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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33화 (133/200)

133화 이루어졌어야 할

파멸 이후 탄생의 순간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썩어 버린 땅, 모든 게 무너진 풍경.

그 위에 피어난 새싹들과 나무들은 아직 연약했고, 황폐한 땅에 비해 너무나 자그마했다.

그래도 한 가지 기대할 만한 것은.

“무럭무럭 자라겠네.”

땅에 퇴비가 많아 쉼없이 자라리라.

엘프들은 침묵했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원시림.

수천 년간 자신들을 보호해 주었던 집이 무너지면 어떤 기분일까.

확실한 건.

“왜 무슨 문제 있나.”

“…아니요.”

“말 해도 된다. 들어주지.”

“아닙니다.”

“눈에 불만이 가득한데?”

“전혀요. 전혀 없습니다.”

“안 넘오다니, 발전했군.”

방금 막 저 거대한 악마를 때려죽이고, 피와 근육, 핏줄이 덕지덕지 붙은 망치를 어깨에 둘러 멘 황태자 앞에선 불만을 토하지 못할 거다.

자칫하다간 저 고깃덩어리의 일부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추악공 보티스는 죽어서도 많은 걸 남겼다.

저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그러했고, 안에서 태어난 수많은 소악마가 그러했다.

마치 숙주가 죽자 뛰쳐나오는 기생충같이, 작은 악마들이 생을 갈망하며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모두.

“타올라라.”

황태자의 불에 휩싸여 타죽었다.

악마의 사체를 휘감은 적염과 광염이 붉고 노랗게 이지러지며 어둑해진 원시림을 밝혔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듯한 횃불 위에는 작게 피어난 나무 한 그루.

“어머니-.”

한 엘프의 감격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타오르는 악마의 사체를 뚫고 피어난 그 모양새가 양팔을 벌린 인자한 여인의 모습 같았기에.

지난 과오를 떠올린 엘프들이 독기 가득한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흐르는 눈물로 팔을 벌린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그저 큰 줄 알았던 분이 저리 여리고 작게 되었구나.

모든 것이 우리의 잘못이구나.

그럼에도 양팔을 벌려 우리를 감싸려 하는구나.

평생 굳건할 거라 생각했던 드넓은 신목은 부서졌고.

타오르는 불 위, 자식들을 대신해 화형을 당하는 모양새임에도 사랑이 가득하니.

뭐라 사죄를 해야 할까.

저 인자한 어머니에게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까.

잘못을 인정한 엘프들이 주름진 얼굴로 가슴 절절한 후회를 곱씹었다.

본래 엘프들이 세계수에게 받은 축복은 장수와 무병.

평생 늙지 않았고 남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던 이들.

그들을 보우하던 세계수의 축복과 원시림의 생명력이 사라졌던 순간.

지금껏 그들을 침범치 못했던 시간이 병마처럼 엄습했다.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엘프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단단했던 등이 급격히 굽었다.

생명력의 부재란 이런 것이다.

축복의 상실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

누구도 신음하지 않았다.

누구도 불만을 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세월을 받아들였다.

거두어진 축복의 빈자리, 어떤 생명도 피할 수 없는 세월의 저주를 함빡 빨아들이면서도 침묵했다.

이렇게라도 속죄할 수 있다면, 이렇게라도 세계수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면 되었다.

그런 마음이었다.

그때.

“평온하소서-.”

한 엘프가 자신들이 아닌 어머니의 평안을 빌었고.

“평온하소서.”

“영원히 푸르소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세계수의 영원한 푸르름을 빌었다.

장수와 무병을 잃고 나자 비로소 어머니의 지난 아픔을 이해했다.

몸이 병들고 늙어 가는 느낌이 생경했고 고통스러웠다.

평생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이기적인 엘프들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며 뱉은 기도.

그들의 기도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도 될까?”

앳된 목소리가 황태자를 불렀다.

세계수가 꺼낸 말.

옆에 선 황태자는 묵묵히 늙은 엘프들을 굽어볼 뿐.

모두를 오시하는 진홍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방금까지 살랑였던 미소는 모두 거짓인 듯 무감정한 표정.

“모질지 못한 어머니로군.”

“너도 부모가 되어 보면 같은 마음일거야.”

세계수의 말에 황태자가 입을 움직거리길 잠시.

“사과를 받았고 속죄가 끝났다 선언했으니, 이제 너의 결정만이 남았다.”

세계수의 의견을 존중했고.

“가장 앞에 선 아이야, 나오려무나.”

어머니가 버린 자식을 앞으로 불렀다.

늙어 버린 엘프가 무릎 걸음으로 악마의 사체를 기어올라 깊이 부복했다.

그렇게 냉철하고 이기적이던 엘프의 표정에 깃든 감정들이 생경했다.

어쩌면 장수와 무병이란 축복은 그들에게 감정이란 중요한 것을 앗아 갔던 건 아닐까.

너무나 긴 시간을 살기에, 아픔을 겪어 본 적 없기에 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축복이었으나 그들을 얽맨 굴레이기도 하니.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흰 바람입니다.”

“새로운 이름을 주마. 너의 이름은 알리스번. 알리스번이다.”

“알리스번. 기억하겠나이다.”

새로운 아이들에겐 새로운 이름을 주어야겠지.

양팔 벌린 세계수의 뒤에서 비쳐 오는 인자한 후광에 흰 바람, 이젠 알리스번이 된 엘프가 감격한 얼굴을 할 때.

“새로운 이름을 받았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가리라.”

황태자가 옆에서 선언하곤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려.

콰앙-!

바닥을 찍어 누르자.

녹염이 알리스번을 휘감았고 더 나아가 폐허가 된 땅을 내달렸다.

작게 피어났던 새싹과 나무들이 손가락 한 마디쯤 자라났다.

새로운 엘프들의 새로운 장로 알리스번이 몸을 채우는 생명력을 느꼈다.

끊어졌던 어머니와의 연결, 세계수의 축복이 다시 깃드는 기분.

허나 이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무한한 생명과 아프지 않은 육신이었다면.

새로운 이름과 더불어 새로운 축복이 자리를 대신했다.

“새로운 아이들에겐 새로운 축복이 깃들리니. 너희들은 늙고, 아프고, 병들 것이나 맹약을 지키고 숲을 지키는 의무를 다하면 비어 버린 생이 채워지리라.”

세계수의 선언에 엘프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였다.

“더불어 슬픔, 괴로움 또한 함께하리니. 슬픔과 고통이 너희의 새로운 양식이 될 것이나, 사랑과 희망이 분명 너희들을 살릴 것이다. 굽은 등으론 겸손을 배우고, 주름진 얼굴론 부끄러움을 배우려무나.”

세계수의 말대로였다.

마음에 느껴지는 낯선 아픔.

심장 어림을 저미는 것 같기도 했고 뻥 뚫린 것 같기도 했으며.

동시에 머리를 간질이고 벅차오르게 하는 무엇이기도 했다.

이걸 감정이라 하던가.

몰려드는 생경한 감각에 알리스번이 몸서리를 치다가 물러났고.

“다음 아이야, 나아오너라.”

세계수가 엘프 하나하나를 불러 새로운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황태자의 망치가 푸르른 불꽃을 뿜어내어 새로운 탄생을 세상에 알리니.

썩은 것들이 가득한 원시림에 새로운 생명들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받은 엘프들이 본능을 따르듯 아직은 여린 새싹들과 나무들을 가꾸었다.

답답하게 주변을 누른 썩은 것들을 치워 내고 그들의 잎을 닦아 숨통을 열어 주었고.

비틀어진 것은 바로잡고 쓰러진 것은 바로 세워 주었다.

그 와중에도 세계수는 새로운 자식들을 맞이하였고.

황태자는 새로운 원시림을 단조하듯 끝없이 망치를 내리쳤다.

너의 새로운 이름은- 쿠우웅, 너의 새로운 이름은- 쿠우웅.

새로운 엘프들이 갓 태어난 숲을 가꾸며 어머니의 보드라운 목소리와.

황태자의 굳건한 망치질 소리를 가락 삼아.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모두가 같은 가락을 흥얼거렸다.

아니, 사실.

“이런 좋은 가락에 노동요가 빠지니 섭섭한데.”

한 장인이 엘프를 도와 단단히 여물기 시작한 나무를 가꾸다가 공단에서 든 버릇을 버리지 못하곤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다른 장인들이 황태자의 망치질 소리에 맞추어 같이 흥얼거린 결과.

본래라면 인간의 이런 행태를 이해하지 못했을 엘프들이나.

“좋은 소리네. 뭔가 여기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야.”

“그래, 이런 걸 힘이… 난다고 하던가?”

이제는 공감했다.

퍼지는 생명력과 되살아나는 원시림, 이에 뒤섞여 울리는 노랫가락을 듣자 가슴 한편에 몽실몽실 무언가가 차올랐고.

흐르는 땀과 매달린 미소가 건강했다.

인간과 엘프가 같은 가락을 흥얼거리며 숲을 돌보려니.

어디선가 산들바람 한 줄기가 스치며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가락이 변화했다.

썩은 것이 가득했던 땅을 단단하게 다졌고 퇴비로 삼았다.

위에 피어난 넝쿨에서 흐르는 달콤한 꿀과 향기로운 꽃가루가 엘프들의 양식이 되었다.

허기짐을 처음 느껴 본 그들에겐 단 꿀과 상큼한 꽃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진미.

장인이 건넨 술에 엘프 수십이 기절해 버렸던 건 문헌으로 남아 대대로 전해지리라.

즐거웠다.

아아, 이게 즐거움이구나.

엘프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자.

점차 그들의 얼굴에 숲의 생기가 옮듯 주름이 하나씩 지워졌다.

썩은 땅을 개간하자 얼굴이 팽팽해졌고, 나무가 단단해질수록 그들의 몸 또한 힘을 되찾았다.

새싹이 풀이 되고 꽃이 될 무렵엔 그들의 눈가에 생기와 총기가 들어찼다.

비록 과거의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으나.

“아하하하-! 쟤, 쟤 또 취했잖아!”

“이봐! 내 술 가져가지 마!”

“술 더 가져와! 장로님! 장로님도 한잔하시죠?”

이젠 남들과 함께 아름다워지는 법을 배웠다.

모두가 즐기며 웃는 풍경, 폐허가 되었던 원시림엔 새로운 생명들이 솜털처럼 자라 부슬부슬 보드랍게도 몸을 흔들어 댔다.

사이를 달리는 공기 또한 가볍고 상쾌했다.

전처럼 습기 가득하고 음침하지 않았고 곳곳에서 쏟아지는 볕들이 정수리를 간질였다.

“이제 되었다. 신비를 거두렴.”

세계수의 말에 블러디, 루비가 잔뜩 펼쳤던 신비를 거둬들였다.

지금껏 그녀가 넝쿨로 어린 나무들의 허리를 받쳐 주었고 꽃으로 엘프들을 먹였다.

적을 잡아먹던 신비가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의무와 책임이 신비를 변화시킨 격.

루비가 감았던 눈을 뜨자.

보석같이 투명하며 반짝이는 눈동자가 드러났고.

그녀가 언덕을 올려다보며.

“어머니의 말씀을 듣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였다.

보티스의 사체가 썩어 지독한 냄새를 풍겨 대던 언덕은 이제 은색 들풀이 가득한 언덕이 되었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들불 속.

아직도 팔을 펼친 세계수의 형상이 인자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언덕을 덮을 만큼 커졌다는 것 정도.

오히려 커진 만큼 커다란 사랑과 돌봄이 느껴지는 형상.

그 아래에는.

“…….”

옆에 거대한 망치를 세워 두곤 푸른 불꽃을 몸에 두른 채 묵묵히 눈을 감은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발아래에는 삼색의 불꽃이 피고, 터지고, 빛났고.

몸과 망치를 둘러싼 녹염은 새싹과도 같이 끝없이 피어나며 살랑였다.

어쩌면 황태자도 세계수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뿜어내는 기세가 상서로웠다.

한 명 한 명 모든 엘프에게 이름을 내리는 동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누구도 날짜를 세지는 않았으나 가라앉았다 오르는 해가 여러번이었으니.

그가 눈을 감은 후에도 나무와 새싹들이 엘프들의 보살핌을 따라 무럭무럭 자랐고.

하나의 생태를 이루었다.

다만 일반적인 나무와 풀은 아니었다.

철에 진생철퇴를 섞어 뿌린 철조각과 말뚝이 자란 결과.

“엄청 단단한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휘어지고 탄력이 있군요. 으음, 이거 뭔가 떠오를락 말락하는데.”

철의 단단함과 숲의 싱그러움을 함께 머금은 형상이 장인들과 마법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해?”

세계수가 옆에 선 황태자에게 물었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보니 지금 보이는 풍경이 감격스러운 모양.

“이 숲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너의 작품이기도 해.”

세계수의 속살거리는 속삭임.

그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롭게 태어난 원시림은 황태자가 두들긴 풍경이기도 했다.

세계수의 치하에 황태자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여는 순간.

“나무, 네게 남은 신비가 몇이지.”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었다.

신비, 엘프들이 인간에게 수확했을 열매.

세계수가 이를 품고 있다는 말.

과거의 상처에 인간들이 움찔했고 엘프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오히려 황태자와 세계수는 담담하기만 했다.

이미 극복한 과거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아파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그런 존재였다.

“모두 내놓아라. 쓸 곳이 있어.”

“으음, 워낙 쎄게 얻어맞아서 몇 개 안 남았어. 그마저도 멀쩡하지 않고.”

“네가 때려 달라 한 결과다.”

“신나게 때려 댔으면서. 사실은 즐겼잖아?”

“내가 할 말이지. 누구보다 맞는 걸 즐거워하는 음탕한 나무 같으니.”

음탕한… 나무……?

세상에.

황태자의 파격적인 발언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으나.

“음탕한가……? 나……?”

뭔가 멋진데? 진취적이야.

세계수는 오히려 이파리를 붉게 물들이며 좋아했다.

오, 세상에… 부끄러워하는 나무라니.

누군가의 황망한 중얼거림이 울리는 가운데.

황태자가 드디어 눈을 떴다.

지난 시간 묵묵했던 이유가 있었는지 그의 눈에 어린 투명함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 자신이 이루어 낸 새로운 숲을 굽어보길 잠깐.

“기사 안드레, 앞으로 나오라.”

자신을 섬기는 기사를 불렀고.

모두가 안드레는 바라보는 와중에.

“……?”

왜 자신을 쳐다보는냐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안드레가.

“아, 아아! 저요? 저 말이죠? 안드레. 네, 맞습니다. 맞아요. 이름이 안드레였죠. 평민인 줄 알았지 뭡니까.”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상기하곤 급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평소 황태자가 그를 평민이라 불렀고, 심지어 주변 사람들도 그를 평민이라 불러 왔으니.

이젠 이름마저 잊었던 모양.

얼마나 놀랐는지 중간에 한 번 나자빠질 정도.

그를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가에 한심함이 끼었고.

모두가 입매를 움틀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왜 저 녀석만은 도저히 진중해지질 못하는지.

황태자가 아려 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곤.

“안드레, 나를 섬기는 기사여. 그대는 자신이 섬기는 주군을 믿는가?”

여전히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안드레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곤.

“전하는 모시는 기사, 안드레. 주군을 믿어 의심치 않나이다.”

무겁게 답하였다.

의도를 모르겠으나 이러는 이유가 있으시겠지 싶었다.

제 주군이 허튼짓을 하는 분은 아니기에 신색을 가다듬었고.

“그대는 나의 등을 지키는 기사. 무엇으로 지키려 하는가.”

“제가 지닌 검으로, 몸으로 지키겠나이다.”

“무엇으로부터 지키려 하는가.”

“차가운 외풍과 몰려드는 적으로부터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다 하여도 물러나지 않을 것인가.”

“네, 기사 안드레. 주군 앞에서 맹세합니다.”

“그 길이 어렵고 위험하다 해도 끝까지 따를 것인가.”

“네, 기사 안드레. 주군이 가시는 길에 피와 죽음이 가득할지라도 끝까지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둘의 문답이 이어졌다.

황태자는 끝없이 그의 마음을 물었고 안드레는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확답했다.

물음과 맹세가 이어지길 몇 번.

기사 서임식과도 같은 과정 끝 마지막 질문이 떨어졌다.

“기사 안드레는 혹여 주군이 그대의 목숨을 원하여도 내어줄 것인가.”

잠깐의 침묵.

문득 안드레의 눈과 황태자의 눈이 마주쳤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말간 진홍색 눈동자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주군께서 목숨을 원하신다면?

앞에 선 고귀한 분께서 목숨을 내놓으라 하신다면?

자신은 어쩔 것인가.

안드레가 황태자를 마주 바라본 채로.

“기꺼이.”

숨을 토해 내듯 답했다.

“기꺼이 드리겠나이다. 이 한 목숨.”

그의 답은 확고했다.

진실로 지금 당장이라도 제 목을 그을 것처럼 단단했고 결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를 들은 황태자는.

“좋다. 오른손을 내밀라.”

기사의 생명과도 같은 검 잡는 손을 내밀라 하였고.

기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넙죽 오른손을 내밀었다.

과거 억울하게 오른팔을 잘린 채 버려졌던 반역도와, 그를 버렸던 폭군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듯.

황태자가 안드레의 내민 팔을 향해.

후우웅-.

망치를 휘둘렀고.

역류하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에도 안드레는 곧은 눈으로 전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같은 장면 속, 전생엔 비명과 원망, 분노가 가득했다면.

이번 생엔 믿음과 결의, 생명이 가득하니.

콰앙!

떨어진 망치가 이윽고 안드레의 팔을 뭉갠 순간.

이루어졌어야 할 운명이 충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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