.”

비로소 블러디가 자신의 신비를 제대로 틔우기 시작했다.

“나는 숲을 저주로 죽여 나갈 테니, 중요한 순간. 너는 새로운 신비이자 축복으로 숲을 살려라. 모든 게 뒤바뀔 것이다.”

황태자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흰 바람. 네가 생각하기에 뜻을 같이할 자들을 모아와라.”

“밖에 엘프들이 많소.”

“단풍이 치미는 길을 따라가면 누구도 널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사과의 뜻만 물으면 되는 건가?”

“단풍 아래에서. 진실이면 살겠고 거짓이라면 사라지겠지.”

“우리가 지은 죄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의사를 물을 수 있는 자비를 조금만 베풀어 주겠나.”

“얼마든지. 거짓 없이 정직하게 자신들의 죄를 털어놓도록.

“그리하지…….”

황태자의 명을 고분고분하게 따르기로 한 흰 바람일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그들을 이끌고 어디로 가면 되겠소?”

목적지를 물어 왔고.

황태자가 여전히 떨어져 내리는 단풍을 똑 닮은, 붉은 미소로 화답하며.

“세계수, 너희들의 심장으로 오도록.”

섬찟한 말을 남겼다.

순간 등에 돋아 오르는 소름.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았던 세계수가 단풍에 병드는가.

엘프의 상징이 무너지려나.

치솟는 굴욕과 분노.

문득,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손끝을 보자.

낙엽이 그의 손끝을 희롱하였고 점차 붉게 물드는 손톱이 아려 왔다.

맹약을 기억하라는 단풍의 경고.

그가 사과하면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듯, 자신들 또한 참회하기 전까진 고귀한 엘프가 아님을 알려 주는 낙인.

흰 바람이 작게 숨을 내쉬곤.

“알겠소. 거기서 보지.”

다른 나뭇가지를 관장하는 장로들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세계수에서 다른 장로들과 다투었던 어린 장로들, 아직 원로가 되지 않은 장로들이라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들이라면.

“말로는 누구나 가능한 일이지만 진심은 모르는 법이지.”

황태자의 조언을 애써 무시하며 제발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길 바랐다.

* * *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앞길에 운명 실망, 절망, 외로움이 깊게 어립니다. 운명 사죄, 변혁이 작게나마 그를 위로합니다]

떠나가는 흰 바람을 보며 직감했다.

많은 아픔이 기다릴 것이라고.

아마 대부분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겠지.

본래 그렇다.

잘못했다는 말까진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으란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은 태도를 바꾸기 마련이니까.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본성이니까.

그래도 죽일 건 죽여야지.

그게 나의 일이니까.

고생할 젊은 엘프의 등을 일별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참 징그럽게도 몰려들었다.

나의 발걸음과 단풍이라는 역병이 세계수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걸까.

“막아! 어떻게 해서든 막아!”

“죽음으로 막아라! 다들 모여!”

“마법, 마법을!”

“정령이시여! 정령이시여!”

처절한 목소리가 붉은 숲에 가득했다.

몰아치는 재해를 막아 보려는 몸부림들이 처절했고 비극적이었으나.

“숲마저 너희를 버렸구나.”

나에겐 그저 가소로울 뿐.

분명 오랜 시간 연마한 검이, 닦아 온 마나가, 교감한 정령이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 제 집처럼 편안하고 익숙했던 숲이 낯설었다.

숲의 모든 것이 엘프들을 밀어내고 있다.

있어선 안 되는 일.

“숲이 너희를 버렸다. 받아들여라.”

단풍에 휩싸여 사위는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숲이 너희를 버렸다고.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단풍과 낙엽은 내 손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

나의 의지가 없음에도 다가오는 적들을 휩쓸었고 그들에게 벌을 내렸다.

맹약과 신비란 이렇듯 냉혹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 숲을 섬겨 왔던 엘프들이라도 맹약을 어긴 순간, 이를 벌할 재해가 찾아온 순간.

철저히 버림받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

이런 힘이 뭐가 좋다고 그런 잔혹한 짓을 저질렀는지.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멈추어라!”

숲 하나를 통째로 올려놓은 듯 원시림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나무를 앞에 두었다.

일렁이는 생명력과 피어나는 습한 기운이 가득한 장소.

신성한 나무 앞엔 마치 최후의 결사대를 구성한 듯 많은 엘프가 있었고.

그 중앙.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인간이 발걸음하는가! 너희가 강요한 맹약을 들이밀고 세계의 뿌리를 협박하는 것이야!”

가장 오래 묵고 가장 썩은 이가 나를 보며 화를 내기에.

“세계수의 요청으로 왔지. 간절히도 부탁하더군.”

진실을 알려 주었다.

날 부른 건 단순히 맹약이 아닌.

“썩어 빠진 관리자들을 제발 바꾸어 달라고, 자신을 살려 달라고 말이야.”

세계수의 바람이기도 했다고.

“거짓-말-!”

대장로의 거센 비명과 구겨진 얼굴을 보곤.

“추악하게도 생겼다. 인상 쓰니까 뒈지게 못생겼네.”

내뱉은 솔직한 평에 놈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린 사이.

“이봐 거대 고목. 봐라. 안 믿잖아. 얼른 사실이라고 말해. 안 그러면 붉게 물들일 테니.”

몰려온 단풍이 차츰차츰 세계수의 드넓은 가지를 타고 올랐고.

신성한 나무를 오염시키는 역병에 엘프들의 비명이 울려 퍼질 때.

-내가 부른 거 맞으니까 그만, 제발 그만 소리 질러 이 미친 새끼들아!

엘프들을 향한 세계수의 상스러운 욕설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어우, 세계의 뿌리답게 성격 한번 화끈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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