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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55화 (155/200)

155화 분노하고, 슬퍼하며, 약동하는

마법사는 상상이란 하늘을 바라보며, 이성이란 땅에 발을 붙이고, 직관이란 몸으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이.

하여 황태자의 질문에 오랜 직관과 이성이 민감하게 반응했고.

믿기 어려운 진실의 끝자락을 도출해 냈다.

지금껏 살아 있다 믿었던 선조들.

숨의 마지막 자락을 수정 속에 보관해 두었다 믿었는데.

물론 확인해 봐야겠으나.

오랜 세월 갈고닦아 온 직감이 속삭였다.

황태자의 말이 옳다고.

이미 선조들의 육신은 썩어 사라졌노라고.

하지만.

“선조를 부숴. 그리하면 알 수 있을 거야.”

패륜을 저지르는 문제는 전혀 달랐다.

이성으로 납득해도 전통과 도리가 턱턱 손길을 막았다.

공작이 자신의 깡마른 손과 수정을 번갈아 보는 사이.

“망설이고 있나? 패륜이라 생각하는 건가?”

황태자가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이며 물어왔다.

그의 눈엔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투명하게 공작을 바라볼 뿐.

수정 같은, 피를 머금은 루비 같은 눈동자가 섬찟함은 왜일까.

아까 보였던 뜨거운 광기보다도 지금의 무감정이 더욱 기괴했다.

찬찬히 공작을 살피던 황태자가.

“자네 생각보다 감정이 풍부한 자였군? 답을 앞두고 고민하다니.”

의외의 말을 남겼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자네가 추구해 온 길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분명 날 처음 보았을 때는 심장조차 뛰지 않는 수정 그 자체였지 않았나. 사실 그 형상은 무감정을 가장한 의태이고-.”

지금 수정 안에서 홀로 떨고 있는 늙고 나약한 모습이 진짜 아닌가?

차가운 조롱 한마디가 노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말은 차가웠으나 어째서인지.

노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손, 발 끝단까지 피가 돌 듯 뜨뜻한 기운이 쭈욱 퍼져 나갔다.

머리에 치미는 뜨거운 감각.

잠시 찌르르 울리는 감정에 눈을 굴리던 공작이.

몸을 침범한 것이 분노임을 알아챘다.

이러한 기분을 느껴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수정 마법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감정을 깎아 내고 또 깎아 냈건만.

황태자가 하는 말과 행동 앞에선 오랜 수양이 무색했다.

공작이 얼굴까지 치민 열기를 느끼며.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분노와 불만을 뱉어 냈다.

죽음을 앞두고도 격해지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벌컥 화를 냈다.

“시간은 주셔야죠! 생각할 시간이라도요!”

전에 없던 격한 목소리.

밖에 대기 중이던 가신들이 숨을 삼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말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수정 마법의 단점과 여기 보관된 가주들의 실체를 설명해 주기만 하셨다면 깊이 생각하고 실험해 보았을 겝니다. 그리고 타당하다면 따랐겠지요! 그런데 이리 무법자처럼 날아와 일단 강요부터 하시면 어쩝니까! 그래도 제국을 이끄실 분이 아니십니까!”

원래 평생 화 안 내던 사람이 한번 화내면 멈출 줄 모르는 법이다.

화내는 자신이 어색하고 당장 몸을 잠식하는 감정을 주체할 줄 몰라서.

지금 공작이 그러했다.

평소라면 차가운 이성으로 상황을 조율하려 했겠으나.

황태자의 방식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었으며 심지어 가문의 금기를 범하라 유혹했다.

그에 대한 반발심과 죄책감들이 뒤섞여 터져 나오는 중.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까지 합니까. 수정궁을 박살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문의 오랜 비원까지 조롱해 가면서요. 하여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성을 얻는다고 해도 제 비원 하나를 위해 이 모든 걸 부수면 무엇이 남는단 말입니까!”

다다닥 쏘아붙이는 말이 이어졌다.

“하여 전하가 얻는 것은요? 제 분노와 미움? 아니면 전통을 잃은 공작가? 그것도 아니면 말 잘 듣는 개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대체 뭘 보시고자 여기까지 이리 패악스런 발걸음을 했단 말이에요!”

공작이 제 할 말을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리 화를 잘 내면서 왜 지금껏 침묵했어.”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지금껏 동북부에 숨어 어떤 수모에도 답하지 않아 놓고선, 심지어 그대가 이끄는 요새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잘만 숨어 놓고. 이제 부당하다고 화를 내는 모습이 놀랍구만.”

“…….”

“이렇게 화를 잘 내면 좀 미리 화 좀 내지 그랬어. 북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렇게 따져서 군사들 좀 보내지 그랬나. 제국 수도가 썩어 문드러지는 동안 좀 화를 내보지 그랬어. 그땐 침묵하다 이리 화를 내니 어때. 좀 시원한가?”

“…기다리셨습니까.”

제가 화내기를.

* * *

공작의 질문에 이번엔 내가 침묵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간절히 기다렸다.

같이 화내 줄 조력자를.

저 빌어먹게 칙칙한 강철성에 혼자 앉아 끝까지 버텼다.

기울어 가는 제국을 붙잡고선.

사실 어쩌면 공작에겐 죄가 없을지 모른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켰을 뿐이니까.

내가 폭군을 대신하여 황좌에 올랐을 때는 이미 반역도로서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럼에도 그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대단한 것들을 지니고 있으면서, 강한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어째서 기울어 가는 제국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는가.

그가 조금이라도 분노하고, 조금이라도 간섭하고, 조금이라도 감정을 표출하고, 조금이라도 섭섭함을 드러내어 이끌었더라면!

제국이 그렇게 지리멸렬,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끝까지 숨어 제 감정을 감춘 채 고고한 척 숨은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북부를 구하고, 서부를 구하고, 남부를 구하고 심지어 드워프들까지 구할 동안.

그는 그저 거북이처럼 수정에 몸을 누이곤 모든 걸 관망할 뿐.

그래서 심술을 부렸다.

괴롭혔다.

정말 공작이 세간의 말처럼 수정처럼 그저 투명한지.

감정도 없고, 욕망도 없으며 세상에 초탈한 깨끗한 수정과도 같은지.

만일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모욕하고 선조를 죽이라 했는데도 눈빛에 변화가 없었다면.

그날 북부 산맥에서 보았던 맥박은 거짓.

그저 자신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 날 이용하려는 수작을 부렸다 판단.

수정궁을 무너뜨리고 공작을 제국에서 잘라 내려 했다.

그래, 이기적이고 잔혹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작가를 반역도로 몰아 몰락시켰던 폭군과 같은 판단일지도.

하지만 분명한 건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책임이 없는 게 아니다.

“공작, 투명한 수정은 보기엔 아름답지만 어떠한 실용도 없어. 그리고 난 소용 없는 것들을 거두지 않아.”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공작의 표정을 마주하며 담담히 답했다.

방금까지 내가 분노했고 공작이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젠 그 반대.

갈라진 수정 틈새로 비치는 무표정.

지금 그를 판단하고 있는 거다.

하르델 공작가, 중립만을 지키며 활동하지 않은 거북이 같은 자들을.

너희들은 제국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느냐고.

그 비겁한 깨달음이라는 껍데기 속에서 나와 고개를 내밀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느냐고.

제국의 멸망엔 많은 책임자가 존재했고, 방관자 또한 자유롭지 않았다.

공작은 끝까지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난 투명하고 깨끗하기만 한 무엇도 하지 않는 장식품보다, 거칠게 소리치고 뜨겁게 타오르는 살아 있는 생명이 필요해.”

새로운 생명으로서 제국에 자리할 것인가.

방금까지 이어졌던 파괴와 구태의연하게 남은 전통을 부수라 한 것은 선택을 위함이었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난 결말을 보았으니까.

반역자로 몰려 멸문당한 참혹했던 말로.

만일 내가 가짜 황제가 되었던 때, 공작가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

공작가가 멸문당하는 와중에도 미래를 위해 해 놓은 마지막 안배.

여기에 희망을 걸었다.

그에게 제국을 향한 일말의 충성심이 남아 있을 거라고.

아니면 분노라도.

“분노하고, 슬퍼하며, 약동하는 감정이. 그게 자네가 그리 꿈꾸는 공작가의 새로운 비원이자 장성의 비밀이라면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 감정 뒤, 요동치는 마나를 느껴 봐. 그건 심마인가 아니면 새로운 깨달음의 단초인가.”

마지막 말에 공작의 눈에 서린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제대로 설명하면 납득했을 거라고? 그동안, 그동안 북부의 검이 죽었고 서부엔 검은 비가 내렸으며 남부에선 고대 악마와 더불어 강대한 악마들이 출현했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10년? 20년? 그 정도 기다리면 모든 실험이 끝나고 움직일 마음이 들겠나?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야 움직일 참인가?”

분노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건 공허와 부끄러움.

그 또한 알고 있는 거다.

결심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지금 몰아치는 운명과 변하는 정세는 폭풍처럼 거칠고 토끼보다 빨라 거북이의 걸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거북이가 이기는 건 결국 동화 속 이야기일 뿐.

세차고 거센 세상의 격류는 결국 거북이를 등껍질 채로 휩쓸어 버릴 것이고.

마법이란 환상을 다뤄 온 대마법사 가문은 투명한 환상에 파묻혀 잊히리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방금도 동북부를 호시탐탐 노리던 적들의 목을 베어 내고 온 참이지. 공작. 자네는 버림받았어. 동북부를 돕는 자는 반역 세력으로 규정한다는 성지가 내려왔거든.”

“누구도 공작가를 품은 적 없습니다.”

“외면했겠지. 무감정이란 이유로.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동북부를 품지 않았다 말할 수 있나.”

“…전하께선 품으셨군요. 반역 세력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자 공작이 쓰라린 미소를 짓고는.

“화를 한바탕 내고 나니 머리가 좀 개운해졌어요.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랫동안 이 투명한 곳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말이죠.”

“때로 마법사들은 너무 똑똑해서 멍청한 짓을 할 때가 있거든.”

아하하하-!

어쩐 일로 공작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어색한 표정에 갑자기 공기를 뿜어내느라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인 그가.

“좋습니다. 공작가를 품어 주신 분에게 저 또한 보답해야겠지요.”

벌떡 일어나서는.

평온히 잠들어 있는 일곱 수정 기둥 앞에 섰다.

“잠시 망치는 못 빌리겠고 그 검이라도 빌려주시겠습니까.”

“들 수 있겠어? 숟가락 들 힘도 없어 보이는데.”

“해봐야죠.”

그리 답하는 노인에게 브레이커를 넘겨주었고.

역시나.

“끄으응, 무겁군요.”

깡마른 몸으로 브레이커를 휘두르기는 커녕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게 다였다.

그러나 간섭하지 않았다.

운명은 스스로 일궈 내야 하는 법.

길을 알려 주었으니 방법은 알아 찾아야지.

두고 보고 있으려니.

공작이 마법사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마나를 일으켰고.

방금까지 바들바들 떨리던 팔뚝에 불쑥 푸른 힘줄이 불거지더니.

콰앙-!

시원스레 수정 기둥 중 하나를 때려 부쉈다.

이미 금이 가득 가 있던 덩어리가 쉽게도 허물어졌고.

원래라면 처참하게 널브러졌어야 할 시체가 자리에 둥둥 떠 머물렀다.

다음도, 그다음도.

부수는 자리마다 피어난 건 시체 냄새가 아닌.

응축된 마나의 소음.

실제로 전대 가주들이 수정 속에 남긴 건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가 아니라 그들이 품고 있던 정결한 마나와 강한 의념의 집합체.

겉을 감싸고 있던 수정이 사라진 지금에도 형체를 잃지 않을 정도.

이 정도라면 거의.

“신비에 가까운 수준이로군.”

정말 그들이 그리 원하던 신비에 가까운 상태.

공작이 투욱 브레이커를 든 팔을 늘어뜨리며.

“이것이었구나!”

감탄한 순간.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던 일곱 신비가 번쩍 눈을 떴다.

[잠든 신비들이 깨어났습니다. 신비에 서린 강렬한 의념과 마나가 할 일을 묻습니다]

[장소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브레이커의 운명 열쇠로 열렸던 이음쇠들이 다시 복구됩니다. 충격으로 갈라졌던 수정궁에 신비가 어리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 * *

좁다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마나와 그들의 의념.

공작이 선조들의 지혜와 마법을 받아들이며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보다 앞서 공작가를 이끌어 온 이들이 남긴 유산이 답답한 골방을 넘어 수정궁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브레이커로 열어젖혔던 이음새들이 맞춰지는 감각.

수정궁이 온전히 회복되는 중.

다만 갈라졌던 상처들은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그림자로 덮여 있는 수정궁 내부에서도 이를 느끼곤.

“후우 그래도 이야기가 잘 끝났나 보네요.”

“그러게요.”

황태자를 따르는 이들이 더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느끼곤 안심했다.

수정궁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화해의 증거.

이대로 잠시간은 평화를 즐겨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할 때.

“저기 오고 있군요.”

“그러게 말이다.”

바이올렛의 말에 백작이 동의하며 생각보다 가깝게 다가온 북부 산맥의 끝자락을 바라보았고.

수정궁에 지내던 이들이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산맥을 타고 몰려오는 것은 바로.

“전하! 신 안드레 가고 있나이다!”

백색 팔을 번쩍 치켜든 안드레와.

“기사님! 같이 가요!”

“이봐, 다들 달려! 이러다 잡히겠어!”

몰려오는 드워프들.

그런데.

달려오는 폼과 소리가 드워프라고 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이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거인-?”

대략 5m는 넘어 보이는 덩치.

그들이 어깨에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달리는 모습이 생경했다.

그리고 다급히 달리는 뒤꿈치를 따라 몰려오는.

“철이로군.”

철의 파도.

눈사태와 같이 몰려오는 광경.

분명 거칠고 험하게 철사태가 다가오고 있으나 땅은 고요했으며 자리 잡은 모양새가 정갈했다.

시온, 드워프들의 천국 시온이 산맥 전체를 지나 드디어 끝자락에 이르는 중.

들풀같이 피어난 철갑이 산맥 끝자락을 덮고 마침내 토옥, 수정궁과 몸을 맞닿았고.

겉을 감싼 그림자를 타고 수정궁마저 덮어 버렸다.

안에서 이 과정을 보고 느낀 공작이.

“이건 대체 뭡니까?”

묻자.

황태자가.

“뭐긴 뭐야. 장성을 만들기 위해 부른 자들이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답하고는.

“장성을 공작 혼자 지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그 깡마른 몸으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최고의 장인들을 초대했지. 겸사겸사 끝내주는 재료들도 구해 오고 말이야.”

대륙에서 제일 단단한 장성을 만들어 보자고.

장담하는 얼굴에 열의와 광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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