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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32화 (132/200)

132화 재생

생전 처음 보는 하늘을 나는 고래가 강철비를 내리는 풍경을 보며.

“파멸이다.”

추수꾼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가 그리 바라 마지않았던 파멸이었으나.

즐겁지 않았다.

세상의 파멸을 바라 왔지.

“파멸이야…….”

자신의 계획이 파멸하는 풍경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파멸의 파멸.

일그러진 현자 베니시오르가 획책했던 모든 계략의 파멸이었다.

어쩌면 환상 아닐까.

오래된 악마의 능력을 빌어 펼치는 못된 장난이 아닐까.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정도였다.

계획했던 모든 게 뭉그러지고 있다.

피어난 악마를 품은 열매들과 독기를 머금은 나무들이, 쏟아지는 강철비와 퍼져나오는 파동에 파묻혀 힘을 잃었고.

기껏 태어난 악마들은 투명한 장미에 갇혀 녹아내렸다.

뚝뚝 떨어지는 꿀과 꽃가루가 기껏 물들였던 땅을 정화했다.

어찌된 일인가.

분명 저 발칙한 하프 엘프가 피워 낸 꽃엔 독기가 넘쳤거늘.

악마들의 양식으로 삼으려 했는데.

이 짧은 사이 대체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저렇게 향기롭고 달콤하게 변하였는가.

아니, 이뿐만이 아니었다.

“땅도 단풍도 낙엽도 모두, 모두 완벽했거늘.”

메말라 가는 땅과 죽어 가는 엘프들, 낙엽에 덮힌 생명의 흔적이 모두 자신을 위한 현실인 줄 알았다.

앞을 가로막던 지독한 생명력과 세계수의 축복이 거두어진 순간.

추수의 때가 왔노라며 자축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였고 모든 것이 그가 꿈꿔 온 대로였다.

오랜 대계가 한순간에 눈앞에 다가왔고, 당장의 즐거움에 취해 의심하지 못했다.

그래,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리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건만.

어찌하여 오랜 세월 궂은 길을 걸어오다 만난 꽃밭에 이리 쉽게 정신을 빼앗겼단 말인가.

어떻게 의심 한 번 해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을 위한 안배라며, 드디어 저 빌어먹을 신들이 세상의 멸망을 허락했다며 기꺼워했는가.

문득 베니시오르가 깨달았다.

“나 또한 인간이구나.”

자신 또한 불완전한 인간임을.

그렇게 인간이길 거부했고 인간으로서의 불완전성과 비열한 정체성을 버리려 했건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

“불완전한 존재였어.”

그는 인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환상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믿었다.

냉철한 이성과 쌓아 온 학식, 마음속 깊이 품은 혐오가, 바라 마지않았던 따뜻한 환상 앞에서.

덧없이 녹았다.

세상의 멸망을 바라던 이가 세상의 조력을 바라다니.

이 얼마나 순진한가.

그가 문득 눈을 들어 보티스와 대치하고 있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당신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절로 입에서 경어가 흘러나왔다.

이런 환상과도 같은 현실을 준비한 자.

멸망의 씨앗이 분명했던 운명.

허나 그는 앞에 놓인 모든 걸 뒤집어 버렸다.

메마른 땅, 마치 멸망을 위해 준비한 것 같은 풍경 아래, 회생의 씨앗을 깊이 묻어 두곤 기다렸던 거다.

악마를 앞에 둔 그 순간까지도 집요하게 지켜본 거다.

자신이 삐끗하기를, 사냥의 시간을.

소름이 돋아올랐다.

황태자의 참을성에, 주도면밀함에, 악의보다 더욱 진득한 분노와, 이를 이룰 지혜에.

“건국제… 제국을 세운 자는 무언가 다르단 말입니까.”

건국.

어쩌면 그와 자신은 대척점에 선 자가 아닐까.

자신은 인간에게 실망하여 멸망을 꿈꾸었던 이.

건국제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가장 앞에서 싸워 왔던 이.

누군가는 파괴를, 누군가는 창조를 위해 달렸고.

지금만큼은.

“그대가 이겼습니다.”

건국제의 승리를 시인했다.

가장 어려운 시절, 인간을 위해 싸웠던 초인의 저력은 대단했고.

일그러진 현자는 아무리 오랜 시간 지혜를 쌓아 왔다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당신을 미리 만났다면 나는 다른 추수를 기다렸을까요.”

악마를 마주하여도 한 점 굽힘 없는 단단한 허리, 용맹함을 품은 눈가와 보석처럼 광기를 담은 눈동자.

적에 대한 혐오로 일그러진 콧대와 숨을 들썩이며 강렬한 힘을 뿜어내는 가슴.

존재 자체가 위대했다.

자신이 본 인간들과는 완전 다른 형상.

인간의 이상향을 그린 듯싶었다.

저 시절의 인간이 그랬던 걸까, 아니면 건국제만이 특별한 것일까.

아, 인간이란 존재가 저리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어쩌면 일그러진 현자 베니시오르, 인간을 가장 미워하여 파멸을 바라 마지않았던 어긋난 자는.

“진정 인간의 이상향을 바라 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간을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가장 크게 실망했을지도.

지금 황태자의 모습을 보며 이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지.”

이미 때는 늦었고 좁히기엔 너무나 많은 거리가 벌어졌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했던 열매들은 모조리 부서졌고, 이제 남은 것은 덧없이 허물어진 자신의 바람들.

메마른 나무가 철조각과 파동에 휩쓸려 바스러지는 풍경 속.

때마침 보티스가 제 본신을 드러냈다.

이마저도 실패다.

보티스의 진면목은 여기서 드러날 것이 아니었다.

악마들로 제국의 힘을 충분히 빨아먹은 뒤, 마지막 단계에서 전신을 현현하는 것이 원래 목표.

허나 벌건 낙엽에 눈이 멀었던 추수꾼은 성급하게 낫을 휘둘렀고.

황태자의 올무에 걸린 악마는 보여선 안 되는 것을 보여 버렸다.

추수꾼이 자신의 양팔을 활짝 펼쳤다.

어그러진 현자가 파멸을 맞이하는 자세는 참 단촐했다.

들어올린 시야, 하늘로 날아오르는 황태자가 보였다.

온갖 색이 버무려진 하늘 위, 은빛 매끄러운 비행선 아래.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뛰어오른 그가 거대한 망치를 손에 들고선.

보티스를 내려치는 장면.

이지를 벗어난 소리가 귓가를 때리길 잠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파사의 울림이, 보티스의 머리로부터 더 나아가 메마른 원시림 전체로 퍼져 나갔다.

독기를 품은 나무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축복과 생명력이 사라진 빈 껍데기들이 부서졌고.

황태자가 보티스를 내려찍은 자리.

우지끈-!

아래에 버티고 선 세계수가 힘겨운 소리를 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금껏 오랜 시간 독기를 버텨 왔고, 심지어 자식들을 잘라 내며 모든 축복을 거두었다.

헐벗은 몸은 새로운 탄생이라기보단 죽음을 유예한 것뿐.

그런데 황태자는 한 치의 배려도 없이.

쩌어엉-! 우지끈!

거대한 망치를 들고 세계수의 두터운 몸통을 모루 삼아, 보티스의 머리를 철 삼아.

거세게 내리쳤다.

한 번 한 번 내리치는 행동이 반복될 때마다.

원시림이 흩어졌다.

거센 파동에 오랜 것들이 허물어졌고 흔적만이 남았다.

“아아, 어머니!”

몇몇 엘프가 고통스러워하는 세계수를 보며 소리를 질렀으나.

-괜찮으니 물러나라! 황태자, 더 내리쳐! 더! 어서!

세계수는 오히려 황태자에게 더욱 강한 매질을 요구했고.

그녀의 요구대로.

“오냐! 너 또한 자식을 잘못 키운 죗값을 받아야겠지!”

황태자가 이를 악물더니 더욱 강하게 보티스의 머리와 함께 세계수를 가열차게 내리쳤다.

불거진 턱 근육과 잔뜩 부풀어 오른 등과 어깨가 그가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세계수의 몸통에 자잘한 금이 일어났고 곧 피가 터지듯 수액과 나무조각들이 날아다녔다.

분명 원시림의 패망과 세계수의 죽음은 베니시오르도 바라던 것이었으나.

“이번엔 또 무엇을 보여 주려 하십니까.”

그는 오히려 황태자가 이번엔 무슨 수를 숨겨 놓았을까 기대했다.

아무 뜻 없이 저러진 않을 것이다.

보았다.

그와 세계수의 화해를.

사과한 자들을 살리고 거부한 자들을 죽인 이유가 있겠지.

지금 무너지는 원시림도 모조리 그의 안배이리라.

땅을 덮어 자신의 의도를 숨겨 왔던 것처럼.

지금 이 멸망의 풍경도.

“새로운 탄생을 위한 밑받침이겠지요.”

새로운 생명을 위한 자리가 아닐까.

현자가 감히 예상해 보았고.

“들켰네.”

황태자가 살벌한 미소로 인정했다.

그가 벌건 미소를 지은 채.

“퇴비가 많이 필요했거든.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추수꾼의 미련함을 칭찬했다.

칭찬받은 그가 깊은 감격을 토해 냈다.

아, 저 위대한 자는 자신의 악독함마저도 이용하려 두었구나.

모든 것은 이미.

“당신의 손바닥 안이었던 겁니까.”

황태자의 손안.

벗어날 수 없는 깊은 계략에 빠졌음을 실감했다.

그래도.

“당신에게 칭찬받았으니 만족하렵니다.”

추수꾼이 깊은 만족감을 표했다.

저 위대한 자에게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았다면, 그래 그것으로 되었다.

물론.

“병신 새끼. 고작 그런 거로 만족하니 그따위밖에 안 되는 거다.”

황태자는 폭언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

그걸로 대화는 마지막.

몇 번의 두드림을 못 견딘 보티스가.

-크아아악! 철퇴! 그 철퇴! 그건 대체 뭐냐! 이 빌어먹을 놈!

고통을 호소하길 잠시.

-권능들이여 날 도와라! 너희는 날 위한 존재이니! 너희의 힘을 내놓아라!

자신이 추수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모든 힘을 회수했고.

근육들이 촉수처럼 사방으로 뻗어 추수꾼과 그의 분신들을 옭아매더니.

그대로 빨아들였다.

질척한 근육 안에 어설프게 녹아든 그들이 꿈틀거리며 비명을 뱉어 내었고.

그들의 이마와 뒷목에 존재했던 굵직한 섬유가 보티스의 힘이 되었다.

그들이 뿜어내던 독기와 절망이 추악공의 추악함을 더했으나.

“뭐 어쩌라고.”

황태자의 표정엔 한 점 흔들림 없었다.

어차피 추악한 놈이 더 추악해졌을 뿐인데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그저.

“뒈져라. 못난 놈아.”

끝없이 놈의 대가리를 내려칠 뿐.

철을 두드리듯 놈의 머리통을 두드릴 뿐.

진생철퇴에 네 가지 불꽃을 두르곤 그저 휘두를 뿐.

타오르고 터지고 빛나는 불들이 강렬한 무게를 담아 보티스의 머리통을 점점 내리눌렀고.

덩달아 세계수의 오래 묵은 몸도 점점 무너져 갔다.

종말을 빚듯 무너지는 풍경이 삭막했다.

쩌어엉-!

맑은 소리가 울리고 나면.

고통스런 신음과 괴로운 비명, 무너진 원시림이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마침내.

꽈아앙!

황태자가 휘두른 진생철퇴가 보티스의 머리를 깊이 내리눌렀고.

세계수의 몸통이 무너지며.

푸우욱.

날카로운 파편이 놈의 머리통을 뚫고 나왔다.

찢어진 근육과 튀어나온 눈알, 짖이겨진 핏줄들이 잔해 위로 너덜너덜 늘어졌다.

보티스의 몸에 흡수된 추수꾼들이 고통에 소리를 질렀으나.

“아직 안 끝났어.”

황태자는 분노를 풀 듯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부서지는 나무와 으깨지는 근육 소리가 뒤섞여 기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보티스가 꿈틀거리며 황태자를 휘감아보려 했으나.

황태자는 요리조리 집요하게 머리만을 노렸다.

이미 모루마저 무서져 제 기능을 못하건만 황태자가 이번엔 땅을 모루 삼아 망치질을 이어갔다.

어찌나 혼신의 힘을 다하던지 한 번 한 번 진생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적염, 초적염, 광염이 뒤섞인 불꽃이 화려하게도 피어올랐다.

“머리, 머리, 머리, 머리이!”

이제는 분노를 넘어 즐기시는 중.

황태자의 입가와 눈가에 즐거움 가득한 광기가 맺혔고.

늘어나는 근육과 터지는 핏줄들을 피해내며 신묘할 정도로 보티스의 머리만을 짖이겼다.

그 와중에도 플라잉 해머호는 강철비로 그를 비호하며.

“다들 긴장 풀지 마! 저 미친놈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넵!”

악마가 아닌 황태자를 경계했다.

지금은 홀린 듯 망치질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곧 어떤 황당한 명령을 내릴지 모른다.

역시나 얼마 가지 않아서.

“살라딘! 비켜라!”

“비켜! 어서 옆으로 피해!”

황태자의 외침에 플라잉 해머호가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자.

황태자가 더욱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알리굴을 진생철퇴에 새겨넣었을 때처럼.

그렇게 솟아오른 황태자가.

“거름을 충분히 만들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때지.”

그리 말하곤 몸에 한 가지 불꽃을 둘렀다.

붉고, 노란 불들이 사그라들고 녹색의 불꽃 하나만이 피어났다.

둥둥둥둥.

새로운 심장이 요동치며 생명력 가득한 불을 뿜어내었고.

녹염이 봄에 피어나는 새싹처럼 옅게 황태자의 몸을 감싸더니.

진생철퇴에 이르러서는 여름의 녹음과 같이 짙푸르게 우거졌다.

펄떡이는 생명력을 손에 쥔 황태자가.

“새롭게 피어날 시간이다.”

그대로 떨어져 막 다시 몸을 수복한 보티스의 머리통을 내리치자.

녹색 나무 한 그루가 피어났다.

지금껏 보았던 폭발과는 달랐다.

형상을 이루었던 폭발이 허물어지며 퍼져 나간 생명력에.

땅 가득한 진생철퇴를 섞어 만든 철 조각들과 말뚝들이 반응했다.

황태자가 이번엔 녹색불을 연료 삼아 다시 땅을 다졌고.

푸른 나무가 폭발처럼 피어나 흩어질수록.

무너지고 썩은 무더기 사이에 있던 철 조각들과 말뚝들이 생명력을 함빡 머금은 채.

새싹과 나무가 되어 피어났다.

황태자가 망치질을 하면 할수록.

푸른 불을 머금은 새싹들과 나무들이 지독한 독기와 썩은 악마들의 시체를 빨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랐고.

그 위를 달콤한 꿀과 향기를 내뿜는 장미가 뒤덮었다.

이윽고 계속된 망치질에.

넘쳐 나는 생명력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다.

숲에 어리는 수많은 동물과 곤충들.

비록 몸은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안에 담긴 생명력만은 진짜.

악마가 피어나는 생명력에 고통스러워 하는 중에.

“아아, 아아아-.”

유독 말간 눈을 지닌 자가 감격 어린 울음을 토해 냈다.

아비규환 속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 참으로 맑았다.

베니시오르.

새롭게 피어난 생명을 보고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현자가.

“그래, 내가 꿈꿨던 건 파멸이 아니었구나.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파멸 이후 찾아올 새로운 탄생이었구나.”

악마의 몸에 파묻힌 채 고백했다.

자신이 잘못 알았노라고.

눈앞의 풍경을 마주하고야 알았다고.

자신이 진정 바랐던 것은 단순한 파멸이 아닌 이후에 이루어질 창조와 재생.

파멸은 그 밑거름이었을 뿐.

이것이었구나.

그래서 지금껏 그리 공허했구나.

이제야 깨달은 현자가 눈 가득 탄생의 순간을 담은 뒤에야.

“보았으니. 이만 끝내야겠지.”

황태자의 망치가 무참히 베니시오르를 뭉개 버렸다.

현자인 척하던 머저리의 깨달음과 후회는 알 바 아니다.

적에게 동정을 느낄 만큼 그는 어설프지 않았고.

결국 싸움이 끝났다.

보티스까 쓰러진 자리.

딱 사람 크기 만한 나무가 거대한 악마의 머리를 언덕 삼아 피어났다.

“자식들이 새로워졌으니 그 어머니도 새로워져야 하는 법이지.”

-그래, 나 또한 죄업을 짊어지고 새롭게 태어나야지.

바로 세계수.

그녀의 속죄하겠단 말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속죄는 죽으며 겪은 고통으로 끝났다.”

방금 겪었던 고통이 속죄.

자식들을 끊어 내고 몸이 타오르고 마침내 부서졌던 모든 과정이 속죄.

다시 태어난 지금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때다. 다시 태어난 만큼 이번만은 올바른 방향으로. 그게 파괴 후 탄생의 의미지. 안 그런가 나무.”

올바른 삶으 향해 나아가야 하리라.

“새로 피어난 모든 것들과 함께, 썩은 땅에서 피어난 새싹들과 나무들, 생명들을 아울러. 또-.”

새로운 자식들도 함께 말이지.

황태자의 말에 모두가 막 여리게 피어난 어머니와 주변에 가득한 새싹 그리고 살아남은 엘프들의 면면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과거의 은원을 정리했고 새로운 탄생을 너머 번성으로 나아갈 때지.”

황태자의 말에 남부의 뱀과 잿가루, 그들 사이에 선 엘프 장로가 멋쩍게 웃었다.

“고통스러운 속죄는 끝났다. 엘프는 사과했고 인간은 사과를 받았다. 비록 몸에 새긴 사과문은 부서졌으나. 우리가 증인이니. 앞으로 오랜 세월 이어 왔던 약속에 한 가지를 추가하자고. 인간이 어긋나는 날엔 너희가 우리를 바로 잡아 주는 것으로.”

황태자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봄철 새싹과도 같이 보들보들했다.

참으로 생경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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