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나를 택했다
남부 원시림이 한창 펼쳐진 곳, 드높은 나무 꼭대기 위.
가벼운 차림, 나무 높이 올라선 사람 둘.
그중 하나.
“놀라울 따름이군.”
정보부 책임자 남부의 뱀이 단풍이 어린 숲을 보며 감탄했다.
날름거리는 혀가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남부의 뱀이란 별명답게 그는 흥분하면 혀를 날름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도가 과할 지경이었다.
어지간히도 흥분했다는 뜻.
원래 파충류처럼 흐릿한 눈이 감정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이였으나.
지금만큼은 눈에 드러난 선명한 감정이 또렷했다.
놀라움과 경탄, 만족과 즐거움.
그와 더불어.
“이거 미쳐 버리겠구만그래. 생전 이런 풍경을 보게 될 줄이야.”
남부 특무대 책임자 잿가루가 오랜 친우의 말에 꿈틀거리는 얼굴로 동의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끝없이 움직이며 흉측함을 더했고 활짝 피어난 웃음 사이 누렇게 빛나는 이가 험악함을 더했으나.
반짝이는 눈과 얼굴에 담긴 감정만큼은 맑고 순수했다.
그만큼 즐거우시다는 거겠지.
잿가루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출 듯 기뻐하며.
“봐라! 애들아! 다들 나무 위로 올라 먼 곳을 보아라! 이게 무슨 일이냐! 저 빌어먹을 엘프들의 눅진한 숲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신과 함께하는 특무대 동료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고.
곧 가벼운 무구로 무장한 채 땀을 닦던 이들이 나무를 급히 오르기 시작.
“와하하하! 저게 무슨 일입니까! 놈들이 아주 혼쭐이 나고 있군요!”
“보입니다! 아주 잘 보입니다! 저 붉은 자리 뒤에 메마른 나뭇가지가 보입니다!”
“어! 너 망원경 어디서 났어?”
“혹시 몰라 가져왔죠! 정보부는 기본 지참인데요?”
“그래? 안에는 뭐가 보이나?”
“멸망이 보입니다!”
원시림 한복판, 나무 위에 오른 정보부와 특무대 인원들의 시끌벅적한 환호가 울려 퍼졌다.
부하들의 신난 목소리에 두 책임자가 덩달아 웃길 잠깐.
“자, 봐라.”
남부의 뱀이 제 가방에서 망원경을 꺼내어 잿가루에게 건넸고.
잿가루가 흉터를 잠시 꾸물거리다가 이를 받아들곤.
“아직도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거냐.”
조심스레 상태를 물었다.
“뭐, 평생 안고 가야 할 후유증이니까.”
남부의 뱀이 담담히 답한 뒤.
“너야말로 붉은 걸 보면 원래 발작해야 하지 않나? 뜨겁진 않고?”
오히려 친우의 상태를 물어 왔다.
잿가루 또한 씁씁히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평생 안고 가야 할 후유증이라더군. 나도.”
남부의 뱀과 잿가루 둘 모두 과거 요원 시절, 작전 중 엘프들과의 싸움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사실 싸움이라기보단 일방적인 고문이었지만.
당시의 일을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았을 뿐.
흔적은 낙인처럼 남아 그들을 괴롭혀 왔고.
눈앞에 펼쳐진 붉은 단풍을 마주하자 잿가루의 등을 덮은 붉은 화상에서 작열통이 느껴졌다.
그때마다 그들은 엘프들의 잔혹함을 상기했다.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놈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신비를 실험한다는 사실은.”
엘프들은 자기네들이 얻은 신비를 발전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서슴지 않았다.
전투 중 붙잡은 인간 포로들과 원시림에 함부로 발을 들인 인간들을 잡아.
신비 사용을 연습했다.
남부의 뱀과 잿가루는 원시림 주변에서 실종된 자들을 추적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엘프들에게 납치되었고 모진 수모를 겪다 간신히 탈출하여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들.
당연히 엘프에 대한 증오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여.
“보이는구나, 들어봐라. 푸른 숲, 가득했던 잎사귀가 모조리 붉게 물들어 너울거리고 있단다. 습한 숨을 뿜어내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메말랐구나. 생명력을 모조리 잃은 붉은 잎이 나풀나풀 떨어지고 있다! 놈들을 가려 주던 숲이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온통 붉게 물들었다! 재해다! 재해!”
잿가루가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자세히 묘사해 주었다.
평생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친우를 위해.
등에 어리는 작열통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으나 마음속 피어나는 기쁨이 거대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좁은 시야로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나 놀랍고, 아름답고, 치명적이어서.
“아아, 아아, 황태자 전하의 걸음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분명 그를 향하여 많은 엘프가 몰려가고 있다! 들어 봐라. 그들이 모두 죽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 붉은 낙엽이 휩쓴 자리엔 아무것도 없구나! 놈들이 도망친다! 메마른 가지를 타 넘으며! 아아! 아아아! 도망치는 놈들의 등 뒤에 독충! 독충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지! 죽여라! 죽여! 놈들의 가슴을 찌르고 살을 파먹어라!”
잿가루의 망원경에 갖다 댄 눈에 핏발이 오르며 격양된 목소리로 상황을 전파했다.
덩달아 외치는 요원들의 고함이 요란스러웠다.
다들 한 번쯤은 엘프에게 납치되었다가 되돌아온 사람들의 꼬락서니를 보았다.
신비한 숲,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나머지 정령의 장난에 놀아난 결과라고?
개소리.
그런 개소리가 또 있을까.
놈들이 벌인 잔혹한 실험이 와전된 것.
특히 잿가루와 남부의 뱀은 당사자이기도 했고 당시 납치되었던 이들의 죽음을 보았기에.
“그렇지! 죽여라! 죽여라! 모두 죽여라!”
발작하듯 엘프들의 죽음을 종용했다.
잿가루의 외침과 주변 정보부 요원들이 떠들어 대는 말에.
“아아, 보인다. 보이는구나. 붉은 숲이, 그들의 죽음이.”
남부의 뱀이 흐린 풍경 위로 상상을 덧씌웠다.
오래전 엘프의 신비에 당해 색을 빼앗겼다.
지금은 이 흐리멍덩한 눈이 그의 상징이자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무기였으나.
원래는 그의 약점이었다.
방금까지 그의 눈에 보였던 풍경은 온통 회색.
다만 메말라 가는 숲을 보며 감탄했을 뿐이라면.
지금은 잿가루의 설명에 구체적 상상을 더하였고 그제야 보였다.
붉게 번져 가는 숲이, 흔적도 없이 죽어 가는 엘프들이,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는 독충들의 살벌함이.
깊이 숨을 들이켜며 죽음의 냄새를 맡던 찰나.
-끼야아아악!
-끼야아아악!
-끄아아아아!
머리를 뒤흔드는 비명이 울려 퍼졌고.
온 숲이 부산스럽게 몸을 떨어댔다.
놀란 새들이 퍼드득 나무 위로 날아올랐고, 숲 가득한 습기가 요동쳤다.
붉게 떨어진 낙엽들마저 이리저리 뒹굴었다.
그만큼 비명은 처절했고 외로웠다.
지금껏 즐거이 떠들어 대던 잿가루와 요원들마저 입을 다물 정도로.
잠시간의 침묵.
흩어지는 메아리와 숲이 떠는 요란만이 불길하게 주변을 떠돌던 차에.
“뭐냐, 잿가루. 대체 무슨 일이야.”
남부의 뱀이 다급히 물었고.
“맙소사. 세계수, 세계수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잿가루가 다문 잇새로 어렵게 말을 뱉었다.
놀라운 풍경이었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시야, 세계수가 붉게 물들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숲을 뒤흔들었던 처절한 비명이 사그라든 뒤.
“다들! 내려가자! 곧 때가 오겠구나! 전하께서 말씀하신 때가 오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을 다해야지! 구경은 끝이다!”
잿가루의 외침에 나무 위에 올라섰던 요원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려가서는.
등에 멘 가방 속에서 기다란 정을 꺼냈다.
크기로 보았을 땐 쇠말뚝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들이 각자 간격을 벌린 후.
땅, 땅, 땅!
망치로 이를 박아 대었고.
곧 습한 땅속으로 말간 쇠막대가 푹푹 박혀 들어갔다.
곳곳에서 울리는 울음이 묘한 공명을 품길 잠시.
그들이 쇠말뚝을 다 박아 넣고 물러나자.
생명력 가득했던 숲이 점차 말라 갔다.
아니 과했던 습기와 음침한 기운이 점차 사라졌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습하고 찐득해서 사람이 다닐 길이 아니었어.”
꽉 막힌 듯 숨을 내리눌렀던 숲의 환경이 조금은 트였다.
공기가 순환하듯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지붕처럼 위를 덮은 나뭇잎이 사르르르 몸을 흔들며 손바닥만 한 햇볕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이 모든 변화의 진원지는 바로.
그들이 박은 쇠말뚝.
땅 깊이 박혀 있는 쇳덩이가 마치 물을 빨아들이듯 가득 고인 음습한 기운들을 벌컥벌컥 빨아 마시기 시작한 후 일어난 변화.
“하, 보면 볼수록 신비하군. 이 얇은 쇠막대 좀 심었다고 이 끔찍한 숲이 이렇게 변하다니.”
남부의 뱀이 다시금 감탄을 토해 냈다.
물론 이 쇠막대가 품은 놀라운 신비에 대한 것도 있었으나.
“대체 전하가 품은 신비와 지혜가 어디까지인지.”
진심으로 황태자의 능력에 놀랐다.
방금 들은 풍경만 해도 평생 본 적 없는 놀라운 신비.
숲 전체를 뒤덮어 가는 재해를 사람 홀로 이루어 낸다는 것도 상상해 본 적 없건만.
“자, 다음 목적지로 가자고. 늦으면 전하께서 화내실 테니까.”
지금 손에 쥔 쇠막대 또한 황태자의 안배였으니.
대체 우리들의 고귀한 전하께서는 무엇을 계획하셨단 말인가.
지난 남부 플라워 밸리에서 원시림으로 향하는 와중.
“너희들은 살라스에게 가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라. 설마 이렇게까지 친절히 말해 주었는데도 이해를 못 한다면 용광로에 빠져 죽으라는 말도 덧붙이도록. 마법사들과 장인들에게 말뚝을 받아 원시림으로 침입해라. 숲 초입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을 박으며 전진하도록. 시선은 내가 끌겠다.”
황태자가 그들에게 비밀리 전한 명령.
하여 플라워 밸리에 대기하던 중.
“여기, 이걸 가져가서 땅에다가 박으면 될 거야. 명심해, 사람 말고 땅에 박아.”
살라스가 퀭해진 얼굴로 그들에게 은빛 쇠막대를 나누어 주었다.
출처는 묻지 않았다.
뒤에 보이는 배경이 충분히 알려 주었으니까.
“저게, 그 전하께서 악마를 박아 넣으셨다는 철괴군요.”
원래 지하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진생철퇴가 주렁주렁 쇠사슬에 가득 묶인 채 지상으로 빼꼼 나와 있었고.
“어이! 어어어! 야, 야 이거 멈춘다! 장비 멈출 거 같은데? 염료 좀 더 가져와!”
“아니야 그 정도로 멈추지 않으니까 계속해 봐. 우리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출력이 기존 마나석보다 훨씬 높아. 장비만 적응하면 더 오래 갈 거야.”
장인들이 달라붙어 조심조심 일부분을 떼어 내는 작업을 이어 가는 중.
뒤에는 마법사들이 각종 연구 장비와 마법으로 이를 보조했다.
그들이 다루는 장비들이 오색 신비한 빛을 머금고는 힘차게 돌아갔고.
불꽃과 마나가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와중.
어디서 끌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거대한 용광로, 펄펄 끓는 불 안에 떼어 낸 조각을 집어넣으니.
파스스스, 푸르스름한 불티가 휘날리며 철괴 조각이 스멀스멀 녹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비했다.
타오르는 불이 아닌 흐르는 불이라니.
저런 물 같은 불이 세상 천지 어디에-.
그때 머릿속에 담긴 수많은 정보 중 하나가 불쑥 부상했다.
그래, 저런 불이 존재하는 곳이 제국 중에 있었구나.
“설마 불의 샘?”
바로 북부.
북부에서 있었던 위대한 전투 이후, 본래 북부의 삶을 책임졌던 모닥불이 사라진 자리에 불의 샘이 어렸다지.
보고서에 불이 물같이 고여 있더란 황당한 내용이 있어 믿기 어려웠는데.
“정말이로군.”
눈으로 보니 정말이었다.
비록 붉디붉다는 말은 색이 보이지 않아 실감 못 했으나 고이고 흐르는 불의 형상은 참으로 신비했다.
황태자가 이루어 낸 신비라던데.
불의 샘으로 녹여 낸 철괴를 달아오른 쇳물에 넣어 섞더니.
같은 모양의 쇠막대들을 뭉텅이로 찍어 내기 시작.
“저 많은 걸 가져갑니까?”
“그럼 우리가 옮겨 주랴?”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 빌어먹게 넓은 숲에 막대기를 잔뜩 꽂으려면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냐. 정보부라는 놈이 좀 생각을 해라.”
살라스의 유독 날카로운 반응에 둘이 눈치만을 보았다.
눈 가득한 다크써클의 이유가 있는 모양.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이 빌어 처먹을 놈! 쌍노무 자식! 나도 데려갈 것이지. 여기 남겨서 이렇게 고생을 시켜? 카악, 퉤! 퉤! 퉤퉤퉤!”
살라스가 발작하듯 욕과 함께 침을 뱉어 댔고.
그 담력 좋다는 정보부와 특무대 요원들이 겁을 먹고선 슬금슬금 물러났으나.
“어휴, 또 저러신다.”
“내버려 둬, 얼마나 답답하면 저러시겠어.”
정작 함께 일하는 마법사들과 장인들은 익숙한 풍경인지 그저 혀를 끌끌 찰 뿐.
그들 또한 얼굴에 다크써클이 짙은 것으로 보아 하니 내심 동의하는 모양.
그렇게 한참이나 욕과 침을 뱉어 대던 살라스의.
“대체 저 무거운 걸 나보고 어떻게 거기까지 가져가라는 말이야-!”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악-!
마지막 절규를 끝으로.
“으음, 황자 전하께선 잘 지내시겠지?”
“용광로에 몸이라도 던지셨을까 걱정되나?”
남부의 뱀과 잿가루가 아직도 침과 욕을 뱉어 내고 있을지도 모를 살라스를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참 그 현명하시던 분이 어쩌다 그렇게 변하셨을까.
그것마저도 신비한 조화.
황태자가 손대는 것마다, 발걸음하는 곳마다 뭐든 변화했다.
물론 지금 이 숲도 이를 피해 갈 수 없었고.
“자, 다들 다시 전진!”
어느새 숲 깊은 곳까지 들어온 정보부와 특무대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쇠막대를 뽑아내어 박아 대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쇠막대를 깊게도 심었고.
“자, 다들 전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걷히는 습기와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그들의 땀을 식혀 주는 순간.
“와-.”
시야가 탁 트이더니 이윽고 멀리서만 보던 단풍과 낙엽을 마주했다.
마치 계절이 바뀐 듯.
“서늘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모두 체온 잃지 않게 겉옷을 여며라.”
완전히 달라진 온도와 풍경이 스산했다.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낙엽이 갈라지는 느낌이 생경한 가운데.
그래도 제 본분을 잊지 않은 그들이.
“어쨌든 할 일은 해야지. 다들 말뚝 꺼내.”
가득한 낙엽을 헤치고 빼꼼 드러난 땅에 다시 말뚝을 박아 넣기 시작.
앙상한 나뭇가지를 따라 땅도 메말랐는지 능숙한 망치질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
그들이 금세 여민 앞섶을 풀어헤치곤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내리친 끝에.
“어휴. 간신히 끝냈네. 이거 왜 이래?”
말뚝의 머리 부분만을 남긴 채 모조리 땅 깊숙이 심었다.
그들이 잠시간 휴식을 취하려니.
우우우웅-
지금껏 잠잠하던 쇠말뚝이 울기 시작했다.
기묘한 울음.
흔들리는 땅, 덩달아 후두둑 솟아오르는 낙엽 사이.
저 멀리에서부터 밀려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어어, 어어어? 다들 일어나! 기상!”
심상치 않은 느낌에 그들이 식은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곧, 저 안쪽에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단풍이다! 달려!”
“말뚝은요?”
“일단 달려!”
붉은 파도.
순식간에 몰려드는 단풍을 확인하곤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마치 해일처럼 단풍이 몰려오는 모습.
어찌 된 일인가.
분명 방금까진 잠잠했건만?
허나 몰려온 단풍이 금방 특무대와 정보부의 발을 따라잡았고.
“으아악!”
“모두 숙여!”
그들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지 않으려 몸을 웅크렸으나.
단풍은 그들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고선 지나쳐 갔다.
위험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요원들이 쏟아지는 단풍을 등진 채 눈을 깜빡였다.
물살처럼 밀려 나가는 풍경이 신비로웠다.
몰아치는 낙엽은 마치 살아 있는 양 그들의 손끝만을 희롱하며 나아갔다.
그들이 멍하니 시야를 잠식한 낙엽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문득, 발밑에 옅은 빛이 보여 고개를 내렸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말뚝이 보였다.
아! 이거였구나.
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꽂은 말뚝과 단풍이 접한 순간.
단풍이 말뚝을 타고 녹색으로 가득하던 원시림을 순식간에 붉게 뒤집었다.
아직도 몰아치는 단풍의 파도 안에서.
촘촘하게 이어진 말뚝들이 서로 공명하는 모습에.
모두가 확신했다.
“가자. 단풍은 우리를 해하지 않는다. 전하께서 일으키신 일이다. 모두 세계수로 진격하라.”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렇게 그들이 섬기는 이가 기다리고 있을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정보부와 특무대가 이번엔 쇠말뚝 대신 무기를 꺼내 들곤 붉은 물결을 역류하며 달렸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붉은 물결이 묻었는지 그들의 미소도 붉디붉게 번져 나갔다.
* * *
[무구 진생철퇴의 일부분이 원시림을 점령했습니다. 당신의 신비 단풍이 이를 타고 순식간에 퍼져 나갑니다. 새로운 운명 확산이 깃듭니다!]
[무구 진생철퇴가 원시림의 운명 생명력을 가득 빨아들입니다. 전체를 운명 그릇 안에 저장합니다!]
[알리굴의 운명 일부를 소화하였습니다. 당신의 운명 현혹이 최면과 환상으로 발전합니다!]
운명이 알려 주지 않아도 느껴졌다.
나의 신비가 원시림 전체를 점령하고 있음을, 몸 안 가득 차오르는 생명력이, 더 나아가 남의 정신을 다룰 수 있다는 확신이.
아아, 만족스럽다.
숲에 가득 채워 넣은, 엘프들이 그 오랜 시간을 들여 키워 놓은 생명력을 훔치고 있다는 기쁨.
명분을 지닌 신비가 전해 주는 전능감.
싸움을 앞두고 적을 상대할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는 즐거움이.
꼬리뼈부터 시작하여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눅진하게 치밀어 올랐다.
“하아-.”
입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문득.
“보아라, 이게 너희들이 지켜 온 숲의 말로다.”
옆구리에 낀 머리통을 들어 올리며 간지럽게 속닥였다.
아, 귀가 길어 작게 말해도 잘 들리려나.
그래도 혹시 몰라.
“보아라! 이게 너희들이 지켜 온 숲의 말로다!”
버럭, 벽력처럼 고함을 내지르니.
문득 지금 내가 선 곳이 세계수의 꼭대기이며 손에 든 것이 대장로의 머리통임을 상기했다.
이에 아래에서 비통하게 피눈물을 흘리는 엘프들에게 다시금 선언하니.
“세계수는 너희를 버렸고.”
엘프들의 창조자 세계수가 그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를 택했다.”
직접 징벌자와 재앙을 청했단 사실을 놈들의 긴 귀에 똑똑히 새겨 넣었고.
죽어서도 원통했는지 잘린 대장로의 머리가 피와 눈물을 뚝뚝 흘려 대었다.
가장 높은 나무 위, 완연히 무르익은 가을을 맞이한 풍경이 온통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