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하늘을 나는 고래
오랜 시간이었다.
추악공 보티스가 삶을 회상했다.
보통 떠올리는 추억과는 달랐다.
그가 그리는 아름다운 풍경은 모두가 고통에 떠는 모습.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생명들이 그 누구보다, 자신보다 더욱 추악하게 비명을 질러 대는 풍경들.
숲이 빚어 냈다던 아름다운 엘프들과 가장 위대하다고 현명하다던 드래곤, 의지가 크기만큼 강대하다던 거인족들마저 자신의 발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자신의 이상향.
추악공 보티스는 그런 세상을 꿈꿨다.
세상 모두가 자신보다 추악해지는 미래를.
무한한 시기와 질투를 타고 태어났다.
자신보다 나은 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용서할 수 없다.
놈은 자신이 존귀해지는 것보다 남들을 끌어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어그러진 감정.
그가 악마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니라.
하여 보티스는 자신보다 아름다운 모든 것을 미워했고 망치고 싶어 했다.
용납할 수 없다.
아름다움을 품은 자들을.
그것은 외형적 아름다움이기도 했고, 내면적 아름다움이기도 했으니, 한낮 길가에 피어난 꽃의 생명력마저 미워했다.
그러니까 추악공 보티스는 세상 모든 것을 추악하게 만들어야 만족할 자.
그런데 지금.
“추악하구나. 아주 추악해.”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잘못된 시기와 질투의 발로가 이루어졌다.
세상 모두가 자신보다 추악했다.
모든 것이 추악하니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고 존귀해졌다.
아아, 이 얼마나 즐거운 풍경인가.
보티스가 못난 세상을 굽어보길 잠깐.
“한데 너만은 아직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구나.”
자신이 앉은 추악한 권좌 주변.
가장 아름다웠던 것들을 추악하게 박제시켜 놓은 자리.
모두가 과거의 영광을 잃고선 추레한 현재를 자랑하건만.
백금발이 깨끗한 한 사내만큼은 끝까지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추했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만났던 적이 있었지.
언제였더라… 과거였던가, 미래였던가.
아니, 어쩌면 둘 다였던가.
깨끗한 백금발, 적의 어린 진홍색 눈동자.
그만은 고결한 모습 그대로 보티스의 앞에 자리했다.
울컥, 불만과 분노가 치솟았다.
문득 이 세상 전부가 맘에 들지 않았다.
단 하나의 존재 때문에.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못나 보였다.
주변 모든 것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느꼈다.
죽어 가던 드래곤도 엘프도 사람도 거인도 악마도.
일제히 비명을 멈춘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풍경.
이내 그들의 입이 히죽 올라갔다.
자신보다 추레한 자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비웃고 있다!
그 중앙엔 자신보다 아름다운 자가 서 있다.
명확한 우열과 비교 속에서 초라한 모욕감이 치달았다.
말도 안 된다.
세상 모든 것은.
“못나야 한다! 추악해야 한다! 나보다 아름다운 것은 있을 수 없어!”
자신보다 못나야 하거늘.
하여 파괴했다.
자신을 비웃는 모든 미소를,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눈동자를.
그렇게라도 벗어나고자 했다.
제 추악함을 감추고자 했다.
방금까지 치밀었던 비열한 행복이 지금 와선 역겨운 분노가 되었다.
마구 날뛰고 또 날뛰던 중.
“고작 이딴 장난으로 무얼 해 보겠다는 거냐!”
보티스의 핏발 선 눈이 유일하게 제 형태를 유지하는 사내를 향했다.
과거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던 인간들의 해방자.
그 위로 겹치는.
“퇴물의 환상으로 날 농락하려 드는 것이냐.”
숲에서 보았던 황태자의 광기.
그래, 과거와 현재가 퍽이나 닮았구나.
추수꾼의 말이 이해되었다.
놈은 건국제의 현신과도 같았다.
아니, 현신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치미는 굴욕감이 설명 되지 않는다.
당시의 불꽃, 당시의 맹약, 당시의 살기를 빼닮았다.
아니, 좀 더 미친 것 같기도.
놈도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 테니 광기가 깃들었겠지.
저 고고한 척하던 세계수마저도 자신이 아끼는 아이들을 잘라 내지 않았던가.
모든 건 변하는 법.
“오랜 맹약을 기억하는 자, 이를 이룰 수 있는 자, 나를 갖고 장난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밖에 없지. 안 그러냐, 카이론. 방금은 잘도 속여 넘겼군.”
건국제의 이름에 황태자가 짙게 미소 지었다.
곧 떠오르는 과거의 싸움들.
환상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겪어 왔던 시절이었으니까.
오래전 악마와 오래전 영웅의 만남일까.
신화와도 같은 풍경 안에서.
보티스가 황태자가 일으킨 환상을 헤치고 나아와 앞에 섰다.
“그때는 졌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놈이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장담하며 황태자를 깊게 찔렀고.
앞에 선 황태자도 주변에 가득했던 추레한 풍경도.
이내 모든 것이 아리따운 나비가 되어 흩어졌다.
보티스의 손에 달라붙은 나비들이 몸을 타고 번지기 시작.
문득 눈을 뜨자.
-따끔하군.
네 가지 불꽃에 감싸인 채 타오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맞은 편, 황태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일찍 일어났군. 못생긴 놈은 역시 잠도 없나?”
막 눈을 뜬 악마를 조롱했다.
* * *
눈앞으로 다가오는 놈의 손을 잡은 순간.
[운명 최면, 환상이 상대의 정신을 잠식합니다]
최면과 환상을 섞어 넣었다.
알리굴이 세상을 속였던 능력.
이를 보티스에게 펼쳤고.
놈의 얼굴에 멍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사이.
새로운 불꽃이 세계수에 어렸다.
[네 번째 심장 녹염이 불꽃에 새로운 형태와 약동하는 생명력을 심어 넣습니다]
네 번째 심장 녹염의 초록은 생명.
지금껏 타오르고 터지고 빛나기만 하던 나머지 불꽃들에 새로운 속성을 부여했고.
형태를 빚어내었다.
이지러지던 불꽃들이 생명력을 함빡 머금곤 나뭇잎으로 변화했고, 더욱 많은 생명력을 쏟아 넣자.
나비로 화했다.
화아악. 세계수에 가득 메달려 있던 불꽃들이 색색의 나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역류하는 바람과 나풀거리는 나비들의 날갯짓.
빨강, 주황, 노랑, 초록.
아이들의 색칠 놀이장이 아닐까 싶을 만큼 화려하게 피어난 나비들 사이.
악마와 마주한 채.
천천히 팔락이는 날개짓을 구경했다.
놈의 눈 또한 앞을 지나가는 나비를 따라 움직였다.
점점 빠져든다.
깊은 환상으로, 깊은 욕구로.
[일어난 생명력들이 휘돌아 상대의 눈을 어지럽힙니다. 보티스의 운명이 깊은 최면과 환상에 빠져 방황합니다]
곧 피워 낸 불나비들이 나와 추악한 놈을 감쌌고.
같이 타올랐다.
몸을 달구는 불의 온도는 뜨거웠고 어리는 생명력이 맑았다.
네 번째 불꽃 녹염이 마치 의지를 지닌 것처럼 추악한 악마의 살갗을 파고들려 했다.
흔드는 날갯짓을 따라 퍼지는 환상과 최면이 치명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는 놈을 내버려 두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어딘가 몽롱한, 먼 곳을 보는 듯한 얼굴들.
그 사이로 나비들이 춤을 추며 날았다.
하나하나 얼굴을 관찰하듯 마주하곤.
지나쳤다.
심판이 자신을 해하지 않음을 알고 나서야 다들 환상에서 깨어났다.
이윽고 나비들이 도착한 자리는 덩달아 멈춰 선 독충들과 인섹터들 앞.
마찬가지로 환상을 보는지 멍하니 정신을 잃은 놈들에게 소리 없이 다가갔다.
나풀거리는 모양새가 현실감 없었다.
나비들이 독충들과 그들의 왕을 감쌌고, 드러난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보기엔 아름답지만 치명적이고 독하다.
생명을 얻은 불꽃은 이전보다 한층 위험해졌고.
남아 있던 적을 모조리 휩쓸었다.
죽는지도 모른 채 날갯짓과 피어난 환상에 홀린 채로 사멸했다.
한데 녹염이 품은 능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헉, 허억, 허어억.”
인섹터에게 당해 죽어 가는 엘프.
그 옆에 선 잿가루와 남부의 뱀이 자신이 가진 회복약을 들이부었으나 소용없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를 따라 원시림까지 들어온 기사들과 마법사들, 사막의 전사들까지.
거친 전투 속, 다친 자들이 많았고 살아남은 엘프들 중에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가 가득했다.
아름다운 풍경 속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가.
희생을 각오한 싸움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전우의 죽음은 힘겨운 일.
그때.
초록빛, 생명력을 가득 품은 나비들이 나풀나풀 날아 상처 입은 자의 몸 위에 내려앉았고.
맑은 불꽃이 되어 그를 감싸 안자.
상처가 끓어오르며 수복되기 시작했다.
달린이 놀랐다.
전에 비슷한 광경을 본 적 있다.
상상력을 빼앗긴 채 죽어 가던 가련한 아이.
황태자가 막 숨을 거두던 아이를 불로 감싸 되살렸던 기억.
지금 그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다친 이는 부상을 회복했고.
숨이 멎어 가던 이는 다시 숨통이 트였다.
한쪽에선 죽음으로, 한쪽에선 새로운 생명으로.
[신비 녹염이 품은 생명력이 주변을 가득 채웁니다. 스러져 가던 운명들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물론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이들은 구할 수 없었으나.
“이봐, 정신이 들어?”
“운이 좋았어. 간신히 살았군.”
“내가 살아난 건가?”
“그래, 전하께서 살려 주셨지.”
문득 남부의 뱀과 잿가루, 그들과 함께 날 올려다보는 엘프의 얼굴을 보았다.
가득한 감격이 간지러워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그래도 살 수 있는 이들은 살렸으니 되었다.
그리 만족하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악마의 눈.
먼 곳을 바라보지만 바로 앞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들켰구나.
아니나 다를까 놈이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심장을 움켜쥐려 했고.
피를 울컥 쏟아 내던 내가 나비가 되어 흩어졌다.
이 마저도 환상.
이후로는 술래잡기가 펼쳐졌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나의 심장을 탐하려는 악마의 손길을 피해 냈고.
나 또한 집요하게 놈의 추레한 껍질을 벗겨 내려 애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쩌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팔랑이는 나비들 사이, 놈의 손이 미칠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놈을 더욱 약올려야만 한다.
추악공 보티스는.
“네 껍질을 벗고 진짜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라.”
가장 못생긴 악마.
아까 뭣처럼 생겼다 조롱했으나 놈의 진짜 얼굴이 아니라는 걸 안다.
진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결코 죽일 수 없다.
전생에 보티스를 죽이는 데 실패했던 이유.
남부 원시림을 비롯하여 평야까지 먹히고 난 후.
제국은 위기에 처했다.
원래라면 알곡과 추수가 가득했어야 할 땅에 유황과 악마가 가득하니.
주린 이들이 서로를 탓했고 더 나아가 제국과 황제를 탓했다.
북부, 서부를 잃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협.
쌓아 놓은 양식에도 한계가 있었고 곧 곡식 창고를 잃은 제국 전체가 주렸다.
아니, 풍요한 자들은 풍요했으나 대부분은 끔찍한 허기에 시달렸다.
이대로는 제국이 전복되거나 서로를 잡아먹을 상황.
하여 남은 힘을 다 쥐어짜 내어 남부 토벌을 시작했고.
처참히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 두 가지.
첫째로는 보티스의 진면목을 몰랐던 점.
그저 저 붉고 핏줄 가득한, 뿔과 송곳니가 길게 난 모습이 진짜인 줄 알았으나.
마지막 전력을 다한 전투 끝에 승리했다 생각했을 때.
놈이 진짜 모습을 드러냈고.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 그대로 악의에 휩쓸렸다.
두 번째로는 추수꾼.
보티스가 추악함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면 놈은 비열한 뱀처럼 사방을 누리며 보이지 않은 곳을 삭혀 나갔다.
중요한 순간 풀썩 주저앉도록.
천천히 퍼지는 독과 같이 몰래 숨어 추수를 준비했지.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 보티스와 쫓고 쫓기는 나를 보며 무언가 계략을 획책하는 중일터.
하여 둘 다 잡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었다.
보티스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추수꾼의 때를 당기기 위해.
이제부터 인내심 싸움이었다.
누가 먼저 알곡을 거두느냐, 누가 자신의 패를 드러내느냐의 싸움.
점차 시간이 무르익었고.
푸욱, 놈의 손이 나의 배를 깊이 파고든 순간.
“전하!”
“안 돼!”
[대상의 운명 거짓된 형상 일부를 진생철퇴의 운명 연옥에 가둡니다. 연옥이 거짓된 형상 전부와 안에 숨어 있는 추악한 본체 일부를 강렬히 끌어당깁니다!]
술래잡기가 끝났다.
현자의 착각과 달리 술래는 나였고 악마가 잡혔다.
추수의 때가 도래했다.
물론 술래가 나였듯 이번에도 추수꾼은 내가 맡으리라.
* * *
“때가 이르렀구나.”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추수꾼이 활짝 웃었다.
그래, 자신의 뜻을 위해 보티스를 보내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황태자 또한 악마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그리고 그는 그동안.
“마른 숲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리라.”
낙엽이 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원시림을 접수하려 했다.
“모두 자리했느냐.”
물음에 머릿속에 답이 요동쳤다.
눈을 감자 그의 이마가 꿈틀거리며 원시림 곳곳을 비추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가득 쌓인 낙엽.
그의 분신이자 자신을 따르는 학파 모두가 어느새 원시림 곳곳에 위치했고.
곧.
“파멸을 이루리라.”
“파멸의 씨앗을 심으라.”
추수꾼의 말을 따라 원시림 곳곳에 제 몸을 파묻었다.
이내 그들의 머리가 꿈틀거렸고.
이마에 오른 핏줄이 땅에 전염되듯 메마른 대지에 덩달아 굵다란 핏줄이 올랐다.
꿈틀꿈틀, 뱀처럼 일렁이는 그 모습이 징그러웠으나.
다행이라면 낙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
이를 보며 추수꾼이 만족스런 미소를 품었다.
“낙엽이 땅을 가렸고 우리를 거부하던 숲은 힘을 잃었다. 그 어느 때보다 파종을 하기 좋은 시기로다.”
지금껏 원시림을 점령하지 못했던 이유.
땅에 깃든 세계수의 축복과, 엘프들이 가꿔 온 질긴 생명력 때문.
지금껏 독충의 독을 이용하여 꾸준히 세계수와 땅을 오염시켜 왔건만.
이리 쉽게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황태자가 일으킨 저주가 세계수의 축복을 이 땅에서 끊어 내었고 가득하던 생명력마저 바싹 말라붙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지금이 씨를 뿌릴 완벽한 시간.
일그러진 현자 베니시오르가 꿈꾸던 순간.
추수꾼들이 뿜어낸 악독한 기운이 메마른 땅을 까맣게 물들였으나.
낙엽이 이를 덮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숨이 막힌 땅 덕에 독기가 훨씬 빨리 무르익었다.
마치 거름을 뿌린 듯 순식간에 썩어 들어간 독기가 메마른 나무를 타고 올랐다.
붉은 단풍 사이사이 나무들이 까맣게 물들었고.
쉬익, 쉬익 땅에서 올라온 짙은 가스가 뜨거운 독기를 뱉어 냈다.
“열린다. 열리는구나. 메마른 땅에 독기가 가득하여 열매가 열리는구나! 파멸이 찾아오리라!”
추수꾼이 열기 어린 눈으로 물들어 가는 원시림을 바라보며 감격했다.
곧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피어난 열매들이 벌어지며 추한 악마들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아아,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꿈꾸었던 풍경!
이렇게까지 빨리 이루어질 줄이야.
이리 빨리 땅이 오염되고 열매를 맺을 줄이야.
추수의 때가 성큼 다가오고야 말았다.
물론 이 모든 공은.
“전하, 당신을 오해한 소신의 미련함을 탓하지 마시옵소서. 당신은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지도자이니. 세상의 타락함을 미워하여 심판을 앞당긴 현자이옵나이다-!”
추수꾼이 고귀한 황태자를 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저자는 분명 파멸의 씨앗이 맞구나.
본래 멸망을 위해 준비했던 씨앗.
한데 어쩌다가 건국제의 영령과 불꽃을 받은 것인지 갑자기 변화했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황태자 덕에 이리 쉽게 비원을 이루다니.
이처럼 사람 일이라는 것이 모르는 거다.
결국 어느 방향으로든 파멸을 이루어 냈으니 황태자는 파멸의 씨앗이 맞지 않은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준 영웅이자 세상을 정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공신!
“당신의 그 미련함이 우리에게 기회가 되었으니.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남겨 드리죠. 얼마나 위대하고 멍청한 결정을 하였는지요.”
추수꾼이 악마에게 배가 꿰인 채 멈춰 있는 황태자를 보며 비열하게 조롱할 때.
보티스가 갑작스레.
-이상하군. 감촉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것마저도 환상이란 말인가?
분명 강철의 신비를 품었다는 걸 안다.
고작 이 정도에 뚫릴 리가 없건만?
그가 손을 빼내자.
보인 건 손이 없는 휑한 손목.
긴급한 불안감이 엄습함과 동시에.
“내가 말했지, 너 잡혔다고.”
황태자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이어 강한 흡입력이 그의 손목부터 전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지금 어디로 빨려 들어가는 것인가.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알리굴, 놈의 웃음.
-연옥에 온 걸 환영한다, 이 못난 놈아.
거기까지 들은 보티스가 껍질을 벗어던지며 제 본모습을 드러냈고.
저 멀리 무르익은 악마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황태자의 함정은 실패했고 악마들이 태동했다.
멸망이 도래하는가.
그러나 멸망이 이루어지기 전 먼저 찾아온 변화가 있었다.
바로 아직까지 환한 빛을 뿜어내던 빛기둥.
그 틈이 활짝 열리더니.
우우우웅-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원시림 한복판에 갑작스레 등장.
마치 그 모습이 하늘을 나는.
“…고래?”
고래와 같았다.
그만큼 은빛 타원형 몸체는 유려했고 뒤에서 뿜어내는 오색 연기가 신비했다.
저 커다란 것이 날고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윽고.
“이 빌어먹을 녀석아! 내가 왔다!”
안에서 들려온 것은 살라스의 목소리.
“어디부터 쓸어 줄까?”
그의 물음에.
“전부. 눈에 보이는 악마 전부.”
황태자가 환히 미소 지었고.
진생철퇴를 섞어 만들어 낸 세계 최초의 비행선.
플라잉 해머 호가.
투투투투투투-! 사방에 은빛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