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붕괴 위기
마법은 논리와 비논리의 집합체.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일을 이루기 위해 엄정한 논리와 비약적인 비논리가 함께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순은 경지의 상승과 더불어 더욱 심화된다.
어쩌면 마법이란 환상을 현실로 불러오려는 치기 어린 도전을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하지만.
그렇기에 매혹적이었다.
그렇기에 아름다웠다.
지금껏 수많은 이가 마법이라는 미로에 갇혀 덧없이 생을 마감했건만.
재능 하나를 믿고 망망대해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 수많았다.
참으로 오랜 시간.
궁극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세월을 지샜다.
마탑, 아카데미, 수도자 등등.
서로의 지식을 나누길 선택한 이들이 모여 상아탑을 드높이 쌓았고.
최대한 많은 재능에게 다양한 관점을 보여 주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지독한 자들은 고독을 곱씹으며 홀로 망망대해를 누볐다.
각자가 각자의 길을 걸으며 만난 장애물을 타넘고 현상을 탐구해 나갔고.
와중에 많은 이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그토록 이루고 싶어 하던 자연이란 법칙 속으로 사라졌으나.
개중엔, 정말 드물게도.
마법이란 망망대해, 재능이란 돛단배와 탐구란 망원경 하나로 진리의 조각을 찾아낸 자들이 존재했다.
보통 세상은 그런 자들을 선각자 또는 대마법사라 칭했고.
제국엔, 이러한 대마법사를 대대로 배출해 내는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동북부 하르델 공작가.
마법 중에서도 수정 마법의 진리를 깨달아 이를 전승한다는 신비로운 가문.
소가주의 자격을 얻기 위해선 최소 6써클, 더 나아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려면 7써클 이상을 달성해야 한다는 극악의 조건.
그래서일까.
유독 하르델 가문의 가주들은 오랜 기간 가주 직위를 유지했다.
깨달은 자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다음 대의 가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 자체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현재 하르델 공작가, 제8대 가주.
사일러스 하르델.
가주 직을 맡은 지만 150년.
그의 자식들마저 늙어 흙으로 돌아갔고 심지어 손자들의 자식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섬길 정도의 오랜 시간.
그 지루한 시간 동안 사일러스는 하염없이 새로운 가주의 등장을 기다렸고.
더 나아가 자신이 새로운 경지에 오르길 고대했다.
남들에겐 너무나도 긴 세월.
그러나.
“덧없이 짧구나.”
그에겐 너무나도 짧은 시간.
그저 탐욕이 많아 영욕을 누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아직, 아직 찾아야 할 진리가 많건만.”
인간에게 허락된 삶은 마법이란 극의를 이루기엔 너무나 짧았다.
하여 많은 걸 잘라 냈다.
감정도, 욕심도, 풍족함도.
차가운 수정으로 이루어진 의자 위.
주린 배를 채울 식사 조금과 몸을 가릴 남루한 로브 하나만을 덮고선 지냈다.
깨달음이 오기를 계속하여 기다리며.
구도자(求道者)의 자세로.
자식들의 죽음에도 슬퍼한 적 없고, 황실에서 공작가의 헌신을 무시해도 분노한 적 없다.
그는 수정 같은 자.
투명하며 단단한 수정은 어떠한 풍파에도 영롱함을 지켜야 하는 법.
그렇게 세상의 소음을 끓고 지낸 지 오랜 시간.
“황태자께서는 아직 멀리 계시다던가.”
가주를 맡은 후, 수정궁의 권좌에 앉아 인간성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후 처음으로.
심장이 뛰었다.
황태자가 제시한 비원은 오랜 시간 스스로를 절제하며 억눌러 왔던 인간성을 떠오르게 할 정도.
공허했던 마음에 갑자기 뜨거운 열망이 차올라서일까.
“눈앞이 흐리구나. 이건 어긋난 심상인가, 깨달음의 시작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간의 종언인가.”
수정궁을 움직여 북부 산맥 끝자락에 도착한 직후부터 공작은 뜨거운 열병을 앓았다.
아무리 세상의 법칙을 뒤트는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노쇠한 육체에 깃든 병마를 쉬이 물리치지 못하였고.
벌써 몇 달을 자리에 누워 흐린 눈으로 오지 않을 깨달음과 멀리 떨어진 황태자를 찾아 대었다.
무엇을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가.
“모르겠구나. 모르겠어. 지금껏 내가 이루었던 것들은 헛된 망상이었나.”
공작이 주름 가득한 눈을 들어 방을 가득 채운 투명한 수정을 바라보았다.
비치는 늙은 얼굴에 가득 담긴 의문과 회한.
수정처럼 단단했던 가문의 비전과 마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탓이다.
“아니다, 아니야. 믿어야 한다. 지금껏 쌓아 온 전대 가주들의 업적을. 내가 흔들려선 안 되는 바. 나는 수정이다.”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그의 표정은 계속 흔들렸다.
그가 자리한 장소는 수정궁 중에서도 가장 깊은 수정 속.
가주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가문의 비원(悲願)을 보관해 놓은 곳.
그의 몸을 감싼 투명한 수정들이 마나를 머금고 끝없이 명멸했고.
그 주위.
“선조들이여, 위대한 마법사들이여, 대답하소서. 당신들의 깨달음은. 나에게 내려 준 의지는 모두 덧없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투명한 수정 속에 담겨 있는 또 다른 늙은 육신들이 침묵했다.
총 일곱.
그중 가장 높은 수정에 담겨 있는 자.
깎아놓은 조각처럼 완벽하고 투명하게 빛을 산란시키는 외형.
1대 가주 마드리드 하르델.
그리고 그를 비롯한 나머지 여섯 가주 모두가 수정 안에 잠들어 있다.
매번 대마법사를 배출하는 하르델 공작가의 비밀.
공작가의 가주들은 모두 마지막 숨결을 내뱉기 직전 수정 속에 몸을 누이어 영생에 가까운 영면을 누렸고.
가주에 적합한 재능을 지닌 이가 나타나면 수정궁 비원의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모든 깨달음을 낱낱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진전을 이은 제자이자 새로운 가주는.
새로운 걸음을 내딛기 위해 모든 생을 바쳐야만 한다.
이것이 공작 가문의 마법사들이 선택한 궁극을 향하는 항해 방법.
짧은 인생 동안 이루지 못한 발전을 후대에 맡기고 이를 다시 다음 후대에게 전하려는 마법사들의 위대한 지혜.
한데 왜일까.
그리 위대해 보였던 선조들이 저리 초라해 보임은.
앞에 선 후손의 칭얼거림을 들은 탓일까.
그들이 품은 거대한 마나가 명멸하기 시작.
그의 얼굴이 활짝 피는가 싶더니.
곧 금세 어두워졌다.
분명 이전 처음 가주직에 오를 때만 해도 선조들이 알려 준 지혜가 놀라웠다.
그의 경지를 몇 단계나 끌어올려 주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놀랍지 않습니다.”
그의 고백에 마나가 뚝 끊겼다.
다 커버린 아이가 그러하듯.
“더욱 놀라운 것을 보았고. 우리의 수정에 의심이 끼었습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젊은 적 놀라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늙은 육신엔 의문만이 자리했다.
지금 공작이 겪는 심마와 급격한 노화의 원인.
풀길 없는 답답함에 황태자를 간간이 찾았으나.
그는 그저 제국을 구하는 데 매진했다.
마치 공작을 잊은 것처럼.
동북부가 처한 위험을 들었으나.
무기력했다.
모든 의지를 잃어 마나도 몸도 일으키질 못했다.
굳건했던 깨달음이 꼬였고 마법을 쓰려 하면 심마가 심장을 흔들었다.
이런 상태로는 나서 보았자 약점을 들킬 뿐.
지금껏 돌보았던 동북부의 저력을 믿을 뿐.
그때 들려온 소식.
“황태자! 황태자 전하가 동북부 전선에 등장했다 합니다!”
수정궁의 모든 장소는 그의 감각 권역 안.
궁에 머무는 이들의 환호를 따라.
“전하! 전하께서 오셨다고?”
사일러스 공작이 늙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쩐 일일까,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수정 속에 누워 골골거리던 노인의 몸에 놀라운 힘이 깃듦은.
흐렸던 회백색 눈동자에 총명함이 돌아옴은.
그가 눈을 감아 의식을 퍼뜨리자.
수정궁 본래 공작이 앉아 있어야 할 권좌 위.
“공작 각하!”
실로 오랜만에 수정이 모여들어 공작의 형상을 취했다.
마침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던 가신들이 이를 보며 기꺼워했고.
“전하는! 전하는 어디에 계시다더냐! 전장터? 당장 가 보아야겠다.”
그가 가신들의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로 전장터를 향하려는 순간.
“황태자 전하 납시오-!”
너무나도 기다렸던 소리가 수정궁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 * *
하르델 공작성, 흔히 수정궁이라 불리는 움직이는 성.
며칠간 이어졌던 폭우 뒤.
막 갠 하늘 아래, 아직 마르지 않은 빗방울이 투명한 수정 위에 고여 내리쬐는 햇빛을 산란시키는 찬연한 풍경.
그것만큼 찬란한 은빛 동체가 오색구름을 뿜어내며 하늘 위를 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평소 수정궁이라는 흔하지 않은 지붕을 덮고 지낸 이들이라 할지라도.
“우와- 저건 대체 뭐야?”
“새로운 몬스터인가?”
“몬스터라니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몬스터라기보다는 신수 아니야?”
“드래곤 같은?”
“그렇지!”
입을 쩍 벌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슬부슬 빗방울을 머금은 유려한 은빛 몸체와 뒤에 흐드러지는 오색구름이 하늘에서 머물길 잠시.
“황태자 전하 납시오!”
안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다들 무슨 뜻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황태자 전하께서 납시었으니 고개를 조아리도록!”
다시금 비행선에서 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뜻을 이해한 자들이 무릎을 꿇기도 전.
“전하-!”
불쑥 솟아난 건 공작의 신형.
수정으로 형태를 빚은 공작이 햇볕을 반사해 내며 드디어 강림할 태자 전하를 기다렸고.
그의 반짝이는 눈과 활짝 핀 표정이 기쁨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그러나 드높은 비행선 안에선.
“이런, 불쌍하기도 하지.”
“아 저렇게 기쁜 표정이라뇨.”
“음- 제 처지도 모르고 기뻐하다니 서글프군.”
오히려 동정 여론이 일었다.
솔도 블러디도 살라스마저.
황태자가 등장했단 의미를 모르는 저 순진한 이들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오히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황태자가 왔다고 기뻐하는 꼴이라니.
미련한 자들, 불쌍한 자들.
비행선에 탄 모두가 공작가의 무운을 비는 동안.
특히.
“공작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정녕, 정녕 아무것도 모르세요. 어찌 저리 순진하신지.”
발자크 백작의 절절한 한탄이 일품.
“그 기쁨 가득한 얼굴이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겠습니다. 아니, 이 아름다운 수정궁이 멀쩡할지도 장담 못 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백작은 공작가가 앞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야말로 황태자를 가장 잘 아는 신하다운 면모.
그들의 행태를 보던.
“이것들이 미쳤나.”
황태자가 입술을 비죽 끌어 올리며 주위를 쓸어보았고.
그제야.
“히, 히익! 전하! 언제 오셨어요? 방금 뛰어내리신다고 나가셨잖아요.”
“어, 전하. 그게 아니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번에도.”
“블러디! 치사해요!”
“와 저 반쪽 엘프 비열한 거 봐. 내가 말한 제 처지라는 건 동북부를 침범하려던 연합 놈들을 말한 거다. 못된 놈들. 고얀 놈들! 아주 하나도 남김없이 싹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맞아요 살라스 전하! 두말하면 잔소리죠! 우리 위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등장하셨으니 이제 걱정 없습니다!”
비열한 간신배들처럼 손을 부비는 모습이라니.
평소 광기에 젖은 황태자마저 고개를 저을 모습들.
대체 어떤 괴물들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는가.
그가 고민해 볼 문제.
그 와중에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수정궁과 맞닿은 산맥의 끝자락을 바라보던 백작이.
“얼마나 부술 예정이십니까.”
발칙한 물음을 던졌고.
이에 황태자는 분노하는 대신.
“자네는 날 너무 잘 알아.”
광기 가득, 입술을 쭉 찢어 올렸다.
진홍색 눈동자가 번쩍이며 광망을 뿜어내었고.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이건만 깨끗한 백금발이 너울거리며 시선을 빼앗았다.
황태자는 지금 즐겁다.
왜냐면.
“완벽을 가장한 거짓을 깨는 건 언제나 희열을 느끼게 하지.”
공작가의 풍경이 정말 먹음직스러웠기에.
물음에 광기로 답한 황태자가 진생철퇴를 챙겨 나가려니.
“너무 많이 부수진 마십시오. 나이가 많아 심장에 무리가 가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백작이 아버지의 친우를 끝까지 걱정하였고.
“뭐, 고려해 보지.”
황태자가 장담은 하지 않은 채 비행선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니까 비행선에 있는 이들에겐 익숙한 사건.
아니지, 이제 사건이라고 하기도 뭣한 일상에 가까운 일이라지만.
“어어? 어어어! 사람! 사람이 떨어진다!”
“아니, 황태자 전하잖아! 황태자 전하께서 떨어지신다!”
동북부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등장.
한 손엔 브레이커 한 손엔 진생철퇴를 든 황태자가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 살 수 없는 높이.
공작의 마법을 믿고 저러는 것인가 싶었으나.
“막지 마라, 공작!”
외치는 목소리로 보아 그것도 아닌 듯했다.
그럼 대체?
답을 확인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답을 황태자는 보여 주었다.
그가 오른손에 든 기괴한 검을 뿌리자.
흩어진 검이 공작성 곳곳에 박혀 들어갔고.
곧,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귓가를 울렸다.
성에 자물쇠가 있었던가? 수정궁은 마법으로 이루어진 성.
자물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한데 어디서?
의문을 이어가기도 전.
쿠욱.
공작의 몸을 대신하여 자리한 수정의 가슴팍.
작은 파편 하나가 박혀 들었고.
철컥.
옆으로 돌며 소리의 근원을 알려 주었다.
비록 형상화한 것뿐이라지만 공작의 가슴팍을 파고든 검 조각이 내는 소리가 스산했다.
무엇을 여는 소리인가.
그리고 왜.
“어째서- 대체 어떻게-.”
대마법사라는 공작 각하께서는 그저 창백하게 물든 채 황태자가 벌이는 일을 보고만 있단 말인가.
그의 마법이라면 떨어지는 황태자를 막는 거로도 모자가 수정궁 곳곳에 꽂힌 저 불길한 검의 파편들을 걷어 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수정으로 이루어진 공작은 몸을 바르르 떨며 자리에 서 있을 뿐.
그리고 마침내.
“흐아압-!”
거센 기합과 함께 땅에 강림한 황태자가 망치로 힘껏.
공작의 분신을 내리쳤다.
콰장창!
거대한 망치 아래, 대마법사가 이룩해낸 마법의 파편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우그러지듯 무너지는 수정 조각들이 날카롭게 튀어 올랐고.
난반사되는 빛결 너머, 황태자의 미소는 더욱 날카롭고 조각조각 나 있었다.
참으로 쉽게 공작을 으깬 그의 망치가 공작성 바닥에 닿는 순간.
귀로 들을 수 없는, 뇌에 직접 와닿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
성만 한 유리가 깨진다면 이러한 소리가 날까.
그리고 실제로.
초겨울, 얇은 살얼음에 금이 가듯.
수정궁 전체에 자잘한 실금이 어렸다.
황태자의 망치는 대마법사의 마법뿐 아니라.
대대로 쌓아 온 가문의 마법마저 부수고 있다!
수정궁에 머무르는 자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린 순간.
부스스 피어오르는 파편 사이에서.
“수정 거북아, 수정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부숴 버리리.
황태자의 불길한 흥얼거림이 울렸고.
새까만 그림자가 막 무너지려던 수정궁을 뒤덮었다.
공작가가 제국에 자리 잡은 이후.
처음으로 맞는 붕괴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