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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36화 (136/200)

136화 추락

눈사태에 휩쓸려 가기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가 산을 망치로 내려치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미치광이 황태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하께서는 무사하시다던가. 남부에 알 수 없는 진동이 계속된다는 소식을 들었다만.”

발자크 드보르작, 북부의 변경백은 진심으로 전하의 안위를 걱정했다.

“지난 플라워 밸리에서 악마를 상대하며 광증이 깊어지셨다 들었어. 스프링 필드에선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셨다더군.”

남부의 소식을 들었다.

누가 죽었다 또는 누가 어떻게 되었다 따위 소식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직 황태자.

전하의 안전과 상태가 그의 관심사일뿐.

“응당 죽어야할 놈들이 반항까지 했다지. 전하를 돕지 못한 게 한이다. 어째서 불러 주시질 않았는지.”

플라워 밸리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듣고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거리만 가까웠다면 당장에 제 기사단과 병력을 이끌고 전하를 도우러 갔을 거다.

전하께서 홀로 감당할 피를 나누어 마셨을 텐데.

아버지의 진한 아쉬움에.

“부르지 않으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라는 깊은 뜻이었겠지요.”

백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카르디스가 한결 진중해진 표정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의 볼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제법 살벌했고, 넓어진 어깨가 아비와 견주어 모자람 없었다.

“갔던 일은 잘 해결되었느냐.”

“네, 산맥 깊은 토굴 속에 숨어 있던 놈들을 찾아내 모조리 베었습니다.”

“얼굴의 상처는 놈들에게 입었느냐.”

“불찰입니다.”

“조심하거라.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으니.”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담담했으나 아들을 보는 백작의 눈가에 걱정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최근 에스키모의 잔재가 산맥에 남아있단 소문이 안까지 돌았다더구나. 티내지 말거라. 새로운 북부에 괜한 흠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네, 불안해하지 않게 단속을 잘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북부를 떠난 지 꽤 긴 시간이 지났다.

북부가 불의 샘을 중심으로 새로운 터전을 잡아가는 동안.

백작을 비롯한 기존 병력들은 북부 깊은 숲을 질타.

산맥에 올라 새로운 산맥방벽을 꾸리기 위하여 분투했다.

몰래 숨어 깊은 겨울잠을 자던 몬스터들을 몰아내자.

산맥 너머, 주인이 사라진 둥치를 차지하려 대륙에도 알려지지 않은 괴물들이 준동했고.

산맥 점령전이 벌어졌다.

살벌한 전투가 매일같이 이어졌다.

밀고 밀리는 전투 속에서 백작이 활약했고 기사단이 단단히 버텼다.

힘들 때마다 그날의 풍경을 떠올렸다.

멀리서 지켜봤던 눈보라, 아스라이 들려오던 폭발음, 쓸쓸히 선 전대 백작, 꽃무덤 속에 잠든 아버지들, 눈물 흘리던 전하를.

위기의 순간, 떠오른 고결한 심상이 항상 그들을 지켜 주었다.

신비한 일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힘차게 피를 뿜어냈으니까.

문득 저 멀리 보이는 불의 샘 앞.

산맥을 향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북부의 새로운 풍습.

출정하는 병력은 하나도 빠짐없이 불의 샘 앞, 꽃무덤과 홀로 선 전대 백작을 향해 경례하니.

불의 샘, 상서롭게 고여 있는 불을 퍼날라 입은 갑옷 심장 어림에 꾸욱 도장을 찍었다.

심장을 바치겠단 의지.

불의 가호를 바란다는 의식.

흩어지는 눈발 속 먼 광경을 아스라이 보던 백작이 감상을 지우곤.

“나머지 토굴은.”

또 다른 토굴의 상태를 물어왔다.

산맥을 기어오른 건 비단 저 너머의 미지의 괴물들뿐만이 아니었다.

에스키모.

언젠가 찾아올 겨울을 기다리며 복수의 날을 꿈꾸던 잔여물을 찾아내었고.

산맥 구석구석을 돌며 놈들의 토굴을 찾아 불태웠다.

백작 또한 방금 거대한 토굴에서 놈들의 머리를 베어 버리고 나온 길.

“일단 지금껏 발견한 자잘한 토굴은 모조리 토벌을 끝냈습니다. 남은 건 하나뿐입니다.”

“으음, 준비는.”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가자.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는 게 좋겠지.”

발자크가 아들과 기사단을 대동하고 산맥의 가장 높은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깊은 만년설이 그들의 앞에 가득했으나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마치 평지를 걷듯 발자크의 걸음은 산뜻했고 뒤를 따르는 기사들 또한 흔들림 없었다.

지난 싸움으로 그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 주듯.

당당하게 산맥 최고 봉우리 한구석, 크게 파여 있는 토굴 앞에 도착했고.

토굴 앞, 온갖 마법 장비들을 세워 둔 채 조사하는 검은 복장의 요원들 사이.

“자네가 보기엔 어때. 정말 에스키모의 굴이 아니라 보는가?”

백작이 말은 건넨 곳에는 흰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중년인.

현장을 지위하던 그가 찬찬히 백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루카르 백작.”

“알프레드.”

바로 황태자의 시종장이었던 알프레드.

살이 빠졌는지 더욱 메마른 얼굴, 한쪽 눈에 씌워진 안대가 이질적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니지, 이젠 알프레드 처장이라 하는 것이 맞겠군.”

“불필요한 호칭까지 붙여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건넨 백작의 농담에 알프레드가 스산히 미소 짓고는.

“확실히, 지금까지 보았던 에스키모들의 토굴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앞에 둔 보고서를 백작에게 건넸다.

물론 백작은 알프레드의 입만을 바라보는 중.

복잡한 보고서는 그의 취미가 아니니까.

“에스키모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잡종들이 머무는 토굴에선 마나가 불안정하게 흘렀으나 법칙을 뒤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겠지요.”

“그럼 이 토굴은 법칙에 간섭한다는 건가.”

“간섭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틀려 있습니다.”

백작이 마주한 토굴의 크기는 대략 3m 가량.

기다란 창을 들고 입장할 수 있을 만한 크기.

“저 입구는 함정입니다.”

“함정이다?”

“어느 정도 크기로 보이십니까?”

“한 삼 미터 정도? 들어가기 부족함 없어보이는데.”

“제 눈에는 약 일 미터 정도로 보이는군요.”

“……!”

알프레드의 말에 발자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럼.

“공간이 왜곡되어 있다?”

“네. 퍽이나 정교하게요. 아마 이대로 들어가면 뒤죽박죽인 공간에 먹히거나 최악의 경우엔 찢겨 죽을 겁니다.”

“허, 악랄하군. 에스키모에게 신비가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놈들이 마법이라도 배웠나?”

“에스키모의 신비라하기엔 또 다릅니다.”

“다르다?”

“네, 저 또한 이글루를 보았지요. 그것에 비하면 훨씬 정교하고 치밀하며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습니다. 야만이 아닌 고도의 기술이라 보는 게 맞겠군요. 우리가 가진 장치로는 풀 수 없는.”

“으음- 정보부나 특무대의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단 말이지.”

“없습니다.”

“내 검으로 벤다면?”

잠시간 고민하던 알프레드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깊이 얽혔는지, 얼마나 넓게 얽혔는지 모를 일입니다. 최악은 백작님마저 빨려 들어가거나 차악은 산이 무너지는 것이겠지요.”

부정적인 견해.

백작을 무시하거나 그가 얻은 신비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대의 말이라면 사실이겠군. 산맥에 존재하는 에스키모의 잔재들을 찾아낸 것도 자네였으니 더욱 잘 알겠지.”

처음 에스키모가 숨어 있는 토굴들이 산맥 곳곳에 있다는 걸 알려 준 것이 알프레드.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대뜸 뱉었던 말.

“산맥에 에스키모들이 숨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와서는 갑자기?”

“놈들이 숨어 다음 겨울을 기다리니. 북부의 검이 필요합니다.”

인사가 끝나기도 전한 충격적인 소식.

증거를 대라고 하기도 전.

“토굴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필요한 무력을 적어 두었습니다. 이대로 진행하면 빠른 시일 내에 무력화할 수 있을 겁니다.”

알프레드의 손짓에 검은 정복을 차려입은 정보부와 특무대가 들이닥쳐 거대한 지도를 백작 앞에 늘어놓았다.

곳곳에 꽂힌 핀과 아레에 적혀 있는 필요한 기사와 병력의 숫자.

북부 측 몇몇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아무리 황태자의 심복이라지만 백작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엉망이지 않은가.

이젠 새로운 북부의 검이라 칭송받는 발자크가 알프레드를 바라보길 잠시.

“다들 나가라.”

부관들을 일제히 내보냈다.

회의실 안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차올랐고.

“다들 나가.”

알프레드도 요원들을 일제히 내보내곤.

둘만이 남아 마주했다.

메마른 시종장의 얼굴을 보던 발자크가.

“한잔하겠나.”

회의실 책상 깊은 곳, 숨겨 놓은 위스키를 꺼내어 잔에 따랐다.

쪼로록, 황금빛 액체가 유리잔을 타고 차올랐고.

“자.”

“업무 중 음주는 제국법 위반입니다.”

알프레드의 차가운 거절에.

“전하께서 없으니 불안하지? 얼굴에 성급함이 너무 드러나 있어. 자네답지 않아.”

발자크가 툭 진실을 찔러왔다.

움찔, 알프레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하와 백작을 대하는 모습이 다를 수 밖에 없죠.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말을 쳐냈다.

그리곤 그가 품속에서 임명서 한 장을 꺼내더니.

“정보부와 특무대를 통합한 중앙정보처장 임명서입니다. 제 말이 곧 황가의, 전하의 지시라 생각하고 따라 주십시오.”

권위를 내세웠다.

정보부와 특무대를 통합한 부처라니? 이번에 신설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찍혀 있는 인장은 분명 황가의 인장.

한동안 전하 곁에 없다더니 아마 시종장의 가면을 벗어던진 모양.

“하여 지금 당장 토굴에 숨은 에스키모들을-.”

거기까지 말하던 알프레드가 급히 뒤로 뛰었고.

하얀 실선 하나가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쳤다.

“이게 무슨.”

알프레드의 날선 목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울린 소리에 북부 병력과 정보부가 우르르 회의실로 들이닥쳤고.

자리엔 멍하니 선 알프레드와 위스키를 담은 잔을 찰랑이는 백작의 모습이 전부.

한가지 다른 점이라면 발자크 백작의 손끝, 하얀 빛무리가 어려 있다는 것.

“의심, 불안, 조급. 자네 마음에 어린 불편함들을 잘라 내었네. 어때,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백작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산뜻하게 물어왔고.

“후우우.”

알프레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든 임명서와 지도에 가득한 표시들.

놀란 정보부 요원들과 북부 기사들 사이.

유일하게 태평한 백작의 미소.

무엇이 이리 급했을까.

“정신이 좀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그가 백작이 전해 준 위스키를 벌컥 한입에 들이켜곤 쓰게 웃었다.

자신이 돌아봐도 방금 대화는 참패.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백작이.

“그래, 천하의 알프레드 시종장이자 현재는 중장앙보처장, 중앙장보처, 에이 씨. 어쨌든 어쩌구 처장님이 된 사람이 이리 급한 이유를 들어 볼까.”

멋진 척하려다 실패했고.

“북부의 병력이 필요한 순간이 올 겁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북부의 위협을 제거해야 합니다.”

“북부의 병력? 북벽을 두고 말인가? 그럴 경우는… 별로 없는데.”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 최소 병력만 두고 모조리 진군해야 하는 한 가지 경우의 수.”

이번엔 주르륵, 입에 머금은 위스키를 컵에 흘렸다.

“검은 위대한데 술은 약하시군요?”

알프레드가 입가를 닦는 백작에게 한 방 먹이곤 잔잔히 미소 지었다.

“다시 설명드리죠. 일이 벌어지기 전에 북부의 모든 위협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가 이끄는 중앙정보처가 북부를 돕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항상 반역의 기미를 엿보기만 하던 정보부와 특무대가 북부를 돕겠다는 이례적인 상황.

남부에서 인간과 엘프의 화해가 이루어졌듯.

“얼마든지. 북부 또한 최선을 다해 임하겠다.”

북부에선 인간과 인간끼리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러니 알프레드는 백작의 실력을 알았고 발자크는 시종장을 믿었다.

그가 못한다면 진정 어려운 것이리라.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방법을 찾아보자고.

발자크가 뒷말을 있지 못하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게 뭐야? …성인가?”

시야에 포착된 하늘을 떠다니는 은빛 무언가.

타원형의 매끄러운 몸채와 뒤에 이어지는 오색 연기가 낯설었다.

마치.

“고래 아닙니까?”

저 먼 바다에 있다던, 자기 전 들었던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고래가 아닐까.

“그건, 바다에 살잖아?”

한 가지 문제라면 여긴 북부, 눈보라 가득한 산맥 위.

고래가 나타날 리가 없지.

문득 발자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안한 기분이 스멀스멀 뒷목을 쓰다듬는 느낌.

아, 느껴 본 적 있다.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들.

휘두르는 병, 솟아오르는 피, 불, 절벽을 뛰어내리던 모습, 휘날리는 백금발.

황태자.

이 불길함은 황태자가 무언가를 벌일 때 느꼈던 직감.

그가 다급히 옆을 돌아보았고.

“자네! 알고 있었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꿈을 꾸듯 하늘을 바라보는 알프레드를 보자 확신했다.

전하께서 도착하셨구나!

그래도 같이 산맥 토벌 작전까지 수행했건만.

“이런 중요한 정보를 누락하다니! 과하지 않은가!”

전하가 오고 있다는 이 중요한 소식을 자신에게 숨기다니.

백작의 질책에 맞선.

“전하께서 오시는 걸 알면 뭐가 달라질까요. 어떻게 맞이하나 모두 뒤집어엎으실 게 뻔한데요.”

“윽- 그건 그렇더라도.”

“어차피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미리 아셨다면 마음만 흔들리셨을 겁니다.”

알프레드의 확답에 발자크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에스키모는커녕 이번엔 대체 어떤 일을 벌이실까 매일같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에 빠져 있었겠지.

그만큼 황태자의 등장은 그의 불안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정말 잘 들어맞았다.

아니나 다를까.

“떨어진다!”

하늘에서 길게 꼬리를 남기며 떨어지는 녹색 유성우!

높은 산봉우리 화려한 폭발이 일어난 순간.

“으아아아-! 이 미친-!”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 걸-!

그의 마지막 절규는 눈에 파묻혀 닿지 못했다.

만년설이 휩쓴 자리.

남은 눈발이 이리저리 고요해진 산 주변을 떠도는 풍경.

“푸하아!”

발자크가 가장 먼저 눈을 헤치고 나와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 들었다.

“이봐! 다들 괜찮나!”

마침 뒤이어 고개를 든 장남이 기사단을 수습하는 동안.

백작이 성큼성큼 위로 향했고.

아까 보았던 함정이 가득한 토굴 입구를 지나.

황태자가 떨어져 내린 꼭대기.

“전하! 전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달려간 곳엔.

“오랜만이로군. 알프레드.”

“전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푹 패인 땅, 흩날리는 눈발과 불어닥치는 칼바람 속에서 마주한 황태자와 시종장이 보였다.

땅에 파묻힐 듯 깊이 부복한 시종장을 보는 황태자의 얼굴이 그리 좋지 않았다.

“고난이 있었군. 눈은 그때 잃었나?”

“부족하여 벌어진 일이옵니다. 염려치 마옵소서.”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다니 떨어진 시간이 길긴 했나 보군.”

황태자가 알프레드의 말에 피식 헛웃음을 짓고는.

“아깝다. 자네의 눈은 내 눈이고 가진 전력은 나의 전력이다. 날 섬기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라. 속죄의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니.”

퉁명스레 알프레드의 부족함을 탓했다.

못된 말에도 알프레드는 인자하게 웃을 뿐.

“그래, 그 눈을 잃게 만든 자는? 황성에 있나?”

“땅속에 있습니다.”

“아쉽군. 내 직접 징치하려 했건만.”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남부에서의 도움은 고마웠다. 덕분에 일이 쉬웠어.”

“아셨습니까? 놀래켜 드리려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만.”

“몰랐다. 혹시나 해서 찔러봤는데 진짜였군?”

그제야 알프레드가 황당하단 얼굴로 전하를 올려다보았고.

황태자가 만족스런 미소를 함빡 머금었다.

“그래, 그거다. 나를 파악하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지. 부하 좀 얻었다고 자만한 건 아니겠지. 알프레드, 자네는 내 시종장이야. 누가 뭐라 해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꽤 오랜만의 해후를 끝마친 황태자가 이번엔.

“백작. 마침 잘 올라왔군. 얼굴이 참 좋아 보여.”

“전하, 북부의 변경백 발자크 드보르작이 인사 올리옵나이다.”

“내가 없어 참 편안했겠어.”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매일같이 전하의 옥체를 걱정하며-.”

“하여 직접 행차했네. 자네가 누리는 평화가 꼴보기 싫어서.”

“전하를 돕기 위한 평화였습니다.”

“말대꾸가 늘었군? 이거 역시 몸이 편하니 정신이 무뎌진 게야. 저저, 얼굴에 기름 낀 것 좀 봐.”

“…….”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를 표정으로 형상화하면 발자크 백작의 표정이지 않을까.

황태자 치밀어 오르는 못된 즐거움에 몸을 떨고는.

“자, 귀를 활짝 열고 잘들 들으라고.”

망치를 다시금 산꼭대기에 내리치는 순간.

우르르릉-

가뜩이나 갈라져 있던 봉우리가 풀썩 아래로 꺼졌고.

갑작스런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오금과 사타구니가 오싹거리는 감각.

산 안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게 바로 평화가 깨지는 소리야. 백작.”

황태자의 태평한 발언에 발자크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

백작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황태자가 즐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오랜만에 괴롭히니 즐겁다.

떨어지는 그들의 귓가에.

아버지이이-

아스라이 울리는 장남의 외침이 간절히도 아버지를 찾았으나.

황태자, 알프레드, 발자크는 이미 산 안으로 떨어진 뒤.

산 깊은 곳에 숨은 드워프를 만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아니, 추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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