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37화 (137/200)

137화 일그러진 공간

산맥 높은 봉우리.

휘날리는 눈보라가 채 가라앉기도 전.

“아버지이이이-!”

“백작니이임-!”

“저은하아아-!”

세 호칭이 뒤섞여 울렸다.

뻥 뚫린 산봉우리 안을 쳐다보는 장남 카르디스의 얼굴이 다급해 보였다.

방금 기사단을 수습하여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일.

솔직히 눈사태는 대비했다.

전하가 등장하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근데 산봉우리를 깨실 줄은 몰랐지!

아니, 누가 예상했으랴.

문득, 황태자 전하를 떠올리면 관자놀이를 붙잡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 또한 마지막 추락하던 아버지의 서글픈 얼굴과 황태자의 밝은 웃음을 보면 머리가 죄듯 아파 왔으니까.

이렇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나 보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 어어. 공자님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뛰어내립니까?”

어느새 눈보라가 가라앉은 봉우리, 지독할 정도로 쨍한 하늘 아래.

코끝을 붉게 물들인 기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어 왔다.

산맥의 추위야 익숙하다지만 추락에 익숙한 이는 없다.

그렇다고 여기 계속 멈춰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

카르디스가 막 몸을 던지려하기 전.

“이봐-! 백작가의 장남!”

봉우리 위를 휘돌던 비행선 안, 살라스의 목소리.

“너희는 따로 할 일이 있다.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황태자의 전언이니 다들 따르도록.”

휘익, 높은 창공에서 떨어진 두터운 서신을 잡아든 카르디스가 이를 펼쳐 보기도 전.

쿠르르-

오색 연기를 뿜어대던 비행선이 찬찬히 봉우리를 향해 다가왔고.

“어어! 공자님 피하십시오!”

북부의 대공자와 기사들이 분분히 흩어져 달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맞아?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토굴 정벌이다 몬스터 방어다, 어떤 적 앞에서도 위축된 적 한 번 없는 용맹한 이들이건만.

왜 항상 전하만 오시면 도망치거나 소리지르는 처지가 될까?

왜 전하 앞에만 서면 이렇게 초라해지는 걸까.

달리던 기사가 의문을 담아 대공자를 바라보다 문득.

“공자님… 우십니까?”

공자의 붉어진 눈가를 발견했고.

“안 울어. 그냥… 오늘따라 바람이 매섭네.”

대공자 카르디스가 북부의 칼바람을 탓하며 물기 가득한 눈가를 닦아 냈다.

그래, 아버지가 북벽 위에서 위로받던 이유를 알았다.

다시 한번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 * *

“다들 꽉잡아!”

플라잉 해머호 조타실 안.

살라스의 외침에 모두가 주변 아무것이나 부여잡으며 충격을 대비했고.

곧 황자가 뚫어 놓은 구멍 안으로.

플라잉 해머호가 안착했다.

거친 충격이 몸을 뒤흔드는 와중에도 마법사들과 장인들이 제 본분을 다했고.

이내 거대한 유선형의 마나 주머니, 오색 모래를 피워 경량화된 마나를 채운 기낭이 봉우리 입구에 걸리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산 안쪽에는 조종실이, 밖에는 유선형의 몸체가 나와 있는 모양.

“내구도 점검해!”

“엔진이랑 배출구 이상 무!”

“실드! 실드 상태 확인 이상 무!”

“마나 주머니도 무사합니다!”

“날개 상태 이상 없습니다!”

곧 충격을 수습한 마법사들과 장인들이 플라잉 해머호의 상태를 점검.

“날카로운 부분과 맞닿은 곳은 실드 강화하고, 혹시 모르니 잔여 철판도 덧대 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살라스의 명령에 다들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그가 성큼성큼 조종실에서 발을 옮겨 도착한 곳은 따로 마련된 객실.

“자, 다들 준비는?”

“준비 이상 무!”

안에 자리한 건 솔과, 안드레, 바이올렛을 비롯한 청익과 마법사단.

더 나아가.

“준비 끝났어.”

블러디, 이젠 루비라 불리는 하프 엘프와 그녀를 돕는 다른 하프 엘프들이 로브를 벗으며 영롱한 얼굴을 드러냈다.

세계수의 축복을 잃었던 후유증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순혈 엘프들 대신 그들이 황태자를 돕기로 하였고.

“좋아. 모두 강하 준비.”

살라스가 가장 앞에 서 객실의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비린내 섞인 바람이 콧속을 깊이 찔렀다.

“철냄새로군.”

플라잉 해머호를 제작하며 익숙해진 철을 달군 냄새.

살라스가 짙게 미소 짓길 잠깐.

“강하!”

어둑한 굴속으로 뛰어내렸고.

잇따라 강하를 시작.

누군가는 마법을, 누군가는 지닌 신비를 이용하여 몸을 보호하는 동안.

“난 부서질 몸이 없지! 와하하하!”

“아니, 이 미친! 나는 부서진다고요! 잠깐! 잠까아안!”

누구보다 빠르게 추락하는 한 갑옷.

아니, 한 깡통 갑옷과 사람 하나.

남부 원시림에서부터 따라온 무명 기사.

안에는 어쩐 일인지 안드레가 들어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라 그에게 몸을 의탁했건만.

“아? 너 왜 내 안에 있냐?”

“나 보고 안전하다며 들어오라면서요!”

“그랬어? 이거 뇌가 없어서 잊어버렸지 뭐냐! 와하하하!”

“뭔 놈의 와하하하예요? 당장 멈춰! 이러다 죽는다고!”

“이미 늦었어. 받아들여.”

“믿은 내가 미친 놈이지-.”

이 미친 깡통아아아-

먼저 산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안드레의 절규가 길게 늘어졌다.

“대체 왜 멀쩡한 새끼들이 없는 거냐. 네놈 주변에는.”

살라스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저을 때.

“우리도 전하 옆에 있는 건데요?”

솔의 순진한 물음에.

“가로등, 닥쳐라.”

“아, 왜 맨날 다들 저한테만 그러시는데요!”

떨어져 내리는 이들이 작게 웃었다.

불안함은 없었다.

황태자가 먼저 떨어진 이상 분명 무얼 하고 있으리라 예상했기에.

그래, 전하라면 지금쯤 누군가의 머리통 하나쯤은 박살 내시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 무언가 올라옵니다!”

한 마법사의 보고와 동시에 치미는 무언가.

터지는 용암과도 같이 몰려드는 것은.

“뭐야 저건…….”

공간.

부글부글 끓는 공간이이었고.

“다들 손 잡아!”

상황을 파악한 살라스가 다급히 모두를 모이라 했다가.

“아니다, 각자 방어! 최대한 몸을 방어해라! 가까운 이들끼리만 뭉치면서 몸을 방어해!”

차오르는 공간과 추락하는 속도가 맞물려 시간이 없다고 판단, 재빨리 각자도생을 명령했다.

그리곤 급히 철을 펼쳐 제 몸을 감싸니.

둘, 셋 씩 모인 이들이 다급히 서로의 몸을 보호하는 순간.

끓어오르는 공간이 그들을 휩쓸었다.

남은 것은 이리저리 일그러진 마나와 얼핏 흐르는 바람소리뿐.

산 안에는 다시 고요만이 자리했다.

* * *

일그러지는 감각이 괴상했다.

산으로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어그러진 공간.

몸을 감싸는 공간들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고.

곧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이 뒤틀렸다.

발과 손이 따로 분리되어 떠돌았고 온 몸이 제각기 다른 크기로 변했다.

아프진 않았으나.

“전하! 전하아아아!”

귓가가 시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백작, 괜찮으니 입 좀 다물도록.”

바로 옆에서 그 거대해진 입으로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귀가 멀어 버릴 지경.

내 타박이 들렸는지 그가 헙- 숨을 멈추곤 깨알만 한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길 잠깐.

“어, 워. 그러니까. 거기 계셨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안도했다.

떨어져 내리던 때, 우리 역시도 끓어오르는 공간을 마주했고.

알프레드가 사철을 펼쳐 동시에 셋을 보호했다.

덕분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군. 둘 모두.”

셋이 흩어지는 일은 면했다.

웃긴 점이라면 백작은 몸은 원래의 반의 반만큼 작아졌고 입은 개구리만큼 커진 모양새.

거기다 손과 발은 본래보다 두 배로 커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였고.

“으음, 불편합니다만 어쩔 수 없겠지요.”

알프레드는 과거 에스키모처럼 빼짝 말라 높이 솟아 있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팔다리가 인상적이다.

“걸을 순 있겠나?”

“해봐야겠는걸요.”

백작의 물음에 알프레드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 보았으나.

다행이 넘어지는 볼썽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득.

“나는 모양새가 어때?”

내 모양새를 물으려니.

백작과 알프레드가 눈을 마주치며 뜻을 교환하기에.

“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니 비슷한 모양새겠지.”

굳이 듣지 않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움직이는 동안에도 뒤틀리는 시야와 감각.

발걸음 소리가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했고 멀리 있던 종유석이 불쑥 가까워지기도 했으며.

분명 작았던 석순이 가까이 다가가자 순식간에 자라 길을 막기까지 했다.

이리저리 돌아가기가 답답하여 등에 맨 망치를 휘둘렀으나.

부우웅!

공간이 휘었는지 맞지 않았다.

골을 울리는 분노에 땅을 내려치자.

엉뚱하게도 건너편 땅이 우그러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망치를 휘둘렀으나.

약이라도 올리듯 석순은 멀쩡했고.

차라리 공간 자체를 부수어 버리리라 마음먹고 막 불꽃을 뿜으려던 찰나.

서걱.

흰 빛줄기 하나가 석순을 가로질렀다.

본 적 있다.

아, 그래. 본 적이 있지.

그리울 정도로 깨끗한 절단.

실물을 넘어 관념과 현상을 베어 냈던 위대한 신비.

전대 북부의 검 루카르 드보르작이 이루었던 검.

일그러진 공간 속, 유일하게 바른 선 하나가 그와 똑 닮아 있었고.

뒤를 돌아보자.

“주제 넘게 나섰습니다. 송구합니다.”

작다란 키로 고개를 숙이는 발자크가 보였다.

왜곡된 감각을 따라 일그러진 운명들이 무어라 떠들어 대길 잠시.

스멀스멀 공간에 맞게 제 모양을 조절한다 싶더니.

[운명을 보는 눈이 깊이와 공간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습니다.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위대한 신비의 일부를 계승했습니다]

[신비에 깃든 운명 고련과 결심, 충의, 극복, 고결을 엿봅니다]

발자크 백작이 이룬 성과를 보여 주었다.

뭐라 해야 할까.

코를 쓱 닦으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백작을 보고.

분명 감격스러운 순간.

아비의 위대한 희생, 분명 상실감이 컸을 텐데.

아들은 결심하여 고련으로 극복했고 더 나아가 깊은 충의와 고결한 신비를 얻었다.

위대하다.

그리 말해 주면 마음이 좀 풀릴까.

어쩌면 내가 유일하게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자일지도 모른다.

루카르, 발자크 부자는.

지키고자 했으나 지키지 못한 관계였기에.

잠시 그를 보다가.

“이런 꼬락서니만 아니었으면 감동적이었을 텐데. 아쉽군. 난쟁이 백작.”

어억.

뜬금없는 놀림에 백작이 칼 맞은 소리를 냈다.

그래, 감동을 표현하기엔 그의 꼴이 너무 괴상했다.

내 꼴도 괴상할 것이고.

손발이 커다란 난쟁이가 되어 버린 백작이 감동스러워하는 꼴은 보기 싫다.

물론 멀쩡했어도 보기 싫었을 터.

괜히 심술이 불거졌다.

“대충 잘했고 고생했다. 이 정도면 되었지? 그만 설레발치고 따라오도록. 갈 길이 멀어.”

고생했다는 말에 감격으로 반짝거리는 눈이 부담스러워 뒤돌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백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심술 어린 칭찬마저도 감동으로 와닿는 모양.

어색함으로 뒤틀리는 입술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많이 부드러워지셨습니다.”

알프레드가 장하다는 미소를 지었으나.

길쭉이 솟아난 얼굴에 맺혀 모양이 괴상한 건 마찬가지.

“자네도 쓸데없는 말이 늘었군. 웃지 마. 얼굴이 이상하니까.”

이번엔 알프레드를 향해 심술보를 휘둘러 보았지만.

알프레드도 백작도 딱히 섭섭해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인간들이다.

이리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다니.

요즘 패악질이 많이 줄어서 그런가?

뭐, 나쁘지만은 않다.

요즘 들어 부쩍 느낀 감상이었다.

과거에는 항상 홀로였고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걷는 길이 험하였기에, 또한 피와 광기가 가득했기에.

하나 달랐다.

이유까지 깊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이 따라오기에 막지 않았고 이제는 꽤 많은 이가 나의 등 뒤에 섰다.

비행선에 탄 이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공단에서 고생할 장인들과 마법사들.

지금 뒤에선 백작을 비롯한 북부인들.

더 나아가 서부 사막과 이제는 알프레드가 이끄는 정보부와 특무대까지.

물론 가장 의외는 알프레드.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함정이 서려 있습니다]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이어진 길을 확인합니다]

보이는 운명을 따라 찬찬히 걸음을 옮기며.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알프레드가 별빛의 인도를 따라 자신을 감싼 운명을 깨치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새로운 운명 진심, 섬김, 조력, 돌파, 보호가 피어났습니다]

[그가 부순 운명의 조각들을 포식합니다. 신비 점수와 개변 점수를 대량 획득합니다]

알프레드의 주변에 어리는 운명을 읽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

마지막으로 살라스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가 언제이던가.

내가 영림에 들어간 후 사라졌다고 했지.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험악했던 운명들을 모조리 부순 것으로 모자라.

“대체 어떻게 특무대와 정보부를 삼킨 것이지?”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번에도 짐작해 보았다.”

“…….”

“아까 떨어져 내릴 때 정보부와 특무대가 자네의 명령에 움직이더군. 남의 말을 들을 자들이 아니니까. 원래.”

“정말 짐작이셨군요. 이거 정보부의 수장이라는 직책에 맞지 않게 전하께는 당하기만 합니다.”

“그래, 대답은?”

특무대와 정보부를 삼켰단 말인가.

백작의 감탄과 알프레드의 곤란하다는 미소.

지난 시간 동안 이상하다 생각했다.

남부 스프링 필드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시림까지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던 정보부와 특무대의 조력치고는 과했다.

아무리 내가 황태자라 할지라도.

남부의 전 정보부와 특무대가 모여들었고 더 나아가 중앙에서도 지원이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 거대한 두 세력을 움직인다는 뜻.

직감이었다.

알프레드로구나.

이렇게 원활하게 조직을 점령하고 정보부와 특무대를 움직일 만한 자라면.

다만 더욱 놀란 점은 바로.

물밑에서 활약하는 단체는 보통 이리저리 나뉘어 권력의 비대화를 방지하는 법.

심지어 암철단은 물밑 중에서도 더욱 깊은 그림자.

그런 그에게 정보부와 특무대까지 맡기다니.

수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또 알프레드 그가 대체 어떤 시련을 이겨 냈기에.

내 눈에서 궁금증을 읽었는지.

“그만큼 간절했습니다.”

“그랬나.”

“네, 저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요.”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이렇게 원론을 무시해 가면서 일을 맡기실 정도로요.”

“설명할 수 있겠나.”

“긴 이야기입니다만 짧게 설명할까요.”

“최대한 간략하게. 자세한 것들은 나중에 길 위에서 듣지.”

알프레드가 지난 시간을 축약하는 듯 잠시 입을 우물거렸고.

심상치 않은 대화에 백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폐하라는 단어까지 나온 이상 그리 가볍지 않은 이야기겠지.

이윽고 정리를 끝냈는지 알프레드가 천천히 입을 열어.

“옥새를 빼앗겼습니다.”

“……!”

“누가 감히!”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옥새(玉璽).

제국의 정점인 황제가 갖는 절대 권력의 상징.

옥새의 소실은 즉 제국의 몰락을 의미했으며, 옥새의 찬탈은 즉 반역의 성공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옥새를 누군가 빼앗았다?

그것도 이렇게 조용히?

* * *

“황후로군.”

황태자의 담담한 듯 깊은 분노가 서린 목소리가 일그러진 공간을 타고 흘렀다.

일그러진 시야 속 황태자의 모습은 마치 불꽃과 같아 끝없이 이지러졌다.

제 모습을 찾으려는지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고.

부유하는 공간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맞추어 가며 지배를 거부했다.

일그러지느니 차라리 끝없이 변화하겠다.

어쩌면 저리 성격대로일까.

그런 그의 형상이 알프레드의 말을 듣자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불꽃이라도 되려는 모양.

그런 황태자를 앞에 두고.

“맞습니다. 막아 내지 못했으니 제 무능함이며 부족함입니다. 벌하소서.”

알프레드가 긴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

그가 성도에 있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소식 전하는 것이 죄스러운 모양.

“그럼 자네에게 정보부와 특무대를 맡긴 것은?”

“폐하의 마지막 안배였습니다.”

백작이 알프레드의 답을 듣곤 깊이 탄식했다.

아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황태자가 타오르는 형상과 쨍한 침묵으로 서 있길 잠깐.

“믿는다.”

신뢰를 표했다.

누구에 대한 신뢰인가.

“나의 아버지이며 황제이신 폐하를 믿는다. 옥새를 빼앗겼다 했지. 아무리 황후라도 물리적으로 빼앗진 못했을 터. 권한과 판단을 빼앗았구나.”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이지를 잃으셨나.”

“그렇습니다.”

“이지를 잃은 와중에도 분명 강한 결단으로 지켜 내신 것이 있을 거다. 그걸 믿는다. 나눈 대화와 나를 지지해 준 시간을 믿는다.”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표명했고.

“단, 아버지를 어둠 속에서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순 없지. 백작, 알프레드 각오를 좀 해야 할 거야. 시간이 촉박한 만큼 이번 난쟁이들과 대화는 험할 테니까.”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나이다!”

“전심을 다하겠습니다.”

끝까지 따르겠단 기사와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이어진 굴을 바라보았다.

“마침 오는군.”

저 멀리, 까만 증기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무언가.

일그러진 공간을 달리는 기계 장치들.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는 적을 포착했단 경고.

선명한 적의를 마주한 황태자가 등에 멘 망치와 거검을 꺼내 들었고.

한 손엔 브레이커, 한 손엔 진생철퇴를 든 채.

“경고하지, 내가 좀 급해. 그러니까 다 꺼져.”

브레이커를 쿠욱, 일그러진 공간 틈새에 찔어 넣곤.

진생철퇴로 이를 내려치니.

콰장창!

유리가 갈라지듯 공간이 갈래갈래 깨졌다.

덩달아 수십으로 갈라진 황태자의 얼굴에 타오르는 미소가 피어나자.

와르르릉!

먹잇감을 찾듯 브레이커가 거친 울음을 토해 냄과 동시에, 맑은 불이 찢어진 공간 사이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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