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빛처럼 번개처럼
황태자 아르한이 치미는 청염과 싸우는 동안.
짙은 번개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마구 치솟았고.
얄미운 건국제의 얼굴을 부수기 위해 날린 마지막 일격이.
하늘을 깨부수는 철퇴가 되어 천둥소리를 내었다.
우르르릉, 정말 개벽이라도 하려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존재감을 뿜어냈고.
번쩍번쩍 먹구름 사이를 내달리는 번개 다발이 일견 신이라도 강림했나 싶을 정도.
수도를 비롯한 북부와 동북부 전역에 짙은 먹구름이 스멀스멀 몰려들었고.
곧.
굵직한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땅을 내리누르는 세찬 빗줄기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어깨가 축 늘어질 정도.
먹구름과 폭우가 내리는 어둑한 분위기 속.
“폐하! 폐하! 동북부로부터 도착한 급보입니다!”
강철성, 묵색의 알현실은 더욱 음침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전령을 맞이했다.
까만 복장을 차려입은 신하들이 고목처럼 막 달려온 전령을 굽어보았고.
그들 사이.
메마른 황좌에 앉은 황제는.
“무슨… 일이냐…….”
흐릿한 얼굴로 늘어져 있을 뿐.
눈동자는 빛을 잃고 허공을 헤매었고 축 처진 어깨가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세월을 한꺼번에 먹었는지 백색 탁한 눈과 주름진 얼굴이 황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 주는 증거.
황제의 쓸쓸한 목소리가 울렸으나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전령이 어찌해야 하나 당황하는 사이.
“폐하께서 피곤하시니 서신을 내놓고 가거라. 내가 읽고 전달해 드리겠다.”
허연 얼굴의 내시 하나가 감히 황제를 대신하여 말했고.
“안 됩니다. 반드시 상달되어야 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전령이 불길함을 느끼곤 고개를 저었으나.
“네놈!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느냐! 폐하께서 오랜 국정으로 지치셨거늘!”
“어허, 공작가의 전령이 미쳤나 보구나!”
신하들이 득달같이 그를 비난했다.
마치 내시를 감싸고 도는 듯한 태도.
전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공작가에선 위급 상황이라 판단했을 시 폐하께 직접 상소문을 올릴 권리가 있습니다!”
공작가가 지닌 당연한 권리를 주장해 보았지만.
까마귀 떼처럼 떠벌거리는 신하들 앞에선 무용지물.
저들이 제국의 대마법사인 공작을 앞에 두고도 저럴 용기가 날까.
귀를 막고 외쳐 대는 역겨운 꼬락서니에 전령이 치미는 헛구역질을 참을 때.
“그만, 그만들 하세요.”
내시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단번에 모두의 잡음을 끊어 냈고.
전령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지금 강철성의 알현실은 폐하가 아닌 저 내시가 통제하고 있다.
빌어먹을, 속에서 살기가 절절히 피어올랐으나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
“다시 말하죠. 여기서 서신을 주고 나가 기다리세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가던지. 할 말은 그것뿐이에요.”
“공작가에서 보낸 긴급 전령이오! 헌데 그저 돌아가라고? 말이 되는 소리인-.”
“감히이-!”
전령의 압박에 내시가 드높은 목소리로 분노를 표했다.
쨍하게 튀는 목소리, 허연 분칠로도 감출 수 없는 붉어진 얼굴, 덜덜 떨리는 어깨.
“감히이- 공작가의 위세로 폐하를 모시는 이를 겁박하는 거야-! 나가! 당장 나가!”
“겁박이라뇨? 폐하께 서신을 전달하러-.”
“뭐 하는 거야! 당장 이 무례한 자를 내쫓지 않고오-!”
내시의 발작에 대기하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곤 전령을 겨누었다.
기가 막혔다.
지금 겪는 일들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수도 강철성이 부패한 버러지들로 가득하단 소린 익히 들어왔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전령이 기사들을 쏘아보았지만 긍지를 잃은 자들의 얼굴엔 한 점 부끄러움 없었고.
대신들은 그저 그를 적의 어린 눈으로 노려볼 뿐.
그가 잠시 눈을 감고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공작을 떠올렸다.
그래,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결심을 끝낸 전령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당장의 굴욕쯤은 감내할 수 있다.
자신이 평생 섬겨 온 공작가를 위해서라면!
“무지하여 무례를 범하였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가령 자신이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상대가 고귀한 폐하가 아닌 내시 따위라 할지라도!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굴욕이라도 감내하리라.
그의 절절한 목소리가 어전을 울렸으나.
흥- 내시의 간드러진 콧소리만이 그의 충절을 비웃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핏발 선 눈으로 땅을 바라보다 못해.
쿵, 쿵, 쿵!
전령이 머리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서신을 맡길 테니 제발! 제발 공작가의 긴급한 청을 보아 주시길 청하옵나이다! 지금 동북부 앞에 타국의 병력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를 돌보소서!”
묵묵부답인 알현실 안, 전령의 머리 찧는 소리와 죄를 비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얼마나 머리를 부딪치고 죄송하다 읊조렸을까.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얼굴을 타고 뚝뚝 떨어질 즈음에야.
“좋다. 사죄의 정성을 보아 서신을 읽도록 하마. 서기관- 가서 서신을 받아오라.”
내시가 제 옹졸한 마음이 다 풀렸는지 서신을 읽어 보겠노라 하였고.
서기관이 그의 서신을 대신 받으며.
“태자 전하를 모시는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망치 마십시오.”
“…….”
그의 마음을 위로했다.
태자 전하를 모시는 이들이라니.
전령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
서기관이 겉으로는 냉정함을 가장하여 그의 서신을 빼앗아 내시에게 공손히 진상하였고.
“되었지? 이제 나가 보아라. 중요한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니.”
바로 축객령이 떨어졌다.
고개를 든 전령의 시야에 붉고 어둑한 알현실이 비쳤다.
창밖에는 먹구름과 내리치는 빗줄기, 코끝 뚝뚝 떨어지는 피가 유독 비렸다.
허연 분칠을 한 내시의 얼굴과 황제의 흐린 눈이 붉게 물들었다.
대체 제국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얼굴을 훔치는 그의 눈가에 맺힌 건 비단 피뿐만이 아니리라.
그렇게 쫓겨나듯 나온 알현실.
“흐흑-.”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공작가의 전령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자신이 겪은 굴욕은 괜찮았다.
다만 고향의 위기와 이를 해결해 주지 못할 만큼 썩어 버린 제국의 꼬락서니가 서글퍼서 울었다.
공작가를 섬기기 이전에 제국민이다.
어찌 이러한 꼴을 보고도 원통하지 않을까.
그가 섞여 흐르는 피와 눈물을 닦아 내며 비척비척 복도를 걷는 중에.
“저기- 혹여 공작성에서 오신 분입니까?”
순한 인상의 한 사내가 그를 불러 세웠다.
피와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렸지만 상대의 얼굴에 낀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강철성에 들어와 처음 느껴보는 동정.
그가 얼굴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린 상대가.
“태자 전하 직속 국정 연구 부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왜 여기에.”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방금 서기관이 언급했던 황태자를 섬기는 이들인가.
그런데 왜 알현실에서 국정을 논의하지 않고 여기 있단 말인가?
“그게 어느 날부터 들여보내 주질 않더군요.”
상대가 전령의 의문에 쓴웃음으로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의 부름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국정 연구소장, 부소장 직위를 맡은 것까진 좋았는데.
말도 안 되는 국정 처리를 몇 번 반대했다고 아예 쫓겨나 버렸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있지만은 않았다.
“여기, 이걸 가져가십시오.”
“이게 뭡니까?”
“전하께서 준비하신 지혜 보따리입니다.”
“지혜 보따리?”
전령이 의아한 얼굴로 그가 내민 서류를 훑었고.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북동부… 방어 계획 연구서?”
적혀있는 제목을 보자 침이 꿀떡 넘어갔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미리 준비해 놨단 말입니까.”
그의 말대로.
“동북부 국경 너머 중소국가들의 병력이 모여들고 있다는 걸 압니다. 공작성이 움직인 이후 비어 버린 동북부를 칠 계획이겠지요.”
그리고 제국의 상황을 알아서이기도 하고요.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황태자에 의해 건국 세력이 와해되고 공작성이 동북부 한복판에서 물러난 이후.
그 공백을 노린 듯 중소국가 연합 세력이 대규모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
창밖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가.
“전하께선 이런 상황을 예측하셨고 대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가는 길에 정보부와 특무대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이걸 가지고 공작성에 돌아가세요. 태자 전하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일말의 희망을 건넸다.
황태자가 남부로 떠나기 전 그들에게 준비하라 지시한 일 중 하나.
동북부의 변화와 이에 따른 연합 국가의 침략을 예상, 동북부가 취할 대처 방안과 향후 계획을 적어 놓은 국정 연구서.
비록 제국은 외면했을지 몰라도 황태자는 전부터 동북부의 전력 공백과 반란 세력이 사라진 자리를 밀고 들어올 국가들을 경계했던 것.
어찌 이럴 수가.
자신들도 생각지 못한 먼 미래를 전하께선 생각하고 계셨구나.
전령의 눈가에 이번엔 다른 의미로 물기가 차올랐다.
비가 내려서 그런가 왜 이리 오늘따라 눈물이 나는지.
그런 전령의 손에 공작가와 동북부를 구할 계획서뿐만 아니라 눈물과 피를 닦을 손수건을 꾹 쥐여 준 부소장이.
“살아서 또 봅시다. 반드시.”
미래를 기약했고.
“반드시.”
고개를 굳게 끄덕인 전령이 다급히 강철성 복도를 가로질렀다.
떠나는 전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 위로 번쩍거리는 명암이 짙게 맺혔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 * *
전령이 강철성을 빠져나와 향한 곳은 열차 플랫폼.
동북부로 향하는 열차 티켓을 급하게 끊고는 서류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기다리는 동안.
철컥, 철컥, 철컥.
무장한 병사들이 플랫폼으로 들이닥쳤고.
불안감이 플랫폼 전체로 퍼져 나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검은 제복을 입은 자들이 갑자기 병사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가시죠.”
덩달아 다른 이들이 전령을 이끌어 따로 마련된 열차에 탑승.
뿌우우-
열차가 출발했다.
* * *
“후우우- 그리되었나.”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 모두가 동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공작가 사령관의 귀에 들어갔다.
현재 동북부 끝자락 북부와 맞닿는 곳에 위치한 거대한 수정궁은 아직도 자리에 머물러 있는 상황.
공작과 공작성이 사라진 뒤.
심지어 그들을 위협하던 반제국 세력까지 사라진 뒤에.
동북부는 황태자의 명을 따라 각 요새와 요새를 잇는 장성을 세울 터를 잡기 시작.
순조로운 과정 중.
갑작스레 공작이 심마에 빠졌다.
이후 상황이 변했다.
기다렸다는 듯 연합 국가 병력이 동북부를 향해 스멀스멀 몰려왔고.
장성을 세우느라 많은 힘을 쏟아부은 동북부는 그들의 위험을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다.
모든 상황이 불리했다.
당장 전력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충원이 필요한 상황.
심지어 어설프게 터만 잡아놓은 장성을 이용하기엔 벅찼고.
가장 커다란 전력인 공작까지 모종의 이유로 활동하지 못함이 들킨 이상.
두려울 게 없다.
밖에 모인 연합 국가의 병력만 수만.
기사단만 스무 개에 달한다 했던가.
마도왕국에선 마탑 소속 고위 마법사들을, 신성 왕국은 사제들과 성기사단까지 보내었다.
어쩌면 동북부가 겪는 최악의 위기.
그런 와중 그가 전령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고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만 한다면 최소한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군!”
기존 방어선을 넓히느라 무너진 정보망을 특무대와 정보부의 것으로 대체하고, 기존 작전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아직 완공되지 않은 장성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방어 계획.
적을 앞둔 동북부가 보지 못했던, 전체적인 판을 읽고 세운 전략이 퍽 뛰어났다.
북부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한 보고가 있었으나 당장은 어쩔 수 없었기에.
그저 계획을 따라 움직였다.
한동안 동북부에 긴장 상태가 계속되었다.
서로를 향한 날이 점점 더 짙은 살기를 뿜어내는 나날.
연합 병력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때를 기다릴 뿐.
마침내 누군가에겐 기다리던, 누군가에겐 한없이 불운한 소식이 찾아왔다.
“사령관님! 수도, 수도에서-!”
달려오는 모습만 봐도 직감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아마 소수의 지원이거나 최악은 아예 지원이 없을 수도 있겠지.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음을 다잡았다.
군량이라도 지원해 주길.
그러나.
“동북부를 지원하는 이는 반란을 모의한 세력으로 규정하겠다는 전언입니다-!”
우르르릉-
요 며칠간 계속된 천둥과 겹쳐 들린 최악보다 더 최악의 소식.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동북부 임시 사령관이 눈을 깊이 감고는 터지려는 탄식을 억눌렀다.
아, 버려졌구나.
제국에서 우리를 버렸다.
순간 절망이 밀려왔다.
분노가 치밀었다.
번쩍번쩍 시야를 물들이는 번개에 머리가 아찔했다.
지원이 없는 것보다도 더욱 최악.
아예 제국에서 동북부를 떼어내 버리겠다는 뜻.
이리 떼에게 살을 던져 주듯 제국의 방벽이었던 동북부를 저 모여든 연합국 세력에게 던져 주겠단 소리가 아닌가!
전령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이 나라는, 오랜 영광을 누려온 제국은-.
“끝난 것인가.”
그의 쓸쓸한 목소리에 늘어선 기사들의 고개가 꺾였다.
그리고 이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뿌우우우우-
진군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들이 몰려온다.
“다들 일어나라. 아직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그래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공작가의 식솔들이 주변을 수습하곤 급히 요새 위로 올랐다.
저 멀리.
그들의 의지를 비웃듯 걸음을 내딛는 연합 국가의 병력들과.
아직 뼈대만 세워진 장성 뒤, 긴장감 어린 호흡을 뱉어 내는 동북부 병력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버려진 이들을 죽이러 오는가.
아직 진실을 모르는 젊은 사내들의 순진한 얼굴에 마음이 아려 왔다.
평생을 지키려 노력해 온 땅이건만.
이리 허무하게-.
“으와아아악-!”
거기까지 생각하던 현 공작 대리이자 임시 동북부 총사령관, 하베스 하르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우울한 생각은 여기까지.
이젠.
“전 병력 전투 준비!”
마지막 명예를 지킬 시간이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동북부 요새에서도 뿔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모두가 일전을 준비했다.
흥분으로 인해 가빠오는 호흡 속에서.
문득.
“주머니-.”
황태자가 제 직속 신하들을 통하여 건네 준, 연구서 안에 있던 작은 주머니를 떠올렸다.
마지막, 가장 위험한 순간에 열어보라 했던 그것.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인가.
아니면 정말 함락 직전에 열어 보아야 할까.
그가 속에 품어 놓은 마지막 지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길 잠깐.
어차피 죽기 직전에 풀어 보느니 지금 풀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맞다 결론짓고는.
품속에서 꺼낸 고급스러운 비단 주머니를 떨리는 손으로 열었다.
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어떤 놀라운 비책이-.
“어?”
그러나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상황을 뒤집을 만한 엄청난 전략 따위가 아니었다.
황금빛, 아름다운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 한 마리.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나비가 주머니를 벗어나 하늘로 날았다.
허무할 지경.
새까만 먹구름 사이, 살기가 무르익은 전장터 한복판.
머리를 짓누르듯 먹먹히 내리는 빗줄기 사이를.
황금빛 나비가 표홀히 가로질렀다.
흔들리는 몸짓이 혹여 세찬 비바람에 쓸려갈까 걱정되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모양새가 감격스러웠다.
무슨 뜻일까.
우리 또한 저리 나아가면 언젠가 도움이 있을 거라는 응원일까.
어느새 나비의 날갯짓이 전장터 한복판에 이르렀고.
아군뿐만 아니라 적들 또한 이를 발견.
다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황금빛에 시선이 빼앗긴 차.
갑자기.
먹구름 사이, 얇은 빛줄기 하나가 짓쳐 들었다.
정확히 나비를 비출 정도로만.
성벽에 선 자들과 성벽을 공략하려는 자들의 중앙.
살기가 사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공간에서.
한 줄기 햇빛을 반사하는 나비의 아름다운 날갯짓이 이어지길 잠시.
콰르르릉-!
몰아친 천둥 번개가 하늘을 화악 찢어발겼고.
커튼을 열 듯 활짝 벌어진 먹구름 사이로 눈을 찌르는 광휘가 쏟아졌다.
그리고 나비가 연약한 날개를 팔랑거리던 자리에.
---!
“이런 한창 전투 중일 때 부르라니까.”
왜 이리 일찍 불렀어?
황태자가 빛처럼 번개처럼 강림했다.
손에든 검과 망치가 뒤늦은 천둥이 되어 살벌한 울음을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