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축복을 잃은 증거
거대한 고목이 살아 움직인다는 전설을 들어 본 적 있는가.
오래 묵어 이끼가 낀 몸통, 오랜 세월 풍화되고 일그러진 주름과 옹이의 형상이 인간의 얼굴을 어설프게 닮아 불쾌감을 일으켰고.
썩은 밑동과 뚫린 구멍을 흐르는 바람이 내는 음침한 소리가 울음소리 같아 생긴.
상상에 의한 착각이다.
어둑한 숲속, 보기 싫게 일그러진 형상들과 소리 위에 인간의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
인간의 상상력은 때론 환상과 깨달음의 매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두려움의 발로가 되기도 한다.
북부인들이 에스키모의 전설을 전하며 그러했듯.
하지만.
-그만, 제발 그만 소리 질러 이 미친 새끼들아!
지금 날카롭게 울리는 고함은 결코 상상력이 만들어 낸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나무이자 오래 산 나무이며 신화와 전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나무.
세계수의 첫마디는 험악했다.
원시림 속의 또 다른 숲이라 말할 만큼 커다란 크기, 몸통의 둘레는 사람 수십이 손을 잡아도 모자랄 정도.
최소 수백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만큼 드넓은 크기를 자랑하는 세상의 뿌리가.
-이 빌어먹을 새끼들! 말종들아! 제발 그 더럽고 지저분한 목청으로 나를 부르지 말란 말이야!
단풍으로 물든 그 시각부터 폭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금껏 침묵했건만 대체 무슨 조화인가.
황태자의 저주이자 맹약의 결과가 몸을 오염시킨 순간, 세계수가 침묵을 깨고 엘프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크기가 커서일까 마치 폭탄이 터지듯 꽝꽝 울리는 게 울림통이 보통이 아니었고.
오래 산 세월 때문일까 안에 담긴 감정이 구구절절이 느껴졌다.
충격적인 이야기.
그 어떤 동화와 신화에도 세계수가 저런 욕설을 뱉어 댄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이야기가 없었다.
아, 물론.
“욕쟁이 나무다운 솜씨로군.”
욕을 들은 황태자만은 입술을 비뚜름히 끌어 올리며 세계수의 본성을 입에 올렸다.
물론 엘프들은 갑작스럽게 들린 욕설에 혼비백산하는 중.
그럴 리가 없다, 저 요망한 자가 무슨 수법을 부린 것이다, 의심하지 마라 우리의 어머니다.
그들이 저들의 믿음을 단속하는 동안.
“너희들의 어머니?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황태자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깊은 조소를 띠었다.
“누구 마음대로 너희의 어머니냐. 어머니의 입을 막는 것이 엘프들의 자식된 도리였나? 패륜이 취미이자 특기였나보군.”
“입 닥쳐라. 감히 어디서 망발이냐! 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온 세월이 얼마인데!”
“망발은 저 시뻘건 늙은 욕쟁이 나무가 가장 많이 했다만?”
“뭐, 뭐어!”
당당한 반론에 엘프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된 사이.
-…들렸어?
세계수가 모두가 자신의 욕설을 들었단 사실을 깨닫고는.
-어찌하여 이 신성한 땅에서 소란들이냐. 아이들아, 나는 세계를 관장하는 오래된 뿌리. 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것을 돌보는 어머니. 하여 말하니 잠잠히 너희들의 고난을 털어놓으려무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었다.
황당할 정도의 태도 변화.
“더러운 목청으로 부르지 말라더니 괜찮은가 봅니다? 보통 미친 새끼들아, 소리 질러 놓고선 바로 뒤이어 그런 따뜻한 목소리를 내진 않는데.”
뻔뻔하신 건지, 아니면 나무라 양심이 없으신 건지요?
황태자의 쿡 진실을 찔러 들어오는 말에.
-…그렇게 꼭 짚어야겠니?
“배운 게 이런 거라 좀 이해해 주십시오.”
-하아, 그 녀석도 그러했지. 그래, 그리 말했다. 미친 새끼들, 말종들이라 했어. 왜 그런 말 좀 하면 안 돼? 뭐 같아서 욕 좀 할 수도 있지. 너도 혼자 수천 년간 말도 못 해 봐. 나처럼 되나 안 되나.
“그런 일 없어도 전 원래 욕을 잘합니다.”
-자랑이야?
“자랑이죠.”
-내가 욕 더 잘해.
세계수가 사실을 시인했다.
* * *
건국제의 말대로였다.
“세계수? 그 노망난 욕쟁이 나무 말이냐? 겉으로는 착한 척, 남을 위하는 척하지만 속으론 아주 온갖 욕설을 하는 못난 나무지.”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나누었다 뿐일까.”
건국제가 과거를 회상하며 알려 준 진실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가 나를 도왔다.”
세계수가 건국제를 도왔단 이야기.
생각해 보니 타당했다.
아무리 인간이 저들의 의지를 공고히 이어 왔다 하여도, 아무리 신비를 숨겨 왔다 하여도, 엘프들이 아무리 방심했다 하여도.
“놈들이 쌓아 온 세월이 수만 년이고 인간이 노예로 살아간 세월만 수천 년이다. 그 오랜 시간을 단 몇 년 만에 바꿀 수 있을 리가. 그런 걸 노예라 부르지 않는 법이지.”
말 그대로였다.
썩어도 엘프다.
야만의 시대, 악마들이 춤추고 거인들이 땅을 누비던 시절.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온갖 전설적인 괴수들과 위대한 종족들이 자웅을 겨루던 대륙의 한축을 담당하던 자들.
그만큼 엘프의 저력은 만만하지 않았고.
고작 인간이 그 짧은 시간 동안 극복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뭐 당시엔 나도 막 노예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려 하던 시기였으니까. 심장에 품은 불과 뜻도 어설펐고. 성장하던 때였지. 한창 무럭무럭 자랄 때였어. 한창 거대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역부족이었지.”
크기에 대한 집착을 제외하곤 건국제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일개 개인이 지금껏 쌓아 온 모든 체계를 단숨에 무너뜨리긴 어렵다.
전생에 제국이 그러했지 않은가.
아무리 썩어 빠져도 제국.
쌓아 온 저력이 있기에, 과거 누렸던 영광이 있기에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버텼더랬다.
그만큼 썩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반면에 또 경험했지 않은가, 오래 쌓인 적폐를 없애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사람의 정신을 묶은 구습과 구태의연한 행위들을 벗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전생엔 실패했던 일.
당대에 이루기엔 불가능함을 실감했고 이번엔 차라리 자르고 태워 버리길 선택했다.
그래서 건국제의 말을 이해했다.
“홀로 이루어 내기엔 너무 거대했고, 막 노예의 처지를 벗어던진 인간은 나약했겠죠. 벌거벗은 아이처럼.”
“그래 그 말대로다.”
몇천 년간 노예 취급 받아 왔고 가진 신비는 모두 빼앗겼으며 단 한 번도 영광을 누려 본 적 없다.
전승과 이야기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고 오랜 시간 두려움과 죽음에 시달려 온 세월.
단번에 모든 걸 깨친다?
그야말로 동화 아닌가.
“시작은 좋았지. 들불처럼 번져 나가며 엘프들을 몰아붙였어. 그런데 들불의 단점이 뭔지 아냐?”
빨리 꺼진다는 점이다.
건국제가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로 당시의 싸움을 상기했다.
처음엔 좋았다.
인간들의 반란을 생각지 못한 엘프들은 속절없이 밀려났고.
그간의 원한과 분노로 속을 가득 채운 인간들이 숲을 질타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이 정도 위기를 겪은 적 없을 리가 없다.
인간들보다 더욱 강대한 존재들과 종족의 생존을 건 전투를 펼쳐 온 경험이 많았다.
고작 노예들에게 당할 자들이 아니었고.
“끔찍했지. 끔찍한 싸움이었다. 글쎄 어찌보면 내 평생의 싸움 중에서 가장 처절한 싸움이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당시는 힘든 시기였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신화로 남은 건국제이자 해방자, 카이론 마저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겪었다 회고했다.
찔리고, 맞고, 터지고, 지지고, 볶고, 파묻히고.
그가 겪었던 고난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얻었던 깨달음들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비록 그의 경험이었으나.
땅, 따앙, 따아앙-!
쇳소리가 울리며 몸에 담긴 강철의 신비가 점차 단단해졌다.
“그래, 그 신비. 그 신비를 얻기 전이었다. 고생을 많이 했지.”
결국 오랜 싸움이 될 수밖에 없던 상황.
직감했다고 한다.
“주어진 삶이 너무 짧아. 이대로면 인간은 다시 노예가 될 것이고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엘프는 앞으로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뿐만이랴.
엘프의 땅에서 도망쳐 나온다고 하더라도 상대해야 할 적들이 산더미.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를 두고 볼 리가 없다.
과연 그들 중 엘프보다 못한 이가 누구란 말인가.
점차 많은 이의 열정이 식어갔고 후회하는 이들도 나왔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겠지.
더 혹독한 세월을 견뎌야 할 것이라며 건국제와 다른 이들을 탓하는 자까지 생겨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군요.”
“그게 인간의 속성이니까. 빨리 타오르지만 그만큼 빨리 식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같은 모습에 건국제가 쓴웃음을 지었고 내 얼굴에도 같은 표정이 피어났다.
앞이 깜깜한 상황.
엘프들과 처절한 전쟁 중 그의 머리통을 스쳐지나간 한 가지 돌파구.
“세계수를 인질로 잡자.”
역시 선조답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안 좋았으니까.
하여 홀로 별동대를 데리고는 숲을 주파, 마침내 대장로가 지키고 선 세계수를 만났다 한다.
그리고 별동대의 희생으로 마침내 건국제가 세계수의 기둥에 불을 들이밀며.
“오면 태워 버린다! 다 죽는 거야! 이 숲 미치광이 새끼들아!”
고결한 협박을 외칠 때.
-태워. 그냥. 죽여, 씨발 다 죽여. 다 죽여 버려!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그냥 다 죽여! 나도 죽여! 같이 죽여 당장!
건국제의 머릿속을 파고 들어온 욕설, 목소리 한 줄기.
여린 듯 굳센 목소리가.
-그냥 다 죽자. 너희들을 내 자식들이라고 보고 있으려니 열불이 터지고, 속이 터지고, 아주 뿌리가 다 썩어 문드러지겠다. 저 쌍노무 새끼들! 당장 죽여! 차라리 불타 죽어서 이런 꼴 안 보련다! 당장 죽여어어어-!
끝없이 욕을 속삭였고.
“어, 저기요?”
건국제가 당황하며 세계수에게 말을 건 순간.
모든 상황이 변화했다.
-내 말이 들리니? 그렇다면 내가 품은 신비를 주마… 저 어긋난 자식들을 교화시켜다오. 부탁이다. 죽여도 좋고 어떻게 다루어도 좋아. 제발 녀석들을 좀 생명체답게 만들어 다오.
그녀가 건국제의 불을 함빡 빨아들였고.
그곳에 자신의 생명력을 담아 건넸다.
지금까지 얻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불이었다.
“하여 네 번째 심장으로 놈들을 매질했고 맹약을 맺었지. 그 맹약엔 엘프들의 굴욕도 들어 있으나, 결국은 그들을 탄생시켰던 어미. 세계수의 후회도 들어 있었다.”
놀라운 일.
세계의 뿌리가 스스로 제 아이들을 징벌했다니.
문득 든 의문 하나.
그럼 그때까지 왜 아무 말도 없었는가.
잔혹한 자식들을 혼낼 기회가 많았을 터인데.
“왜 미리 말리지 않았답니까. 선조를 도와줄 때까지요.”
“자식들이 귀를 닫고 어미의 입을 막았으니까. 세계수는 입을 봉인당했다. 엘프들의 손에 의해.”
“듣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었군요.”
“그러니 가서 맹약을 어겼다는 징표를 들이밀어라. 그리하면 그들의 어미이자 늙은 욕쟁이 나무는 결국 너의 손을 들어줄 거다.”
“네 번째 심장은 어디있습니까.”
“그녀가 갖고 있다.”
“답이 되었습니다.”
그리 잠깐의 만남을 끝마치려 할 때.
“힘들지 않으냐?”
문득 건국제가 물어왔다.
겉모습이 얼추 나와 비슷한 나이대.
아마 해방자로서 활동했던 나이인가 보다.
“선조만 하겠습니까. 뭐 나름 따르는 이도 있고 제국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구나.”
그렇게 등을 돌리려다 문득 나 또한 속에 품었던 물음을 꺼냈다.
“큰 거 좋아하는 꼰대시여.”
“하나만 해라 좀 미친 후손아.”
“그대도 세계수처럼 제국의 삶을 원망하고 질책합니까? 변해 버린 의지와 사라져간 고결함을 미워합니까?”
“…….”
잠깐의 침묵.
그걸로 답이 되었다.
부끄러운 후손은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를 남기려는 찰나.
“그랬지. 그랬었다.”
건국제가 툭 내심을 털어놓곤.
“하지만 이젠 아니지. 보았지 않았는가. 북부의 위대한 희생과 회생을, 서부의 검은 눈물을 오색 웃음으로 바꾸는 모습을.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질책도 미움도 웃긴 일이지. 너희의 제국이니. 별걸 다 물어보는구나? 사실 소심한 성격이냐, 후손아?”
기습적인 한방으로 나의 질문을 되갚았다.
놀란 후손의 얼굴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그러니 평안해라. 굳건해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건국과 회생은 한 가지다. 뿌리가 같으니 결국 뜻도 같지 않겠느냐.”
마지막 위로를 남기고는 떠났다.
건국과 회생은 한 가지.
창조와 회복은 한 가지.
그의 말이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원래라면 끝까지 바락바락 이겨 먹었겠으나.
흐리게 남은 고맙다는 한 마디에 독기가 날아가 버렸다.
재미없게.
여하튼 건국제가 알려 준 바에 따라.
단풍을 이용하여 세계수의 봉인된 입을 열었고.
“오랜 선조의 유언에 따라 당신의 자식들을 징치하러 왔으니, 세계의 뿌리께서는 답하시오. 어찌해 드리리까. 모두 죽여 드리리까?”
당당히 물었다.
잘못을 저지른 당신의 자식들을 어찌했으면 좋겠느냐고.
물론.
“말도 안 된다! 세계수, 우리의 어머니께서 어찌 너 같은 놈에게 답을 하시겠느냐! 어머니! 여기 엘프들의 삶을 위협하는 해충 같은 자들이 왔사오니, 직접 벌하여 당신의 사랑과 넘치는 생명력을 증거하소서!”
엘프들의 대장로는 변함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으나.
오랜 세월 자식들이 부리는 패악을 지켜본 세계수는.
-너희는 나의 자식이 아니다.
단 한마디 말로 모든 관계를 부정해 버렸다.
그 순간.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디서부터인가.
아니, 모든 곳에서 울려 나왔다.
깊은 곳 내장을 끊어 내는 듯한 비명들.
엘프들이 눈물을 흘리며 내질렀고, 숲 전체가 몸을 떨며 질렀으며, 세계수조차 절절하게 내뱉었다.
그래, 온 원시림과 안에 사는 존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니.
느껴졌다.
그들의 운명이 갈라짐을.
본래 엘프들은 세계수가 잉태한 첫 신비이자 첫 생명.
그녀의 오랜 사랑.
그리고 지금.
[대상, 세계수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질긴 운명 인연, 원시림, 숲, 고귀, 첫 자식을 찢어 내려 합니다]
[엘프들의 운명이 보입니다. 주요 운명 숲의 아이들, 섬김, 돌봄이 뜯겨 나갑니다]
[장소의 운명을 읽습니다. 장소에 가득했던 운명 생명과 축복, 보호가 사그라듭니다]
그들을 오랫동안 묶어 왔던 강렬한 인연과 운명이 강제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어미와 자식의 인연이란 얼마나 끈끈한가.
더군다나 첫 자식, 가장 고결한 마음과 따뜻한 심성으로 빚어 낸 자식들.
이후 오랜 시간 축복과 보호로 키워 왔더랬다.
세계수의 자식 엘프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순수함으로 어미를 돌보았고 오랜 시간 섬겨 왔다.
참으로 따뜻한 관계가 아닌가.
그러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지금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엘프들이 철저히 믿었던 어머니, 세계수의 손에 의해서!
“아아악- 아아아악! 어머니! 어머니! 우리를,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자식들을 버리시나이까! 어미니이이이-!”
세계수를 바로 옆에서 모셔 온 대장로가 가장 아파하며 울었다.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
모두가 오랫동안 보아온 드넓은 세계수를 향하여 양팔 벌려 울부짖으니.
그 모양새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부르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 자식들의 모습이 비통했는지 세계수 또한.
-끼아아아악! 끼아아아악!
날 선 울음을 뱉어 냈다.
자식을 잘라 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찌 평안할까.
허나 붉게 단풍에 물든 세계수는 피를 쏟아내듯 비명을 쏟아내면서도.
말을 되돌리지 않았다.
그들이 끊어진 운명에 고통스러워 하는 동안.
“그럼, 버린 자식들의 처리는 내가 맡겠습니다. 세계수께선 건국제와 약속한 불을 준비하십시오.”
이대로는 비명만 듣다 끝날 거 같아 버린 자식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나섰고.
“닥쳐라! 인간 주제에-!”
장로 중 하나가 나의 무례함을 탓하기 전에.
놈의 몸통을 갈랐다.
터지는 피에 일제히 비명이 멈추며 고요가 찾아들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구나.
방금 울렸던 비명이 얼마나 컸는지 이명이 들릴 정도.
폭력으로 슬픔을 잠재운 후.
“먼저 첫 번째, 이 모든 일의 책임자인 대장로는 대가리를 내밀어라.”
당연히 내밀 리가 없었고.
방금까지 울부짖던 이들이 가장 존귀한 엘프를 보호하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왜? 왜애!”
엘프들이 그리 오래 쌓았던 힘이 단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힘은 그대로였으나 자신들을 돌보는 이의 축복이 사라지자 탈력감과 무력감이 그들의 몸을 지배했고.
마음이 꺾여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쉬웠다.
허우적거리는 놈들을 지나쳐 대장로 앞에 서서는.
“그러니까. 사과하라 했잖아.”
검을 휘둘렀을 뿐.
오랜 과정에 비해 허무한 결과.
툭, 머리 떨어지는 소리가 어째서인지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같기도 했다.
죽어 버린 대장로의 머리를 들고 세계수 위에 오르니.
먼 원시림이 모조리 눈에 들어왔다.
붉게 이어진 길.
내가 피워 낸 단풍이 일직선으로 피어 있었고.
이제는 원시림의 중심인 세계수마저 완전히 물들어 버린 풍경.
곳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엘프들의 시선이 느껴지기에.
짙게 웃었다.
그들에게 세계수가 너희들을 버렸음을 공표했다.
울리는 메아리와 더불어 단풍이 화아악, 온 숲을 물들였다.
정보부와 특무대가 소임을 다한 모양.
그때가 너무나 절묘하여 마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착각이 일 정도.
필요한 때 커다란 행운이 깃들었고.
대장로의 머리를 든 채로 그들의 죄를 읊었다.
많은 탄식과 부정, 고통이 숲에 흘렀다.
허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실은 원래 아픈 법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다시 한번, 진짜 마지막으로 물으니.
“그래서, 죽을래 사과할래?”
거절하는 이들은 뻣뻣이 고개를 들었고.
죄를 인정한 이들은 그대로 허리를 굽혀 사죄를 표했다.
좋다, 저 정도 기개라면 이해해 주어야겠지.
“허리를 높인 자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 너희의 때가 끝났으니.”
원시림 가득한 단풍이 잠시 소란을 피웠고.
붉은 바람이 가라않자 남은 건 허리를 숙인 이들뿐.
“대장로의 피로 너희 어머니였던 세계수의 둥치에 죄를 적어라. 평생의 속죄이며 평생의 업보다.”
너희는 고귀함을 잃었다.
원시림과 세계수를 잃은 엘프가 인간과 동격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축복을 잃은 증거, 주름이 빠르게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