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환상 같은 현실
그러니까 황태자가 막 남부로 떠나기 직전.
원시림까지 함께 따라가려는 살라스를 멈춰 세웠다.
“넌 왜 와?”
“나도 가야지. 지금 엘프가 장난이야? 그놈들 강한 거 몰라?”
“알지.”
“그럼 당연히 내가 필요할 거 아냐. 그리고 마법사단을 이끄는 게 난데. 가야지. 애들만 보내?”
“무슨 애들이야. 털 숭숭 나서 너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아저씨들인데.”
“뭐야. 왜 꼬였어? 뭐가 또 문젠데? 요즘엔 말 잘 듣고 욕도 안 하잖아?”
살라스의 불퉁한 물음에 황태자가 볼을 긁적이길 잠시.
“넌 오지마.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
분명 겨울이 아님에도 싸늘한 바람이 주변을 감쌌다.
불안하다.
매우 불안하다.
녀석이 무언가를 입밖으로 꺼내기 전.
“아, 아아, 아아아아- 안 들린다. 난 남부 간다. 남부 갈 거다. 가서 같이 깽판 치고 지랄 난리를 칠 생각이다-.”
살라스가 양 귀를 막고선 되는대로 지껄였다.
눈까지 까뒤집고선 난리를 치는 모습에.
지나가던 마법사들과 장인들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황급히 눈을 깔곤 지나갔다.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심지어 이리 중얼거리는 이까지 있을 정도.
그러나 살라스가 아무리 광기를 부려도.
“다 태워 버린다. 귀 열고 바로 들어.”
황태자만 할까.
제국, 어쩌면 제국을 넘어 대륙 제일의 미치광이일지도 모르는 황태자의 협박에 살라스가 슬그머니 귀를 막은 손을 내렸고.
“넌 저걸 남부 숲까지 가져와라. 명령이다.”
“…저걸?”
황태자가 가리킨 무언가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손끝엔.
공단 지하에 묻혀 있던 커다란 철괴이자, 악마 알리굴을 심어 놓은 철퇴.
길이 수십 미터, 높이만 수 미터짜리 순수 철로만 이루어져 있는 묵직한 녀석.
그때까지만 해도 살라스의 표정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어떻게든 마법과 온갖 장비를 이용하면 남부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머릿속으로 돌려 본 계산에 따르면, 가능했다.
좀 시간도 걸리고 힘도 많이 들겠지만 어떻게든.
문제는.
“남부 숲에 가져오는 건 물론, 앞으로 어디로든 가져갈 수 있게 만들어 놔.”
“……!”
앞으로 어디로든 가져갈 수 있게 만들라는 말.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저 무거운 걸.
“종종 가지고 다녀야 할 거 같으니까.”
종종 가지고 다닌다니? 누가?
“네가.”
너무나 놀라 입만 벙긋거리는 살라스를 바라보던 황태자가 비로소 만족했는지 그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저거, 갖고 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써서든. 명령이라고 했다, 살라딘.”
명령을 내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과 장인들 또한 하던 일 그대로 멈춘 상태.
“고생들 하도록. 기대하는 바가 커.”
황태자가 멈추어 선 이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간 뒤.
절망 어린 비명이 연이어 퍼졌다는 것은 공단에서 유명한 일화.
황태자가 남부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날부터.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살라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멀쩡했던 대도서관 마법사들과 공단 장인들이 매 순간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 내려진 과제가 막중했기에.
저 빌어먹게 큰 철괴를 자유자재로 옮겨라.
대체 어떻게?
그래도 한 가지 힌트가 있었다면.
“이봐, 서부 쪽에 연락을 넣어 봐.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서부든 북부든 어디든. 로이스 가문? 그쪽에 돈이 많다지?”
황태자의 수단 가리지 말라는 말.
어떤 식으로는 방법만 찾으면 된다.
하여 남부 플라워 밸리로부터 시작된 연락이 서부 사막, 북부, 로이스 가문까지 닿았고.
“뭘 옮겨요?”
“그러니까 얼마 만한 크기요?”
“그건… 돈으로도 안되죠.”
소식을 들은 모두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어렸다.
그러니까 물건을 옮기는 건 가능하다.
“뭐 병사 수백 수천도 옮겼으니 시도는 해 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한 달은 앓아누워야 할걸요?”
“안 됩니다. 그러다 제 동생 죽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서부 등대지기와 하란은 난색을 표했다.
한 번 옮기는 거야 가능하겠지만 자유자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북부는 당연히 방법이 있을 리 만무.
로이스 가문 또한 아무리 트럭 수십 대를 움직인다 하여도.
“손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의미가 없어요.”
돈만 드는 일.
어떠한 성과도 없으니 의미가 없다.
그래도.
“안 그래도 트럭을 제국 전역으로 돌리려면 대규모 도로 공사가 필요하긴 했습니다만. 때가 이릅니다.”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으나, 아직은 먼 미래의 일.
심지어 이 빌어먹을 철괴는 자르는 것도 어려웠고 다루기마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름시름 고민만 깊어져 가던 때.
“전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철괴를 쇳물과 섞어 말뚝 수천 개를 만들어 달라고요.”
정보부와 특무대의 방문.
황태자의 명령에 살라스가 막 화를 내려던 찰나.
“북부의 불과 서부의 가루를 이용해라. 네 그 알량한 마법과 섞으면 무어라도 되겠지. 그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 설마 이렇게 말해 줘도 못 알아들으면 알아서 용광로 속에 몸을 던지라 해. 이렇게 말을 추가하셨습니다.”
남부의 뱀이 눈치를 보며 전한 황태자의 중요한 조언.
순간 살라스의 머리 한구석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몰려오는 순간.
잠시,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봐, 서부와 북부에 연통을 보내라. 북부에선 불의 샘을 서부에선 오색 모래를 보내라고 해. 해 볼 것이 많다.”
일단 일을 벌이기로 작정.
다짜고짜 북부와 서부의 자원들을 모았다.
거기까진 어렵지 않았다.
하란의 능력을 통하여 받을 수 있었으니까.
“마석을 빼고 모두 이 오색 모래를 넣도록.”
살라스도 지금껏 논 게 아니었다.
황태자와 함께하는 와중에도 서부의 모래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했고.
자신이 머릿속으로만 짜 놓은 이론을 토대로 마나석 연소 장치를 개조.
즉석에서 실험과 동시에 실전을 병행했다.
“어, 점검은요? 그래도 3차까진 계산하고 6차에 실험하고 8차쯤 실사용해야하지 않을까요?”
물론 처음엔 마법사들의 반대가 있었다.
원래 여러 번 검증을 거쳐야 안심하는 성격들.
하지만.
“그럴 시간 없어. 당장 돌려.”
살라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허락된 시간이 촉박했다.
조금이라도 늦는 순간 미친 녀석이 어떻게 발작할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놈이 향한 자리가 평안할 리가 없다. 지금부터 서둘러도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어. 짐이 될 순 없지. 내 명예를 걸고, 대도서관과 공단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성공한다.”
황태자가 가는 길이 평안할 리 없다는 확신.
이례적인 강행.
즉석에서 오류를 수정해 가며 공단 마법 장치들을 개조.
연소 기관을 바꾼 장치들에 서부 사막 모래를 넣자.
화려한 연기를 뿜어내며 이전보다 훨씬 강한 출력을 뿜어냈고.
철괴를 조각조각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한번 길이 뚫리자 나머지는 쉬웠다.
본래 철괴는 불에 녹지도 않았고, 모양을 형성하기엔 너무 단단했다.
보기엔 철이었으나 철이 아닌 느낌.
순도가 너무 높아, 마나나 일반적인 불로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북부에서 가져온 특별한 불은 달랐다.
건국제가 세운 모닥불을 파괴한 대신 새롭게 얻은 불의 샘에 조각난 철괴를 넣자.
물에 풀어지듯 스멀스멀 녹기 시작했다.
신비한 현상.
이를 쇳물과 섞어 밀도를 낮추니 이전보다 편히 조형할 수 있게 되었고.
말뚝 수천 개를 찍어내면서도.
“으음, 흐으음.”
살라스가 괴상한 콧소리를 내어 가며 고민을 이어 갔다.
그래 좋다.
철괴를 녹여 쇠와 섞어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치자.
여기까진 좋다.
그렇다면 철괴와 쇳물을 섞어 무기라도 만들까? 검과 창을 잔뜩 만들면 되나?
일부는 하란을 통하여, 일부는 트럭에 실어, 일부는 마법으로 옮기고?
결국 손에 들린 무기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격이니 맞긴 하다.
근데 정말 그게 끝일까?
그러기엔 뭔가.
“아쉬운데.”
부족했다.
단순히 저런 말뚝이나 검 수천 개를 뽑아간다고 그 강한 엘프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이번에 남부에서 보지 않았던가.
악마가 얼마나 강한지.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마법사로서의 직감과 실험 정신이 끝없이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살라스의 간질거리던 머리가 뻥하고 뚫리며 이전 보았던 무언가를 상기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고래! 그거다! 하늘을 나는 고래!”
비행선.
한 장인이 보여 주었던 설계도.
그거면 되지 않을까.
철괴를 녹여 섞은 철로 몸체를 짜고, 기관을 만들고, 안을 오색 모래로 채운다면?
거기에 지난 싸움에서 황태자가 쏘아 댔던 이상한 무기를 달면 어떨까?
상상해 보라, 하늘에서 강철비가 쏟아지는 장면을!
비행선 전체를 자신의 철 속성 마법으로 조정한다면 가능하다!
“그거야! 완벽해!”
드디어 해답을 찾은 살라스가 바로 마법사들과 공단 관계자들을 한데 모아놓고 브리핑을 시작.
그의 주도 아래.
세상 첫 비행선이자 최강의 비행선 플라잉 해머 호 제작에 들어갔다.
특무대와 정보부가 말뚝을 가지고 떠난 후 모든 공정을 멈추곤 오직 거기에만 집중했다.
북부에선 불의 샘과 튼튼한 나무를, 서부에선 오색 모래를 대량으로 공급받았고.
로이스 가문에 요청하여 지금껏 쌓아 온 차량 제조 기술들을 제공받았다.
물론.
“저희 쪽 차량 제조 장인들과 마법사들을 보내겠습니다. 혹여 필요하시다면 공장 장비들도요!”
로이스 자작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강렬하게 풍기는 돈 냄새에 눈이 돌아간 그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역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플라잉 해머 호.
아직 안에 채울 것도 많이 남았고 겉모양새만 갖추었다 해도.
“완성이다! 완성이야!”
지금껏 밤을 새워 가며 이루어 낸 결실에 살라스를 비롯하여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과 공단 장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매끈한 몸체와 힘찬 연기를 뿜어내는 프로펠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걸 몰고 남부로 가면 된단 말이지?”
살라스가 비행선을 띄우기 전 샴페인 병을 힘껏 쥐고선.
출정식을 시작하려는 순간.
저 멀리 솟아나는 빛기둥이 눈에 띄었다.
웅성웅성 퍼지는 의문과 소란에.
쨍그랑! 살라스가 황급히 샴페인을 던져 깨 버리곤.
“모두 탑승! 때가 왔다! 모두 타!”
황급히 플라잉 해머 호에 물자와 사람을 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밝은 빛이 비행선을 감쌌더니.
으으윽, 이렇게 무겁다곤 안했잖아요-!
하란의 불만이 얼핏 들려오길 잠시.
눈을 떴을 땐.
“으와아아아! 하늘이다!”
이미 남부 원시림 드높은 하늘 위였다.
안에 있던 마법사들과 장인들이 고함을 질렀다.
하늘 위에서 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능감이 몰려왔다.
이리 높이 떠 본 적이 있었던가.
발아래 세상을 둔 적이 있었던가.
목을 꺾어도 다 볼 수 없었던 세계수가 한눈에 들어왔고, 까맣게 일렁이는 원시림 너머 드넓은 남부의 평야가 펼쳐졌다.
쨍하게 빛나는 광염을 뒤에 두고 훤히 드러난 은빛 몸채가 번쩍였다.
그들이 감탄하길 잠시.
“모두 위치로!”
살라스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자리를 찾아 마나를 집어넣었고.
마치 함장과 같이 중앙에선 살라스가 당당히.
“이 빌어먹을 녀석아! 내가 왔다!”
자신과 비행선의 출현을 알렸다.
황태자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요구에 부응하고자.
“함선 무기 준비!”
살라스의 지시에 마법사들이 다시 마나를 다급히 움직였고.
위이이잉- 함선 곳곳에 달린 괴상한 모양의 원형 철통들이 휘돌았다.
지난 플라워 밸리에서 황태자를 공격했던 기괴한 무기.
철조각을 무수히 뱉어 대던 놈을 기억했고 그대로 비행선에 이식했다.
물론 기사와 마법사들을 상대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화력.
하지만.
“그 철괴가 섞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자신 있었다.
철퇴를 섞어 만든 철 쪼가리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거기다 자신의 마법까지 섞는다면?
기사까진 아니더라도 웬만한 정예들은 충분히 혼쭐낼 수 있으리라.
“발포!”
자신감을 담은 우렁찬 명령과 동시에.
마나를 실은 철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비록 크기는 작았으나 담긴 화력이 남달랐다.
우수수 강철로 이루어진 비가 한번 휩쓸고 나면 메마른 나무가 산산히 부서졌고.
열매처럼 달려 있던 악마들은 벌집이 되었다.
어쩌다 강철비를 피했다 하더라도.
두두두두두둥.
파사의 힘을 담은 빗소리가 주변을 울리니.
“이건… 뭐야?”
도망치던 추수꾼 하나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곤 아래를 바라보았다.
뿌리와는 다른 단단한 질감.
낙엽이 흩어진 자리에 빼꼼히 수줍은 얼굴을 드러낸 것은 바로.
“말뚝……?”
옅게 빛나는 쇠말뚝.
정보부와 특무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심은 말뚝 수천 개가 서서히 빛을 품었고.
플라잉 해머 호가 쏘아 낸 철 조각들이 땅을 두드릴 때마다 진동을 뿜어냈다.
땅을 가린 낙엽은 추수꾼을 위한 것이 아닌.
“이때를 위한 안배였다. 미련한 현자.”
황태자의 모략을 가리기 위한 위장.
그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퍼져 나감과 동시에.
떨어지는 강철비와 원시림 가득한 쇠말뚝이 공명을 시작하더니.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높고 낮은 울림들이 맞물리며 원시림 전체를 떨쳐 울렸다.
때가 왔다.
“잔뜩 열린 악마를 추수할 시간이군.”
황태자의 선언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울리는 파동에 원시림 가득한 낙엽이 다시금 솟아올랐고.
그사이.
“세계수의 축복이여, 다시 깃들라. 원시림을 지켜다오. 더불어 황태자의 적을 멸해 다오.”
블러디, 루비의 명분을 얻은 신비가 치열하게 숲을 뒤덮었다.
땅을 덮은 넝쿨 위로 새빨간 장미가 피어났고.
순식간에 악마들을 잡아먹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장미가 아름다웠다.
메마른 원시림이 부서지고 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파동과 뻗어 나가는 붉은 꽃에 의해서.
“안 돼! 막아! 막으란 말이야!”
일그러진 현자 베니시오르의 외침이 처절했다.
추수꾼들이 독기를 뿜어내며 어떻게서든 원시림에 피운 열매를 지키려 했으나.
파사의 힘이 그들의 탄생을 억제했고, 명분을 얻은 블러디의 새로운 신비가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끝없이 확장해 나갔다.
악마를 머금은 보석 같은 꽃이 뚝뚝 단 꿀과 진한 꽃가루를 풍겨 냈고.
땅에 가득 차올랐던 독기를 흩어 내기 시작.
“안 돼! 안 돼! 파멸이, 파멸이 물러간다! 파멸을 지켜라! 파멸을!”
그가 어떻게 해서든 파멸을 이룰 악마들을 지켜보려 했으나.
“어때 좋은 꿈 꾸었나?”
황태자는 그의 발악을 비웃을 뿐이었다.
쏟아지는 강철비와 파문처럼 이는 파동들에 부서져 내리는 풍경 속.
-의도였나. 이 모든 풍경이.
추악공 보티스가 황태자와 나란히 서서 물어 왔다.
이제 와 보니, 자신들에게 유리해 보였던 이 모든 풍경이 함정이었구나.
그의 몸을 이루고 있던 붉고 추한 피부는 모조리 사라진 상태.
훤히 드러난 근육과 새파란 핏줄들이 징그럽게 일렁이길 잠시.
“그래, 모든 게 의도였지. 어때, 내가 준비한 환상 같은 현실이.”
황태자의 인정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투투투툭, 몸을 감싸고 있던 근육마저 끊어 내며 크기를 부풀렸다.
아니, 근육이 끝없이 확장하는 느낌.
파사의 파동을 밀어내듯 놈이 한없이 커졌고.
드러난 것은 근육과 핏줄이 단단히 뭉쳐 이루어진 뱀.
흐르는 독물, 주렁주렁 늘어진 근섬유와 핏줄들이 바닥에 지이익- 검붉은 자국을 남겼다.
놈이 쩌어억, 세계수와 황태자를 동시에 삼킬 듯 입을 벌리고는.
-그 현실마저 먹어 치워 주마.
놈이 황태자를 향해 달려들 때.
“황태자! 아직 선물이 남았다!”
살라스의 외침이 다시 울리더니 플라잉 해머 호에서.
벌겋게 익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플라잉 해머 호를 만들고 남은 진생철퇴.
과거 수십 미터에 달하던 크기가 이젠 사람 하나만 했고.
이를 발견한 황태자가.
“좀 빌리자.”
세계수의 나뭇가지 하나를 급히 꺾어서는.
떨어지는 진생철퇴를 향해 날았다.
방금까지 불의 샘에서 달궜는지 벌겋게 무르익은 철퇴 사이로.
푸욱, 두꺼운 나뭇가지를 끼워 넣자.
커다란 망치 하나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투박하지만 묵직한 손맛이 괜찮다.
황태자 또한 만족스러운 듯 씩 웃고는.
“이제야 휘두를 만하겠네.”
그대로 보티스의 쩍 벌린 아가리를 향해 내리치니.
쩌어엉-!
진생철퇴에서부터 맑고 깊은 충격이 퍼지자.
간신히 버티던 원시림이 와르르 무너졌다.
완벽한 파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