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41화 (141/200)

141화 천국과 지옥

드워프 하나가 딱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 하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치고는 초라하지.”

알렉세이가 자조를 띄며 자신이 연 작은 공간을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열린 구멍에서 스산한 바람이 흘러나오는 중.

철옹성,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장인들은 여전히 망치를 두들기는 중.

황태자는 브레이커를 요새 입구에 찔러넣은 채 묵묵히 알렉세이와 구멍을 바라볼 뿐.

그가 손목을 비틀면 요새의 문이 열리며 공간이 허물어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대감찰관을 비롯한 감찰관들이 몰려와 철옹성을 비롯한 모든 걸 씹어먹을 거다.

분명 그가 그리 무서워하던 위기였으나.

“흐흐흐, 흐흐흐흐. 참으로 초라하지 않나. 우리가 그리 바라 마지않던 천국이 이런 작은 공간 안에 파묻혀 있다니. 흐흐흐흐.”

알렉세이가 벌개진 얼굴로 하염없이 웃음을 흘렸고.

거대한 철옹성 앞, 쫓겨나듯 뛰쳐나온 늙은 드워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울상으로 바뀌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그것도 모르고 시온을 외쳐대거든. 미련한 놈들, 시온은 없는데. 이미, 이미 우리는 모든 걸 잃었는데… 천국을 바란다며… 천국을 바란다며…….”

늙은 드워프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처음 천국으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했던 때는 아직 어린 장인이던 시절.

토끼굴같이 복잡한 통로를 돌아다니며 맘에 드는 공간을 찾아 다니던 때.

갑자기 한쪽 발이 공간 안에 푹 빠졌고.

“이것들은 뭐야…….”

그렇게 처음으로 시온의 입구를 발견했다.

며칠을 준비하여 마침내 처음 발을 들인 구멍 안.

그곳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세상이 존재했다.

안에는 어떤 공간 왜곡도, 심지어 감찰관도 없는 세상.

거대한 무더기 앞.

처음 그를 맞이하는 무더기 중 하나의 먼지를 쓸어 보니.

그곳에 적혀 있는 단어.

- 시온에 온 것을 환영한다.

시온.

드워프들이 꿈꾸는 천국.

처음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이것도, 저것도! 그저 놀라운 것뿐이야!”

진정 새로운 세계였으니까.

그가 지금껏 보아온 철옹성의 기술들보다 한층 더 진보한 기술이 가득한 땅.

심지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건 대체 뭐야? 아예 이해가 가질 않는구만.”

생전 처음 보는 수준의 장치들이 즐비했다.

“이 공간만 있으면 대장인도 문제없어!”

어린 시절 마주한 기연이자 행운이었다.

공간 안에 무한한 영감과 놀라온 기술들이 가득하니.

그중 일부분만 배워 나와도 장인으로서 업적을 쌓기 충분했다.

매일 같이 공간을 구하겠단 핑계를 대고 시온에 들락거렸다.

초입에 있는 몇 가지 물건을 그나마 흉내라도 냈을 즈음엔.

그는 장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자가 되어 있었고.

더 나아가 이를 이해했을 때에는.

다음 대장인 후보 중 하나가 되었으며.

한발 더 깊은 장소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그렇게 대장인이 되었지. 천국의 것을 훔쳐서 말이야.”

대장인이 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시온을 탐험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깨달았다.

“훔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지. 그러니까 내가 가진 기술은 도둑질도 못 할 만큼 형편없었어.”

자신의 기술이 얼마나 빈약하고 하잘 것 없는지.

기연이자 행운이라 생각했던 만남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옥죄는 시험으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부각하는 징벌로 변해 갔다.

열등감에 파묻힌 순간, 장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망치를 놓았다.

검과 날카로움을 다루는 장인들 중 가장 뛰어나다던 대장인은 사라졌고.

매일같이 신음하고 괴로워하는 늙은 드워프 하나가 남았을 뿐.

“아무리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단 절망을 느낀 적 있는가? 내 전부라 생각하던 자긍심이 사실은 먼지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황태자, 고귀한 이여. 그대의 혈통은 천국 앞에서, 또는 저 높은 곳에 있다던 신들 앞에서 얼마나 귀하냐. 진정 그대의 고귀함을 지금의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드워프의 회한 어린 말이 아직 젊은 황태자를 질책했다.

너의 젊음과 치기 어림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얼마나 갈 것 같으냐고.

하늘 위엔 하늘이 있는 법이라고.

자신을 그걸 보았고 영영 벗어나지 못했노라고.

“시온은 천국이 아닌 폐허였다. 그리고 자격이 없는 자에겐 지옥과 다름없었지. 감당할 수 있겠나. 이 진실을.”

늙은 드워프가 고백을 끝내곤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차라리 베어 버려라. 아니면 저들에게 알리던가. 그래, 모두에게 고백하는 것이 좋겠어. 그들의 망치에 곤죽이 되어 죽어도 말이지.”

이젠 차라리 짐을 벗어 버리고 싶다 중얼거렸다.

홀로 짊어진 짐이 무거웠다.

천국이 천국이 아님을 밝히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났고, 홀로 고민하고 몸을 뒤튼 지 오래되어 지쳤다.

“황태자, 네 마음대로 해라.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이들을 괴롭히지만 말아다오.”

그 말을 끝으로 알렉세이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랜만이었다.

황태자 앞에서 저런 방만한 자세를 보인 이는.

지금껏 견뎌 온 심적 부담감이 황태자의 위협을 만나자 터져 버린 모양새.

시온의 문을 활짝 연 드워프가 자리에 서서 홀로 웃고 울며 짐을 덜어 내는 동안.

“또 도망치려 하는군, 늙은 난쟁이.”

황태자의 냉정한 말이 번쩍 드워프의 감상을 일깨웠다.

그가 브레이커를 철옹성 정문에서 빼낸 뒤.

거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성큼성큼 다가섰고.

알프레드와 백작이 혹여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하는 동안.

와락, 황태자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드워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후우, 백작의 자그마한 안도의 한숨과는 별개로.

아르한의 얼굴은 그야말로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분노 가득한 얼굴.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슬픈 척 힘든 척하면 누가 공감이라도 해 줄 줄 알았나? 그야말로 개소리가 따로 없군. 본 적 있나? 녀석들이 짖는 소리가 의미 없이 꽤 크거든. 네 말이 방금 그랬다.”

“…개소리라고? 내 말이 의미 없다고?”

“그래, 아니 개소리가 더 아름다울 지경이야. 늙은 드워프. 홀로 비련의 주인공이 되니까 즐겁나?”

“비련?”

“수염이 숭숭난, 작달막하고 기름때가 가득 묻은 얼굴로 그런 회한 어린 표정을 짓지 마라. 역겨워.”

“역겹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잘 들어라. 네가 어떤 상처를 입고 어떤 고생을 했던 내 알 바가 아니다. 오히려 화가 날 지경이야. 너 혼자 시온을 발견하여서 무엇을 했지?”

“그야.”

“혼자 기술을 훔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궁상떨고, 혼자 영광을 누렸지!”

황태자의 맹수와도 같은 고함에 드워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대롱대롱 들린 짧은 다리가 애처로웠으나.

황태자는 노인 공경 따위 하지 않는 자.

아니, 오히려.

“비겁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지금까지 즐거웠나? 훔친 기술을 보며 놀라는 다른 드워프들의 얼굴이? 나이가 들고서야 자신이 숨긴 비밀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았군. 그래 죽을 때까지 숨길 비겁한 비밀을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냐?”

“죽을 때까지 숨길 생각은 아니었어.”

“남에게 짐을 넘기니 시원해?”

“시온을 물어본 건 황태자 그대가 먼저-.”

“이 빌어먹을 새끼가!”

노인 공격에 재능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 상대를 을러대던 황태자가.

“좋아, 또 묻지. 공간! 너희를 감싼 공간이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걸 알았나 몰랐나?”

“어떻게 그걸-.”

“멸망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껏 남들에게 받을 손가락질이 무서워 숨겨 왔어! 네가 그러고도 대장인이냐! 장인전을 받아들인 이유도 그것이었구나! 자연스레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으윽, 그렇게까진.”

“또 개짖는 소리!”

콰앙!

그가 목덜미를 붙잡은 채로 바닥에 드워프를 처박았다.

숨막히는 소리가 울렸으나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황태자의 눈가에 맺힌 분노가 선명했기에.

“멸망을 알고도 침묵한 건 비겁을 넘어 저열한 짓이다! 이를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었으면서 침묵한 건 죄야! 언제쯤 용기를 내려 했나! 모두가 죽고 나서? 그때야 내가 시온의 입구를 알고 있다고 선언이라도 하려 했어!”

황태자의 분노가 너무나 선명하여 드워프가 숨막히는 얼굴로 굳었다.

왜? 그는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가.

타오르듯 이지러지는 황태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알렉세이가.

“왜, 왜 이리 화를 내는 거야. 너희들의 멸망도 아닌 우리의 멸망이다. 우리의 잘못이기도 하고, 우리의 착각이기도 하지. 그저 집주인이라? 왜 네가 이리 화를 내는 거야.”

막힌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왜 그대가 그리 화를 내냐고.

자신이 숨긴 일을, 드워프들의 위기를 보고 왜 자기 일처럼 화를 내냐고.

그 미약한 물음에.

“나 또한 몸부림치고 있으니까.”

황태자가 한숨을 토해 내듯 답했다.

목소리에 담긴 한이 절절하여 마음이 아릴 정도.

“멸망을 이겨 내려 하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황태자가 입을 다물었다.

불이 꺼지듯 타오르던 형상이 가라앉았고 남은 건 잔열과 매케한 감정뿐.

황태자는 그렇게 가만히 드워프가 연 새까만 구멍 넘어 먼 무언가를 바라볼 뿐.

분명 등에는 아무것도 없건만.

왜 굽힌 등에 상상도 못 할 무겁고 큰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은가.

백작이 문득 과거 꽃무덤 안에서 눈물을 흘리던 전하의 모습을 상기했다.

그 시절부터 이리 무거운 짐을 져 온 걸까.

북부의 패망을 막는 과정에선 광기와 피로 가리어 몰랐으나.

마지막 순간 황태자가 흘린 눈물은 누구보다 맑았고 선했다.

지금 어린 감정도 마찬가지.

광기와 패악으로 가려 놓은 그의 본심.

알프레드와 백작이 서서히 슬픔에 젖어 가는 사이.

“켁, 케켁, 이, 이러다, 주, 죽어-.”

황태자가 막아 놓은 숨통에 얼굴이 시뻘게진 드워프가 공기를 갈구했고.

“살고는 싶은가 보구나, 난쟁이.”

황태자의 형상이 다시 타오르듯 날뛰었다.

본심을 드러낸 것은 아주 잠깐.

“그래, 이기심은 생물의 본성이지. 나 또한 마찬가지고. 그래서 말인데 위치를 알려 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휘익, 놈을 붙잡은 채 안으로 뛰어들었고.

“차라리 죽여 줘-!”

드워프의 몸부림은 미약했다.

알프레드와 백작도 예상이라도 한 듯 황태자의 뒤를 따라 뛰어들고 나서야.

새까만 구멍이 자취를 감추었다.

* * *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깊은 구멍과 짙은 먼지에 가려 운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깊이 보는 눈이 운명의 아주 일부를 확인하였습니다. 운명 퇴적, 금자탑을 엿봅니다]

시온의 흔적을 엿본 순간 떠오른 운명들.

덩달아 분노가 피어났다.

빌어먹을 난쟁이 놈.

시온의 입구는 처음부터 놈에게 있었다.

알렉세이가 뱉는 고백이 기만처럼 느껴졌다.

놈은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남들에게 밝히는 게 두려워서, 남들의 조롱과 공격이 두려워서.

끝까지 시온에 대해 숨긴 거다!

위기가 그들을 삼킬 때까지.

놈이 결심했을 때는 이미 늦었을 테고.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늙은이의 안일함과 제 고집이 역겨워서.

하지만 애써 참았다.

- 드워프들에게 시온은 허락되지 않았으니. 우리에게 기회는 없었고. 난 드워프로서의 정체를 버리고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모욕은 아프지 않았으나 내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이후 매일같이 만나는 이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뒤늦은 속죄였으나 신은 역시나 늦은 참회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가 이후 겪은 모욕들을 알았기에.

인생이란 게 그렇다, 한순간의 창피를 피하려다 영영 씻지 못할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하는 법.

그때 가서 잘못을 되돌리려 하지만 수 배, 수십 배의 노력으로도 바로잡기 어려운 것이 삶.

알렉세이 또한 그랬다.

드워프들의 볼멘소리가 싫어 진실을 감추었고 나중엔 온갖 모욕과 조롱을 감내했다.

마침내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수정 안에 영겁의 시간동안 갇히는 형벌을 감내했다.

그때의 모습이 어쩌면 나와 닮아 있기에.

물론 나는 남이 뿌린 똥물을 뒤집어쓴 것이지만.

왜곡된 공간 사이를 지나가는 모양인지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느껴지길 잠시.

시야가 트였고.

[왜곡된 공간의 무더기와 먼지를 헤집고 쌓아 올린 운명을 마주합니다]

펼쳐진 풍경에 터지는 감탄을 억눌렀다.

주위를 둘러보자 나머지도 마찬가지.

백작과 알프레드 또한 감히 입을 벌리거나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굳어 있는 모습.

함부로 숨을 내쉬지도 못했다.

지금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완벽해서.

분명 알렉세이의 말대로 폐허에 가까운 모양새이나.

모든 조화가 놀랍도록 자연스러웠고.

가라앉은 먼지마저도 의도된 장식처럼 멋스러웠다.

모두가 가만히 숨죽여 이 위대한 풍경을 바라볼 때.

저벅.

그 조화를 깨며 발을 옮겼다.

알렉세이가 몸을 바르르 떨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폐허의 가장 첫 지점에 섰고.

위에 서린 먼지를 후우- 불자.

- 장인들의 천국 시온.

첫 문구가 눈에 띄었다.

환영하는 문구를 마주함과 동시에.

완벽, 창생, 조화, 아름다움, 지혜 등등.

화려한 운명들이 마치 값비싼 샴페인을 따랐을 때처럼 보그르르르, 방울져 튀어올랐다.

흐읍- 와인을 맛볼 때처럼 깊이 숨을 들이쉬자.

향긋한 운명들이 뒤섞여 폐부를 눅진하게 녹였다.

천국의 향이로구나.

그렇게 잠시 깊디깊은 운명들을 음미할 때.

[깊은 운명을 확인합니다. 보이는 운명들 뒤 또 다른 운명들이 존재합니다]

[대상의 운명이 굳게 잠겨 있습니다. 운명 열쇠가 필요합니다]

다른 운명들이 존재한다는 소리에 브레이커를 휘둘러.

카앙! 눈앞을 가린 껍질을 쳐냈고.

화악 피어난 먼지를 걷어 내자.

방금까지 천국이라 칭하던 자리엔.

- 장인들의 지옥 바벨.

지옥을 알리는 글자가 떠올랐다.

뒤에서 터지는 알렉세이와 알프레드, 백작의 경악을 배경 삼아.

이번엔.

부조화, 비약, 오만, 단절, 정죄 등등.

악한 운명이 짙게 피어났다.

나 또한 덩달아 짙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피어난 천국의 운명들이 샴페인의 상쾌한 기포와 같았다면.

지금 눈앞을 붉게 물들인 운명들은 레드 와인의 무거운 향.

피와 닮은 색과 향이 눈을 가득 물들이니.

즐거웠다.

그래, 이건 지옥의 냄새로구나.

“좋군.”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천국과 지옥이 하나라.”

천국과 지옥은 하나.

장인들이 꿈꿔 온 천국은 사실 지옥이었고, 그리 두려워했던 지옥은 사실 천국이었다.

참으로.

“모순되고도 아름답군.”

아름답기 그지없다.

어찌 웃지 않을까.

터지는 웃음으로 폐허의 완벽함을 헤집어 놓는 사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시온과 바벨이 하나라니…….”

충격을 못 이긴 알렉세이가 바닥에 엎어진 채 설설 기어다녔다.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모양

천국과 지옥이 하나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지.

놈이 왜 굳이 수정 속에 자기 자신를 가두었는지 알겠다.

그가 있어야만 하는 이유, 단순히 공간을 열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래, 브레이커를 찾으러 온 이유 또한.

열쇠.

열쇠였던 거다.

내 손에 들린 브레이커가 열쇠였듯.

저 바닥에 엎어진 늙은 드워프가 열쇠였기에.

다만 놈이 알지 못한 점은 천국과 지옥은 하나이며.

열쇠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

어째서 그들은 시온을 이루지 못했는가.

왜 그리 쓸쓸히 패망했는가.

퍼즐은 풀렸고.

열쇠는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그리고 자신이 열쇠임을 모르는 녀석들이 밖에 빼곡하니.

그야말로.

“최고로군.”

절호의 기회.

내가 곧 알렉세이를 옆구리에 끼곤.

철컥, 들어온 통로에 브레이커를 꽃아 돌려 공간을 잠궜다.

열쇠는 열기도 하는 것이지만 닫기도 하는 것.

다시 반대로 돌리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새로운 통로로 발을 들이밀었다.

“가자, 다른 열쇠들을 빚으러.”

[혼재된 운명 속 끝없이 튀기는 신비 - 염제심결 다섯 번째 심장 청염(靑炎)이 개벽의 때를 기다립니다]

[운명 조롱과 가학을 일삼는 악의가 모습을 숨기고 여린 운명들을 위협합니다]

벌써부터 심장들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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