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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56화 (156/200)

156화 표명

황태자가 동북부 전선으로 향한 이후.

몇몇 이는 드워프들과 함께 끝자락 산맥에 남았다.

대표적으로 안드레와 알프레드 그리고 청익 기사단.

동북부 전선에 몰려든 전운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북부 병력 반절 이상이 이미 도착했단 소식.

나머지 북부 병력을 이끌어 산맥의 방어를 단단히 할 것.

또 드워프들이 산맥에 자리 잡아 가는 시온을 안정화하고 새로운 거주지를 확립하는 동안, 그들과 함께하라는 황태자의 명령.

백작 또한 남아 산맥의 안정화를 돕겠다 했으나.

“제가 없는 자리를 부탁드립니다.”

“백작이 없으면 공작이 많이 힘들 거 같은데. 거기다 북부와 동북부의 연합이기도 하니까 자리에 수장이 있어야지.”

알프레드의 부탁과 살라스의 권유에 비행선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는 시온을 산맥에 정착시키는 데 힘썼다.

역시나 산맥 너머 몬스터들은 산맥에 오를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그때마다.

“청익 준비!”

청익과 안드레가 북방의 병사들과 함께 앞을 가로막았다.

황태자와 백작이 없는 자리.

가장 활약을 하는 이는 바로.

“하압!”

안드레.

치열한 방어선의 첨단, 처음 마주하는 험악한 몬스터들을 맞이하여 가장 용맹하게 싸우는 이.

팔이 여섯, 온몸에 비늘을 두른 괴물이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고.

이에 맞서 안드레가 검을 뻗었다.

쏟아지는 공격 사이로 몸을 놀리며 순백의 팔을 휘두른다.

검이 아닌 깃털을 휘두르듯 부드러운 곡선들이 닿는 곳마다 피어나는 거친 불꽃과 피.

오러를 두른 검에도 갈라지지 않던 비늘이 안드레가 품은 날카로움에 베었다.

벌써 그린 검의 궤적만 수십 번.

그러나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

마침내.

흐르는 곡선으로 적을 잠식해 나가던 안드레가 이를 한데 모아 단번에 쏘아 내자.

적의 가슴팍에 마름모 모양의 날카로운 구멍이 뚫렸고.

피를 게워 내며 쓰러졌다.

어찌 용기가 나지 않겠는가.

그를 따라 전투를 벌이던 청익의 사기가 크게 올랐고.

그들이 안드레의 등을 따라 산맥 봉우리 하나를 가득 메우며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밀어붙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청익의 막내였던 그가.

평민, 그중에서도 고아 출신이라 무시 받았던 그가 이제는.

“건너 절벽에 적이 몰려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알겠다. 지원은?”

“혼자면 충분합니다.”

“고맙다.”

청익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인재가 되었다.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던 도중, 전투를 틈타 다른 봉우리를 넘으려는 무리를 발견한 안드레가 홀로 싸우겠다는 말에도.

청익 기사단 단장은 오히려 그의 용기와 헌신을 칭찬할 뿐.

지난 싸움을 지켜보았고 그가 이룬 성취가 얼마나 드높은지 알고 있다.

소드 마스터, 검에 극의에 이른 자.

하나 안드레가 품은 힘은 저런 단순한 단어 하나로 모두 설명할 수 없으니.

마침 그가 선 장소는 누군가의 부상을 걱정할 필요 없는 절벽 앞.

좋은 전장터다.

“스으으읍!”

숨을 깊이 들이쉬는 그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어렸다.

그가 모시는 전하와 비슷한 미소.

함께하면 닮는다 했던가.

전하에게 하사받은 순백색의 오른팔에서부터 거친 바람이 몰아쳤고.

팔을 뻗어 낸 순간.

폭풍이 적을 휩쓸었다.

근래 그에게 붙은 별명, 폭풍의 기사.

지금 절벽에 몰아치는 건 거친 바람과 날카로운 비.

곡선은 폭풍이 되어 적을 베어 냈고 직선은 빗줄기가 되어 적을 꿰뚫었다.

폭풍이 거칠어지면 거칠어질수록 그의 오른팔이 더욱 하얗게 타올랐다.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길 퍽 오래.

그의 팔이 달아오른 쇠처럼 새하얀 증기를 뿜어내는 동안.

절벽 위로 불쑥.

크워어어어.

몬스터 무리의 대장이자 머리통의 크기만 수 미터, 아래 절벽을 붙잡고 있는 몸통만 절벽의 4분의 1에 달하는 괴물이 등장했다.

“안드레! 기다려라! 함께 상대하겠다!”

상황을 파악한 청익 기사단이 분분히 그쪽으로 향하려 했으나.

어느새 몰려든 몬스터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은 상황.

하나.

“오히려 좋아.”

안드레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산맥 깊은 곳, 전하의 옆에 서서 보았다.

앞에 서는 자가 얼마나 많은 압박을 받는지.

악마들의 무수한 눈동자와 악의를 마주한 순간, 자신도 무릎이 풀릴 뻔하지 않았던가.

하여 결심했다.

더욱 강해지자, 굳건하여서 전하의 옆을 받치자고.

오히려 이런 위기는 한계를 넘을 기회.

안드레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오른팔을 갈무리하며 더욱 굳세게 검을 쥐었고.

그런 그를 마주한 이름조차 없는 괴물이 쩌억,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얼굴에 달린 다섯 눈동자와 비죽비죽 솟아난 이빨 사이에 낀 더러운 고깃덩어리들.

놈이 안드레를 보며 포효하는 순간.

새하얗게 달아오른 안드레의 팔뚝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고.

핏줄이 도드라지듯 푸른 전류들이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주위를 퍼렇게 물들이며 일어난 작은 뇌전들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팔을 넘어 전신에 어렸다.

그렇게 힘을 모으는 동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괴물이 안드레를 잡아채려 거대한 손을 뻗었고.

드넓은 손바닥 한가운데를 향하여.

폭풍검, 전뢰식 일검집중.

콰르르릉!

지난 시간 지겹게 보았던 뇌전 한 줄기가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몰아치는 폭풍을 찢으며 등장한 뇌전이 뿜어낸 새파란 광망에 기사들의 시야가 잠시 까맣게 물들었고.

이윽고 드러난 풍경은.

“정말 괴물이 다되었군.”

휑하니 뚫린 손바닥, 사라진 머리통, 피어나는 연기와 살 타는 냄새.

안드레의 일 검으로 이루어 낸 신기.

곧 땅바닥에 내려선 그가 아직도 푸른 전뇌를 머금은 오른팔을 살폈다.

황태자가 만들어 주었던 형태와는 다른 모양새.

손가락의 형태가 완벽했고 은은하게 새겨진 문자들이 신비함을 더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이봐! 새로운 팔은 어때!”

멀리서 지켜보던 장인들이 환호하며 안드레의 상태를 물었고.

“죽여줍니다! 최고예요!”

그들이 개량해 준 새로운 팔에 안드레가 만족을 표하며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려 승리를 만끽하는 순간.

“이런 멍청한 놈아! 팔 들지 말라 그랬잖아!”

“아-.”

콰르릉!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 한 줄기가 그를 때렸다.

시커멓게 그을려 콜록거리는 안드레를 보며 한바탕 웃던 드워프들이.

“자! 가자고! 전하께서 기다리는 곳으로!”

저들의 공간을 풀어헤치기 시작.

점점 거대해지는 몸을 보며 서로 감탄했다.

이제 산맥 안, 왜곡된 공간에서 지내지 않으니 겉을 감싼 공간을 반드시 유지할 필요가 없다.

어느덧 훌쩍 키가 커 버린 드워프들이 비틀비틀 변한 눈높이에 적응하는 동안.

“시온을 확장해라! 출력을 높이고 퍼지는 철에 올라타!”

드워프들이 넓어진 품에 다른 이들을 안아 들었고 길어진 다리로 퍼지는 시온 위에 성큼성큼 올라탔다.

곧 몬스터들의 시체를 감싸며 철로 이루어진 들풀이 피어났고.

증기를 뿜어내며 헐벗은 산맥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드워프들의 천국이 향하는 곳은 바로 저 멀리 보이는 동북부 수정궁.

거대해진 알렉세이 어깨에 올라탄.

“흐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전하께서 무언가를 이루신 모양입니다.”

“역시 가만히 우릴 기다릴 인간이 아니지!”

알프레드의 한쪽 눈엔 안대 대신 새까만 눈이 자리 잡은 모습.

눈동자, 흰자위의 구분 없이 까만색 일색인 바탕에 휘도는 알 수 없는 글자들.

바로 드워프들의 새로운 기술로 빚은 알프레드의 눈.

글자들이 끝없이 변화하며 그에게 여러 정보를 알려 주었고.

멀리 떨어진 동북부 성에 일어난 일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전하께선 준비가 끝났습니다. 공작을 설득하신 모양입니다.”

검게 둘러싸인 수정궁 내부 요동치는 마나와 의념들.

마침 때가 이르렀다는 소식.

“기술 좋은 난쟁이들과 고대의 천국을 이끌어 오도록. 때가 되면 이를 이용하여 장성을 지을 것이다.”

황태자가 남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지난 시간 알프에드와 안드레, 청익은 산맥에 숨어든 몬스터들을 토벌하며 영역을 넓혀 왔고.

와중 새롭게 개량한 드워프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안드레의 팔과 알프레드의 눈을 제작해 주었다.

“우리 차례는 언제 온다 그랬지?”

“동북부 도착한 이후 준다 했으니까. 조금 기다려야겠지.”

“이거 기대되는걸.”

청익 또한 드워프들에게 약속받은 물건을 기다리는 중.

그들의 전력 상승도 기쁜 일이나 가장 중요한 점은.

“좋아, 다들 계획은 잘 알고 있지?”

바로 수정궁과 시온을 뒤섞어 장성을 세우는 일.

북부와 동북부를 이어 거대한 구획을 나눌 생각.

이에 필요한 재료는 시온과 수정.

그리고 드워프들의 새로운 기술.

이내 시온이 그림자에 감싸인 수정궁을 휘감은 뒤.

“전하!”

마침 황태자와 공작이 그들을 맞이했다.

공작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위험해 보였으나.

황태자는 부축해 주지 않았다.

“공작 각하. 어찌 나오셨습니까.”

공작을 섬기는 이들이 황태자에게 예를 표한 뒤 비틀거리는 주군을 부축하려 했으나.

“건들지 마라. 중요한 순간이니.”

황태자가 그들을 제지했고.

공작은 수정궁을 감싼 철과 그림자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끝없이 중얼거리는 중.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도 같았고 누군가에게 따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이봐 나도 종종 저랬나?”

황태자의 물음에.

“전하요? 전하는 저러신 적은 없으셔요. 음- 뭐랄까. 훨씬 더-.”

“미쳤다고?”

“맞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가로등, 아주 요즘 물이 올랐구나? 진짜 돌아 버린 게냐?”

“죄, 죄송합니다!”

“수정궁 열 바퀴 돈다 실시. 돌면서 그림자 보강도 겸하도록.”

무심코 답한 솔이 비척비척 수정궁을 뛰어다니는 사이.

지금껏 중얼거리던 공작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으으음- 그런 것이었군요. 알겠습니다. 이제 이해했습니다.”

비척거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모든 건 준비되었고, 이제 이루리라.”

그가 강대한 마력을 일으키자 이에 화답하듯 수정궁 깊은 곳에서부터 마나가 해일처럼 일어났다.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마나가 그림자와 철갑피를 뚫으며 솟아나는 광경에.

“어서! 다들 준비!”

황태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드워프들이 터지려는 시온을 조여 모양새를 이루니.

공작이 손을 들어 길게 산맥의 끝자락에서부터 저 멀리까지 손을 긋자.

수정궁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그의 손끝을 따라 내달렸다.

덩달아 철과 그림자가 거칠게 다져 놓은 땅 위를 내달리는 풍경.

곧.

“가자, 선조들이 준비해 놓은 위대한 일을 이룩할 때다.”

공작이 마력광이 줄줄 흐르는 새파란 눈을 들어 선언하자.

수정궁이 몸을 떨며 일어났다.

움직이는 성채가 빠르게 동북부 요새 사이를 가로질렀고.

공작이 마나를 밟고 공중에 떠올라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리마다 장성이 자리했다.

“안정화 완료!”

“에너지 공급은?”

“모닥불에서 동력 끌어오는 중입니다.”

“모자라! 출력 높이라고 해!”

“산맥 안에서 동력 채취하고 모아 놓은 전류 흘려보내!”

그리고 뒤를 이어 키가 훌쩍 자란 거인 드워프들이 수정궁 너머 장성의 안정화를 도왔다.

세워 놓은 장벽 밖을 그림자와 시온으로 감싼 후, 안에 마나와 열기를 채워 넣는 작업.

그리고 그사이.

“어머, 기사님. 여기 앉으셔요.”

“아니, 괜찮습니다. 레이디의 어깨에 어찌 함부로 앉겠습니까.”

“괜찮아요! 제 생명을 구해 주신 분인걸요. 어찌 두고만 보겠어요. 언제든 내드릴 수 있답니다~.”

“아, 아니-.”

어느 한 거인이 손사래 치는 안드레의 허리춤을 붙잡아선 자신의 어깨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찬찬히 위를 보자 눈에 들어온 풍성한 금발 머릿결과 깨끗한 피부,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

건물만큼 거대하긴 하지만 분명 아름다운 미인의 형상.

저런 드워프가 있었던가?

의문도 잠시.

“어머, 황태자 전하 그간 강녕하셨어요. 아버지께선 회복을 마치시고 산맥에 남아 다른 드워프들을 이끄는 중이셔요.”

찰랑대는 머릿결을 쓸어넘기며 환하게 짓는 미소를 보며 정체를 깨달았다.

신체를 다듬는 대장인의 딸, 이름이 나타샤였던가? 아니면 아나스탸샤? 아, 쏘냐였지.

분명 기억나는 건 작달막하고 두꺼운 몸통과 얼굴을 가득 덮었던 금색 수염.

“음, 오, 그렇군. 그래. 기억났어. 그런데- 원래 그런 모습이었던가?”

오래전, 황소 베론의 나이를 들은 이후 실로 오랜만에 황태자가 당황했고.

그런 그의 놀람을 이해했는지.

“아, 얼굴이 많이 변하였죠? 공간을 벗어 던지니 이리 변하더라고요. 평생 제 진짜 모습이 어떤 줄 모르고 살 뻔했지 뭐예요.”

배시시 웃는 미소가 참으로 시원했다.

키가 8m 정도에 이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으나.

어차피 남의 일이다.

“뭐, 안드레. 잘 지내보도록.”

“전하?”

황태자의 상쾌한 윤허에 안드레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고.

대장인의 딸은 허락을 받았다며 기뻐 방방 뛰었다.

그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안드레를 껴안다시피 한 그녀의 품, 숨이 막힌 안드레가 까무룩 정신을 잃어 가는 중에.

“어, 작아지면 원래 드워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더군요.”

알프레드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그러니까 거인 미인과 소형 드워프 중 선택해야 한다는 소리.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이지선다.

평생 어깨에 매달려 살 것이냐, 수염이 숭숭 난 드워프와 평생을-.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주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자네 생각은 어때.”

“…뭐 수염보다는 덩치가 큰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식비가 많이 들려나?”

“…현실적인 고충이네요.”

“안드레의 봉급을 많이 올려 주어야겠어. 열심히 벌어야 식비를 충당하지.”

“전하의 자비로우심에 안드레 또한 감사할 것입니다.”

아니야아아악-!

안드레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을 뒤로한 황태자와 시종장이 똑같이 못된 웃음을 짓는 동안.

그들을 실은 수정궁은 우직하게 나아가는 중.

손끝을 따라 지어지는 아직은 칙칙한 장성과 주변을 돌아다니는 드워프와 거인들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어느새 수정궁이 동북부의 중심에 다다랐고.

북부 끝자락부터 동북부 한복판까지 장성이 자리 잡은 시점.

비극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아르한은 폐하의 성지를 받으라-!”

유독 햇빛이 쨍하던 날.

무뢰배처럼 찾아온 전령들이 수정궁에 흙 묻은 발을 디뎠고.

거만한 고개를 뻣뻣이 쳐들어 힘이 가득 들어간 오만한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러선.

파르륵, 당당히 성지를 펼쳐 읽어 내려갔다.

“황자 아르한은 들으라!”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

모두가 뒤바뀐 호칭에 미간을 찌푸렸으나.

황태자만은 담담히 전령들을 마주 볼 뿐.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찬 전령이 더욱 목소리를 높여 드높이 성지를 공표했다.

“지난 동북부에서 요청한 도움이 거짓으로 판명된 바! 연합 국가들은 공격의 의사 없이 동북부의 이상을 확인하러 왔을 뿐이란 사실을 확인했다!”

개소리.

누군가의 작은 읊조림에 잠시 그쪽을 노려본 전령이 다시 성지를 읽어 내려갔다.

“하여 지난 동북부의 서신과 최근 세우는 새로운 요새가 불온한 움직임을 가리기 위한 거짓이라 판단! 동북부를 돕는 자들을 모두 반역 세력으로 규정하겠다 하였거늘!”

전령이 힐끔 조롱이 가득한 눈매로 황태자를 바라보곤.

“어찌하여 아르한은 이들을 도왔는가! 본디 반역의 죄를 물어 멸해야 옳으나! 마지막 온정을 베풀어 황자 아르한에게 벌과 이를 만회할 기회를 같이 내리니.”

그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벌로 아르한의 황태자 직위를 박탈할 것이며! 기회로는 반역 세력인 동북부 하르델 공작가를 멸하라!”

멸하라, 멸하라, 멸하라-.

놈의 역겨운 목소리가 고요한 수정궁에 메아리쳤다.

황태자의 직위를 박탈하고 공작가를 직접 멸하란 황제의 명령.

“이것이 황제 폐하의 뜻이니 황자 아르한은 와서 성지를 확인하시오.”

황제의 입을 빌린 전령이 턱을 치켜들며 성지를 그에게 내밀었고.

저벅, 저벅, 저벅.

아르한이 다가가 직접 확인했다.

분명히 찍혀 있는 제국의 옥새.

이젠 박탈되어 버린 황태자의 침묵이 절망이라 판단했던 걸까.

“폐하께서 주시는 마지막 기회이니 반드시 황자의 충성심을 보여야 할 것이오. 여기 있는 불온한 자들을 모두 죽이는 한이-.”

그가 비웃음을 담아 수정궁에 선 이들을 조롱하려던 차.

번쩍.

싸늘한 검날이 쨍하게 빛을 틔워 낸 순간.

전령의 머리가, 황제의 입을 빌린 자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얼마나 깔끔한 솜씨였는지, 한발 늦게 피가 솟아났고.

오만하게 섰던 몸이 허물어졌다.

이어지는 침묵.

하늘 높이 솟았던 피보라가 유독 강한 햇볕을 산란시키며 무지갯빛 살기를 흩뿌렸다.

쏟아지는 피를 함빡 맞은 황태자의 백금발과 손에 든 성지가 함께 붉게 물들어가는 와중.

“모두 죽여라.”

그리 말하곤 뒤돌아섰고.

전령들의 목이 후두둑 떨어졌다.

피로 물드는 수정궁 한가운데.

황태자가 붉은 눈물을 흘리며.

“전군 준비, 서부, 남부에 서신을 보내라. 수도로 가서 직접 답을 들어야겠다.”

수도로 진격할 것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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